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오해 해결
2018.01.08.
이오지프가 입술을 떨며 말했다.
“아, 아이딘 영애에 대한 일이지?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남의 약혼녀의 이름을 들먹이다니 말이야.”
제드가 말을 내뱉으며 이오지프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그럼 아이딘 영애의 정체 때문이 아니라는 말인가? 이오지프는 이 미친놈이 왜 더 미쳐서 날뛰는지 궁금했다.
물론, 황제가 이걸 가지고 문제 삼지는 않겠지만 그도 황자가 아니던가! 이런 취급을 받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무슨 일인데!”
“내 약혼녀가 아니라 네 약혼녀 때문에 이러는 거야!”
“로에르 영애?”
제드의 눈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분노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주, 제대로 무례를 저질렀더군.”
“무례라니?! 내가 로에르 영애에게?”
“로에르 후작저에서 내 약혼녀를 그렇게 찾았다지?”
“이, 이거 놓고 말해, 제드.”
이건 그건가? 질투인 건가. 진짜 눈이 뒤집혀서 달려오다니. 클로렌스에 대한 건 핑계고 루시펠라 때문에 그런 모양이군.
이오지프는 당황했으나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무례라니, 영애와 내 사이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로에르 영애 핑계는 대지 말고, 그냥 나와 아이딘 영애 사이가 질투 난다고…… 윽!”
그에 제드가 멱살을 더욱더 강하게 쥐었다. 그에 이오지프가 캑캑거리며 기침했다.
“질투는 내가 아니라, 네 약혼녀가 했겠지.”
“뭐?”
“네놈이 황자라는 걸 감사해라. 아니었으면 죽여 버렸을 테니까!”
이오지프의 등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내 약혼녀가 질투를? 제드, 그냥 차라리 질투한다고 해라. 로에르 영애가 질투 같은 걸 할 위인이야?”
“그럼 대체 내 약혼녀에게 왜 화를 낸 거지? 그게 질투가 아니라면 대체 뭔데?”
이오지프가 무어라고 할 때 제드가 멱살을 놓고 그를 벽으로 밀었다. 이오지프가 윽, 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내 약혼녀가 우는 걸 거의 보지 못했는데, 그게 로에르 영애 때문이더군. 우습지, 그 원인이 겨우 너라니.”
“아이딘 영애가 울었다고? 그게 말이나 돼? 내가 잘 아는데, 그 영애는 절대 울…….”
쾅!
제드의 주먹이 이오지프를 스쳐 지나갔다.
이오지프는 경직된 얼굴로 자신의 바로 옆, 벽을 내려찍은 제드의 주먹을 보았다. 더 이상 입을 함부로 놀린다면 저 주먹이 벽이 아니라 그 입을 향할 거라는 명백한 경고였다.
이오지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자식 자신은 질투 안 하는 것처럼 말하더니 완전히 질투하고 있잖아. 그러나 이 말을 꺼냈다가는 저 주먹이 자신의 얼굴을 향할 것을 알기에 이오지프는 입을 다물었다.
“제드, 진정하고.”
“내 약혼녀가 눈물을 흘릴 수 있는지 아닌지 어째서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걸까.”
“아, 아니, 그런 사이는 아니지. 아니, 그냥…….”
“그냥? 네가 나 때문에 영애한테 접근하는 걸 내가 알고 있다는 걸 너도 알았을 텐데. 몇 번 경고를 주고, 심지어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까지 했는데, 대체 뭐가 더 남아서 치근대는 거지? 정말 내 약혼녀에게 관심이 있는 건가?”
“설마 그럴 리가 있어?! 아니야! 물론, 관심이 가는 건 사실이지만 그런 종류의 관심은 아니야!”
“그래? 그럼 그 다른 종류의 관심도 꺼줬으면 좋겠는데. 자기 약혼녀는 등한시하면서 내 약혼녀에게만 관심을 주다니, 너도 네 형님을 닮아 미쳐 가는 거냐?”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나도 노력하고 있다고. 그래도 시간 날 때마다 로에르 영애를 찾아가는데!”
“아, 그래서 로에르 영애를 찾아가서 영애와는 이야기 안 하고 내 약혼녀와 이야기를 하는 건가? 참으로 어이없는 노력이군.”
그에 이오지프가 억울하듯 항변하려고 하자, 제드가 차갑게 말했다.
“로에르 영애에 대해 너무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렇게 화를 낼 정도라면 원래 성자는 아니었던 거지.”
“잠깐. 그러고 보니 너 내 약혼녀와 나에 대해 관심이 많다? 이건 나도 기분 나쁜 일인데? 네가 뭔데 내 약혼녀에 대해 운운해?”
“기분이 나빠? 네가?”
제드가 쓰레기를 보듯 이오지프를 보았다. 이오지프는 기분이 더러워졌다. 안 그래도 황후에게 꾸지람을 들었는데 이놈까지 이런 말을 하니 자신이 천하의 나쁜 놈이 된 것 같았다.
“네 약혼녀나 신경 쓰지그래? 내 약혼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 취급을 네게 일일이 설교받고 싶지는 않아.”
“신경을 안 쓰게 해야지. 네 약혼녀에게 애정 표현 따윈 한 적 없지?”
“야, 너는 얼마나 잘한다고 그러냐? 아이딘 영애를 보니 네가 영애를 좋아하는 것도 제대로 모르던데. 아직도 고백 안 하고 있지?”
“이미 한 지 오래다.”
제드가 조용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엔 살짝 뿌듯함이 묻어 있었다. 이오지프가 상황을 잊고 오, 라는 감탄사를 냈다. 그거 기분 더러운 와중에 알아낸 재미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는데? 영애도 네가 좋대? 키스는 했어?”
“이 미친놈이!”
그 분노에 이오지프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영애가 쉬운 사람은 아닐 거야. 그래도 얼샤도 같이 가겠다고 했지? 나한테 감사해, 내가 얼샤에 같이 가보는 건 어떠냐고 말했거든.”
그러자 제드의 두 눈에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래, 알아서 한다는 것치곤 내 약혼녀에 대해 상당히 많은 걸 알고 있군. 네 생전, 네 약혼녀에게도 그만큼 거리가 좁아졌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죽기 전에 마음껏 후회하도록 해.”
제드의 기세는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자, 잠깐만. 진짜 자길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이오지프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야, 제, 제드, 내가 로에르 영애와 그렇게 거리를 두는 건! 나도 사정이 있어서……!”
“사정?”
“그, 로에르 영애는 내가, 아무래도, 소중히 대해야 할 약혼녀니까. 마냥 직감으로만 어떻게 하긴 좀 조심스러워.”
“뭐?”
“아, 그리고 그 영애한테 내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마냥 들이대냐? 너 같으면 그러겠냐?!”
“…….”
“너 같으면 승산도 없는 싸움에 몸을 내던지겠어? 아무 표현도 안 하는데 내가 좋고 싫고를 판단할 수는 없단 말이야. 나도 내 사정이 있으니까!”
제드는 이오지프의 대답에 아무 말도 안 했다. 이오지프는 생각해 보니 억울해졌다.
“야, 그리고 아이딘 영애처럼 로에르 영애가 솔직하면 내가 말도 안 한다. 그리고 내가 일말의 감정이 없었다면 영애를 대하는 데 더 쉬웠겠지.”
“뭐?”
제드의 목소리에 분노가 사라졌다. 그것을 깨달은 이오지프는 이를 으득 깨물며 말했다.
“아이딘 영애와는 사사로이 만난다면 분명 구설에 오를 건데, 어쩔 수 없었어. 나도 아이딘 영애와 할 말이 많았으니까. 게다가 로에르 영애도 괜찮다고 하니까 정말 괜찮은 줄 알았다고. 내가 멍청이냐, 내 약혼녀가 싫다는데 그렇게 하게?”
“애초에 로에르 영애가 단 한 번도 기분 나쁘다고 표현한 적 없었던 건가?”
“없었다고! 아이딘 영애와 만나고 싶다고 했을 때도, 그냥 자리를 마련해 줬단 말이야!”
이오지프는 정말로 억울해 보였다. 제드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러면 저놈도 지 약혼녀가 좋아서 오히려 거리를 뒀다 이런 말인가?
별로 이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해가 가서 짜증이 났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 때문에 로에르 영애가 오해해서 루시펠라에게 화를 내 루시펠라의 마음이 크게 상했다는 거였다.
모두 다 저놈 때문이었다. 제드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건 영애가 네게 일말의 상식을 기대하는 걸 포기했던 모양이지.”
“아니라니까. 너야말로 어떻게 로에르 영애에 대해 잘 알아? 둘이 따로 만난 건 아니지?”
제드가 이오지프의 멱살을 다시 꽉 쥐며 벽으로 밀어붙였다.
“네놈이 할 말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지? 상식을 검으로 알려줘야 하나?”
그가 이를 갈며 말하자, 이오지프는 자신이 적당히 하지 않으면 진짜 이놈이 칼을 뽑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 제드가 물끄러미 어딘가를 보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이오지프의 멱살을 놓았다.
“이만하지.”
“제드?”
제드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밖으로 나갔다. 인사 없는 깔끔하고도 허무한 퇴장이었다.
제드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유를 눈치챈 이오지프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아까부터 방에 들어와 있던 이를 향해 말했다.
“추태를 보였군, 로에르 영애.”
클로렌스가 머뭇거리며 걸어 나왔다.
“숨어 있으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냥 두 분이 제 존재를 모르시는 것 같아서…….”
“그건 아닐 거야. 저놈은 기사니까. 제드 녀석이 왜 저렇게 살벌하게 나오나 했더니, 이미 영애를 눈치채서 그런 모양이군.”
폭력적인 모습은 되도록 여자 앞에서 보이지 않는 제드였지만, 클로렌스에게도 어지간히 화가 났던 모양이다.
“그런 건가요?”
클로렌스는 여전히 이오지프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루시펠라에게 화를 내고 난 뒤, 울적함을 주체하지 못한 클로렌스는 이오지프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해 황궁으로 찾아왔다.
예고도 없는 방문은 그녀가 절대 저지르지 않는 무례였으나, 오늘만은 그러고 싶었다.
이오지프의 방에서 그를 기다리자,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오지프가 들어왔다. 제드에게 패대기쳐져서.
예상외의 그림에 너무나 당황한 클로렌스는 제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알고 소파 뒤로 숨었다.
“많이…… 다친 건가요, 전하?”
“저놈이 날 진심으로 쳤으면 난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이오지프가 웃으며 말했다. 클로렌스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나저나, 정말로 아이딘 백작 영애에게 화를 낸 게 사실인가? 내가 아는 영애와 달라서 좀 당황스럽군.”
이오지프가 클로렌스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클로렌스는 툴툴거리며 말했다.
“루시도 그걸 그새 공작께 일러바쳤대요?”
그것을 본 이오지프의 표정이 변했다. 그것이 꼭 평범한 사람의 꽁알거림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오지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그게 그렇게도 화가 날 일이었나?”
“당연한 거 아닌가요?”
클로렌스의 말에 이오지프가 당황했다.
“제집에, 제가 아닌 루시를 만나러 오는 것 같았어요. 심지어 전하께서는 저보다 루시를 대하는 게 더 편해 보였고요. 약혼자는 저인데 말이에요.”
이오지프는 그 말을 듣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마음을 품었지? 약혼한 사이로서의 의무감, 대외적인 평판, 뭐, 그런 것 때문에? 영애도 알겠지만, 나는 영애에게만 충실할 거야. 로에르 후작과도 후비는 들이지 않기로 약속했단 말이야.”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에요.”
클로렌스가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전하, 전하는 약혼을 했다고 해서 제게 어떤 감정도 없으신 건가요? 아까 들었더니, 감정이 있으신 것 같은데.”
이오지프는 클로렌스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당황했다. 돌려서 은근히 연유를 묻는 사교계의 방식이 아닌, 직접적 물음은 이오지프의 예상 밖이었다. 그녀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약혼녀가 되면서 전하의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겐 그런 욕심이 있단 말이에요. 레이디로서, 이런 말을 하면 분명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그런 점에서 제 친구에게도 베풀 관용의 미덕 따윈 없어요!”
“…….”
“전하는 언제나 앞만 보시죠. 그런데 가끔가다가 돌아보는 옆에는 제가 아니라 루시가 있어요. 그러니 제가 어떻게 화를 내지 않겠어요? 제 자리를 루시가 뺏어가는 것 같은데! 전하는 저보다 아이딘 영애를 더 좋아하는 것 같으세요!”
“……그 말인즉슨, 영애는 아이딘 영애를 질투한다는 건가?”
“그걸 이제야 아시는 건가요? 하인트 공작 각하께서 그렇게나 열심히 말해주셨는데!”
클로렌스가 빽 소리를 지르자 이오지프의 귀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오지프는 눈을 지그시 감고 미소를 지었다. 말 그대로 클로렌스는 루시펠라를 ‘질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오지프는 어째서인지 그 감정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걸 깨닫자 괜히 입꼬리가 더더욱 올라갔다.
“아이딘 영애에게는 참 미안하게 됐군. 시답잖은 오해를 하게 했으니 말이야.”
“전하, 또!”
클로렌스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제드에게 말했던 건 들었겠지? 나는 영애를 대하는 데 상당히 조심하고 있어. 그리고 아이딘 영애가 편한 건 사실이야. 그러나 그녀와는 어쩌다 여러 일로 엮여서 그런 거지, 이성적 감정은 추호도 없었어. 맹세할게. 진짜야.”
그 말에 클로렌스가 ‘거짓말’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이오지프를 보았다. 이오지프가 그에 난감한 웃음을 흘렸다.
“귀한 사람에겐 조심스럽게 대하는 게 당연한 거야. 하물며 내가 무분별하게 영애를 대했다가 영애가 날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 우린 평생 얼굴을 보고 살 사이인데 말이야.”
“…….”
“나는 언제나 영애를 보면 책임감을 느끼지. 영애를 황후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형님이 영애에게 두 번 다시 손을 못 대게 할 생각. 그런 생각들 말이야. 영애는 내 도움 따윈 필요치 않게 혼자서 잘하고 있지만.”
“…….”
“그리고 나 역시 질투라는 게 존재해. 만약, 제드와 영애가 따로 만났다고 한다면, 난 제드에게 화를 낼 거야. 영애에게도 화를 내겠지.”
“그 말은…….”
“영애의 마음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 역시도 내 사람, 내 여자에게는 질투한다는 말이지. 들었다면서. 나는 영애에게 마음이 없는 게 아니야.”
이오지프가 손을 뻗어 클로렌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클로렌스의 눈물을 훑었다.
“하지만, 하지만 전하. 전하께서는 제게 단 한 번도 손을 내밀어주시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때도…… 저를 그대로 두셨잖아요.”
“그때?”
이오지프가 깨달은 듯 눈이 살짝 커지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라고 말하면 이오지프와 클로렌스가 서로 약혼을 하기로 거래했던 날을 말했다.
“설마 거기서부터 영애의 고민이 시작된 건가? 제발 아니라고 말해줘.”
“맞는데요.”
클로렌스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서글픈 얼굴로 말했다.
“그때부터 제가 전하를 억지로 제 계획에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실감했어요. 전하께 못 할 짓을 했다고. 그래서 전하께서 저를 안 좋아하실까 봐 언제나 고민했어요.”
클로렌스의 고백에 이오지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운명에 클로렌스를 끌어들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못내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클로렌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일을 당하고 내 방에 온 영애를 안는 건 나보고 짐승이라도 되라는 소리지? 설령 영애가 원했더라도 똑같아. 영애는 영애의 나이가 나보다 한참 어리다는 자각은 있는 건가?”
이오지프의 단호한 음성에 클로렌스가 어, 라는 소리를 냈다.
생각해 보니 이오지프의 말이 맞았다. 이오지프는 그녀를 배려해 주었다. 그렇다면 그녀를 혼자 두는 것도 안심시켜 주기 위해서 그랬던 건가? 그것도 모르고 클로렌스는 혼자서 오해의 나래를 펼쳤다.
“그렇지만 그 일 이후도 전하께서는 제게…….”
손 한 번도 제대로 잡지 않으셨잖아요.
클로렌스의 말을 이해한 이오지프가 눈을 휘며 웃었다.
“우리가 아직 가까운 사이가 아닌데, 함부로 접촉하면 기분이 나쁠 것 같아서 그랬어. 영애가 좋다면 나야 좋은데.”
이오지프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그에 클로렌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오지프의 미소에 그녀는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루시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네요.”
“맞아. 아이딘 영애는 내 만남을 거절할 수 없었으니까. 영애도 사정이 있거든. 그리고 그대 역시도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고, 나도 배려가 부족했지.”
“루시에게 사정이요?”
그녀의 걱정 어린 말에 이오지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을 내가 알아버렸거든. 이 일은 더 알려고 하지 말아줘.”
이오지프가 끊어내자 클로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딘 영애는 솔직한 편이라 사실 꽤나 당황했을 거야. 나보다 친구인 그대가 더 잘 알겠지만.”
이오지프의 부드러운 말에 클로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울었다니 너무 의외네요. 마음이 너무 안 좋아요.”
“그러게 말이야. 그래서 제드 녀석이 저렇게 미친놈이 된 거겠지.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이오지프가 한숨을 쉬자 클로렌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오지프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보았다. 클로렌스는 이오지프가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맨얼굴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독점하고 싶었던 그 얼굴 말이다.
“약혼녀 앞에서 멱살을 잡히는 내 체면도 생각해 줘야지. 그놈은 이래서 친구가 없다니까.”
“많이 친한 사이인가요?”
“조금. 저 녀석, 선대 하인트 공작에게 검을 배울 때도 저랬어.”
이오지프는 얼굴을 찌푸리며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크게 기분이 상하지는 않은 듯했다.
이오지프 역시도 클로렌스의 얼굴을 보았다. 언제나 알 수 없어 보이던 레이디의 가면은 벗겨지고, 클로렌스는 한결 편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이오지프는 쑥스러움을 애써 숨기며 말했다.
“내가 앞으로 좀 더 조심하지. 내가 영애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일이 있다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내게 말해. 언제나 날 먼저로 여겨줘, 나도 영애를 우선으로 할게.”
“알겠어요.”
클로렌스가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오지프가 손을 내밀자, 클로렌스가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꼭 처음 잡는 것처럼 생경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오지프가 중얼거렸다.
“가을이 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
“가을이 되면요?”
“나는 그 두 사람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도 달라질 것 같거든.”
“그게 무슨…….”
“우리가 더 가까워질 거라는 소리야.”
이오지프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꽉 잡았다.
맞잡은 손 사이로 온기가 전해졌다. 그들은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