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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93화 (93/173)

#93화 술버릇

2018.01.18.

“저 녀석 때문에 오랜만에 포식하네.”

아니카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술잔을 들이켰다. 리엄 역시 만족스러운 듯 콧노래를 불렀다.

그걸 본 발데르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마련한 금전 덕분에 그들은 지금 주점에서 술을 마시며 포식할 수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야?”

“키칼 공작에게 가봐야지.”

발데르의 물음에 리엄이 술을 마시다 말고 대답했다. 그들은 머리를 박고 쓰러진 오이겐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쟤는 겨우 맥주 한 잔에 쓰러지냐.”

“그러게 말이야. 맥주가 술인가? 음료지.”

아니카가 술을 들이켜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발데르가 술을 마시려다 멈추며 말했다.

“그거 단장도 말했었지?”

리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도 참 술을 잘 마셨지.”

그들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죽어버린 어떤 이가 떠올랐다. 항상 길잡이별과 같던 어떤 사람이.

“그러고 보니, 단장은 말술이었다던데 진짜야?”

“그래. 술 하나는 잘 마셨지.”

“그래도 한계가 있을 텐데. 단장이 술 취한 거 본 적 없나? 단장은 술버릇도 되게 재밌을 것 같은데.”

아니카의 물음에 발데르가 자신은 본 적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리엄이 풉 하고 술을 내뱉었다. 발데르와 아니카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뭐 아는 게 있나 본데?”

발데르가 팔꿈치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모인 이들의 얼굴이 흥미 어린 표정으로 변했다.

“어서 불지 그래, 리엄? 하여튼 거짓말을 못 한다니까.”

리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어서 말해봐. 궁금하잖아.”

“그게…….”

“그게?”

“예전, 드하일 상단에서 개발한 술을 한 컵 마시고 단장이 쓰러진 적이 있었어.”

“엥? 단장이?”

“겨우 술 한 컵을?”

“그건 술이 아니었어. 그냥 사람을 죽이는 음료였지. 한 모금만 마셔도 보통 사람이 나가떨어질 정도였으니까 쓰러진 걸로 끝난 게 대단한 거지.”

리엄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심각한 표정에 비해 다른 이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단장은 어땠는데?”

“당연히 방에 옮겼지. 그냥 얌전히 자는 게 술버릇인가 보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리엄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그는 이를 으득 갈았다.

“칼리드, 그 새끼한테 내가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모를 거다.”

“그놈이 왜?”

발데르가 이를 갈며 말했다. ‘칼리드’라는 말에 고개를 처박고 자던 오이겐이 풀린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부단장님이 왜?”

언제나 칼리드를 따르던 오이겐이었다. 술김에 나온 ‘부단장’이라는 말에 그들의 표정이 굳었으나, 이들은 애써 못 들은 척하고 리엄을 바라보았다.

“우리 단장의 술버릇은…….”

리엄은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뭐지? 욕을 내뱉는 것인가? 하지만 원래 욕을 잘하던 사람인데? 때려 부수는 거? 이거 역시도 늘 하던 일이라 별로 놀랍지는 않은데, 설마 우는 거?”

“아, 그거라면 좀 이해가 간다.”

아니카와 발데르가 호들갑을 떨며 자신의 추측을 늘어놓았다.

“모두 틀렸어. 단장의 술버릇은 바로,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가 목욕을 하는 거다.”

리엄의 진지한 표정에 사람들의 얼굴이 굳었다.

발데르의 떡 벌린 입에서 술이 주르륵 흘러나오고 있었으나 그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 오이겐 역시 술에 취한 와중에도 자신이 들은 게 진짜인가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어디에 물이 있든 꼭 찾아가서 거기서 무조건 옷을 벗고 씻어.”

“그, 그거 굉장히 위험한 거 아니야?”

“그래서, 나도 얼른 들어가서 데리고 나왔지. 심지어 들어가자마자 뒤에서부터 망토를 뒤집어씌워서 뭘 본 것도 아니야. 그런데…….”

리엄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들 역시도 알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다음 분명 단장을 쫓아 나선 칼리드와 맞닥뜨렸을 테고, 그 모습을 본 칼리드에게 어떤 앙갚음을 당했을지 안 봐도 뻔했다.

서늘하게 분노하던 칼리드에게 생각이 미치자 발데르가 말했다.

“누가 봐도 그렇게나 단장을 아끼던 놈이, 대체 왜 그런 걸까?”

그에 오이겐이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사랑해서 그럴 수도 있는 거겠지……. 그분도 사정이 있었을지 몰라.”

그러나 술주정뱅이의 헛소리엔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

만약 제드가 가장 힘들었던 날이 언제냐고 말한다면, 제드는 주저 없이 오늘을 꼽을 것이다.

하루의 시작은 나쁘지 않았으나, 하루의 마무리는 최악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모미 모미 아니었군, 내가아 깜빡해써!”

“…….”

“아, 지인짜, 난 이 약한 몸이 너무 시러!”

“…….”

“내가 이거를 마시고 취하다니, 굴욕쩍이야. 이게 말이 돼?!”

“…….”

사람들이 모두 술잔을 들고 분노하는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제드 역시도 그중 한 명이었다.

“각하, 아무래도 영애를 쉬게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보다 못한 버나드의 말에 제드는 정신을 차리고 루시펠라를 일으켰다. 물론 그녀가 얌전히 일어나 줄 리가 없었다. 술주정뱅이를 왜 꺼려하겠는가.

“나 더 마실 수 이써! 취한 거 아니야!”

저렇게 자기가 취했다는 현실 자각을 못 하기 때문에 술주정뱅이를 꺼리는 것이다.

술주정뱅이의 정석처럼 그녀는 제드의 손을 뿌리쳤다.

자신의 부하였으면 두들겨 패거나 얼굴에 찬물이라도 퍼부었겠지만, 상대는 슬프게도 자신의 약혼녀였다.

제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루시펠라를 두 팔로 안아 들었다.

발이 허공에 뜨자 루시펠라는 꺄악, 하며 비명을 지르더니 그나마 얌전하게 제드의 목에 팔을 감고 머리를 기댔다.

‘이런 걸 보면 그닥 나쁜 일은 아니군.’

제드는 루시펠라를 안아 들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녀의 천막 안에 들어가 그녀를 내려놓았다. 루시펠라는 눈만 느릿하게 깜빡이다가 술기운이 계속 올라오는 듯 가쁜 숨소리를 냈다.

루시펠라가 괴로운 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자 헐렁한 드레스 어깨 부분이 흘러내려 살결이 보였다. 제드는 그것을 보며 흠칫했다.

신음이 섞인 뜨겁고 빠른 숨소리, 붉은 살결, 그리고 풀린 채 가끔 자신을 바라보는 두 눈. 이건 마치…….

제드는 재빨리 천막 바깥으로 나왔다. 그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자신의 철옹성 같은 이성을 점검했다.

“……쓰레기.”

그는 예전 버나드가 했던 말을 되뇌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이 내미는 금화를 그대로 받는 건 쓰레기라고. 그때의 비유로 따지자면, 심지어 지금 이건 금화를 내미는 것도 아니었다.

혹 저때, 충동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몸에 손을 댄다면 쓰레기에게도 미안할 정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뛰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그러곤 다시 심호흡하며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루시펠라는 잠들어 있었다.

여전히 숨소리는 빨랐으나 이대로 잠이 들지 싶었다. 내일 숙취가 있을 텐데, 꿀물을 준비하라고 시켜놔야겠군.

제드는 루시펠라에게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녀를 제대로 눕히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조심스럽게 정돈해 주었다.

“…….”

루시펠라가 그 손길에 배시시 웃었다. 제드는 그것을 내려다보며 한숨 섞인 웃음을 지었다.

참, 여러모로 신경 쓰이게 하는 이였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가버린 이상 어찌할 수 없나.

제드는 루시펠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드랍고 매끈한 머리카락이 그의 거친 손에 감겨들었다.

제드는 가끔 그녀의 머리를 만져 보고 싶었다. 꼭 검은 비단 같았기 때문이다. 쓰다듬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계속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루시펠라는 그 손길이 좋은지 더 편한 표정을 지었다. 제드는 자신이 미소 짓고 있는 걸 발견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자신이 잘 웃었지? 그닥 유쾌한 인생을 살아온 건 아니었는데. 그는 자신의 변화를 자각하고 얼굴을 굳혔다.

그가 이성을 만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자주 웃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루시펠라의 모습을 보았다. 갑작스럽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는 새삼 자신이 정말로 눈앞에 있는 이를 마음에 담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어딘지 모르게 아릿한 기분이 들었다.

“루시.”

그는 조용히 루시펠라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대의 모든 걸 원해.”

그의 두 눈에 강렬한 열망이 깃든 것도 모른 채, 루시펠라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잠을 자고 있었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는 있나? 그대의 마음뿐만이 아니라, 과거까지 알기를 원한다는 거야.”

그는 어쩐지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말을 이었다.

“어떤 상처를 지니고 있는지, 그대가 황태자를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그 마음의 깊이까지 모두. 그래서 나는 그대의 생각을 모두 다 알고 싶어.”

이런 감정은 그릇된 감정일까?

이 사람의 눈길이 어딘가에 머무르면 거길 왜 바라보고 있는지 알고 싶고, 웃으면 왜 웃는 건지, 화가 나면 무엇에 화가 난 건지 알고 싶다. 과거를 알고, 그녀의 생각을 알고 싶다는 것은 진정 탐욕이고 그릇된 집착일까.

“나는 아직도 그대를 모르겠어.”

손에 잡히지 않아서 애가 타는 것일까. 루시펠라는 잡힐 것 같으면서도 손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자꾸 잡히지 않는다.

“그댄 이 소리를 들으면 소름 끼쳐 할까.”

마음이 깊어짐을 깨달았는데, 이 감정을 고백하면 그 마음의 크기와 무게에 짓눌려 도망갈지도 몰랐다.

제드만 해도 그렇다. 만약 관심 없는 여자가 자신에게 이런 감정을 품었다면, 그 사람과 자신에게 그야말로 비극이겠지.

자신의 감정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처음 만났을 땐 그냥 억지로 맞이한 약혼녀였는데.

제드는 그녀의 깊게 잠든 얼굴을 한참 동안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만약, 여기서 끝났다면 제드의 하루는 평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루시펠라가 자는 천막 바깥으로 나가고 나서부터였다.

제드는 혹 천막에 오래 머물러서 루시펠라와 관련된 어떤 소문이 나길 바라지 않았다.

그는 나가자마자 기사들 무리에 섞여 들어갔다. 그러곤 제드는 이따금 그녀의 천막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이고, 주변에 기사들이 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을 터였다.

텅 빈 천막을 보기 전까지는,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제드는 사람들이 슬슬 잠자리로 돌아가기 전, 루시펠라의 천막으로 찾아갔다.

딱히 어쩌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냥, 그녀가 자는 모습을 확인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은 빈 천막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그는 잠시 동안 이성을 잃을 뻔했다. 불침번을 제외한 기사들은 모두 잠들었고, 제드는 기사들을 모두 깨울까 하다가 이오지프가 준 팔찌를 떠올렸다.

루시펠라가 그걸 차고 있으니 위치를 찾는 것은 쉬웠다.

제드는 어느 방향에 가져다 대자 팔찌에서 느껴지는 강한 진동에 안심했다.

강한 진동이 변함없는 것을 봐서 루시펠라는 움직이지 않고 아주 가까이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자신이 묵을 천막과 그녀가 묵을 천막을 붙여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드는 그 와중에도 의아했다. 술을 마시지 않은 기사들이 주변에 있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몰래 빠져나갔냐는 것이었다.

‘하긴, 원래부터 그리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지.’

제드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자신이 향하는 방향이 호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드는 눈에 띄게 안심했다.

그러곤 호숫가로 다가가 루시펠라를 찾던 그는 크게 놀랐다. 심지어 그는 비명까지 지를 뻔했다.

비명이라니, 그의 기사 인생에 얼마 되지 않는 참으로 수치스러운 순간이었다.

호수 가운데에 윤기 나는 바위 같은 동그란 무언가가 솟아 있었다.

제드가 거기서 비명을 지를 뻔한 건, 그 이상한 바위에 눈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종 마물인가 해서 그 기분 나쁜 물체를 자세히 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건 루시펠라였다. 물에 젖은 그녀의 미끈한 검은 머리카락이 달빛에 비쳐 빛나고 있었다.

문제는 그게 루시펠라의 얼굴에 착 달라붙어 있어 무척 기괴해 보였다는 것이다.

일렁이는 맑은 호수 수면 아래 루시펠라의 검은 머리카락이 흐물흐물거렸다.

눈만 내밀고 있는 게 누가 봐도 마물로 보였다. 다른 기사들이었으면 기겁해서 검을 빼 들었을 것이다.

“거, 거기서 뭐 하는 거지?”

제드는 자신의 이성과 상식을 다 동원해도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녀를 보고 절실히 깨달았다.

“빠진 건 아니겠지?”

슬며시 걱정된 제드는 첨벙거리며 호수로 들어갔다.

그녀와 제드의 거리가 좁혀지고, 호수의 물이 그의 허벅지까지 차오를 때였다. 생각보다 수심이 얕다고 제드가 생각할 때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

그는 자신이 아까 봤던 문제들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통수가 딱딱하게 굳은 느낌이 들었다.

“대체…….”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그녀의 나신을 가리는 것은 기다란 검은 머리카락과 그녀가 담근 호숫물밖에 없었다.

루시펠라가 손을 들어, 앞쪽에 있는 머리카락을 치웠다. 그에 가려져 있던 여체의 가장 도드라지는 부분이 보였다.

“왜?”

루시펠라가 태연한 표정으로 다가오려고 했다. 그러나 호수 바깥으로 다가올수록 물은 얕아졌고, 자연스럽게 그가 볼 수 있는 부분도 많아졌다. 호수의 수심이 배꼽 아래로 내려가기 전에 제드가 소리쳤다.

“잠깐!”

그의 머릿속에서 그가 아는 이 세상 모든 욕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달빛 아래 서 있는 루시펠라는 자신의 벗은 몸에 어떤 자각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왜 저렇게 태연하지? 그러다 루시펠라의 두 눈이 풀려 있는 걸 보고, 제드는 이것이 그녀의 술버릇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드는 그녀의 평생 다시는 술을 마시게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맥주 한 컵에 저렇게 이성을 잃을 정도면, 그보다 더 심한 건 어떻게 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제드, 뭐가 이상해?”

심지어 혀도 덜 풀렸다. 제드는 호수에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이상하냐고? 어디서부터 이상하다고 말해야 할지. 저 망할 술버릇? 술버릇으로 호수에 몸을 담근 거? 아니면 옷을 벗고 있는 거? 거기에 부끄러움도 못 느끼는 거?

“내가, 이상해?”

“응, 옷이 없어서 이상하군.”

그러니까 옷을 얼른 찾아 입어. 제드가 그녀의 술주정에 맞춰주려고 달래듯 얼른 말했다. 루시펠라가 배시시 웃었다.

“원래 사람은 옷 없이 태어나는 법이지. 이상한 모습은 아니야.”

그녀는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검은 밤과 대비되는 새하얀 나신의 곡선이 도드라져 보였다.

제기랄! 아스트라여, 지금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제드는 자신이 찬물에 몸을 담그고 있어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으면 그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제복이라도 입고 있었으면 망토라도 있었겠지만, 그는 지금 셔츠에 바지만을 입은 상태였다.

아, 그래, 셔츠. 제드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웃통을 벗어 내렸다.

“그치? 내 말이 맞지? 사람은 옷 없이 태어나는 법이야.”

루시펠라는 제드가 자신을 따라 옷을 벗는 줄 알고 신이 나서 말했다. 그러곤 손을 들어 그에게 물을 튀겼다.

“…….”

그에 물을 흠뻑 뒤집어쓴 제드는 환하게 웃고 있는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장난스러운 모습은 꼭 호수의 요정 같았다. 그 아름다움에 홀릴 뻔한 제드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루시, 이리 와.”

“나 루시 아닌데.”

“뭐?”

“나 루시 아니야.”

그녀는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쩐지 화가 나고 심통이 난 모습에 제드는 그 말에 대해 분석하기보다는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술에 취했는데 자신은 짜증이 나지 않는 건지 자신의 도량에 감탄했다.

그는 결국 루시펠라가 있는 곳까지 다가갔다. 루시펠라는 아직도 무언가에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제드는 말없이 자신이 벗은 셔츠를 그녀에게 입혀주었다.

루시펠라는 탈의한 제드의 상체를 보았다.

“짜증 나게 좋은 몸이네.”

“뭐?”

루시펠라가 툴툴거렸다.

“나도 그런 몸이었으면 했는데.”

“뭐?”

점점 더 알 수 없었다. 제드는 술에 취해 이성을 잃은 사람의 말을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보통 술에 취하면 취중진담이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 한데 어째서 말하는 것마다 헛소리란 말인가.

그때 루시펠라가 제드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뜨거운 상체에 닿는 차가운 팔의 감촉이 느껴졌다.

제드는 옷을 입힌 것도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하얀 셔츠 아래 살결이 비쳤기 때문이다.

열린 앞섶 사이로 루시펠라의 굴곡진 가슴이 보였다. 오히려 이게 더 사람을 자극했다. 제드는 입을 틀어막고 무어라 얼굴을 찌푸렸다.

그것을 가만히 보던 루시펠라가 말했다.

“입 가리지 말고 나한테 입 맞춰주라.”

“뭐?”

“어서.”

루시펠라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새하얗게 질린 피부와 젖은 머리칼, 그러나 붉은 입술만이 대비되었다.

“루시, 들어가서 자자.”

제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버나드가 했던 ‘쓰레기’라는 말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는 자신이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눈앞에 있는 광경에도 자제력을 잃지 말아야 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다른 모양이었다.

“입 맞추고 싶어.”

루시펠라는 발돋움을 하며 제드에게 입을 맞추려고 했다. 그러다 발을 헛디뎌 앞으로 넘어졌고, 그의 상체와 루시펠라의 헐렁하게 벌어진 상체가 부딪쳤다.

겨우 얇은 옷 한 겹을 두고 제드는 루시펠라와 맨살을 맞대었다.

물컹, 하는 여체 특유의 보드라운 살덩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자신의 뜨거운 육체와 대비되는 차가운 육신도.

제드가 그것에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루시펠라를 내려다보았다. 루시펠라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제드는 그에 마지막 이성을 놓아버리고, 허리를 숙여 루시펠라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입맞춤이 어찌나 거셌던지, 무게중심을 잃은 루시펠라와 밀어붙이는 제드가 호수 속에서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첨벙,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론 제드의 머릿속에, 쓰레기라는 소리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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