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고민
2017.12.28.
제드는 오늘도 서류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티파티 이후로 며칠이 지났다. 제드는 루시펠라에게 연락을 했으나, 그녀에게는 답장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그날의 일을 후회했다.
그렇게 얼렁뚱땅 자신의 마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조금은 자신을 봐주지 않을까 하는 애매한 기대감에 섣불리 고백하고야 말았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게 실언이라니, 너무나 서글픈 일이긴 했지만 상황을 보면 그가 내뱉은 말은 실언이었다.
이전, 루시펠라 마음이 맞지 않는다면 단호하게 끊어내겠노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동안 그는 고백을 보류하기로 했다.
마차 안에서 고백을 받은 루시펠라가 처음 보인 것은 당혹감이었다. 그녀는 마치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제드는 상처받았다.
그리고 그다음, 그녀는 눈에 띄게 불편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드는 자신이 그때서야 얼마나 어마어마한 짓을 한 건지 깨달았다.
황태자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분명 그녀를 위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고백하면, 너를 위해 엄청난 짓을 저질렀으니 그 마음을 받아달라고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참 찌질한 짓이었다.
그랬기에 루시펠라는 침묵을 선택한 거겠지. 그를 걱정하긴 했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걱정이지 애정은 아니었으니까.
제드는 그때 루시펠라의 묻는 듯 자신을 바라보던 두 눈을 기억했다.
대체 왜?
그것은 좋아하는 이유를 묻는 게 아니었다. 왜 고백하냐고 원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드는 그것에 마음이 무너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꼈다.
고백하게 된다면 그동안 쌓아두었던 관계가 사라지느냐, 아니면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하느냐가 결정되게 된다.
제드는 루시펠라와 자신의 거리가 가까움에 만족하면서도, 더 깊고 진한 관계를 갈망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라 버린 동화 속 어리석은 남자처럼, 그도 어리석었다.
루시펠라는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도착하고 나서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행여나 그가 잡을까 봐 도망치듯, 황급히.
그는 차마 루시펠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과 루시펠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어차피 결혼할 사이니까 괜찮다고 안심해야 할까.
기회는 많다고, 앞으로 함께할 시간은 충분하다고?
그럼 ‘결혼’이라는 그 어설픈 규약에 기대어 살아가야 한다는 말인가.
만약 처음 만났을 때처럼 결혼했으니 된 거 아니냐고, 이혼해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지?
그는 앞으로의 일이 아득해졌다.
심지어 제드는 루시펠라에게 몹쓸 원망마저 들었다. 이렇게 자신이 노력하는데, 그럼에도 그렇게 원망하듯 쳐다보고 대답조차 안 하다니, 너무하지 않은가.
제드는 자신이 얼샤를 떠나기 전까지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는 것은 틀렸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잘된 것이다. 떨어져 있다 보면 없는 일처럼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는 그렇게 위안하면서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며 자신의 일에 몰두하기로 결심했다.
사실 그가 장시간 자리를 비우려면 미리 처리해야 할 일은 상당히 많았다.
그가 생각에 잠기느라 내려놓았던 서류를 다시 읽어 내릴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제드의 허락에 문이 열리고 버나드가 들어왔다.
“각하.”
제드는 버나드의 표정이 어색하다는 걸 알았다.
“왜, 무슨 일이라도?”
“옷차림을 정돈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
“아이딘 영애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뭐?”
그러나 의외로 제드에게 먼저 다가온 사람은 루시펠라였다.
***
에스텔이라는 인물의 특성을 단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떤 일에서건 그녀는 명쾌하게 답을 내리고는 했다.
그것은 그녀의 생각이 단순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가야 할 길에 대해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이전 생애, 그런 단순한 길을 갈 수 있었던 이유가 인생에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루시펠라는 지금 혼란스러웠다. 기사였던 에스텔과 레이디인 루시펠라의 사이에서 그녀는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감정은 무엇이지? 새로운 사람이 되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에 파생되는 새로운 관계에 그녀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대를 사랑해.”
제드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의 의미는 루시펠라가 착각이라고 위안 삼지도 못할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그녀는 제드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 눈빛은 분명히 그녀를 오롯이 담으며, 열렬하게 구애하고 있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났다. 제드에게 연락이 왔으나 루시펠라는 그 연락을 무시했다.
루시펠라는 백작가의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여름의 따사로운 햇살, 하늘은 그렇게나 청명했으나 마음은 꼭 먹구름이 낀 것 흐릿했다.
루시펠라는 정원의 어느 지점에 멈춰 서 있었다. 익숙한 꽃이 보였기 때문이다. 얼샤의 숲에서 자주 보던 꽃이었다.
“그곳도 참 아름다웠는데.”
에스텔은 아름다움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딱 한 번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던 적이 있었다.
에른 숲에 있는 반딧불.
새파란 빛을 지닌 반딧불이들이 숲을 날아다니면 꼭 하늘에서 별이 내려와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 숲에 이 꽃도 많이 피어 있었지.’
루시펠라는 꽃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얼샤에 가면 그 반딧불이들을 볼 수 있을까?
“무슨 생각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칼리드가 서 있었다. 루시펠라는 주위를 둘러보다 그를 바라보았다. 반말하는 걸 보면 주위에 사람은 없는 듯했다.
“대체 왜 자꾸 날 찾아오는 거야?”
루시펠라의 말에 칼리드가 활짝 웃으며 꽃다발을 내밀었다.
“당연한 거 아니야, 너를 보기 위해서지.”
“…….”
“난 널 사랑하고 열망해.”
사랑해서, 열망하기 때문에, 칼리드는 루시펠라에게 꽃다발을 주러 저택에 온다.
루시펠라는 꽃다발을 받지 않은 채 여느 때처럼 그를 지나쳐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듯 뒤를 돌아보았다.
“칼리드.”
루시펠라가 뒤를 쳐다보자 칼리드의 얼굴이 밝아졌다.
“응, 에스텔.”
“너는 내가 좋다고 그랬지?”
“그래.”
“그건 ‘사랑’이라고 했고 말이야.”
“맞아.”
칼리드는 마치 칭찬을 받은 듯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칼리드. 너는 나를 언제부터, 대체 왜 사랑하게 된 거야? 그리고 그 마음을 언제 확신하게 됐어?”
자신을 사랑한다는 상대에게 언제부터 사랑했냐는 루시펠라의 물음은 서늘하고 건조했다. 그럼에도 칼리드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언제부터냐고? 그게 그렇게 중요해?”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당연하지.”
루시펠라의 대답에 칼리드는 생각하는 듯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에스텔, 너는 언제 처음으로 분노와 공포를 느꼈는지 기억하니?”
“뭐?”
“같은 거야, 내겐.”
루시펠라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을 찌푸렸다.
분노와 공포.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기본적인 감정이 아닌가.
“그 말은, 내게 감정을 품었다는 게 기본적이며 당연한 일이었다는 건가?”
“이해력이 많이 늘었구나, 에스텔.”
칼리드가 칭찬하듯 미소를 지었다.
그때 바람이 불어오며 루시펠라와 칼리드의 머리를 흩뜨렸다. 풀들이 쏴아, 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루시펠라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루시펠라는 그 시선만으로도 칼리드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언제 너에 대한 사랑을 깨달았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칼리드는 루시펠라에게 선물하려고 들었던 꽃다발의 분홍 장미를 한 송이, 한 송이 꺼내 땅바닥에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무슨…….”
루시펠라는 의아했다. 지금 그녀에게 바치기 위해 든 꽃을 스스로 버리다니.
“언제 깨달았냐면, 네가 미치도록 원망스럽고 증오스러워졌을 때. 그때 사랑을 깨달았지.”
원망과 증오. 칼리드는 그렇게 말하며 발을 들어 장미 꽃잎을 발로 짓이겼다.
루시펠라는 그 감정이 이해 가지 않았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나를 사랑한다면서 또 원망하고 증오한다는 건 뭔데?”
“에스텔, 너는 아직 모르는군. 사랑과 증오는 공존할 수 있어.”
칼리드는 눈웃음을 지었다.
루시펠라가 그의 발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선물하러 가져왔던 분홍 장미는 발아래 철저하게 짓밟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왜 칼리드는 자신을 증오하는 걸까? 그 증오가 자신을 죽이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일까? 대체 왜?
“그렇다고 널 증오해서 죽인 건 아니야.”
그렇다면 그녀를 죽인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루시펠라는 칼리드의 눈을 바라보았다.
미소를 짓고 있는 그 눈 속에 어린 감정은 루시펠라가 아직 알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었다.
저런 걸 품는 게 사랑이라고?
루시펠라의 혼란스러움을 눈치챈 것인지 칼리드가 말했다.
“내가 왜 그랬는지, 나에 대해 어떻게 복수할지는 생각해 둔 거야, 에스텔?”
“…….”
“제더카이어 하인트가 2황자 편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돌던데 말이야. 네 복수를 대신 해주기 위함인가?”
“너, 대체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러는 건데?”
루시펠라가 경멸 어린 표정으로 칼리드를 바라보자 그가 코웃음 치듯 말했다.
“너를 어떻게 보는 게 아니야. 네 곁에 미친놈이 하나 더 있다는 걸 지적하는 거지. 빌어먹게도 말이야. 그놈은 네 생각 이상으로 네게 질척이고 있어. 감히 네게.”
이 녀석 설마, 제드가 자신에게 품은 감정을 알고 있었어?
칼리드 역시 루시펠라의 바뀐 표정을 보며 얼굴을 싸늘하게 굳혔다.
“모르고 있던 건 아니었나 보군.”
“…….”
“역겹지 않아, 에스텔? 적국의 기사가 너를 연애 상대로 본다는 게. 기사인 네게는 엄청난 모욕이겠지. 그냥, 너를 단순한 레이디로 취급하는 거잖아.”
칼리드의 말은 루시펠라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
루시펠라의 얼굴이 굳자 칼리드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무어라 더 말하려던 찰나였다.
“너도 날 그렇게 취급하는 건 똑같잖아, 칼리드.”
“뭐?”
“네가 기사로서 날 대한 건 또 뭐가 있는데?”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루시펠라가 말했다.
“내가 지금 너에게 사랑에 대해 물어봤다고 뭔가 대단한 착각이라도 한 모양인데. 칼리드, 네가 궁금해서 물었던 거지, 그걸 귀담아들을 생각으로 물은 건 아니었어.”
“…….”
“개소리만 나불댈 걸 알았는데, 내가 어리석었군.”
루시펠라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칼리드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하인트 공작이 얼샤로 떠난다던데, 그럼 너는 그동안 혼자 있겠네.”
“…….”
“그렇다면 또 내가 자주 들러야겠지?”
자주 오겠다는 칼리드의 말이었다. 루시펠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방에 들어온 루시펠라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얹고 생각에 잠겼다.
아이딘 백작과 칼리드의 만남이 잦아졌다. 칼리드는 루시펠라에게 언제나 꽃을 바쳤으며, 그녀의 차가운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백작은 그것을 알면서도 용인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싫다는 것을 언급해도 백작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백작은 칼리드와 만날 일이 많다고만 말하며 대화 자체를 피했다.
제드가 없는 여름 동안 저놈과 함께해야 한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알아낼 것도 없는 그 지지부진함 속에서?
루시펠라는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
루시펠라를 움직인 것은 이오지프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제드를 따라가지 않는 거야?”
“뭐?”
이오지프의 말에 루시펠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루시펠라는 칼리드가 또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클로렌스의 집으로 차를 마시러 온 상황이었다.
언제나처럼 이오지프가 찾아왔고, 이오지프는 응접실에서 따로 이야기하자며 그녀를 불러냈다. 그리고 다짜고짜 물어본 질문이 바로 이것, 얼샤에 안 가냐는 말이었다.
“내가 왜?”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가. 자신이 왜 제드와 함께 얼샤를 간다고 생각하는 거지?
이오지프가 웃으며 말했다.
“왜냐하면 둘이 서로 좋아하는 사이니까.”
“미친. 개소리하지 마. 언제까지 그놈의 좋아한다는 소리를 할 건데?!”
루시펠라가 욕을 내뱉으며 소리치자 이오지프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참 재미있단 말이야, 두 사람 다.”
“무슨 꿍꿍이야?”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꿍꿍이로 들릴 것 같은데, 진짜로 아무 꿍꿍이도 없어. 경, 아니, 영애. 덕분에 아주 일이 쉬워졌거든. 그래서 영애의 편을 들어줄 생각이야.”
이오지프는 루시펠라의 말을 듣고 있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제드가 2황자 편에 가담하겠다고 선언했었지. 그렇다면 루시펠라에게 호의적인 것도 이해가 갔다.
루시펠라는 이 남자가 정말 짜증 났다. 루시펠라 때문에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도 제드가 자신의 편에 섰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손 안 대고 코 푼 격이다. 얄미워 죽을 것 같았다.
“앞으로 루시펠라 아이딘이라는 인물이 얼샤에 갈 기회가 있을 것 같아? 기회가 있을 때 가는 게 좋을 거야.”
이오지프의 말이 맞았다.
루시펠라 아이딘이 어떻게 얼샤에 갈 수 있을까.
루시펠라가 고민하던 부분도 이 부분이었다.
루시펠라는 혼자 여행을 갈 수 없다. 아이딘 백작이 허락해 줄 리도 만무했고, 그녀 혼자서 무분별하게 떠나봤자 범죄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었다.
앞으로 그녀에게 얼샤에 갈 기회가 있을 것인가?
분하게도 그럴 수 없다가 결론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제드가 출발하기까지 시일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겨우 오 일. 만약 가려면 서둘러 제드에게 데려가 달라고 말해야 했다.
루시펠라는 이오지프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고 몸을 돌려 응접실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잘 다녀와!”
이오지프의 인사 따윈 물론 무시했다. 복도로 뛰어가던 그녀는 클로렌스와 얼굴을 마주했다.
“클로렌스! 나 급하게 일이 있어서 나가 볼게!”
머릿속엔 빨리 제드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기에 루시펠라는 클로렌스의 표정이 어둡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로에르 후작가와 하인트 공작가는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으며, 루시펠라가 생각을 미처 다 정리하기도 전에 그녀는 공작저에 도착했다.
마차에 내려 저택 안으로 발을 내딛자 루시펠라의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마차에서 그가 말한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그때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도 잘 안 나는데 무언가 이상한 말을 한 건 아니겠지.
루시펠라는 그제야 자신의 기억을 점검했다.
하인이 똑똑, 노크하자 들어오라는 제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나 듣던 목소리임에도 새삼 그녀의 몸이 뻣뻣하게 긴장으로 굳었다.
루시펠라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옷차림을 점검했다.
그러고 보니 뛰어오느라 자기 얼굴이 어떤 상태인지도 모른다. 이 얼굴이야 뭘 해도 예쁘겠지만, 저놈 역시 뭘 해도 잘생긴 얼굴이지 않은가?
외모가 평등한 시점에서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려니 내키지 않았다. 그녀는 짧은 순간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문을 열자 제드가 루시펠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문이 닫히고, 둘만 남은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루시펠라는 다시 한 번 애꿎은 머리를 손으로 정돈했다.
제드가 자리에 일어서며 말했다.
“앉지.”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간단한 과정인데도 어딘지 어색하고 이상했다. 그러면서도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루시펠라는 제드와 함께 소파에 앉았다.
“차를 마시고 싶나?”
“간단한 용건이니 그럴 필요는 없어.”
루시펠라가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할 말을 점검하느라 그의 얼굴이 굳어 있다는 것도 몰랐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그러니까…….”
얼샤에 데려가 줘.
루시펠라는 그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숙이고 고민했다.
얼샤에 가려는 이유는 뭐라고 해야 하지? 그러고 보니 그걸 생각하지 않았다. 역시 마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지나치게 짧았다!
“루시펠라.”
제드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대답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뭐?”
“거절도 방법이지만, 우린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시간?”
“그래, 시간.”
시간이라니? 루시펠라가 의아해할 때 제드가 말을 이었다.
“영애와 나는 앞으로 아주 많은 시간을 함께해야 해. 서로 간의 감정을 규정하며,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는 것보다는 그냥 이대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무슨 소리야?”
루시펠라의 물음에 제드 역시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루시펠라는 가만히 이 대화를 분석했다.
거절, 시간, 감정을 규정한다고?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당신의 고백을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는 말이야?”
“아닌가?”
루시펠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나는 대답하러 찾아온 게 아니야. 나는 부탁할 게 있어서 온 거야.”
“부탁?”
루시펠라는 제드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실망으로 물드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것에 당황했다. 또 자신이 뭔가를 한 건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막상 없던 걸로 치고 이렇게 말하니 기분이 이상하군.”
그는 크게 기분이 상한 듯했다. 루시펠라는 상황을 이렇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자신의 입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제드는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더니 말했다.
“그래, 부탁이라니. 어서 하도록 해.”
제드의 말에 루시펠라가 말했다.
“얼샤에 같이 가고 싶어.”
“뭐?”
루시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루시펠라는 대답할 수 없었다.
“영애, 미안하지만 난 얼샤에 놀러 가는 게 아니야.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그곳에 불순분자들이 있는지 시찰하러 가는 거야. 전투 상황이 생길 수도 있어.”
“…….”
“영애의 어머니가 얼샤 출신이라서 그러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이번 부탁만은…….”
“같이 있고 싶어.”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