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역지사지
2017.12.07.
옛 동료와의 재회와 작별은 너무도 쉽게 이루어졌다. 많은 감정을 전하고 싶었건만 그녀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루시펠라는 계속 생각했다.
역시 돈을 더 줄 걸 그랬나? 아니면 최소한 사람을 시켜 안전한 곳에 데려다주었어야 했나?
그녀는 울적해졌다.
저택 앞에 도착하여 마차에서 내릴 때였다.
“아가씨, 하인트 공작 각하께서 집에 와 계십니다.”
제드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루시펠라는 표정을 굳혔다.
왜 갑자기 그가 이곳에 온 거지? 혹시, 무언가를 눈치챈 건가.
심장이 쉴 새 없이 뛰었다.
혹시나 해서 살펴본 저택의 분위기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으며, 그가 딱히 기사들을 끌고 온 것 같지도 않았다.
침착하자.
루시펠라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녀가 문을 열고 응접실에 들어갔을 때 보였던 건 제드의 뒷모습이었다. 제드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설마, 그녀가 마차를 타고 들어오는 걸 보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그녀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언제 온 거야?”
“방금.”
어쩐지 제드의 대답이 그리 길지 않고 딱 끊어지는 게 역시 무언가 있는 듯했다. 루시펠라가 긴장 어린 표정으로 제드를 보았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방문에 그녀는 자신의 약혼자인 제드와 발데르의 관계에 대한 씁쓸함보다는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루시펠라는 말을 더듬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녀는 제드의 두 눈을 유심히 보았다. 그의 적갈색 눈 속에는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제 사냥 대회에서 브로치 말이야.”
그녀는 그 ‘브로치’라는 말을 듣고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기로 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만약 제드가 눈치챈 게 맞다면 그 녀석을 도망가게 해야 하는데, 여기서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그녀는 머리를 팽글팽글 돌렸다. 우선 그가 어떤 경로로 발데르가 브로치를 습득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는지 알아야만 했다. 그녀가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왜 두 개를 받았다는 말은 안 했지?”
“어?”
루시펠라는 예상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그가 브로치를 ‘두 개’ 받았냐고 물어보는 게 맞나.
“루이르크 공작이 준 브로치에 대해서 내게 말하지 않았더군.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은데.”
“설명…… 할 게 있어? 받지도 않고 버렸는데.”
다행이다. 그 일은 루시펠라의 신경을 곤두세우게는 했지만, 딱히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눈에 띄게 편안해 보이는 표정을 짓는 루시펠라를 보는 제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듣자 하니 루이르크 공이 저택에 방문할 때마다 꽃을 가져다 바쳤다는군. 저번이 한 번이 아니라고 하던데.”
“응.”
“그건 어떻게 된 거지?”
“그것도 다 버렸어.”
“…….”
루시펠라의 시원스러운 대답에 제드는 할 말을 잃었다.
발데르 하우젠을 찾는 와중에도, 사냥 대회에서 있었던 일을 듣자마자 저택으로 향한 제드였다.
그는 이 상황이 매우 불쾌했다.
결국 그 일을 가장 나중에 안 사람이 자신이었다는 사실이 참 기분이 더러웠다.
적어도 그에게 언질이라도 해줄 수 있지 않았는가? 꼭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왜 내게 말을 안 했지?”
“말을 해야 했던가?”
“당연히…….”
제드는 그렇다고 소리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화를 내면 안 된다.
그는 자신이 행여 이성을 잃고 화를 내면 루시펠라에게 지나친 위협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이성을 잃는 건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지.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영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린 약혼한 사이야.”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와 그녀의 사이에 확실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약혼’뿐이었다.
곧 결혼할 사이,
곧 동반자로서 후계를 생산할 사이,
평생을 같이할 사이, 라는 건 변명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저 관계는 애정이 없어도 성립하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는 ‘약혼’을 말하며 속으로 차게 쓴웃음 지었다.
문제는 약혼이 아니었다. 그저 그의 애정이 커졌다는 게 문제였다.
그가 그녀에게 품은 감정이 루시펠라가 그에게 품은 감정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 거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질투했고, 그래서 분노했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아니었다. 그 일을 제드에게 설명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마음에 대해 말하지 않고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했기에 입을 다물었다.
한편, 루시펠라는 안도의 한숨을 쉼과 동시에 제드의 기분이 언짢은 것을 파악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칼리드에 대한 건 ‘에스텔’의 영역이라고 생각했기에 굳이 제드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칼리드는 에스텔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고, 제드는 그녀가 새로 살고 있는 ‘루시펠라’의 삶과 연관되어 있었다.
이 둘은 별개의 영역이었기에, 칼리드와 자신의 관계가 제드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을 깨달은 루시펠라는 생각을 정리했다.
우선, 다른 남자가 엄연히 약혼자가 있는 여성에게 들이댄다는 건, 그 약혼자에 대한 도전이 틀림없다. 루시펠라는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해야 했나?
그녀는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기로 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제드에게 구애를 한다면?
루시펠라는 그 장면을 떠올리자 얼굴이 찌푸려졌다. 상상만 해도 불쾌하고 짜증이 났다.
왜냐하면 자신과 그는 약혼한 사이가 아닌가! 그리고 그 인간은 뭐지? 엄연히 자신이 있는데 그렇게 행동하면 자신을 우습게 여긴다는 게 아닌가?
그리고 제드가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열 받지!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기분이 더러울 게 분명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간단한 것을, 자신이 너무도 경솔했다.
루시펠라는 미안해하며 제드를 향해 말했다.
“미안, 다음부턴 말하도록 할게.”
“…….”
“내가 좀 경솔했던 것 같아. 들었다시피, 그 사람이 가져다 바친 꽃은 모두 버렸고, 내게 바친 브로치는 처음부터 받지도 않았어.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말하지 않았던 거야.”
루시펠라가 슬쩍 제드의 눈치를 보자, 제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어색한 분위기 속에 루시펠라가 눈을 굴리며 어색하게 말했다.
“다친 건 괜찮아?”
“…….”
“나 좀 걱정했는데.”
거짓말이다. 그녀도 기사였기에 잘 안다. 그 정도 긁힌 상처는 딱지만 지면 금세 아문다. 하물며 고급 약을 쓴 제드의 팔이 괜찮아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금방 나을 상처야. 영애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아주 사소한.”
어째서인지 루시펠라는 제드가 ‘사소한’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느낌이 들었다.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그의 쪼잔한 태도에 슬쩍 화가 났지만 루시펠라는 꾹 눌러 참았다.
‘그럼 여기 왜 있어! 돌아가던지!’
그러면서도 루시펠라는 그가 바로 돌아가지 않는 것에 안심했다.
어차피 저 쪼잔이는 더 이상 화를 내지는 않을 것 같으니, 루시펠라는 그만 미안해하기로 하고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걸 물어보기로 했다.
“아까 거리에서 들었는데, 얼샤에 있는 사람이 그쪽을 쏜 거라던데…….”
“또 이 시기에 거리로 나간 건가? 며칠간 외출은 자제하도록 해. 내 말은 듣지도 않겠지만.”
제드는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루시펠라의 말에 투덜투덜 다 대답해 주고 있었다.
“잡혔어?”
“아니. 혹시나 해서 수도를 뒤지고 있지만, 멍청한 놈이 아니라면 이미 그 산 너머로 도망을 갔겠지.”
그 멍청한 놈이 사실 브로치를 팔려고 수도로 되돌아와 숨어 있다는 걸 이 사람은 알고 있을까. 루시펠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나는 언제까지 집에 있으면 돼?”
봉쇄령이 언제까지 지속되냐고 은근히 묻는 것이었다.
눈을 마주하지 않던 제드가 루시펠라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에 루시펠라는 뜨끔했지만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기껏해야 사흘 정도.”
다행이다. 사흘 정도면 잘 숨어 있을 수 있겠지. 안 되면 나무 위에서라도 잘 놈이니까.
루시펠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의 의미를 착각한 건지 제드가 말했다.
“그렇게 못 참을 것 같으면 내게 말해. 동행하도록 하지.”
루시펠라는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지? 외출하면 함께 나가준다는 건가? 그 와중에도 신경을 써준다는 걸 아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이대로 발데르가 도주에 성공하는 건 좋다. 한데 그러고 나서는? 그 녀석은 이런 행동을 그만둘 것인가?
아니, 전혀.
그렇다면 그 후는 어떻게 될까. 그 녀석은 여전히 노력할 것이고, 제드는 그 녀석을 찾아 죽이겠지.
그저 막연히 살아만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이들을 보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얼샤 독립 세력 말이야. 다음에 또 수도로 오면 어떻게 할 거야?”
“폐하의 명에 따라야지.”
“죽겠지?”
“그래.”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제드의 목소리를 듣고 루시펠라는 치맛자락을 꾹 쥐었다.
그것을 본 제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살벌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어?”
제드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더니, 그 위에 놓인 꽃다발을 가져와 건넸다. 새빨간 장미 꽃다발이었다.
찔리는 게 있었기에 아까부터 응접실에 장미향이 가득하다는 것도, 이질적인 장미 꽃다발이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막상 그것을 받아 든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화를 내다가 웬 꽃다발? 지나치게 행동에 연관성이 없지 않은가? 얀스가르에는 화를 내면 꽃다발을 주는 풍습이라도 있는 걸까?
“칼리드 루이르크가 꽃을 바쳤다는데 내가 주지 않는 건 아무래도 모양새가 이상하겠지.”
아아.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드 녀석이 그런 행동을 벌인 이상, 약혼자인 제드가 칼리드만큼도 하지 않는다는 건 모양새가 이상하긴 했다.
남에게 보이는 것도 제드는 중요하게 여기기에 이런 번거로운 행동을 한 것이다.
루시펠라는 꽃을 바라보았다.
장미의 향기는 칼리드가 바친 그 분홍 장미처럼 짙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제드가 준 이 꽃다발이 싫지 않았다. 분홍색이라는 빨강도 하양도 아닌 색보다는 자신의 색채를 간직한 선명한 빨강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고마워.”
이 꽃을 주려고 계속 남아 있었던 모양이구나. 루시펠라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남자가 여자에게 꽃을 바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뭐 하러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꽃을 바치는가? 그건 꽃에게도 못 할 짓이 아닌가?
그러나 막상 받아 들자 기분이 묘했다. 꽃은 예쁘고, 향기로웠기 때문이다.
루시펠라가 꽃을 보며 환하게 미소를 짓자, 그것을 본 제드가 루시펠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루시펠라는 제드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모습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손 운동이라도 하는 건가? 그는 흠,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루시펠라를 보며 말했다.
“내가 준 건 안 버리나?”
“내가 이걸 왜?”
“루이르크 공이 준 건 모조리 다 버렸다면서.”
“이유를 알면서 물어?”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는 다시 한 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왜 선물을 줘놓고서 저러지? 루시펠라는 자신의 말투에 역시 문제가 있나 생각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웃기나 하고…….”
“뭐?”
루시펠라가 되물었지만 제드는 입을 다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속을 모른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녀가 제드를 빤히 보았지만, 제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어째서인지 제드의 화가 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꽃병에 소중히 꽂아둘게.”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는 다시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저 손,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상처가 악화된 건 아닐 테고, 진짜 무슨 문제라도 있나?
‘미치겠군.’
사실 제드는 루시펠라를 만지고 싶어 어찌할 줄 몰랐지만 화를 내버렸기에 참고 있었다.
제드는 그 와중에도 꽃을 든 루시펠라를 보며, 볼을 쓰다듬고 싶다. 손을 잡고 싶다.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싶다. 입을 맞추고 싶다,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사과하자마자 바로 풀어져 접촉하려는 모습을 보이면 매력이 없어 보일 게 분명했다.
때문에 제드는 솟구치는 여러 가지 욕구를 억누르며, 또 하나의 방문 목적을 상기했다.
“영애에게 할 말이 있어.”
“또?”
루시펠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조만간 얼샤에 가게 될 것 같아.”
제드의 말에 루시펠라의 얼굴에 어렸던 미소가 사라졌다.
“왜?”
“폐하께서 명을 내리셨어. 이번 일로 시찰을 돌고 오라고.”
“그렇구나.”
루시펠라의 표정이 굳었다. 제드는 그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챘다.
그 굳은 표정은 마치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서글퍼하는 것 같기도 했으며,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에 제드는 꺼내려고 했던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다녀와서, 그땐 결혼하자.’
왜냐하면, 그 말을 들은 그녀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기에.
***
“무슨 일 있어요?”
클로렌스가 루시펠라에게 물었다. 오랜만에 차를 마시는 자리이건만 루시펠라는 어딘지 모르게 생기가 없어 보였다.
“루시! 차가 뜨거워요!”
“앗, 뜨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루시펠라는 찻잔에 입을 대다 화들짝 놀라 찻잔을 떨어뜨렸다.
차 시중을 들던 하녀 한 명이 부리나케 달려와 수건으로 루시펠라의 무릎을 닦아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야.”
“무슨 일인데요.”
클로렌스의 끈질긴 물음에 루시펠라가 한숨을 푹 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먼 거리로 떠나는 건 불가능할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여행을 말하는 거야.”
“루시가 여행을 떠난다고요? 혼자서? 보호자 없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바깥이 얼마나 위험한데.”
클로렌스의 말에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렌스는 루시펠라가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루시, 진짜 무슨 일이에요?”
“가고 싶은 데가 생겼거든. 그런데 어떻게 하면 갈 수 있을까 고민이야.”
처음 그녀가 루시펠라에 몸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굳이 얼샤로 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우선 몸에 대한 적응이 먼저였으니까.
그 당시 그녀는 자신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달라진 삶을 받아들이는 것도 버거웠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루시펠라는 얼샤에 가고 싶었다.
그곳으로 아예 떠나겠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녀는 지금 얼샤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칼리드가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제대로 알고 싶었다.
“가고 싶은 데가 어디인데요?”
“얼샤.”
이 말을 하면 이상하려나. 막상 내뱉고 후회하자 클로렌스가 미묘한 표정을 하며 되물었다.
“루시의 어머님이 거기 출신이라서 그래요?”
“어?”
맞다. 그녀는 진짜 루시펠라의 어머니, 루아나가 얼샤 출신이라는 걸 기억해 냈다. 맞아, 그녀는 이소타 왕비를 모셨던 사람이다.
“루시, 그러면…….”
클로렌스가 무슨 이야기라도 꺼내려 할 때였다.
“두 영애께서 차를 마시고 계셨군요.”
이오지프가 해맑게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루시펠라의 표정이 와그작 찌푸려졌다.
“전하를 뵙습니다.”
클로렌스가 일어나 우아하게 인사하자 그녀는 마지못해 따라 했다.
이제 그 안경을 안 쓰고 다닐 생각이라면, 저 의뭉스러운 표정도 어떻게 할 수는 없나. 더 자세히 보여 더 재수 없었다.
루시펠라가 이오지프를 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녀가 내온 의자에 앉은 이오지프는 루시펠라를 응시했다. 그에 클로렌스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둘을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 여름이군요. 이곳으로 오기만 해도 땀이 나더군요.”
이오지프의 말에 클로렌스가 대답했다.
“얼음을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로에르 영애.”
그 정중한 말에 클로렌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오지프는 루시펠라를 바라볼 뿐이었다.
한편, 루시펠라는 분명 이오지프가 사용인들로부터 자신과 클로렌스가 티 타임을 가지고 있다는 걸 들었을 텐데, 왜 여기로 왔는지 의아했다.
게다가 왜 노골적으로 자신을 보는 걸까. 그러다가 루시펠라는 이오지프의 제안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애, 잠깐 단둘이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오지프가 루시펠라에게 말을 건넸다. 루시펠라는 그제야 이 녀석이 처음부터 자신과 이야기할 기회를 노리고 이곳에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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