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레이디는 기사를 사랑했다
2017.12.11.
“무슨 일 때문이죠?”
루시펠라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안 그래도 요사이 신경 쓸 일이 많았는데 이오지프 녀석과 이야기를 해야 한다니 최악이었다.
이오지프는 응접실 소파에 앉아 루시펠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어쩐지 자신을 노골적으로 관찰하는 것 같아 루시펠라는 불쾌감을 느꼈다.
“오랜만이군.”
“사냥 대회가 불과 얼마 전이었어요, 전하.”
“그런가? 그땐 따로 제대로 인사를 하진 못했지. 내겐 오랜만이야.”
“그래서 로에르 후작저에 이렇게 찾아온 건가요? 그 제대로 된 인사를 하려고?”
다행히 클로렌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응접실을 안내해 줘서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싸울 만한 일이었다. 약혼자가 약혼녀 집에 와서 다른 여자를 따로 보자고 하다니.
“로에르 영애야 괜찮아. 어차피 신경 쓰지도 않을걸.”
“…….”
저 섬세한 남자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루시펠라는 클로렌스의 표정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가 이오지프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더 지체할 생각이 없는지 이오지프가 물었다.
“그때 제안은 생각해 봤나?”
“약혼자를 꼬셔서 전하의 편을 들게 하라는 거?”
루시펠라의 직설적인 말에 이오지프가 피식 웃었다.
“나는 영애의 그 직설적인 말투가 좋아.”
“그래요? 클로렌스가 들으면 서운해하겠네요.”
루시펠라의 말에 이오지프가 미묘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서 대답은 뭐야?”
“거절해요.”
루시펠라의 말에 이오지프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사람 마음을 가지고 놀고 싶지 않으니까.”
재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그 말투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제 약혼자를 설득하려면 전하가 설득하세요, 제게 설득을 떠넘기지 마세요. 그리고 아이딘 백작가가 얼샤에 지원했다는 걸 알리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고요.”
이오지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 같은 태도에 오히려 루시펠라가 의아했다.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영애라면 거절할 줄 알았어.”
“…….”
“이걸로 확신이 섰거든.”
“그게 무슨 말이죠?”
루시펠라는 이 사람이 또 개소리를 하려나 싶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이오지프가 말했다.
“영애, 다시 한 번 말하지. 나는 황제가 되어 얼샤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독립을 원한다고 말했고, 영애의 소원을 하나 들어준다고 했지. 그 말은 칼리드 루이르크를 죽일 수도 있다는 소리야. 영애는 그걸 거절하겠다는 말이지?”
“그런데요?”
이 사람, 지금 또 무언가 넘겨짚어서 헛소리를 늘어놓으려는 모양이었다.
그가 ‘칼리드’를 짚어 이야기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때, 황궁에서 투신했던 그 모습을 목격한 이오지프로서는 불가능한 소리는 아니었다.
루시펠라는 일단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이오지프의 얼굴을 쳐다봤다.
“영애는 내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는군?”
“외람되지만 그러합니다, 전하.”
이오지프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슈페르트 경, 경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을 텐데 말이야. 왜 거절을 하는 거지?”
갑작스럽게 불리는 자신의 이름에 루시펠라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온몸의 피가 싸악 식어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슈페르트 경이라니, 왜 기사로서의 그녀의 이름이 이오지프의 입에서 나오는 것인가.
루시펠라는 주먹을 꽉 쥐며 애써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이 사람은 또 제멋대로 추측하다가 이상한 결론에 도달한 거다. 일일이 놀라면 이상한 거야.
루시펠라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역시 그렇게 시치미를 뗄 것 같았어. 아, 지금은 수도 봉쇄가 풀렸지?”
“…….”
“발데르 하우젠은 잘 도주했나 모르겠군. 내 감이라면 왠지 영애, 아니, 경이 도망에 상당한 도움을 줬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것부터 우선 조사를 하는 게 나으려나?”
그는 진실에 가까운 소리를 하고 있었다.
다 알고 떠보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추측을 말하고 떠보기 위함인가.
루시펠라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대답을 했다.
“전하, 지금 전하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반역죄를 뒤집어씌우겠다고 협박하시는 건가요?”
이오지프는 노련하게 자신을 숨겨오던 사람이었다. 얼굴을 본다고 무언가가 나올 리가 없었지만 그녀는 이오지프를 노려보았다. 여기서 자기 자신을 드러냈다가는 끝이다.
탐색하려는 자들의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그 숨 막히는 정적을 먼저 깬 이는 이오지프였다.
“그때 루이르크 공작의 저택에서, 루이르크 공과 영애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
루시펠라의 표정이 순간 무너졌다.
“일부러 엿들을 의도는 없었어. 로에르 영애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영애를 찾았거든. 한데 루이르크 공작은 영애를 에스텔이라고 불렀지. 영애도 그 ‘에스텔’처럼 대화했고 말이야.”
“…….”
“루이르크 공작은 상당히 영애, 아니, 경에게 미쳐 있더군. 더 말해줄까?”
루시펠라는 그 물음에 ‘예’라고도, ‘아니오’라고도 대답할 수 없었다. 이오지프 역시 그걸 알았는지 말을 계속 이었다.
“내가 우연히 들어갔던 방이 경의 시신이 들어 있던 방이었어. 경의 유골과 머리카락을 장식해 놓았더군.”
자신의 머리를 방에 장식해 놨다고?
그 말을 듣자 루시펠라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고 평정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칼리드 루이르크의 행동이 소름 끼치고 역겨웠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욕지기를 삼켰다.
이오지프는 루시펠라의 반응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영애, 영애는 신전에 간 적이 있나?”
루시펠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이오지프가 말을 이었다.
“당시 나는 그걸 믿을 수 없어서 신전을 찾아갔어. 칼리드 루이르크도 무언가 눈치챘는지 나와 똑같은 질문을 했다고 해.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올 수 있느냐.’ 그게 루이르크 공작과 내가 신관에게 했던 질문이었어.”
“…….”
“그리고 육체에 주어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새로운 육체가 있다면 되살아날 수 있다는 게 신전의 의견이었지. 영애는 여신의 가호에 의해 루시펠라 아이딘의 육체를 빌어 소생한 거야. 그 증거로 영애가 되살아나던 날, 별이 떨어졌다고 해. 별은 영혼을 상징하지.”
자신이 어떤 경위로 살아나게 되었는지 타인에게서 듣는 건 전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여기서 알 수 있었던 것은, 이오지프가 마냥 ‘떠보려고’ 말한 게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이오지프에게, 얀스가르의 2황자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켰다.
이오지프는 루시펠라가 침묵을 지키자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는 안심하고 솔직해져도 될 것 같은데. 내가 에스텔 슈페르트가 루시펠라 아이딘 영애라고 주장했다간, 난 미친놈이라고 반대파에게 공격당한 뒤 황위 싸움에 밀려날 거고, 그전에 그쪽의 약혼자에게 죽을걸.”
이오지프의 말에 루시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부드러운 듯 촉촉함을 담던 두 눈이 예기를 담고 번뜩이며, 의례적으로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하던 입술이 일자선을 그었다.
그렇게 긴장하면서도 예법을 지키려는 듯 가지런하게 모으고 있던 두 손이 금방이라도 검을 쥘 수 있는 자세로 풀어져 축 늘어졌다.
이오지프는 루시펠라의 변모를 만족스럽게 지켜보았다.
그래, 이런 표정이었다. 이런 자세였다. 레이디들의 모습이 아닌 칼날처럼 벼려진 듯한 모습, 기사 에스텔이었다.
“이 사실을 안다는 걸 내게 드러내는 이유가 뭐지?”
루시펠라가 날카롭게 물었다. 이오지프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숨기지 않을 생각인가 보군, 슈페르트 경.”
“이상해서 말이야. 만약 그걸 알았다면, 나라면 얀스가르에 후환이 될지도 모르는 인물을 제거할 텐데, 굳이 이렇게 이 사실을 안다고 내게 말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해서.”
“글쎄, 지금 루시펠라 아이딘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위협이 될까? 그 육체는 예전과 같은 무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고작 레이디라는 위치로 경이 무얼 하지는 못할 텐데.”
분하게도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루시펠라는 주먹을 꼭 쥐었다. 그 표정을 본 이오지프가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경. 그 대단하신 기사께서 레이디의 육체에 갇혀 있다고 위협이 되지 않을 리가 없지. 이 말을 하는 건 경을 견제하기 위함이야.”
“뭐?”
“내가 알았다는 걸 드러낸다면 최소한 영애가 함부로 날뛰지는 못하겠지. 일종의 제약을 거는 거야. 나는 발데르 하우젠을 도망치게 한 사람이 경이라고 생각하거든. 부정해도 소용없어, 나는 그렇게 생각할 테니. 그런 점에서, 경은 얀스가르에 위협이야.”
“…….”
“얼샤의 독립을 원한다고 해서 얀스가르에 위협을 끼치면 안 되지. 나는 내 나라 사람을 보호할 의무가 있으니까 말이야.”
그는 자신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 그는 에스텔 슈페르트라는 인물을 잠재적 위험인물로 설정하고 고삐를 채우려 하고 있었다.
에스텔로 만난 사람 중 제일 위험한 사람이 저런 사람이었다.
방심하지 않고 빈틈조차 보이지 않으려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검술로서도, 다른 쪽으로도 가장 상대하기 힘든 사람 중 하나였다.
“이제 이 사실을 밝혔으니 다시 물어보지.”
“뭘?”
“경은 얼샤를 위해 싸웠던 기사잖아? 독립을 생각하고 있는 내 제안에 왜 거절한 거지? 마음을 농락하고 싶지 않다고? 그 이유가 정말 중요한 건가?”
루시펠라는 그 말을 듣고 이오지프를 노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쪽의 말대로 나 검을 들고 싸워온 기사야. 그런 내게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남자를 유혹하라는 말인가? 심지어 그 상대가 제더카이어 하인트인데도?”
“…….”
“검을 안다고 고작 황궁에서 책만 읽던 샌님이, 기사와 전쟁에 대해 알까? 모르니 이렇게 내게 물어보는 거겠지.”
루시펠라가 이죽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 도발에도 이오지프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저, 루시펠라의 두 눈을 보더니 입을 열어 말할 뿐이었다.
“이제 그만 자신에 솔직해지는 게 어때?”
“…….”
“에스텔 슈페르트 경, 경은 기사로서 자긍심이나 자존심 때문에 내 청을 거절한 게 아니잖아.”
이오지프의 말에 루시펠라가 차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궁금하군. 내가 전하의 청을 거절한 게 그 이유가 아니라면 무엇이지?”
“경은 제더카이어 하인트를 마음에 담아둔 거지?”
예상치 못한 말에 루시펠라가 눈을 크게 떴다. 이오지프가 그걸 보며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설마, 자각도 없었던 건가?”
“미친 소리 하지 마.”
그녀가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오지프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강한 확신이 찬 이오지프의 두 눈을 보며 오히려 루시펠라가 흔들렸다.
“날 모욕할 생각인가!”
“모욕이 아니라 직접 관찰하고 하는 말이야.”
미친 소리,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왜 그 말에 찔리기라도 한 듯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기 시작하는 건가. 마음이 제어가 되지 않았다.
“그럼 영애, 대체 왜 얼샤보다 제드의 마음을 이용하지 않는 게 우선이 된 거지? 기사였던 경이, 여자들 특유의 방식으로 그를 유혹하기 싫다고? 아니겠지, 그 ‘기사’가 나라를 위해 이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뭐가 있지? 그건 그저 공작의 마음을 이용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 아닌가?”
루시펠라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게 사실이니까.
이오지프의 말이 맞았다. 거절의 가장 큰 이유였던 건, 자신의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제드를 이용하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강한 의지 때문이었다.
왜 그렇게 자신은 망설임 없이 제드에게, 이오지프의 제안에 대해 이야기 했던가.
그녀는 제드를 속이고 싶지도 않았고, 이용당한 그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런데 그게 그를 마음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아니, 아닐 거야.
루시펠라는 가장 쉬운 방법인 ‘부정’을 선택했다.
“하인트 공작에 대한 내 마음은 속단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아주 불쾌한 일이야.”
“그래?”
이오지프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내가 머리가 멍청한 기사이긴 해도 사리분별은 가능하거든. 그쪽이 황제가 된다면 어차피 얼샤의 독립은 이뤄질 것이고, 칼리드에 대한 처우는 그 누구도 아닌 내가 결정해야 할 일이야. 그래서 굳이 승낙할 필요를 못 느꼈던 거고.”
이오지프는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리며 루시펠라의 말을 들었다.
“만약 ‘그쪽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다’는 말로 설득하려 했던 거라면, 실패했다고 말하지.”
그것을 본 이오지프는 눈을 크게 뜨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아, 정말 사람을 설득하는 건 내 적성에 안 맞아.”
“뭐?”
“내 설득이 실패했군. 경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포기하도록 하지.”
루시펠라는 의외로 산뜻한 그의 태도에 놀랐다.
“제드를 설득할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겠어.”
이오지프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 아니, 영애에게 두 번 다시 이런 부탁을 할 일은 없을 거야. 그럼 난 나가 보지.”
그는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문 앞으로 걸어 나갔다. 문을 열기 전 그는 생각났다는 듯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에스텔 슈페르트 경.”
루시펠라가 그를 쳐다봤을 때 이오지프가 말했다.
“나는 기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전쟁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어.”
이오지프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듯, 그대로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졸지에 응접실에 혼자 있게 된 루시펠라는 복잡한 생각에 신음 소리를 흘리며 주저앉았다.
이오지프의 의도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더욱더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새로 머릿속에 들어찬 버거운 사실에 구토라도 할 것 같았다.
한편, 이오지프는 복도를 걸어가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는 머리가 아주 가벼웠다. 지금 그를 억누르던 고민거리가 해결되었다.
사실, 이오지프는 그녀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 순간부터 에스텔 슈페르트에 대한 처분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결국 결론은 직접 물어보고 결론을 내리자는 것이었다.
그는 제드처럼 루시펠라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기에 자신이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오지프는 우선 그녀를 견제함과 동시에 그녀를 떠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안심하기로 했다.
그녀는 위협이 되지 않을 사람이다.
우선 첫째로 그녀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일단 끝까지 태연하게 시치미를 뗐다면 이오지프는 그녀를 의심했을 것이다.
둘째로 표정에서 너무 표가 났다. 그녀는 절대로 노련한 협상가는 아니었다.
제드를 마음에 두냐고 물어봤을 때의 표정이란! 마치 로맨스 소설에서 사랑을 자각하는 이의 표정과 똑같았다. 참 진귀한 구경을 했다.
셋째로 루시펠라는 이오지프의 은근한 제안을 재고의 여지도 없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것은 루시펠라가 제드를 이용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뜻했다.
그녀는 얼샤보다 제드를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제드에게 위해를 끼칠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는 것을 의미했다.
에스텔 슈페르트가 어떻게 레이디로서 잘 살아왔는지 경이로울 정도였다.
더 지켜봐야겠지만, 우선적으로 마음에 걸리던 일을 하나 해결했으니 앓던 이가 빠진 듯 시원했다.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도 저 너머에서 클로렌스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기분은 상당히 좋았고, 그는 자신의 기분에 집중했기에 클로렌스의 목소리가 싸늘하다는 것을 몰랐다.
“그래, 영애. 아주 기분이 좋아.”
“루시와 이야기를 잘 나눠서요?”
“그래.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니 역시…….”
“역시?”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이딘 영애 좀 잘 봐줘.”
클로렌스가 어떤 오해를 하는 줄도 모르고 이오지프는 자신의 유쾌한 기분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클로렌스는 이오지프의 뒷모습을 보며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했다.
지금 이오지프는 자신의 저택을 루시펠라와 만남의 장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전부터 생각했는데, 이오지프는 상당히, 아니, 심할 정도로 루시펠라에게 관심이 많았다.
이 사람, 상당히 섬세한 사람 아니었나? 그런데 왜 이런 데에는 무신경한 거지? 역시 자신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가?
아니면, 그녀가 신경을 쓸 정도의 존재가 아니라는 건가? 클로렌스가 무수히 들어왔던, 아내를 집안의 부속품 취급하는 남편이라는 게 바로 저런 모습일까?
그때였다. 이오지프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하더니, 그녀 앞으로 다시 걸어왔다.
“아, 영애, 이번에는 좀 귀한 찻잎을 가져왔어.”
“…….”
“영애?”
이오지프의 물음에 클로렌스는 누가 봐도 가식적이라 말할 미소를 지었다.
클로렌스는 또다시 이오지프와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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