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79화 (79/173)

#79화 재회

2017.11.30.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린 황제는 고개를 기울이며 제드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으며 때로는 고개를 가누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이상입니다, 폐하.”

제드의 보고가 끝나자 황제가 팔을 내리고 기울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평소와 다른 황제의 몸 상태는 제드의 눈에 여과 없이 들어왔다.

이전부터 이상하다고는 했지만, 황제의 상태는 생각보다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 얼샤의 독립 세력이 움직였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제드가 대답했다.

그에게 화살을 ‘실수로’ 잘못 날린 하인을 인도하던 기사 둘이 실종되었다.

사냥 대회가 끝난 이후, 제드는 기사들을 시켜 말라카 산을 수색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날 새벽, 이마에 단검이 박혀 살해당한 기사 두 명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모두 제드의 휘하에 있던 기사들이었다. 어정쩡한 실력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죽었다는 건, 그만큼 그 습격자가 대단한 놈이라는 거겠지.

기사들의 시신이 있던 근처에서 하인을 포박했던 밧줄이 발견되었다. 밧줄은 칼에 의해 잘려져 있었으며, 하인은 발견되지 않았다.

제드는 그 하인이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조사 끝에 답이 간단하게 도출되었다.

발데르 하우젠.

그놈이 수도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사냥꾼으로 위장해 메튼 남작의 집에 숨어들어 제드를 노렸다.

현재 제드는 그놈이 수도에 다시 숨어들었을지도 모르니 추적하는 한편, 수도를 봉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목표는 공을 죽이기 위해서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조치는 알아서 취하도록 하라.”

제드가 뒤에 앉아 있던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기사들이 예를 표한 뒤 재빨리 알현실 밖으로 나갔다.

이제 황제가 허가했으니 수도는 며칠간 봉쇄될 것이다. 제드는 황실의 모든 기사를 움직여 수도를 한 번 조사하기로 했다.

그때, 황제가 다시 손에 이마를 대고 기댔다.

“몸이 편찮으십니까, 폐하?”

“그래 보이느냐?”

황제의 말투는 다시 다정하게 돌아와 있었다.

제드는 그에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바위보다 더 단단해 보였던 이 황제가 오늘따라 정말로 노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이자가 이렇게 약했는가. 그는 낯선 사람을 보는 것마냥 황제를 바라보았다.

“얼샤 놈들이 날뛴다라…….”

황제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 짙은 주름 하나하나에 회한이 새겨진 듯, 그는 나약해 보였다.

제드는 그것을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너는 짐이 얼샤를 침략한 것이 부당하며 잔혹한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황제의 말에 제드는 딱 잘라 말했다.

“얼샤 정벌만은 정당했습니다. 만약 같은 일을 겪었다면 저 역시 그리했을 겁니다.”

그 말에 황제가 픽 웃었다.

“여자 기사를 그렇게 높게 평가하는 놈이 말은 모순되는구나.”

제드는 그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마저도 알고 있을 정도로 자신이 지나치게 그 기사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고 다녔나 싶었다.

“에스텔 슈페르트를 옹호하는 게 얼샤 정복을 부정한다는 말과 같진 않습니다.”

“게다가 방금 했던 말은 짐이 해왔던 정복 전쟁은 정당하지 않다는 소리가 아니냐. 고얀 놈이로고.”

“폐하께서 원하셨다면 그게 명분입니다. 제가 어떻게 명분의 당위를 판단하겠습니까.”

제드의 말에 황제는 씁쓸하게 웃었다.

제드의 어투는 분명 정복 전쟁 자체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는 기분 나빠 하는 기색 없이 말했다.

“짐은 전쟁이 국민의 삶을 황폐하게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이오지프 녀석이 전쟁을 싫어하며, 앞으로 그놈이 황위에 오른다면 나와 정반대의 길을 걸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 말에 제드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 이자힐과의 전투 때, 전선으로 끌려 나온 이오지프와 자신이 목격했던 전쟁의 참상에 황제는 ‘전쟁으로 빗어진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며, 무너져 내리며 울었던 이오지프를 보고 나약한 놈이라고 비난했다.

이오지프는 그 길로 수도에 돌아와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만 읽어댔다. 다시는 바깥에 안 나올 것처럼.

그러나 황제는 책만 읽던 이오지프가 황위에 대해 야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자신의 아들이 그가 평생 쌓아 올린 업적을 없던 일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를 차기 황제 후보로 인정하고 있다는 말인가?

“대륙을 정벌하는 것은 내 비원이었지만, 얼샤, 얼샤만은 달랐다.”

“…….”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이었거늘, 그놈들은 그것을 납득하지 못한단 말인가.”

황제의 낮은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렸다.

“제드.”

“네, 폐하.”

“동쪽의 조하르에 다녀오너라.”

제드는 고개를 들었다. 그곳은 멸망한 얼샤가 있던 땅이다.

그는 얼샤의 땅을 직할령으로 삼고, 가장 먼저 투항한 귀족들에게 땅을 내렸다.

다섯 공작이 지배하는 그곳은 마치 오망성의 모양과 같아, 황제는 그곳을 ‘조하르’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나라가 멸망한 지 3년, 사람들은 아직도 그 나라를 ‘얼샤’라 불렀다. 심지어 황제마저도. 그가 그 나라를 ‘조하르’라고 칭할 때는, 공식적으로 명령을 내릴 때밖에 없었다.

“그 말씀은…….”

“그놈들을 잡아오라는 말이 아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명 받들겠습니다.”

황제는 그놈들을 추적하는 것이 아닌, 혹여나 독립에 가담할지도 모르는 다섯 공작에게 일종의 경고를 하라는 것이었다.

또 수도를 떠나게 되는 것인가.

게다가 수도를 떠나서 향하는 곳은 얀스가르에 복속된 얼샤였다.

그는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

루시펠라는 얼굴을 찌푸리며 한참 앉아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두건을 쓴 남자와 점원이 들어왔다.

“여기 데리고 왔습니다.”

루시펠라의 시선이 그 두건을 쓴 남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두건을 쓴 남자는 어찌 된 일이냐는 듯 점원을 쳐다보았다.

“다름이 아니라, 그쪽이 여기에 판 브로치에 대해 이 아가씨가 물어볼 게 있다고 하시는군.”

그에 남자가 루시펠라를 훑었다. 그녀의 얼굴은 노출되어 이렇게 관찰되고 있는데 두건 아래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에 기분이 나빠진 루시펠라가 말했다.

“얼굴을 보자고 불렀는데 얼굴을 안 보여주면 어떻게 하라는 거지?”

루시펠라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점원이 대답했다.

“아가씨, 이 남자의 얼굴에는 끔찍한 흉터가 있어 아가씨가 보기에 불쾌하실 겁니다.”

“벗어.”

루시펠라의 대답은 단호했다. 남자는 결국 머뭇거리며 두건을 벗었다. 루시펠라는 두건을 벗은 남자를 바라보며 얼굴이 굳었다.

미친…….

그녀는 하마터면 욕을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남자의 얼굴에는 흉터 자국이 자리해 있었다. 하지만 끔찍한 흉터 자국에는 애초에 시선이 가지도 않았다.

문제는 흉터가 없는 쪽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자신이 익히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보십시오, 아가씨. 자네, 얼른 두건을 뒤집어쓰게.”

루시펠라의 반응을 착각한 것인지, 점원이 다시 두건을 뒤집어쓰게 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가려졌다.

루시펠라는 그것을 굳이 막지 않았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었다.

‘발데르.’

어떻게 잊어버리겠는가.

적갈색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남자. 곱상한 생김새에 비해 성격만은 까탈스럽고 더럽기 그지없었던 그녀의 동료였다.

루시펠라는 발데르를 훑어보았다. 두건 너머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왜 저 녀석이 여기에? 루시펠라는 이놈이 자신이 산에서 잃어버린 브로치를 팔러 왔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어제, 그 산에서 제드에게 화살을 잘못 쏜 하인을 체포한 하인트 공작가 기사 두 명이 어떤 일에서인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제드에게 화살을 쏜 놈이 이놈이었어?’

발데르가 제드에게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전혀 관계없던 사실들이 모여서 하나의 사실을 도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 미친놈이! 그랬으면 말라카 산에서 내려가는 길로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져야지! 여기서 편하게 브로치나 팔고 있어?

더구나 저 조악한 화상 흉터는 뭐란 말인가! 가까이서 제대로 보면 다 들통날 게 뻔한 분장이었다.

만약 그녀가 에스텔이었으면 당장 꽥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겠지만, 그녀는 지금 루시펠라였다.

침착한 표정으로 드레스 자락을 쥔 루시펠라는 고개를 돌려 점원에게 말했다.

“자리를 피해줬으면 좋겠군.”

“아가씨, 이건…….”

“대금은 내가 직접 지불할게. 중개료도 섭섭지 않게 챙겨주지.”

루시펠라의 말에 점원은 할 말이 없는지 무슨 일이 있으면 자신을 불러달라는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루시펠라는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까. 여기서 그녀는 자신이 에스텔이라고 밝힐 수도 있었으며,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만약 기회가 있다면 이때뿐이겠지.

“그 브로치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가씨?”

그때, 발데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펠라는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만 했다.

나름 귀족 집 자제라고 깔끔을 떨었는데 지금 그의 망토는 다 떨어져 허름하기 그지없었다. 얼샤가 멸망한 직후 이 녀석은 얼마나 힘든 세월을 견뎌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에스텔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녀가 입을 열려고 할 때, 루시펠라는 그 녀석의 왼쪽 손이 망토 아래에 감춰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녀석의 특기는 단검술이다. 자신이 가르쳤으니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무슨 행동을 보였다간 이놈은 망토 안에 있는 단검을 날려 자신을 죽일 것이다.

왜냐하면 순간의 망설임은 실수를 부른다고, 에스텔이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루시펠라는 한숨을 쉬었다.

“이 브로치 말이야. 어디서 발견했는지 알려줄 수 있나? 내가 알던 것과 비슷한 것 같아서.”

그에 발데르가 말이 없었다.

“그건 제가 우연히 얻게 된 겁니다. 제가 어떤 분을 도와드렸더니 고마워하시며 이것을 주시더군요.”

“어떤 분이라니, 누구?”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세한 사정은 설명해 드릴 수 없고요.”

그의 말투는 삐딱했다. 루시펠라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거짓말을 해도 제대로 해라. 보아하니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귀족을 도와준 답례로 이것을 받았다고 하는 것 같은데, 이러면 누구라도 캐묻고 싶어지지 않나.

루시펠라는 지금 발데르가 단검을 만지작거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동료에게 생명을 위협당한다는 사실이 꽤나 씁쓸하게 느껴졌다.

“더 캐묻지는 않겠어. 비슷한 물건인지 아닌지 헷갈려서 물어봤는데, 아닌 것 같네. 대금은 내가 지급한다고 했는데 괜찮은 건가?”

“지금 여기서 말입니까?”

“응, 아래에 데려온 기사가 금화를 가지고 있으니 받아서 주도록 하지. 얼마에 판매할 생각이지? 금화 20개 정도면 되나?”

그에 갑자기 발데르가 옷깃을 꾹 쥐었다. 루시펠라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이곳에서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매입가를 제시한 모양이었다. 상인 놈을 욕하는 발데르의 얼굴이 상상이 갔다.

“아, 내가 이걸 샀다는 건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어. 그쪽에게 사정이 있듯이 나도 사정이 있으니. 이쪽 사람들에게는 따로 입단속을 해둘게. 무슨 말인지 알지?”

발데르에게 ‘비밀’로 하라는 것은 그녀보다는 오히려 그에게 이득이었다. 이는 루시펠라가 일부러 제안한 것이다.

“감, 아니, 알겠습니다.”

방금 저 녀석,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려 했다. 남을 속이는 데 익숙지 않은 녀석이다. 아직도 그러한 면모를 보자 루시펠라는 어쩐지 울컥해서 그에게 뭐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힘으로 인내했다.

이야기가 끝나고, 루시펠라가 가게 밖으로 나왔다.

루시펠라는 거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황실 기사로 보이는 이들이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지?”

호위기사에게 물어보니 그가 설명했다.

“어제 하인트 공작을 시해하려고 했던 놈이 공작가의 기사 둘을 죽이고 도주했다고 합니다.”

“뭐?”

“듣자 하니 얼샤의 잔당이라던데, 폐하께서 수배령을 내리셨습니다.”

제드가 드디어 움직인 모양이었다.

이를 어떻게 하지? 수배령을 내리면 제일 먼저 봉쇄되는 것은 수도의 성문이었다.

지금 발데르는 갇힌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빨리 수도를 떠났어야지. 그렇게 돈이 급했냐, 이 멍청아!

이 녀석은 여기가 얼샤가 아니라 얀스가르라는 걸 몰랐나 보다. 보아하니 수도로 되돌아옴으로써 허를 찔렀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황제도 제드도 녹록지 않은 사람이었다.

저놈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분장하고 있는 것도 일시적일 뿐이지, 눈썰미 좋은 사람들이 본다면 바로 들통날 종류의 어설픈 위장이었다.

심지어 저 위장이 들통나면 그게 더 수상할 게 뻔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 구역은 특히나 귀족들이 자주 왕래하는 곳이라 기사들의 감시가 더 삼엄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동료가 잡혀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루시펠라가 옆에 있는 발데르를 힐끗 보니, 그 녀석도 이 상황에 당황한 것 같았다.

“일이 심각한 것 같으니까 얼른 기사들에게 더 자세한 사정을 알아와.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지도.”

“저…….”

“어서 서두르란 말이야, 날 기다리게 할 생각이야?!”

루시펠라의 말에 기사 한 명이 헐레벌떡 모여 있는 황실 기사들 쪽으로 달려갔다.

루시펠라는 자신의 마차를 보았다. 다행히 마부는 자리를 비웠고, 클로렌스와 함께 왔기에 하녀들은 대동하지 않았다.

“경은 점원에게 대금 좀 지불해 줄래? 그리고 클로렌스에게 내가 먼저 가니 다른 마차를 불러서 가라고 전해줘. 갔다 오는 길에 마부도 좀 데려오고.”

“네, 네.”

순식간에 자신의 호위기사 둘을 쫓은 루시펠라는 다급한 표정으로 발데르에게 소리쳤다.

“어서 마차 안으로 들어가!”

“네?”

“어서 마차에 들어가란 말이야! 저기 기사들이 나랑 그쪽을 보면 안 된단 말이야!”

“네, 네?”

“너 정말 눈치가 없구나! 그 브로치 산 걸 들키면 안 된다니까! 기사들이 조사하면 너, 내가 그거 샀다는 거 바로 말할 거 아니야?”

“……아니,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참! 내가 너를 못 믿겠다니깐. 어서 타란 말이야!”

그녀가 소리치며 발데르를 밀었다. 그러면서도 루시펠라의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지금 그녀의 말투는 한창 사춘기 때의 새침하며 앙칼진 레이디의 말투였다.

이 나이 먹고 이런 말투를 써야 하다니……. 루시펠라는 자신의 말투에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생각이 바뀌었어! 대금은 집에서 지불하도록 할게.”

아이딘 백작가 쪽은 광장을 지나야 하므로 상대적으로 감시를 따돌리기 쉬울 것이다.

발데르는 망설이는 듯하더니, 멀리서부터 기사들이 사람들을 하나하나 조사하는 것을 보고 마차에 올랐다.

귀족 영애의 마차에 올라타고 자리를 이동하는 게 안전할 거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루시펠라 역시 마차에 올라타 창문을 열었다. 자신이 타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함이었다.

“숨도 쉬지 말고 조용히 있어야 해. 알았어?”

“…….”

“얼른 허리 숙여. 들키면 큰일 난다고!”

미안, 발데르.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의 어깨를 억눌렀다. 그러곤 그를 엎드리게 했다. 마치 꼭 그녀가 그를 덮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아, 아가씨, 잠깐! 이건!”

얼마나 당황했는지 일부러 낮게 가라앉힌 듯한 목소리가 제 목소리로 나왔다.

루시펠라는 이놈이 얼마나 속으로 욕을 시원하게 내뱉고 있는지 알았으나 모르는 척했다.

기사들이 돌아오는 것을 창문 너머로 본 루시펠라가 말했다.

“출발하도록 해.”

루시펠라의 명령에 마차가 황급히 출발했다. 다행히 아이딘 백작가의 마차는 수색 범위 바깥이었는지, 기사들은 신경도 쓰고 있지 않았다. 하긴, 그 약혼녀를 수상하다 생각해서 조사하는 이들은 없겠지.

루시펠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참으로 애처로운 자세로 쭈그리고 있는 발데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을 어떻게 하지? 이대로 백작가에 데려가야 하나?

그때였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멈췄다.

루시펠라가 창문 밖을 바라보니 자주색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서 있었다.

불길한 느낌에 루시펠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딘 백작 영애가 타고 있단 말인가?”

익숙한 목소리에 그녀도, 발데르도 움찔했다.

칼리드가 바깥에 서 있는 것이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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