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미움과 이해
2017.11.20.
루시펠라와 클로렌스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수다를 떨었다. 가끔 그녀의 곁에 있던 다른 영애들도 수다에 참여했다.
대화는 거슬리는 주제 없이 평탄하게 진행되었다. 이들은 아까의 말싸움 때문인지 루시펠라의 눈치를 보았으며, 그녀를 자극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대화에 끼면서도 루시펠라는 이따금 나팔 소리가 들리는 산속을 바라보았다.
보통 자신이 있던 곳은 이곳이 아닌 저 산속이었다. 얼샤에서 그녀는 때로는 수사슴을 잡기도 했고, 자그마한 토끼나 족제비를 잡기도 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삶과 과거, 에스텔의 삶을 비교하며 씁쓰레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대화에 잠시 관심을 꺼두고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때였다.
“의원! 의원을 불러주십시오.”
다급한 소리에 천막 아래 대기하던 의원들이 일어났다.
누가 다쳤나? 루시펠라는 어쩐지 그 사람이 낯이 익다고 생각하며 유심히 그를 보았다.
사실 의원들이 몇 번 다녀가긴 했기에 여자들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저마다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그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소속이 어디인가!”
의원의 물음에 하인이 대답했다.
“하인트 공작가입니다!”
루시펠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저 하인은 하인트 공작가 일원 중 한 명이었다.
“루시!”
루시펠라가 일어서자 클로렌스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시펠라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항상 안전한 수도에서 살아온 귀족들의 목숨이 가장 위험한 행사를 꼽자면 바로 사냥 대회라고 할 수 있었다.
에스텔로서 얼샤의 사냥 대회에 참여했을 때 사람들이 다치는 일은 허다했다. 특히나 사냥 대회 중에 일어난 화살 오발 사고는 생각보다 자주 일어났다. 심지어 한 귀족 영식을 잘못 쏴 죽여서 영지전까지 벌어진 적이 있었다.
하인이 이렇게 다급히 뛰어올 정도면. 분명 높은 사람임이 틀림없다. 제드, 분명 제드가 다친 것이 틀림없다.
그 사실을 되뇐 그녀는 하인에게 뛰어갔다. 하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의원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루시펠라가 다급하게 물었다.
“상처는 많이 심각한가?”
“그거야 당연…… 아가씨?!”
루시펠라를 보자 하인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루시펠라의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심각하다고? 그렇다면 큰일이 아닌가.
“어디를 다친 건가?”
“화살에 다치셨습니다.”
화살 오발 사고!
루시펠라는 화살에 상처 입은 제드를 떠올렸다. 화살을 팔에 잘못 맞으면 다시는 검을 들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이는 심각한 일이었다.
“나도 가겠어.”
루시펠라는 자신의 옷차림을 점검했다. 치렁치렁한 드레스였지만, 사냥 대회라는 걸 고려해서 활동적인 드레스를 입었다. 말은 물론이고 산 정도는 여유롭게 오를 수 있었다.
“네? 아가씨가요?”
“안 되십니다. 위험해요. 거긴 마차가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의원과 하인이 동시에 말렸다.
“그건 내가서 할 테니 어서! 환자가 있는데 이렇게 지체할 생각인가!”
루시펠라의 매서운 눈빛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이 있는 쪽으로 뛰어가려고 할 때, 클로렌스가 황급히 그녀의 팔을 끌어당겼다.
“루시, 황후 폐하께 인사는 드려야죠!”
허락 없이 자리를 비우는 것은 매우 무례한 행동이었다.
루시펠라는 이를 악물었다. 서두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면서 쓸데없는 데에 시간을 낭비하게 생겼다.
“여유가 있으니, 얼른 다녀오십시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곤 황후에게 다가갔다.
황후는 아까부터 대화를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녀는 수월하게 황후에게 인사와 더불어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부디 자리를 비우는 걸 양해해 주십시오, 황후 폐하.”
“아이딘 영애, 산으로 들어가는 건 분명 위험한 행동입니다. 얌전히 기다리는 게 어떨까요? 황실에서 준비한 의원입니다. 분명 괜찮을 거예요.”
“폐하, 제 약혼자가 다친 상황입니다. 제 두 눈으로 괜찮은지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황후가 무어라고 더 말을 하려 하자, 루시펠라는 간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실랑이로 시간을 허비할 순 없었다. 그녀의 표정을 본 황후가 할 수 없다는 듯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영애를 말릴 수는 없겠군요. 호위기사를 더 보내겠습니다. 긴말은 하지 않겠으니, 어서 가보도록 하세요.”
“감사합니다.”
황후와 눈을 마주하며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었으나, 그녀가 받은 인상대로 황후는 상당히 섬세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황후의 배려에 루시펠라는 예를 표하고 치마를 잡고 뛰었다. 그것이 예의에 어긋나 손가락질을 당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주변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얼마나 험담을 할지에 대해서는 이미 관심 밖이었다.
그가 다쳤다는 말에 왜 그렇게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의 이끌림과 급박한 상황에 그녀의 머릿속을 감싸던 복잡한 생각은 사라지고 행동만이 남았다.
그녀는 일행과 함께 말을 타고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에 의원과 하인이 동시에 눈을 마주 보았다. 레이디치고는 승마 실력이 수준급이었기 때문이다.
산 하단부를 겨우 벗어날 때였다.
“아이딘 영애?”
루시펠라는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칼리드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를 뒤따라오는 하인들의 손에는 산 채로 포획된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묶인 채 들려 있었다.
그녀는 칼리드의 얼굴에 일일이 역겨워할 여유가 없었다.
“인사를 생략하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각하. 급한 일이 있어서요.”
“무슨 급한 일입니까? 영애, 그러고 보니 지금 드레스 차림이군요. 그 차림으로 산에 오르시고 계시는 겁니까?”
마치 나무라는 것 같은 표정에 루시펠라는 구역질이 나올 뻔했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뱉어냈다.
“하인트 공작가에서 의원을 불렀습니다.”
“…….”
그것을 들은 칼리드가 하인들과 루시펠라의 일행이 안 보이는 쪽으로 등을 돌려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으나, 루시펠라는 그것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산 아래서 기다리고 있으셔야지요, 대체 왜…….”
칼리드의 물음은 이미 산 아래서 들은 것이었다. 그녀는 칼리드의 말을 끊은 채 짜증스럽게 말했다.
“내가 걱정되니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루시펠라는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는지도 모른 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공작 각하, 저는 시간을 여기서 지체할 수 없습니다. 이제 지나가겠습니다!”
루시펠라는 칼리드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지나쳤다.
루시펠라가 갑자기 말을 빨리 몰자 의원과 하인, 기사들이 헐레벌떡 그녀를 쫓아갔다.
칼리드가 루시펠라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는 무표정으로 그대로 서 있었다. 하인들은 시선을 주고받으며 칼리드의 눈치를 살폈다.
묘한 정적이 자리 잡을 때, 포획된 새가 요란하게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날개를 묶었던 매듭이 풀리며 새가 푸드덕 날갯짓을 했다.
혹여나 칼리드의 심기를 상하게 할까 봐 하인들이 애써 새를 붙잡으려 했지만, 새 역시 필사적이었다.
그때 은빛의 빛줄기가 새의 목에 정확히 꽂혔다. 칼리드가 허리춤에 착용하고 있던 단검을 새에게 날린 것이다.
새는 단말마의 소리를 끝으로 부르르 떨다가 생을 달리했다. 아름다운 하얀 깃털이 붉은 피로 젖어 흘러내렸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나라고 언제나 명중한다는 보장은 없을 테니까.”
분노로 달아오른 칼리드의 눈동자를 본 하인들이 기겁해서 주저앉은 채 덜덜 떨었다.
“그래, 기어이 그놈이란 말이지.”
그가 낮게 가라앉은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제드가 있는 곳은 말에서 내려 한참이나 걸어야만 하는 곳이었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걷은 채 발을 내디뎠다.
아름다운 드레스 자락이 흙에 젖어 물들기 시작했다. 그에 기사들이 걱정스러운 시선을 교환했으나 루시펠라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참을 가자 물소리가 났다. 계곡이었다.
“이 앞만 가면 됩니다.”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건너기 위해 물이 얕은 곳으로 향했으나, 커다란 바위를 건너야 했다. 따라서 루시펠라는 가끔 기사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영애, 영애께서는 여기서 그냥 기다리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기사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길이 없다뿐이지 못 걸을 곳은 아니었다. 이런 곳은 에스텔이 마치 산책을 하듯 놀러 다녔던 곳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물러날 수는 없죠.”
루시펠라는 기사 한 명의 손을 잡은 채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도중에 바위가 흔들거려 쓰러질 뻔했던 것을 빼고 루시는 그럭저럭 원활하게 문제의 그곳으로 향할 수 있었다.
“이곳입니다.”
높이 솟은 바위 하나를 지나 루시펠라가 뛰어가려고 할 때였다. 그녀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제드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제드는 경계태세를 하다 검을 내리고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영애가 왜 여기 있지?”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뒤에 있는 사람들도 의아한 표정이었다. 오로지 의원과 하인만이 침착한 표정으로 제드에게 인사를 올린 후 그를 지나쳐 ‘진짜 환자’를 향해 뛰어갔다.
“다쳤다면서!”
“다쳤어.”
제드가 턱으로 자신의 어깨를 가리켰다. 그는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루시펠라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하인을 보고 소리쳤다.
“심각한 상처라고 하지 않았나?!”
“각하께서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당연히 심각한 상처가 아니겠습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그리고 저기에 진짜 환자도 있습니다.”
하인이 가리킨 곳에는 가슴팍을 감싼 채 누워 있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버나드였다. 심각하게 다쳤다는 건 제드가 아닌 저쪽이었던 모양이다.
루시펠라는 억울한 눈빛으로 하인을 노려보았다.
“대체 영애가 이곳에까지 왜 온 거야? 그리고 지금 옷은 그게 뭐지?”
“…….”
“누가 영애를 이곳으로 데려온 건가.”
제드의 음성에 분노가 서렸다. 그가 매서운 시선을 보내자 하인이 필사적으로 말했다.
“제가 모셔온 게 아닙니다. 영애께서 막무가내로…… 심지어 황후 폐하께서도 허하신 일인 것을요.”
그걸 말이라고! 제드가 입을 열어 그를 혼내려 할 때였다.
“……하, 다행이다.”
루시펠라가 한숨을 쉬며 제드의 옆쪽에 주저앉았다. 무리하게 산에 오르느라 그녀는 지나치게 지쳐 있었다.
“영애!”
제드가 놀라 그녀의 옆에 앉아 상태를 살폈다.
루시펠라는 제드의 얼굴을 보았다. 다쳤다는 팔도 어느 정도 제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아 아주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다. 게다가 응급처치 역시 제대로 한 상태였다.
루시펠라가 붕대를 감은 제드의 팔을 쓸었다. 손길이 닿자 제드가 움찔했다.
“영애, 설마 날 걱정해서 온 건가?”
“그래.”
그럼 대체 왜 말도 안 되는 차림으로 이 산에 올라왔겠나. 이 멍청한 남자는 그것도 모르는 걸까. 루시펠라가 툴툴거렸다.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는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그는 눈썹을 찌푸린 채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행동은 일관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다쳤다는 소리를 듣고 주저 없이 말을 탔을 때, 루시펠라는 생각했다.
원래 그녀는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복잡한 계산은 그녀에게 맞지 않았다.
비록 여러 생각 끝에 결론을 내렸어도 그가 다쳤다는 말에 움직일 만큼 그녀는 이렇게나 단순했다.
그녀가 한 행동은 그녀의 가장 간절한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그 단순명료한 결론이 내려졌을 때, 그녀는 혼란에서 벗어났다.
칼리드 녀석이 깔아놓은 저주 같은 말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때, 제드가 뭐라고 입을 열었다.
“뭐?”
“아니, 아무것도.”
너무 작고 빠르게 지나가는 말이라 미처 듣지 못했다.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캐묻고 싶었으나, 시야에 들어온 버나드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어딜 다친 거야?”
“낙마했어. 떨어진 곳이 튀어나온 돌이었지.”
최소 타박상, 심하면 뼈가 으스러졌을 수도 있었다. 루시펠라가 혀를 차며 버나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왜 낙마한 건데? 무슨 일이 있었어?”
루시펠라의 물음에 제드가 어깨를 가리켰다.
“메튼 남작이 하인으로 위장시킨 사냥꾼이 화살을 잘못 쐈더군. 그것 때문에 나는 팔에 스쳤고, 버나드는 그걸 피하려다가 낙마했지.”
“쯧, 조심 좀 하지.”
그녀가 혀를 찼다. 사냥 실력이 출중하지 못한 귀족들이 면을 세우기 위해 사냥꾼을 고용해서 하인 대신 사냥에 데려오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 얼빠진 놈은?”
“산 아래로 이미 끌고 가도록 했어. 못 본 건가?”
“그쪽이 아프다는 것만 들어서 거기까지 볼 정신은 없었어.”
“그래.”
제드가 피식 웃자 루시펠라는 윽, 신음 소리를 흘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 웃는 건 양심이 없는 행위였다.
“부관이 아픈데 기분이 좋아?”
“설마. 난 부관을 위해서 사냥도 포기할 정도야. 영애에게 영광을 바칠 기회도 포기했거든.”
제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 말이 맞았다. 제드는 지금 부관 하나가 다쳤다고 사냥 자체를 중단한 상황이었다.
이런 사냥 대회가 가지는 의미를 루시펠라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참여한다면 어느 정도 성과를 내야 한다.
이것은 무인들의 자존심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제드는 이름 높은 기사였으며, 사람들은 당연히 그의 성과에 주목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부관 곁을 끝까지 지켜준 것이다. 저렇게 거들먹거리며 말하는 것은 재수가 없었지만,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제드가 몸을 일으키더니 버나드에게 다가갔다. 그는 툭 던지듯 괜찮냐고 물었지만, 그것은 분명 걱정이었다.
‘알고 있었어.’
그래,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저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부하들을 죽이라 하고, 직접 목을 잘랐던 것은, 이 남자가 해야 할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사고, 자신의 부하들은 적국의 기사들이었다.
에스텔 역시 만약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들을 살려둔다면, 사람들은 그들을 살아 있는 것보다 더 비참한 상태로 고문하고 굴복시켰을 테니.
제드는 그들을 죽임으로써, 에스텔의 부하들의 명예를 지켰던 것이다. 그것이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것이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칼리드에게 그 소리를 듣자 온갖 감정이 범람해 어찌할 수 없었다.
아마 자신의 마음은 평생 이럴 것이다. 미움과 미워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 계속 공존하며, 그녀를 괴롭게 만들겠지.
잠깐만, 평생?
루시펠라가 더 생각하려고 할 때 제드가 다시 루시펠라에게 다가왔다. 그는 루시펠라의 몸을 살짝 이끌어 앉기 편한 돌 위에 그녀를 앉히며 그 바로 옆에 앉았다.
“영애는 참 이상하군. 이전에는 그렇게 서먹하게 대하더니.”
“서먹해 한 게 아니라 이쪽도 이쪽 나름 사정이 있었거든!”
“사정. 언제나 그놈의 사정이 있군. 왜 또 그 말이 안 나오나 했어.”
제드가 빈정거렸다. 이상하게도, 루시펠라는 꼭 그가 투덜거리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쪽도 말 못 할 사정이 하나둘 있을 거 아니야?”
“없어.”
“없다고?”
“응, 없어.”
“허, 참.”
이 인간이 어디서 약을 팔아?
에스텔과 만났을 당시의 일을 입에 담는다면 저 남자가 저러진 못할 텐데?
루시펠라가 억울한 표정을 짓자 제드가 피식 웃었다. 그에 루시펠라는 반박할 기력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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