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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85화 (85/173)

#85화 폭력과 로맨스

2017.12.21.

“그게 무엇이 모욕인가? 영애조차도 모욕이 아니라고 했어.”

황태자가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그의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것을 보았다. 제드에게서 비롯된 압박감 때문이었다.

제드가 황태자를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모욕으로 느끼지 않는다면, 모욕하려는 의도가 사라지게 되는 것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전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제드는 자신의 분노를 일부러 감추지 않고 드러내고 있었다.

저렇게 황태자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도 되는 건가 싶을 만큼.

루시펠라는 제드를 말리기 위해 그의 손을 잡았다. 그에 제드가 손을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제드는 오히려 루시펠라의 손을 더욱 힘주어 꽉 잡았다. 마치 안심이라도 시켜주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공작,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지? 황후궁에 왜 공작이 함부로 출입하느냔 말이야.”

“황후궁에 소란이 있는 것 같아 왔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잊으셨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황실 제1기사단의 단장입니다.”

제드의 딱딱한 말에 황태자는 꼬투리를 감히 잡지 못했다.

루시펠라는 황태자가 제드의 위압감에 눌린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황태자를 이겨내지 못하는 게 너무나 분했지만, 이상하게도 황태자가 제드에게 꼼짝 못 하는 걸 보니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공은 황태자인 나를 잡아넣을 생각인가?”

공연한 트집 잡기에 실패하자 황태자가 일부러 극단적으로 말했다.

“아니오.”

제드는 단칼에 부정했다. 그에 황태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공은 내게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건지 궁금하군.”

그 비웃음에 제드는 잠시 동안 입을 다물었다.

“전하와 적어도 모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을 것 같군요.”

“뭐?”

“제 약혼녀를 모욕하려던 것에 대해 말입니다.”

그에 황태자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 순간 승리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것에 신경 쓸 줄은 몰랐군, 공작! 과거는 과거라지? 루시, 어떡하나? 네 약혼자는 네 과거가 상당히 신경 쓰나 봐.”

루시펠라는 대답 대신 황태자를 쏘아보았다. 그는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루시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공이 신경 쓰인다니 내 직접 말해주지. 그러니까…….”

그러나 황태자는 입을 열지 못했다. 어느 누구도 여기서 입을 열 수 없을 것이다. 아까부터 제드가 뿜어내는 무형의 기운이 사람들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내가 말하는 건 영애의 과거가 아니라 ‘모욕’ 그 자체입니다. 전하께서는, 아까부터 계속, 모욕이라는 걸 알면서도 영애를, 제 약혼녀를 모욕하고 계십니다.”

“…….”

“게다가 과거의 일이라니, 과거의 일이라고 하면, 영애에게 폭력을 행한 것을 말하는 겁니까?”

이를 으득 가는 듯한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맹수가 이를 드러내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처럼 은근하게 사람들을 옭아맸다.

루시펠라는 제드가 상당히 분노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당장에라도 황태자에게 결투라도 신청할 태세였다. 그것을 황태자 역시 깨달은 것 같았다.

“하, 루시! 네가 말해봐. 너도 좋아했잖아! 나중에는 좋다고 했잖아. 어떻게 그게 폭력이야! 만약 아니라고 생각했으면 아바마마께 고해바쳤어야지!”

황태자가 루시펠라를 바라보려 했지만 제드는 루시펠라를 자신의 등 뒤에 숨겨 그녀의 시야로부터 황태자를 차단했다.

루시펠라는 제드의 너른 등을 보았다. 기대도 된다는 듯, 지켜주겠다는 듯, 그의 등은 단호하고 든든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그게 폭력이냐니. 폭력이 맞았다. 제삼자인 에스텔에게는 루시펠라가 당한 일은 폭력이었다. 그러나 진짜 루시펠라에게서는 폭력이 아니었다.

사랑했기 때문에, 라는 진부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녀에게서 황태자가 했던 행동은 폭력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진짜 루시펠라는 너무 괴로워서 그것을 저 남자의 사랑이라고 생각한 채 합리화하며 살아왔다.

황태자라는 지위, 사교계에서 고립된 위치, 자신에게 내려진 유일한 관심. 거기서 황태자의 행동이 ‘폭력’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에 절망했다면 더 이상 견딜 수 없기에 그걸 필사적으로 숨겼고, 자신을 속이며 살아왔다.

외로운 루시펠라는 저 사람을 필사적으로 사랑했다. 이 사람 아니면 안 된다고, 이 사람만이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자 자신의 울타리라고.

가끔가다 보여주는 황태자의 외롭고 나약한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계속 흔들었다. 그렇게 진짜 루시펠라는 타협인지, 진짜 사랑인지 모를 애매한 감정을 키워 나갔다.

그렇게, 폭력이 로맨스가 되어갔다.

그때, 루시펠라의 머릿속에 얼샤의 마지막 왕비 이소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괜찮다고 말했던 그녀의 얼굴이.

루시펠라는 눈을 질끈 감고 이를 꽉 깨물었다. 어쩐지 머리가 아파왔다.

‘죽고 싶어.’

그때, 머릿속에 강한 울림에 루시펠라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때, 황궁 호수에 투신했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냥 머리가 빈 멍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몸을 사용하면서 그녀는 얼마나 안이했던가.

그녀는 저 남자가 아니면 안 될 정도로 몰려 있었다. 그리고 물에 빠져 의식을 잃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두 번 다시 눈 뜨고 싶지 않아.’

그렇게 진짜 루시펠라는 자신의 삶을 포기했다.

루시펠라는 이오지프의 말이 떠올랐다. 아스트라가 영혼을 다룰 수 있다는 말, 그리고 죽은 루시펠라의 육신에 자신의 영혼이 들어갔다는 말도.

왜 그녀가 삶을 포기했는지 알 것 같았다.

참으로 애처롭고도 가여운 인생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상처를 외면한 끝에 주위 사람에게 화풀이를 해대고 고립되다 결국 삶을 포기하다니.

그녀는 분노했다. 루시펠라가 안쓰러워 미칠 것 같았다. 그녀에게 힘이 있다면,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당장 저 남자의 목을 베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분노를 억눌렀다.

비록 그녀가 육신을 쓰고 있었지만, 이것은 진짜 루시펠라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진짜 루시펠라는 이미 그 일을 묻어버리기로 결정했다.

가짜인 그녀가 화를 내고, 용서를 할 영역은 아니었다. 그것이 이 몸의 진짜 주인에 대한 예의였다. 뼈아프게도, 그러했다.

그녀가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아릿한 배신감에 분노가 떠올랐지만, 그보다 자리하는 건 짙은 절망과 슬픔이었다. 진짜 루시펠라는 황태자에게 복수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숨기려 주먹을 꼭 쥐었다.

“무엇을 어찌하겠단 말이지? 그래서 황제 폐하께 고해바치겠다는 건가, 아니면 결투라도 신청하려는 건가?! 설마 내게 검을 들이대려는 건 아니겠지?”

황태자의 말에 제드는 피식, 비웃음의 기색이 역력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저는 폐하께 고해바치지도, 결투를 청하지도 않을 겁니다. 처분을 정하는 건 제가 아니라 영애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여기 서 있는 건가? 볼일이 끝났으면 불손하게 여기 서 있지 말고 공은 어서 돌아가도록 하게!”

황태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제드가 풍기는 위압감에 비해 그는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제드가 대답하지 않자 초조한 모양인지 황태자가 소리쳤다.

“내게 맞서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에 제드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뭐?! 이번에 루시펠라가 화들짝 놀랐다.

제드는 황태자에게로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갔다.

그것은 맹수가 잡아온 사냥감을 포식하러 느릿하게 걸어가는 모습 같았다.

황태자는 체면상 그대로 서 있었지만, 도망가고 싶은지 다시 다리를 후들후들 덜었다.

왜냐하면 제드의 적갈색 두 눈이 분노로 빨갛게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전하는 과거 제 아내가 될 이를 욕보이고, 현재 제 아내를 모욕하려 했으며, 미래, 제 아내의 신변을 위협했습니다.”

그 분위기에 제드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분명 섬뜩한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제드는 황태자를 내려다보았다.

“이 순간 이후부터, 하인트 공작가는 테미르 1황자 전하를 차기 황제 후보로 예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하인트 가와 제가 전하를 황제로 모실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아는 걸까? 아니, 잘 알고 있겠지.

루시펠라가 눈을 크게 뜨며 제드를 보았다. 제드의 표정은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는가? 내가 황제가 된다면 이 발언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느냔 말이야! 지금 저 계집 때문에…….”

“계집이 아니라 제 아내가 될 사람입니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제드의 뒤에 서 있던 루시펠라의 귀에도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마치 사자의 고함 소리 같았다.

“제 아내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자가 어떻게 황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저도, 하인트 가도 오늘의 이 일을 잊지 않을 겁니다.”

“하하하! 사람을 가축처럼 베어넘기는 도살자 같은 놈이!”

황태자가 지지 않겠다는 듯 화를 냈지만, 이미 그의 기세는 제드에게 눌려 있었다.

그는 눈을 굴렸다. 그때, 멀리서부터 자주색 옷을 입은 기사들이 달려왔다.

루시펠라는 그 맨 앞에 칼리드가 서 있다는 걸 알았다.

“전하!”

2기사단의 기사들이 황태자를 에워쌌다. 황태자는 그에 의기양양해져서 소리쳤다.

“저 불손한 놈을 죽여!”

“…….”

“감히 내게 반기를 들었다, 어서!”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기사들은 엉망으로 된 티 테이블과 제드의 표정,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황후와 레이디들의 표정을 보고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한 듯했다.

“어서 거처로 모셔라.”

칼리드의 말에 기사들이 황태자를 이끌었다. 분노에 찬 그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황태자가 사라지자 난장판이 된 티 테이블과 상황 정리를 지시하는 황후, 겁에 질려 눈치를 보고 있는 여자들, 그리고 제드만이 남았다.

“전하께서 아무래도 술이 과하셨던 듯합니다.”

칼리드가 허리를 숙이며 황후에게 말했다. 황후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칼리드 역시 그에 더 말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칼리드는 루시펠라를 보며 걸어갔다.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칼리드는 걱정 어린 표정으로 그녀의 몸을 훑어보았다.

루시펠라가 대답하려 할 때 제드가 루시펠라 바로 옆에 섰다.

“영애는 내가 알아서 돌보지. 경은 경의 술 취한 주인이나 돌보는 게 어떤가.”

제드의 말투에 칼리드가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드의 얼굴에는 칼리드를 향한 경멸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제 몸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각하.”

루시펠라가 서늘하게 잘라내자 칼리드는 피식 웃었다.

꼭 그게 안심했다는 뜻인 것 같아 루시펠라가 질린다는 표정을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황후에게 다가갔다.

“그럼, 제가 도울 건 없겠습니까?”

“그런 것 같군요. 뒤처리는 제가 알아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칼리드가 자리를 떠났다. 그 어수선함 속에 황후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리를 옮겨야겠지요? 경도 따라오셔야 하실 것 같군요.”

***

루시펠라를 비롯한 티 파티의 참여 인원들은 테이블 위에 놓인 문서를 보고 서로 눈치를 보았다.

“마침 신관이 있어서 다행이로군요.”

황후가 그 인장을 보며 말했다.

루시펠라는 제드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그는 무표정하게 자신의 앞에 있는 서류를 보고 있었다.

“오늘 일어났던 일에 대해 침묵을 지키겠다는 서약서입니다.”

그에 사람들이 숨을 들이켰다. 루시펠라 역시 숨을 들이켰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충분히 불쾌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이만큼 확실한 요구는 없었다.

물론 신전이 찍은 인장에 어떠한 마법적 제약은 없었다.

그러나 이 서약을 위반하는 게 발견될 시 신의 백성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 명예는커녕 사람으로서 살아갈 자격을 잃게 되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은 황족의 수치에 대한 일이기도 하지만, 영애의 개인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말이 새어 나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루시펠라는 황후의 배려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해 소문이 퍼져 나가 행여나 상처를 입을까 방비하기 위해 황후가 나서준 것이었다.

“하지만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말씀하시고 다닌다면 이 서약의 의미는 없지 않습니까?”

멜로즈가 날카롭게 물었다.

“황태자에 대한 건 제가 책임지고 입단속을 시키겠습니다. 만약 황태자가 입을 열고 다닌다면, 이젠 황제 폐하가 아시는 일만 남았겠지요. 술이 깬 황태자에게 그 정도 분별력은 있길 바랄 뿐입니다.”

그에 멜로즈가 입을 다물었다.

황후가 먼저 자신의 이름을 적자 클로렌스가 그다음으로 이름을 적었다. 다음은 제드가 이름을 적었고, 그 옆에 서 있는 여자들이 순서대로 이름을 적어 나갔다.

종이가 마지막 멜로즈에게로 향할 때였다. 멜로즈는 펜을 들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로서는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루시펠라와 그녀는 아주 사이가 나빴으므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면서까지 비밀을 엄수하라고 하시다니, 지나치게 강경한 처사시군요, 폐하. 이건 거의 강요네요.”

그녀는 날이 선 말을 하며 루시펠라를 노려보았다.

황후가 이렇게 나서기 전, 사교계를 주도했던 것은 황후가 아니라 이드리스 공작부인이었다.

이드리스 공작가인 멜로즈가 황후에게 호의적일 리는 없었으며, 루시펠라의 사정을 봐줄 리도 없었다.

“이렇게 하지 않아도, 제가 이걸 퍼뜨리고 다니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에요.”

멜로즈는 뒷말을 덧붙이며 이름을 적은 후 펜을 놓았다.

황후는 그것을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루시펠라는 황후를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루시펠라를 위해 이렇게까지 나서준 것일까. 정치적 계산이 깔린 행위라기엔 이 사실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 손해를 보는 건 온전히 루시펠라뿐이었다.

모든 이가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일에 대해서 손해를 보는 것은 황태자가 아니라 루시펠라라는 것을.

사람들은 왜 루시펠라에게 진즉 말하지 않았냐, 왜 황태자와 연인이 된 거냐, 말하며 그녀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갈 것이다. 거기서 황태자는 쏙 빠진 채로.

설령, 이것이 소문이 나더라도 황후 소생인 2황자가 아닌, 1황자의 명예에 누가 되는 것이다.

한데 그런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이 유력 가문의 여식들을 불쾌하게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러나 루시펠라는 자신에게 비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이 별로 불쾌해하지 않으며 의외로 선뜻 서약서에 서명했다는 것에 놀라고 있었다. 자칫 제국민의 지위를 잃을 수도 있는 무거운 의미의 서약에 말이다.

그녀들은 불쾌하기보다는 불편하다는 표정을 하며 루시펠라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는데, 힐끔 바라보는 그 시선에는 호기심보다는 동정과 연민, 걱정이 느껴졌다.

그것에 루시펠라는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나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은밀한 비밀을 만드는 데 주저하지 않은 여자들은 분명 루시펠라의 편이었다.

루시펠라는 어떻게 할까 하다가 허리를 숙여 이들에게 감사를 표현했다.

이 순간, 그녀는 진심이었다.

몇몇 사람은 말없는 루시펠라의 감사 인사에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몇몇 이는 따스한 격려와 위로의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서로 간에 이미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모든 일이 끝난 후, 황후가 제드에게 말을 건넸다.

“하인들의 입단속은 내가 알아서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하인트 공, 아이딘 영애를 잘 바래다주세요.”

이곳에 오래 있으면 그만큼 더 루시펠라가 힘들어할까 봐 보여준 황후의 배려였다.

“그리하겠습니다.”

루시펠라는 제드와 함께 복도를 걷고 있었다. 또박또박하는 정갈한 발걸음 소리가 텅 빈 복도에 울려 퍼졌다.

루시펠라는 제드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진짜 루시펠라가 과거에 당한 일에 분노했고, 현재 루시펠라가 당한 모욕에 분노했으며, 미래 루시펠라에게 향한 위협에 분노했다. 그래서 황태자와 맞서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루시펠라는 어쩐지 기분이 가라앉았다. 왜인지는 모른다. 갑자기 울컥 화가 나기 시작했다.

“영애?”

어느새 걸음을 멈춘 모양인지 제드가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평이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루시펠라는 울컥해서 제드와 잡은 손을 뿌리쳤다.

“따라오지 마.”

“영애, 잠깐.”

루시펠라가 빠른 걸음으로 제드를 지나쳐 갔다.

왜 화가 나는 거지? 자기 자신도 몰랐다. 루시펠라는 발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그 와중에도 도망치는 것처럼 뛰고 싶지는 않았다.

“영애.”

이런 미친! 루시펠라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제드가 긴 다리를 쩍쩍 벌리며 아주 빠른 속도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아주 긴 다리라도 이렇게 빨리 따라잡아도 되냐! 루시펠라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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