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출발
2018.01.11.
출발 날 아침, 백작은 떠나기 전 루시펠라와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혹, 하인트 공작이 네게 무례하게 대하거든 그 즉시 이곳으로 돌아오너라.”
“알겠어요.”
그 말로 루시펠라는 백작이 제드를 상당히 못 미더워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루시펠라는 망설이다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 사람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
그 말에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시펠라는 백작이 그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제드가 그렇게 신뢰감이 없는 사람이었나?
루시펠라는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백작과 제드가 같이 있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인사도 이미 다 끝냈다고 했고.’
제드도 백작도 이미 서로 할 이야기는 다 끝냈다고 했다.
따라서 제드는 황궁에서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고 바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약속 시각이 얼마나 남았나 생각할 때였다.
“루시,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구나.”
“네?”
백작은 미소를 지었다.
“만약 하인트 공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굳이 결혼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에 루시펠라의 두 눈이 커졌다.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진짜? 그럴 수도 있었던 거였어?
“하지만 신관의 인장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하다고 들었는데요.”
“하인트 공작은 임의로 약혼을 취소할 수 없지만 우리 쪽에서 취소하는 건 가능하단다. 그건 선대 하인트 공이, 현 공작에게 남기는 유언이었기에 공작은 그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지.”
그랬다. 선대 공작이 남긴 유언은 제드더러 결혼을 하라는 것이 유언이었고, 아이딘 백작가에서는 원한다면 그것을 거절할 수 있었다.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 약혼을 파기하고 남남처럼 살거나 결혼하는 것이냐로 갈린 것이다.
“그건…….”
“하인트 공작도 이에 동의했단다.”
루시펠라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가 안다고? 이런 일을 왜 말을 하지 않았던 거지? 그도 이것에 동의를 했다는 말인가?
약혼이 깨지면, 서로 간에 의무로 해왔던 교류가 없을 것이다. 약혼이라는 단어로 변명하며 같이 있을 기회가 사라진다는 말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약혼하지 말지, 대체 왜 약혼이 이루어진 것인가.
이상했다. 마치 그녀에게 선택을 종용하는 것처럼 상황이 흘러갔다.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루시펠라는 장시간 마차를 타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이건 기회다. 지지부진해지기 전에 선택을 빨리 하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포기한다는 선택지’가 생겼다는 건 어쩌면 행운일 수도 있었다.
루시펠라는 마지막으로 짐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점검이 거의 다 끝났을 때, 클로렌스가 돌연 찾아왔다.
그들은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루시펠라는 클로렌스가 찾아온 것만으로도 그녀가 화를 풀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녀는 미안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루시펠라가 미소를 지었다. 클로렌스는 그 모습을 보다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꼭 그녀는 안도하는 것 같았다.
“빨리 찾아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저는 루시가 제게 단단히 화가 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니야.”
루시펠라가 고개를 저었다. 클로렌스가 화를 내준 덕분에 그녀는 자신이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타인이 괜찮으면 그대로 그걸 믿어버리며 신경을 쓰지 않던 자신, 분명 에스텔로서도 그런 실수를 해왔던 거겠지. 그래서 그녀는 클로렌스의 분노를 이해하고,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다.
“나도 똑같이 미안해. 네게 배려가 없었어.”
“아니요. 제가 더 미안하죠,”
“아니야, 내가 더 미안…….”
그러다가 클로렌스와 루시펠라는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서로 더 이상 사과가 필요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클로렌스가 말했다.
“하인트 공작 각하가 찾아왔을 때는 놀랐어요.”
“뭐? 너를 찾아갔다고?”
루시펠라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 인간이 진짜!
“아니, 제가 아니라 이오지프 전하요. 저는 우연히 거기 있었고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멱살을 잡으시던데요? 황족 시해 사건이 일어나는 줄 알았어요.”
루시펠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게, 내가 일러바치려던 건 아니었어. 조사하면 다 나온다고 해서 말할 수밖에 없었어.”
루시펠라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다시 생각해도 수치스러운 기억이었다. 침묵하려고 했지만, 그는 조사하면 다 나온다며 그 와중에 그녀를 압박했던 것이다.
울고 있는 사람에게 그런 강압적인(?) 수사라니. 생각해 보니 참으로 못 할 짓이었으나, 제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루시펠라는 자신도 모르게 하소연하듯 말하고야 말았다.
그가 돌아간 후 아무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내가, 정말 미안해…….”
루시펠라가 얼굴을 붉혔다.
“아니에요. 그것 덕분에 전하와도 제대로 이야기하게 되었는걸요.”
클로렌는 괜찮다는 듯 웃었다.
“물론, 일러바쳤다는 게 짜증이 나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웃는 얼굴로 독설을 하니 루시펠라는 양심에 크게 가책을 느꼈다. 클로렌스가 말을 이었다.
“우리 모두 다 잘못이 있는 거죠. 말하지 않았던 잘못, 알아차리지 못한 잘못.”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공작 각하가 루시를 좋아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알고 있었다고?”
“너무 표가 나는 걸요.”
그게 그랬었나? 루시펠라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빠르게 뛰었다. 클로렌스가 그것을 보며 웃었다.
“얼샤에 다녀올 때쯤에는 나도, 루시도 많은 게 변해 있겠지요?”
“응.”
제드의 고백, 백작의 제안, 그녀에게 새로 주어진 상황이 너무나 많았다.
그녀는 이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다가올 때쯤, 서로가 어떻게 달라질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저는 알아서 잘하고 있을게요, 루시도 잘 다녀와요.”
클로렌스의 말에 루시펠라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잘 있어.”
한두 번 받은 작별 인사가 아니었음에도, 막상 인사를 받자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루시펠라는 자신의 친구와 짧은 작별 인사를 했다.
마차에 타기 전, 백작은 루시펠라를 살짝 끌어안았다. 백작이 루시펠라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가 백작의 얼굴을 보니 그의 코가 살짝 빨개져 있었다.
“조심히 다녀오렴.”
루시펠라는 그 모습에 기묘함을 느꼈다. 백작은 루시펠라를 사랑하는 것일까. 그런데 왜 어린 루시펠라를 혼자 두었던 것일까.
“루시.”
“네, 아버지.”
“아니, 아니다.”
백작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옆에 있는 클로렌스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제드의 약혼 이외에 무언가 또 중요한 할 말이 있는 것일까? 그때 백작이 손을 들어 루시펠라를 지탱해 주었다.
“아버지.”
루시펠라가 입을 열었다. 백작이 그녀를 보았다.
“다녀와서 제게 이야기를 해줄 수 있나요? 듣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아요.”
루시펠라가 말하자 백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묘한 서글픔이 느껴졌다.
루시펠라가 생각하기엔 백작은 루시펠라를 사랑했다. 그러나 의문스러운 구석이 너무도 많았다.
이전엔 그녀와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방관했으나, 이젠 그녀는 이 사람에 대해 알고 싶었다. 아이딘 백작은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기도 했으니까.
그녀는 마차에 올랐다. 긴 마차 여행을 간다고 생각하자 벌써부터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창문을 열어 손을 흔드는 이들을 보았다. 벌써부터 여기가 그리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제드.”
제드가 고개를 들자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말라 있으며 입가의 색이 살짝 푸르게 변해 있었다.
“네, 폐하.”
“이오지프 녀석에게 가담했다고 들었다.”
황제의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 있어, 제대로 들으려면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그렇습니다.”
제드는 머뭇거림 없이 답했다. 파벌을 형성하는 건 황제가 반기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이미 벌인 일을 숨길 수는 없었다.
“아이딘 영애 때문에 그렇다지?”
“…….”
거기까지 알아버린 건가.
제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는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침묵을 서약했으니 더 물어볼 생각은 없다.”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짐에게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제드는 이미 황제의 얼굴을 보고 눈치채고 있었다. 그가 눈치를 챘다면 다른 이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나라가 어수선해졌겠지.
“네가 의견을 표현했으니 이제 그 우유부단한 놈들이 선택을 시작하겠구나.”
황제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로가 깃든 녹안을 보며 제드가 물었다.
“어찌 보면 황가에 반기를 든 것과 마찬가지인데 왜 저를 질책하지 않으십니까?”
“짐에게 반기를 드는 게 아니라, 짐의 아들에게 반기를 든 것이 아니더냐.”
황제는 더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드는 황제의 태도만으로 어째서 황제가 이오지프를 이제껏 외면하고 테미르의 포악한 행동을 모른 척했는지 어렴풋이 눈치챘다.
아마 이오지프 녀석도 지금쯤이면 분명 깨달았겠지.
깨닫지 못하는 것은 황태자뿐이겠지.
“황태자 전하를 폐위시키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그놈이 입으로 이야기하고 다녔느냐.”
“네.”
제드의 대답에 황제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똑바로 하지 않으면 폐위를 시키겠다는 말이었건만, 멋대로 곡해하는구나.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그러나 이미 소문은 퍼질 대로 퍼져 나갔다. 자업자득이다.
거기다 환각 효과가 있는 술을 마시고 분별없이 황후의 티 파티에 나타난 게 테미르의 가장 커다란 잘못이었다.
“그렇지만 나의 계획에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제드는 그 말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렇다면 황태자의 지위가 사라진 테미르는 이오지프와 동등한 입장이 되어 앞으로 더 치열하게 대립할 것이다.
“아이딘 영애를 데려간다고 했지?”
“네.”
“그래, 데려가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군.”
황제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이제 권력은 그의 뒤를 이을 아들들에게 자연스럽게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루시펠라를 얼샤에 동행하는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초조한 황태자가 그녀를 데리고 무슨 짓을 할지 몰랐으니까. 황제라도 그를 감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딘 백작도 그런 생각에서 마지못해 보내주는 척을 한 건가.’
제드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백작은 명실상부한 황태자파였고, 만약 제드 때문에 황태자가 루시펠라를 이용하려 한다면 백작 역시 막을 수 있을 명분이 없을 테니, 이곳을 떠나는 게 정답이었다.
루시펠라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보고 싶다 어쩐다고 했지만, 백작 역시 결국 루시펠라를 피난시킨 것과 마찬가지였다.
‘순방 이후로, 루시펠라의 의지에 따라 약혼 취소를 생각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까. 1황자와 2황자의 대립 때문에?’
제드가 백작의 의중을 짐작할 때였다.
“네가 얼샤에 다녀오면 많은 것이 바뀌어 있을 거다.”
“네…….”
이오지프는 세력을 공고히 할 것이고, 제드 역시 돌아와서 적극적으로 그에 가담할 것이다. 만약, 큰 이변이 없다면 분명 다음 황제가 되는 건 이오지프겠지.
제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디 이번 여행길은 순탄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약혼녀도 있으니까.
“그럼, 이만 다녀오겠습니다, 폐하.”
제드가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리자, 황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제드, 네가 가는 그곳 어디든 얀스가르의 땅이라는 걸 명심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제드는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제드가 알현실 밖으로 나가자, 이오지프가 복도에서 제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바마마께서 뭐라고 하셨어?”
“말 안 할 거다.”
이오지프는 별로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을 지나치는 제드를 따라갔다.
그가 간신히 제드의 바로 옆에 설 때였다.
“작별 인사 정도는 하게 해주지? 조금 서운한데?”
“우리가 그런 살가운 사이는 아니지.”
제드의 차가운 말에 이오지프가 노골적으로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경을 벗었으면 그 연극적인 행동은 어찌할 수 없나? 지나치게 짜증 나는군.”
“제드, 원래 이건 내 성격이야.”
이오지프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내가 고대인의 마력이 깃든 물건을 좀 빌려주려고 왔는데…… 그럴 사이가 아니라니, 참.”
“필요 없어.”
“착용하는 사람끼리 위치를 알 수 있는 대단한 건데…….”
제드가 걸음을 멈추며 손을 내밀었다. 이오지프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진짜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본인 때문에 내게 파생된 위험이 얼마나 많은데, 당연한 것 같은데.”
제드의 말에 이오지프가 한숨을 쉬며 팔찌를 내밀었다. 섬세한 문양이 음각되어 있는 팔찌였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사용한다는 거지?”
“서로 팔찌를 끼우고 한 사람이 팔찌를 낀 다른 사람을 찾겠다고 생각하면 돼. 아주 쉽지?”
“그게 끝인가?”
“아니, 그래서 그 사람이 있는 곳과 가까워지면 팔찌에 강한 진동이 오나 봐. 윈터 경에게 시험 삼아 시켜봤는데 내가 어디 있든지 잘 찾아오더라고. 나도 몇 번 도망가려고 했는데 실패했어.”
이오지프의 뒷말은 더 듣지 않고 제드가 그것을 품에 넣었다. 그러면서 의아한 듯 물었다.
“이건 어디서 난 거지? 이런 물건은 얀스가르에서도 진귀한 거라 매우 비쌀 텐데.”
사실 제드의 재력만 해도 이런 걸 사는 것은 다소 무리였다. 제드의 물음에도 이오지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띨 뿐이었다.
“잘 다녀오도록 해. 아이딘 영애에게 안부……!”
더 이상의 정보는 얻을 수 없겠다고 판단한 제드가 몸을 휙 돌려 저만치 앞으로 걸어갔다.
이오지프가 그걸 바라보며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그는 픽 웃었다.
“어쩔 수 없다니까. 조심히 다녀와라.”
***
제드는 기사들과 함께 성문 앞에서 루시펠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약속한 시각에 늦지 않았다.
잠시 후 루시펠라가 탄 마차가 보였다. 아이딘 백작이 신경 쓴 모양인지 그리 작은 규모는 아니었다.
제드는 주머니에 있는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타고 마차 쪽으로 다가갔다. 이내 창문이 열리고 루시펠라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을 보자 제드는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딘 백작과는 인사를 잘하고 왔나?”
“응.”
“다행이군.”
“그리고 클로렌스도 배웅해 줬어.”
“로에르 영애가?”
“응. 우리 화해했어.”
루시펠라는 그에 멋쩍은 듯이 웃었다.
참 기뻐 보였다. 저번에 그것 때문에 울더니, 그래도 잘 풀린 모양이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2황자 전하를 찾아갔다면서? 내가 그러라고 말한 게 아닌데 그러기야?”
“그러길 바라고 말했던 게 아니었나?”
“그러면 말을 안 했지!”
마차를 사이에 두고 루시펠라와 제드가 말을 주고받았다.
악의가 없는 소소한 말싸움에 하인트 공작가의 기사들이 피식 웃었다.
1기사단 사람들은 제드의 그런 모습을 보고 충격받은 표정을 했다.
제드가 그 시선을 깨닫고 민망함을 숨기며 출발 지시를 내렸다. 그에 기사들이 말을 몰며 일렬로 성을 빠져나갔다.
루시펠라와 같이 성문을 빠져나가던 제드는 거슬리는 시선을 느꼈다. 그 시선이 어디 있는지 찾던 제드는 성벽 위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를 발견했다.
칼리드 루이르크였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제드와 루시펠라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그와 제드의 눈이 마주쳤다.
섬뜩하리만큼 차가우며 어둡게 가라앉은 자안. 제드는 그가 분노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으로 꼴좋은 모습이었다.
제드 역시 알고 있었다. 그가 없으면 칼리드 루이르크가 백작가에 찾아온답시고 루시펠라에게 꽃을 바친다는 것 정도는. 그러나 루시펠라가 그와 동행함으로써 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된 것이리라.
제드는 칼리드의 분노가 우스웠다. 언제나 자존심이 없는 것처럼 비굴하게 행동해서 거슬리게 하던 놈이, 이렇게 분노를 드러내는 것 자체가 짜릿했기 때문이다.
제드는 문득, 검을 들어 그와 싸우다 그의 목을 자르는 흉포한 상상을 했다. 그러나 그에게 그럴 명분은 없었다.
테미르가 황태자 자리에서 폐위가 된다면, 아마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암살자를 보내는 것이겠지. 황태자가 저놈을 보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그렇다면 자신의 사람을 탐낸 어리석은 놈의 목을 자를 수 있을 것이다.
굳이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는 이성적인 이유보다는 제드는 저 남자를 굴복시키고 싶은 감정적인 이유가 더 컸다.
“왜 그래?”
루시펠라의 목소리가 들리자 제드는 자신 안에 꾸물꾸물 올라오던 음험한 살의를 억눌러 감추었다.
“아니, 아무것도.”
그가 미소를 짓자 루시펠라가 묘한 시선으로 제드를 바라보았다.
“가자.”
제드의 웃음에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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