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92화 (92/173)

#92화 여행길

2018.01.15.

“주인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은 다 하셨습니다.”

노기사의 말에 아이딘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수도 밖으로 사라지는 행렬에 시선을 둔 채 한숨을 내쉬었다.

“딱히 안심이 되지는 않는군.”

“하인트 공작가의 기사들이 따라가지 않았습니까. 아무 일 없을 겁니다.”

기사가 안심시키자 아이딘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피곤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쉐인.”

“네.”

“루시가 얼샤에 다녀와서 하인트 공작과 결혼할 것 같나?”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이전과는 다르게 하인트 공작과 친밀해 보였으니까요. 그래도 이젠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대안’이 생겼으니까요.”

“그렇지.”

백작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루시가 그곳에 다녀와서도 결혼을 원한다면 그때는 나도 결혼을 더 미룰 수는 없겠지.”

백작은 하인트 공작과 루시펠라의 약혼에 대해 이야기 나눴던 그날을 떠올렸다.

선대 하인트 공작은 마지막까지 루아나를 원하고 또 원했다. 결국 그 욕심은 그녀의 딸인 루시펠라에게로 향했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일생 사랑했던 여인의 딸과 맺어주려 했던 것에 백작은 그의 집착을 엿볼 수 있었다.

“주인님.”

쉐인이 그를 불렀다.

“이제 신관들을 만나러 가야겠군.”

그의 시선이 성문 위에 있는 칼리드 루이르크에게로 향했다.

그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어떻게 보면 저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자신 역시도.

***

얀스가르 국경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얀스가르 자체가 이미 길이 잘 닦여 있었고, 묵는 장소도 그 지방 영주의 성, 아니면 고급 여관이었기에 상당히 편했다.

루시펠라는 하녀들과 같이 마차에서 수다를 떨거나 아니면 멍하게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심심함을 달래고는 했다.

제드는 기사들을 통솔하느라 바빠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틈틈이 루시펠라에게 불편한 점은 없는지, 몸은 아프지 않은지에 대해 물었다.

루시펠라는 자신이 제드의 일정에 끼어들었다는 자각은 있었기에 피해만 끼치지 말자 생각해서 웬만해서는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았다.

얼샤의 마지막 국왕인 아렌트가 왕자였을 시절, 그를 호위했을 때 개고생한 걸 떠올리면 치가 떨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건 호위도 아니었고, 제드는 임무 수행 중이었다. 그렇기에 루시펠라는 폐를 끼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체력이 약해서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마차에서 잠들다 보면 한나절이 휙휙 지나가고는 했다.

루시펠라가 불편함이 없다고 말할 때마다 제드는 매번 이상한 표정을 지었는데, 루시펠라는 제드가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느꼈다.

도움을 청하지 않고 귀찮게 굴지 않는다면 본인도 편한 게 아닌가? 왜 저러는 거지?

루시펠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움직이는 인원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며, 루시펠라가 시간을 따로 지체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얀스가르의 국경, 정확히 말하면 본토의 국경을 넘어섰다.

이제 남아 있는 건, 브리즈에 대평원과 레온가스 숲이 다였다.

루시펠라는 거의 다 왔다는 걸 알고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나 루시펠라의 시중을 드는 이들은 여행길이 편치 않았는지 불편한 표정을 했다.

게다가 오늘 이들이 해야 할 것은 바로 노숙이었다. 숲 한가운데에서 자는 것.

기사들이야 아무리 귀족 자제들이라도 전쟁터나 수행을 나가면 경험해 보는 노숙이지만, 루시펠라와 저택 출신 사용인들, 특히 하녀들은 수도에서만 나름 곱게 자라온 이들이었다.

이들은 노숙 준비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이 노숙이 꽤나 호화롭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로 기사들이 자신들에게 마련해 준 천막 때문이었다. 그녀 혼자만을 위해 하인트 공작가의 기사들이 쳐준 천막 말이다.

“이래도 되는 건가요?”

“숲을 벗어나려면 하루가 더 걸리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최대한 편의를 봐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버나드가 루시펠라의 말을 오해한 모양인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이 개인 천막은 저희 쪽에서 준비해서 영애께서 사용인들과 같이 자는 일은 없어 다행이군요. 아무래도 이런 장거리 이동에 대해 준비한 적이 없어서 사용인들이 영애가 묵을 곳은 생각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음…….”

“‘공작 각하’께서 특별히 준비해 두라고 하셨습니다.”

루시펠라는 버나드가 눈치를 보면서 ‘공작 각하’라는 말에 힘을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리슬쩍 그를 찾아보니, 그가 루시펠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일부러 그렇게 준비하라고 시킨 건데요.”

“네?”

“노숙을 하는데 뭐 얼마나 호화롭게 하겠다고, 비효율의 극치로군요. 아니, 딱히 경에게 말하는 건 아니에요.”

루시펠라의 독설 아닌 독설에 버나드는 어디선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조금 더 생각을 해본다면, 각하께서도 그런 결정을 안 내렸을 텐데 말이에요.”

“조금 더 그 생각이라는 걸 해보면, 그런 결정은 못 내렸을 텐데 말이야.”

바로 자신의 주군과 똑같은 말투였다.

‘히이익!’

버나드는 사실 루시펠라와 이렇게 일 처리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만약 저분이 공작부인이 된다면, 자신의 주군이 하나 더 생긴다는 말인가?

버나드는 앞으로 자신에게 벌어질 끔찍한 미래에 절망했다. 역시 주군이 사랑에 빠졌던 이유가 있었다. 저렇게나 비슷한 성격이니 그랬던 것이다.

그때, 제드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궁금한 모양인지 걸어와 루시펠라의 옆에 섰다. 버나드는 질린 얼굴을 하며 눈치껏 그들 사이에서 도망갔다.

제드는 천막을 바라보는 루시펠라를 보며 말했다.

“노숙, 괜찮겠나?”

“응, 상관없어.”

“땅에 벌레도 나오고 등도 딱딱해서 배길 거야. 실내에서 잤던 것과는 아무래도 다르겠지.”

“천막 없이 길바닥에 누워 자는 것도 아니고, 괜찮아.”

“…….”

제드는 루시펠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게 아닌데’라는 표정이었다. 그는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결심한 듯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애, 나는 지나친 배려를 싫어해.”

“뭐?”

“영애는 이런 경험이 처음일 텐데 지나치게 잘해주고 있어. 여행에 피해를 주려고 하지 않지.”

당연하지, 자신이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루시펠라는 혼자서 뿌듯해했다.

“그런데 영애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불편함을 감내하는 건 원치 않아. 영애는 솔직한 사람이 아니던가? 이런 걸 참지 않아줬으면 해.”

그녀가 품었던 일말의 뿌듯함이 사라졌다. 제드는 그런 것이 상당히 싫은 모양이었다.

“아니, 정말 나는 괜찮아.”

“…….”

“내게 배려할 기회를 달라는 건데, 내가 불편한 건가?”

제드의 물음에 루시펠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충분히 배려받고 있어. 이 팔찌만 해도 그렇고.”

루시펠라가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이 팔찌를 보고 제드에게 솔직히 감동했다. 이런 여행에서 행여나 위험에 처할까 제드가 마련한 방비책이었다. 이렇게까지 배려받았는데 뭘 또 배려를 바라겠는가.

한편, 제드로서는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루시펠라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고자 노력했다. 노력을 했는데 노력할 일이 별로 없었다.

루시펠라는 지나치게 데리고 다니기 편했다.

그가 생각했던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무단이탈이라던가, 앓아눕는다거나, 지쳐서 행렬을 세운다거나, 식사를 안 한다거나, 잠자리가 맞지 않아 불편해하는 그런 것 말이다.

아니, 레이디, 아니, 보통 이런 여행을 해보지 않은 이들이라면 누구든 흔들리는 마차에서 힘들어하거나, 식사가 입에 맞지 않아서 안 먹는다거나, 바뀐 잠자리가 불편해서 잠을 못 이루지 않는가?

한데 없다.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노숙도 괜찮다고 한다.

지금 그의 목표는 루시펠라의 마음을 돌려 결혼을 하는 게 목표였다. 그런데 매력을 보여줄 기회가 없다. 차단되었다. 차라리 철로 이루어진 성벽을 뚫는 게 더 빠르겠다고 생각이 될 정도였다.

“난 신경 안 써도 돼.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한 게 아니라 내가 원래 이런 걸 신경 안 쓰는 성격이라서 그래.”

루시펠라가 웃으며 말했다.

제드는 자신이 처음 노숙했을 때를 떠올랐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길바닥에서 잔다는 것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다시 생각해 봐도 루시펠라는 분명히 이게 처음일 텐데. 제드는 충격을 받았다. 루시펠라의 표정은 참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정말로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저, 삶의 태도의 차이다. 루시펠라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아직 그녀는 어린 나이인데, 이렇게 매사에 포용력이 넘치다니.

제드는 그녀를 보며 자신의 미숙한 삶의 태도에 반성했다. 역시 어린 사람에게도 배울 점은 존재했다.

제드가 이상한 것에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루시펠라는 자신이 묵을 천막에 들어가 보았다.

천막은 사람 둘이 들어갈 크기였고, 아늑해 보였다.

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준비하지 않았지만, 제공받으면 뭐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루시펠라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등이 딱딱해서 좀 불편하겠군. 그래도 가져온 옷 중 몇 벌이 레이스가 풍성하니 그걸 깔고 자면 되지 않을까? 그게 더 폭신할 테니 말이야.

물론 그냥 생각만 하는 거다. 그렇게 애를 써서 만든 드레스를 깔고 자겠다고 하면 하녀들이 기함하겠지.

루시펠라는 자신을 따라 들어온 제드를 보며 물었다.

“아, 여기 근처에 물이 있어?”

“근처에 호수가 있어. 물이라도 마시고 싶나?”

“아니,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물의 위치를 파악해 두는 건 여행의 기본이다. 설마 루시펠라가 알고 물어보는 건 아니겠지?

제드가 바라보자, 루시펠라는 그러거나 말거나 편한 얼굴로 땅바닥에 앉아 다리를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식사 시간이 되고, 하인들이 저마다 식사 준비를 했다. 커다란 모닥불이 피워지며 해가 점점 저물어가 공기가 식어가는 숲 한가운데에 훈기가 퍼졌다.

식사가 준비되자, 루시펠라와 제드에게 먼저 식사가 내밀어졌다. 루시펠라는 자신에게 내밀어진 걸 보았다. 그릇에 담긴 스튜였다.

본격적으로 길 위에서 먹는 식사는 처음이었기에 모두가 루시펠라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먹었다. 비록 길거리에서 요리했지만, 어느 정도 허기가 진 탓인지 음식은 맛있었다.

저녁 식사 후 뒷정리를 하며 황실 기사단과 하인트 공작가의 기사들이 따로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루시펠라는 웃고 떠드는 그들을 보며 묘한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루시펠라도 저랬던 적이 있었다. 지금의 그녀는 끼어들 수 없는 곳. 루시펠라는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제드를 보며 부러움을 느꼈다.

“아가씨, 어서 와서 쉬세요.”

로이자가 루시펠라를 불렀다. 그녀는 완전히 지친 표정이었다.

루시펠라는 물끄러미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보았다. 하녀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곳에 루시펠라가 다가가자 그녀들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많이 힘들지요, 아가씨?”

“아니, 생각보다 힘들지 않아.”

“우리 아가씨 머릿결 상한 것 좀 봐.”

“나중에 도시에 가면 예쁘게 단장해 드릴게요.”

“고마워.”

루시펠라가 웃으며 말했다. 저기에 속하지 못한다고, 지금 레이디로 생활하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찌 되었건 루시펠라가 해왔던 일이니까.

하녀들은 루시펠라를 배려해 주었으며, 루시펠라 역시도 다른 이들을 배려했다.

그러다가 루시펠라는 하녀들이 힐끔힐끔 거리며 커다란 모닥불이 있는 곳에 시선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루시펠라가 하녀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젊은이들만 있나 보니 이런 쪽으로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하인트 공작가의 기사들은 평민도 뽑는다면서요? 얼굴도 보고 뽑는 걸까요? 다들 잘생겼어요.”

“얼굴을 보고 뽑지 않아. 다만, 평민들의 입단 시험과 그쪽 봉신들의 입단 시험은 동일해서 저 기사단 사이에서는 적어도 신분으로 상하관계를 나누지 않나 봐.”

루시펠라의 말에 하녀들이 감탄하는 듯했다.

“정말 잘 아시네요?”

“저런 기사님들과 이야기 나누는 게 제 꿈이었는데.”

역시, 여자들끼리 모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건가? 루시펠라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우리 저쪽으로 갈까?”

“네?”

“아, 아가씨?”

“어차피 여행 내내 같이 있을 사이인데 얼굴도 보고 그러자. 핑계는, 내가 억지를 썼다고 하면 되지. 난 원래 제멋대로니까.”

“하지만 저희가 가면 싫어할걸요. 아시잖아요.”

“전혀 안 그럴걸.”

루시펠라는 확신했다. 황실 기사단이라면 몰라도 제드가 있는 하인트 공작가의 기사들은 시토라 기사단처럼 신분에 따른 서열이 없다 보니 상대적으로 분위기가 자유로울 것이다.

루시펠라는 기사들이 힐끔힐끔 이쪽을 쳐다보는 것을 알고 있었다. 뻔할 뻔 자가 아닌가.

루시펠라가 히죽 웃으며 가기 싫어? 라고 묻자 하녀들의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중 가장 용감한 로이자가 가요, 가요! 라고 외쳤다.

한편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제드가 루시펠라를 비롯한 하녀들이 다가오자 의아해했다.

참고로 하녀들은 새침한 얼굴로 고개를 내리깔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 오는 건 아가씨의 의사 때문이라는 듯.

“큰불 구경 좀 하고 싶어서 말이야. 그래도 돼?”

어쩐지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기에 제드는 일어서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기사들 역시 괜히 헛기침하며 뒤로 물러나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하녀들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루시펠라의 옆에 앉았다. 루시펠라의 눈에는 그녀들이 힐끔힐끔 기사들을 관찰하는 게 다 보였다.

어느덧 피워놓은 모닥불이 더 타오르고, 하늘이 더욱 어두워져 까맣게 물들 때였다.

어색한 분위기를 겨우 깬 하녀들과 기사들이 통성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이걸 꺼내야죠.”

서글서글해 보이는 눈매의 기사 하나가 나무통을 꺼내 흔들었다.

액체가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저런 걸 또 가져왔지?”

제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루시펠라의 눈이 커졌다.

설마, 저건?

“마지막 도시에 들렀을 적 제가 하나 사왔습니다.”

넉살 좋은 웃음을 짓자, 제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일정에 방해가 안 가도록 마시도록 해. 알아서 하리라 믿는다.”

제드의 허락에 기사들이 탄성을 질렀다. 루시펠라는 다른 곳에 모여 있던 황실기사단이 환호하는 소리도 들었다.

루시펠라와 하녀들이 통 안의 액체가 궁금했는지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루시펠라의 눈을 본 제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맥주야.”

“맥주?”

루시펠라가 눈을 크게 떴다.

“보리로 만든 거지. 사실 그렇게 맛은 없어. 말 오줌 맛, 아니, 비유가 좀 그렇군.”

그걸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었다.

맥주, 맥주라니! 얀스가르에서도 이런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했다니. 그래, 산속, 노숙할 때는 역시 맥주다. 이런 곳에서 비싼 포도주를 마시겠나!

기사들이 나무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하녀들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들에게 내밀어진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안 줘?”

루시펠라가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옆에 있던 제드가 말했다.

“맛이 없다니까. 레이디가 먹을 게 아니야.”

“아니, 나도 입이 있는데. 음식이 사람 가리는 건 아니잖아.”

그때 하녀들이 맛이 없다며 콜록 기침하는 것을 보고 거 보라는 듯 제드가 눈짓했다.

아니, 그 맛을 모르는 게 아니라니까. 루시펠라는 안달이 났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오늘 배려해 준다고 하지 않았어? 이건 날 존중해 주지 않는 것 같은데. 좀 실망이야.”

“뭐?”

제드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루시펠라의 말이 상당히 신경 쓰인다는 듯이 물었다.

“영애, 술에 강하나?”

“나야 엄청 강하지!”

루시펠라의 자신만만한 말에 제드가 자신이 들고 있던 술잔을 내밀었다. 그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강조했다.

“한 모금만이야.”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가져갔다. 그러곤 단숨에 벌컥거리며 마셨다.

“루시! 그걸 그렇게!”

그녀는 말술이었고, 시토라 기사단 중에서도 술이 제일 강했다. 맥주가 어디 술이던가! 그냥 보리 맛이 나는 맹맹한 물이지!

그러나 루시펠라의 생각은 틀렸다.

맥주는 술이었다. 그것도 아주 독한.

갑자기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목구멍에서 열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이게 원래 이렇게 독한 술이었나?

“루시?”

제드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루시펠라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꾸물꾸물 올라오는 이 낯선 술기운과 싸우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루시펠라는 문득 깨달았다.

“아, 내 모미 모미 아니어꾸나.”

아, 이거 에스텔이 아니라 루시펠라의 육체였지.

루이르크 공작저에서도 술 한 잔에 뻗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젠 술도 못 마시는 육체가 돼버렸다니, 그녀는 너무나 억울했다.

게다가 발음까지 풀리기 시작하다니…….

“루시!”

루시펠라는 자신을 받쳐 주는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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