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진부한 로맨스
2017.11.27.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클로렌스와 루시펠라가 마차에서 내려 장신구 상점 입구로 다가서자, 점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뛰쳐나왔다.
클로렌스는 그것이 익숙한 듯 그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갔다. 이른 시간이라 가게 안에 사람은 없었다.
클로렌스가 점장에게 말했다.
“전하가 저번 화재 복구에 대해서 자네에게 물어보고 싶어 해. 알려줄 수 있나?”
“물론입죠! 아,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무래도 상점이 아닌 마련되어 있는 응접실에서 이야기할 모양이었다.
루시펠라는 그녀를 따라갈까 했지만, 저 안에서 이야기를 듣다가는 따분할 것 같기에 적당히 구경하겠다고 말하며 뒤로 빠졌다.
루시펠라는 클로렌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거리에 나왔을 때부터 느꼈지만, 어제 사냥 대회 이후로 사람들이 클로렌스를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왜냐하면 그녀는 2황자비가 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제 사냥 대회의 우승자는 이오지프였다.
그야말로 혀를 내두를 정도의 압승이었다. 루시펠라도 그의 우승에는 이견이 없었다.
심지어 제드 역시도 감탄하는 듯했다.
그날, 황태자는 언제나처럼 귀족들이 잡아온 사냥감을 빼앗아 자신이 잡은 것처럼 위장했다.
물론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황제 역시 그것을 알면서도 넘어갔고, 사람들은 그가 차기 황제가 될 재목이니 귀족들이 성의를 보이는 것이라 생각해 그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런 황태자의 사냥감의 양을 보고 사람들은 자연히 2황자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본디 그는 책만 읽는 괴짜였고, 사냥에 대한 지식이 전무해 보였다. 심지어 조언을 구한다며 루이르크 공작에게 도움을 청하는 그의 모습을 목격한 사람도 있었다.
그가 황위 싸움에 뛰어들어도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 괴짜가 토끼 한 마리라도 제대로 잡아오면 다행이었다.
지금 그가 내려오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 아무것도 못 잡았기에 그런 것이리라. 사람들은 2황자를 기다리며 비웃었다.
시간의 종료를 알리는 뿔피리를 불기 바로 직전, 이오지프는 아슬아슬하게 산 아래로 내려왔다. 사람들은 이오지프가 잡아온 포획물을 보고 경악했다.
이오지프가 잡아온 것은 ‘오릭스’였다.
멋들어진 황금색 뿔이 일품인 그 동물은 ‘소’와 같은 생김새를 지녔지만 다리가 길고, 때때로 사람의 키 높이로 뛰어다니기 때문에 잡기가 매우 힘든 동물이었다.
심지어 이 동물은 힘차게 다리를 움직이며 발버둥 치고 있었다. 산 채로 잡은 것이다.
“다른 이의 공을 가로채다니. 이게 무슨 짓이냐, 이오지프!”
황태자가 이를 으득 갈며 소리치자, 사람들이 그제야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이오지프도 형을 따라서 부정행위를 한 것이다.
황태자에게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이들이, 똑같은 이오지프의 ‘부정’에는 격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대회는 공정해야 합니다, 전하.”
사실 황태자가 잡아온 것들은 양만 많을 뿐이지 토끼나 새, 기껏해야 족제비 정도의 작은 동물이었다.
그러나 오릭스는 숙련된 사냥꾼들이 꼬박 사흘을 추격해야 잡을까 말까 하는 동물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더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본 기사들이 분개하며 말했다.
“전하는 사냥감을 직접 잡으셨습니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보증합니다.”
이들은 모두 산에 들어가기까지 이오지프에게 회의적이던 기사들이었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오지프 대신 분노하며 그 ‘명예’까지 건단 말인가.
몇몇 사람은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오지프, 이게 무슨 더러운 짓이지?”
황태자가 뻔뻔스럽게 이오지프에게 말하자 이오지프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그는 사람들을 훑어보더니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여유로운 어투로 말했다.
“혹시나 이럴까 봐 산 채로 잡느라 좀 늦었지 뭡니까.”
이오지프가 고개를 돌려 사냥감을 바라보더니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풀어주십시오.”
이오지프의 말에 기사들은 놀란 표정이었으나, 이내 군소리 없이 꽁꽁 묶은 밧줄을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이오지프가 검을 들었다. 무인들은 이 황자가 책을 많이 읽은 나머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사들이 밧줄을 풀고 오릭스가 날뛰기 시작하자 이들은 이오지프가 농담하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검을 잡는 자세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다 싶더니, 오릭스가 몸을 풀어내고 도약하자마자 낙하지점까지 빠르게 달려가 검집째 그 짐승의 머리를 쳐 기절시켰다.
“이번에도 죽이지 않은 건 모두가 보는 곳에서 부적절한 장면을 보일까 해서입니다. 이놈이 혹 건방지게 도망치려고 한다면 그땐 죽여야겠지요.”
이오지프는 기절한 오릭스를 툭툭 건드리며 자신을 매도했던 이들과 하나씩 눈을 맞췄다.
반발하던 귀족들이 하나둘 이오지프의 시선을 피했다.
이오지프는 서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귀공들도 내게 그만한 신뢰를 보여줬으면 좋겠군.”
그가 나지막한 경고를 보냈다.
그 일 이후로 이오지프에 대한 평가가 바뀐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루시펠라는 상점에서 우뚝 선 채 생각에 잠겼다.
황위 싸움이 이렇게 치열할 줄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새삼 그 긴장감이 와 닿았다.
루시펠라는 이오지프의 그런 행동 이후로 차마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설설 기던 귀족들과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황태자를 떠올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형제가 서로 칼을 겨누고 섰음에도 이것에 대해서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그 점에서 얼샤는 평화로운 나라였는데 말이야.’
파비아누스 국왕은 꽤나 오랫동안 재위 기간을 가졌고, 마지막 국왕인 아렌트는 파비아누스의 유일무이한 자식이었기에 왕위 계승에 어떠한 잡음도 없었다.
‘아니, 정말 그랬었나?’
파비아누스 국왕이 즉위할 당시의 일은 에스텔이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으니 그녀도 모른다.
그녀는 언제나 단순하게 나라를 지킨다는 신념을 위해 살았고, 그 이외의 것은 보지 못했다.
지금의 그녀가 바라보는 시각과 에스텔이 바라보는 시각은 달랐을 것이다.
그녀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되뇌며, 이왕 온 김에 제드를 위한 선물을 사기로 했다. 아직도 브로치를 잃어버린 것이 미안했던 탓이었다.
제드는 시원시원하게 괜찮다고 말했으며 그 사람이 브로치를 자루째로 살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많은 것 같았지만, 그것과 루시펠라의 미안함은 별개였다.
어디 좋은 게 없을까?
꽤나 커다란 상단과 연관되어 있는지 상점의 건물은 1층부터 3층까지 모두 장신구를 파는 가게였다.
루시펠라는 느긋하게 진열되어 있는 장신구들을 구경했다. 그러다 그녀는 자신이 선물을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물을 사고 싶은데.”
아까부터 루시펠라의 옆에서 기웃거리는 점원에게 묻자 점원이 활짝 웃었다.
“잘 물어보셨습니다! 저희 가게 물품은 언제나 최고급이지요!”
사실 클로렌스가 데려온 가게가 저질일 리는 없었기에 품질은 믿을 만했다.
점원은 루시펠라가 마음을 바꿀세라 그녀를 안내하며 하나하나 장신구에 대해 말해주었다.
은으로 섬세하게 세공된 넥타이핀, 브로치 등등.
수많은 물건 속 루시펠라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보석은 아름답고 예쁘긴 했지만 루시펠라에게 그것은 그냥 돈뭉치로 보일 뿐이었다.
점원은 입에 침이 튀도록 많은 상품을 열심히 소개해 줬으나, 내키지 않는 그녀의 반응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대체 어떤 종류의 선물을 원하십니까.”
점원이 지친 표정으로 물었으나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이건 너무 안 어울릴 것 같고, 저건 너무 화려하기만 하고, 또 이건 너무 성의 없어 보였다.
그러다 루시펠라의 시선이 다른 진열대로 옮겨갔다. 점원이 안내해 주지 않은 유일한 진열대였다.
사실, 진열대라기보다는 책상으로 보였다.
“아가씨, 거기 있는 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상품들입니다.”
그 말대로 줄에 딱 맞춰 진열되어 있는 물품과는 다르게 이것들은 상자가 열린 채로 너저분하게 책상 위에 흩어져 있었다.
이른 방문으로 미처 치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루시펠라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것들을 보았다. 그러다가 한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어?”
왜 이게 여기 있지?
루시펠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잘못 본 건가?
그러나 지금 여기 상자에 담겨 있는 브로치는 분명히 제드가 준 사파이어 브로치였다.
“이게 언제 매물로 나왔지?”
“오늘 아침입니다. 보다시피 아주 미세한 기스가 있어서 아가씨가 구매하시기엔 좀 무리가.”
“이거 여기서 제작한 거야?”
“예?”
“이 물건, 내가 아는 물건인 것 같아서.”
점원은 당황해하는 것 같더니 루시펠라의 표정을 보며 말했다.
“이건 저희 쪽에서 제작한 게 아니라 저희가 중개해서 판매하는 물품입니다. 오늘 아침에 어떤 남자에게서 매입한 물건이고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이거 내가 잃어버린 것 같거든.”
그 말을 들은 점원의 표정이 굳었다.
“이 물건 판 사람, 만나볼 수 있을까?”
“그, 그게…….”
“큰일은 벌이지 않을 테니 데려와. 데려올 때 적당한 핑계를 대주리라 믿어.”
물론 그놈이 시치미를 떼면 그녀는 바로 응징할 생각이었다. 주웠으면, 주인에게 돌려줘야지 그걸 팔아치워? 그놈의 면상을 보고 싶었다.
***
“오랜만에 아들과 함께 차를 마시다니 좋구나.”
“저도 그렇습니다, 어마마마.”
황후 프리실다는 오랜만에 자신에게 시간을 내준 이오지프가 퍽 반가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연신 미소를 지으며 아들을 위해 기꺼이 귀한 차를 내왔다.
“최근 아주 바쁘다지?”
“네, 사냥 대회 이후 저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그렇구나, 네가 아주 큰 수확을 거뒀으니 말이다. 이 어미는 네가 참 자랑스럽구나.”
이오지프가 얼굴을 붉혔다. 어머니인 프리실다는 이오지프가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그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칭찬에 익숙하지 않았다.
칭찬이라 하니 생각났다.
어제, 사냥 대회 때도 황제는 자신을 보며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굳이 말하자면, 황제가 자신에게 해준 ‘칭찬’인 거겠지.
참 칭찬도 그 사람답게 한다고 속으로 조소하던 이오지프는 프리실다의 눈치를 보더니 찻잔을 들었다.
“음, 이건 릴라꽃 향이군요.”
이오지프가 웃으면서 찻물을 바라보았다. 프리실다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차인데, 네가 차에 조예가 깊을 줄은 몰랐구나.”
“그야, 로에르 영애가 좋아하는 차니까요.”
“로에르 영애?”
이오지프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말을 고쳤다.
“아, 클로렌스요.”
이름을 발음하기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프리실다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는 검술 연습보다는 영애의 이름을 부르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구나.”
“…….”
“영애가 좋아하는 차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아주 잘한 거야. 영애랑은 자주 만나고 있니?”
“정기적으로 한 번씩 만나고 있습니다. 사냥 대회 이전에도 몇 번 만났습니다.”
“더 자주 만나거라.”
“네?”
이오지프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본 프리실다의 표정이 의아하게 물들었다.
“왜, 무슨 일이 있는 거니?”
프리실다의 물음에 그가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요, 저는 로에르 영애를 자주 만나는 게 부담스럽습니다.”
그는 다시 클로렌스를 ‘로에르 영애’로 지칭하고 있었다. 프리실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오지프. 설마 로에르 영애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는 아니겠지?”
“설마, 제가 그런 것을 따지겠습니까?”
이오지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애는 자신의 운명에 저를 끌어들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제가 제 운명에 영애를 끌어들인 거예요. 아주 쉬울 수도 있고, 어쩌면 아주 힘들고 고단한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길에 영애를 초대해도 될는지, 그게 제 욕심이 아닌지에 대해 생각합니다.”
프리실다는 아들의 고민을 보며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황실에서 자란 아들은 황족답지 않게 너무나 다정했다.
어미의 이마에 새겨진 흉터를 외면하지 못하고, 아비가 만든 잔혹한 전쟁 속 핏물에 빠져 죽어가던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해서 대업을 결심할 만큼.
프리실다는 그런 다정한 아들을 사랑했다.
“이오지프, 그런 걸 고민하는 이는 매력이 없단다.”
프리실다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에 이오지프가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부채를 팔랑이며 웃었다.
“로에르 영애가 먼저 거래를 청했다는 건, 이미 같이 위험에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다는 말이야. 네가 죄책감을 가지는 건 영애를 우습게 보는 것과 똑같단다.”
“…….”
“어리석은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영애가 행복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렴.”
“……알겠습니다.”
“아니면 클로렌스 로에르 영애가 싫은 거니?”
“설마 그렇겠습니까!”
평소보다 큰 이오지프의 목소리에 프리실다가 웃음을 지었다.
이오지프는 차를 조금 빠르게 들이켰다. 찻잔을 받침대에 올려둔 이오지프는 찻물을 보며 문득 떠오른 기억에 미소를 지었다.
며칠 전, 그는 클로렌스를 초대해 함께 티타임을 가졌다.
“무슨 차를 좋아하십니까? 다음에는 그 차를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제겐 신경 쓰지 마세요. 전하께서 준비한 차가 맛이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클로렌스는 우아한 자세로 차를 들이켰다. 그러나 차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마시는 양은 상당히 적었다.
지나치게 예의를 차린 딱딱한 태도. 그녀의 예법은 완벽했으며, 자신의 반려로 과분할 정도로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단 한 번도 제대로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약혼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의해 성립되었다. 따라서 단둘이 있을 때 굳이 애정을 위장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이오지프는 씁쓸했다.
클로렌스가 돌아간 뒤, 이오지프는 사람을 시켜 클로렌스의 하녀에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차를 물었다. 릴라꽃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차였다.
그리고 다음 만남 때 그 차를 내오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참 좋은 연인이세요.”
그제야 그녀는 이오지프의 눈을 바라봐 주었다.
그리고 릴라꽃으로 우려낸 차를 좋아한다던 클로렌스는 그가 사냥 대회에서 우승해 영광을 선물하자 환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그에 이오지프는 왜 사람이 짝을 지어서 사는 것인지, 왜 사랑하는 이에게 무언가를 바치고 싶은 것인지 로맨스라는 것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난 너희가 사이가 좋았으면 좋겠다. 하인트 공작과 아이딘 영애처럼 말이다.”
“네?”
“사냥 대회에서 이 어미는 보았단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뜻밖의 말에 이오지프의 얼굴이 굳었다.
당시 이오지프는 루시펠라에게 신경을 쓰지 못할 것 같아서 프리실다에게 그녀를 관찰해 달라고 부탁해 두었다.
“모르는 거니? 하인트 공작이 다쳤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아이딘 백작 영애가 말을 타고 직접 그곳으로 달려갔단다.”
그도 제드와 제드의 부관이 다쳐서 사냥 대회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에 쉽게 우승을 손에 넣었는데, 이런 뒷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이오지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황후, 프리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아이딘 백작 영애의 표정을 그때 네가 봤었어야 했다. 내가 허락하지 않았어도 산에 올라갔을 거야.”
“…….”
이오지프는 혼란스러웠다. 제드가 다쳤다는 소식에 주저 없이 산속으로 뛰어갔다고? 그녀는 에스텔이 아닌가. 제드가 다쳤다는데 왜?
“대체 왜?”
입 밖으로 나온 중얼거림을 들은 프리실다가 혀를 차며 말했다.
“어머, 그동안 이 어미의 로맨스 소설을 정말 허투루 읽었구나.”
로맨스 소설. 이오지프는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그녀는 에스텔 슈페르트다. 얀스가르에 의해 멸망해 버린 망국의 기사란 말이다.
제더카이어 하인트는 나라를 멸망시킨 적국의 기사인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건 소설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오지프의 머릿속에 루시펠라가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루시펠라는 단 한 번도 제드를 증오에 찬 눈빛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제드는 기사다. 그렇다면 루시펠라가 어떤 석연찮은 행동을 보이며 계속해서 그에게 살의를 품고 있었다면, 제드는 눈치챘을 것이다. 그는 자신보다 무예에 뛰어난 사람이니, 그의 판단은 믿을 수 있었다.
설령 살기를 능숙하게 숨겼다 하더라도 수시로 제드를 만나왔던 그녀가, 그를 죽이는 것은 완벽하게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으니까.
“정말입니까?”
“정말 눈치채지 못한 거니? 네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도 하인트 공작과 아이딘 영애는 꼭 붙어 있었단다.”
알고는 있다. 그 둘은 자주 함께했다.
그것을 떠올리자 이오지프는 자신이 간과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는 그간 제드가 루시펠라에게 빠져 있다고만 생각했지, 루시펠라의 감정에 대해서는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서로를 보는 따스한 시선, 티격태격하다가도 언제나 서로를 마주 보는 두 사람.
제드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벌이지 않는 루시펠라, 가끔 손을 잡았던 그들.
다쳤다는 소식에 예의도, 체통도 잊고 말을 타고 산속으로 달려갔던 루시펠라.
에스텔 슈페르트라는 이름을 제거하고 루시펠라 아이딘의 행동을 판단하면 답은 뻔했던 것을 왜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는가. 이오지프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조소했다.
“그래서 안 죽였던 거로군.”
로맨스라면, 정말 진부한 로맨스라고 할 수도 있겠다.
원수와 원수에게 마음을 뺏긴 이의 잔혹하고 비극적이며 애절하고 낭만적인 이야기.
그러나 소설은 허상의 일이었으며, 현실은 그보다 더욱 잔혹했기에 그는 소설 같은 일을 굳이 현재로 끌어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에스텔 슈페르트는 제더카이어 하인트를 죽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일 수 없었다.
레이디가 된 망국의 기사는 적국의 기사를 사랑해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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