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74화 (74/173)

#74화 반갑지 않은 재회

2017.11.13.

루시펠라는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목소리를 듣는 것도 굉장히 오랜만의 일이라 그가 이곳에 있다는 게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실존하는 이였다.

루시펠라는 칼리드에게 잡힌 손을 잡아 빼려 했지만, 칼리드는 더욱 손을 꽉 잡았다.

“오랜만입니다, 하인트 공. 영지의 일은 잘 해결이 되셨나 봅니다.”

제드는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루시펠라에게서 칼리드를 떼어냈다. 꽉 잡힌 손이 의외로 쉽게 풀리며 아릿했다.

루시펠라는 제드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제드의 시선은 시퍼렇게 멍이 든 루시펠라의 손목을 향해 있었다.

“괜찮나? 손은 다치지 않았고?”

그 물음에 루시펠라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손 좀 줘봐.”

제드는 가만히 자신의 손을 내밀며 그녀가 손을 얹기를 기다렸다. 루시펠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딱히 다친 곳은 없어.”

그에 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칼리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대체 왜 이런 무례를 범한 거지?”

“그건 영애와 저만의 비밀입니다.”

칼리드가 입꼬리를 들어 올려 미소 지었다. 루시펠라는 칼리드가 제드의 속을 긁어놓을 생각임을 알았다. 하지만 제드는 그 도발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긴, 그녀가 칼리드와 비밀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그게 제드에게 화가 날 일이라는 것 자체가 허무맹랑한 생각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텐데?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야. 어떤 이유에서든 내 약혼녀를 함부로 대했다는 걸 문제 삼는 거지.”

제드의 눈빛이 매서웠다. 그러나 칼리드는 능글맞은 특유의 표정으로 그 눈을 마주했다.

루시펠라는 칼리드가 제드를 대하는 게 어째서인지 이전보다 여유롭다고 생각했다.

“제가 힘 조절을 못 했나 봅니다. 그렇게 꽉 잡았을 줄은 몰랐습니다.”

“영애에게 사과는 안 하나?”

“사과는 제가 영애와 단둘이 있을 때 직접 하겠습니다.”

또다시 시작하는 은근한 도발에 제드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 말은 또 단둘이 만날 일이 있다는 소리군.”

“만나면 안 되는 겁니까?”

칼리드의 말에 루시펠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 자식이 지금 얼마나 막 나가려고 이러는 거지. 그의 자색 눈이 루시펠라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것을 본 제드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공은 지금 나와 결투라도 하겠다는 건가?”

으르렁거리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칼리드가 웃으며 말했다.

“결투라, 그것도 나쁘지는 않군요. 결투는 여기 계시는 레이디를 두고 할까요?”

제드가 대답하려고 할 때 루시펠라가 조용히 말했다.

“두 분 다 제 의사는 별로 고려해 주시지 않는 것 같네요.”

그에 제드와 칼리드가 동시에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도발하는 인간이나 냉정을 잃고 그 수에 말려 들어가는 그나 똑같았다.

“제 약혼자가 돌아왔으니 이만 돌아가 주시죠, 각하.”

적당히 하고 돌아가.

루시펠라가 눈짓으로 신호를 주자 칼리드가 피식 웃었다.

그에 제드가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았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영애. 그리고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습니다, 공작.”

칼리드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방 밖으로 나갔다. 방문이 닫히고, 이들 사이에 정적이 찾아왔다.

루시펠라는 착잡한 표정으로 칼리드가 나간 문 쪽을 바라보았다.

“영애.”

저 녀석은 대체 어떤 생각인 걸까. 좋아했다고 애타는 마음을 고백하면서도, 어째서 자신을 죽이고, 그 시신의 목을 자를 수 있었을까.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고 조롱할 수 있었을까.

“영애.”

직접 그 이유를 찾으라고? 자신을 생각해 달라고? 증오해도 상관없다고? 그놈이 미친놈이었던 것을 왜 그간 몰랐지.

“영애!”

루시펠라가 그 말에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 옆에 제드가 서 있었다.

루시펠라는 순간 깨달은 사실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간 이 남자에 대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를 찾았던 적도, 그의 연락을 기다리기도 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지금, 지금은 감정의 편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간 그녀의 머릿속을 괴롭혔던 것은 다름 아닌 칼리드였으니까.

그녀는 그제야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어두운 청동색 머리, 적갈색 눈동자. 얼굴은 말끔했고, 옷 역시도 여느 때와 같이 멋스러웠지만, 살이 빠져서 그런지 얼굴선은 날카로워져 있었다.

“야위었군.”

루시펠라가 눈을 크게 떴다. 우습게도, 그 역시 지금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도.”

그에 제드의 얼굴에 살짝 웃음기가 서렸다.

“도착하자마자 편지를 보내지 않았던 것은 사과하지. 그러나 편지를 보냈는데도 답장을 안 한 건 좀 너무하지 않나?”

“내가 그랬나?”

편지. 그러고 보니 편지가 왔던 것도 같았다. 그냥 그 일 이후로 주위에 대해 아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게 맞았다.

제드가 손을 들어 루시펠라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려 했다.

“제더카이어 하인트는 주저 없이 그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어. 공작은 그 녀석들의 목을 깔끔하게 잘랐지.”

칼리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에 루시펠라는 흠칫하며 손을 피했다. 그러자 제드의 손이 움찔했다.

미묘한 어색함과 긴장이 그들 사이에 떠돌았다. 제드는 뻗었던 손을 거두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무슨 일이라. 어쩌면 굉장히 많은 일이 일어난 것도 같았다. 그러나 사실 그녀에게 일어난 일은 딱 하나였다.

칼리드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

하지만 그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아무 일도 없었어.”

그래서 루시펠라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에 제드의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갔다. 그는 루시펠라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 힘없는 목소리, 우울한 표정.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무어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루시펠라가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영지의 일은 잘 해결된 거야?”

“잘됐어.”

“듣자 하니 봉신 중 한 명이 의무를 소홀히 해서 일어난 일이라던데, 그 봉신은 어떻게 됐어?”

제드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말했다.

“멸문시켰어.”

그 말은 간단했지만 의미는 컸다. 보통 때라면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루시펠라는 조금 집요하다 싶게 캐물었다.

“모두 죽였다는 말이야?”

“그래.”

그 말이 주는 의미는 컸다. 그 가문에 소속된 사람은 여자든 어린아이든 상관없이 다 죽였다는 말이니. 아마 자신의 기사단 녀석들을 죽였을 때도 그는 저런 모습이었겠지.

얀스가르의 수도에 있으면서 전쟁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니 잊어버렸던 것일까. 그도 많은 이를 죽였을 텐데. 황제의 옆에 섰다면, 그의 손에 자신의 부하들이 많이 죽었을 텐데.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제드의 물음에 루시펠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답답한 침묵 후 제드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영애는 나를 전혀 반가워하지 않는군.”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기에 루시펠라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반가워하나? 물어보면, 반가워하는 것도 같다. 그러나 반가워하지 않는 것도 같았다.

전쟁에서 피를 흘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 녀석들을 저 사람이 죽였다는 것을 생각하자 그의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대는 내가 두렵나?”

“아니, 전혀.”

그 말에 바로 부정의 말이 나온 것은, 그 와중에도 제드가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어째서인지 그녀는 그 질문이 아주 중요한 것 같았다.

제드는 그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면 안 될까? 지금은 아무와도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루시펠라는 최대한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말했다. 이상하게도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는 밉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얼굴을 보며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그러도록 하지.”

제드가 그 말에 수긍한 듯했다. 제드의 음성은 어느새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제드는 칼리드와 그녀에게 무언가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루시펠라에게 그것을 집요하게 캐묻진 않았다. 분명 이것은 그가 불쾌할 만한 상황이고, 도와준 그에게 어느 정도 설명이 필요했을지도 모름에도.

새삼 그의 배려를 눈치채니 입맛이 썼다. 그녀는 입을 달싹거리다 눈을 질끈 감고 문에 다가가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아무렇게나 떠오른 말을 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말하는 감정이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를 보니 불편하긴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안심이 되는 자신을 느꼈으니까.

제드는 그 말을 듣고 멈춰 섰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는 아무래도 화가 난 모양이었다.

결국, 아무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자신임에도,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제드를 마냥 반가워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칼리드가 꼭 저주라도 건 것 같았기에, 루시펠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얀스가르인들은 2황자가 황위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을 가장 화려한 방식으로 알게 되었다.

바로 치정극.

2황자는 그 레이디가 자신의 연인이었으며, 그 여인과 결혼하겠노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한 레이디를 둘러싸고 벌어진 형제의 싸움은 대륙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황제는 황태자 편을 들어주지 않고 침묵했다.

평민들은 이것을 로맨스라고 말하며 좋아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해 조금이나마 아는 이들이라면, 이것은 황제가 황태자를 무조건적으로 비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유추해 냈다.

권력에 더 예민한 이들이라면, 이것은 로에르 후작가를 둘러싼 황태자와 2황자의 싸움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모든 것은 마치 잘 짜인 각본과도 같았다.

발톱을 감추고 있었다는 것을 대놓고 드러내듯, 2황자는 화재로 큰 피해를 입은 서부 지역에 어마어마한 금액을 기부하며 순식간에 중소상인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것도 모자라, 수도에 있는 지식인들이 2황자를 지지했다. 그들은 대륙에 있는 국민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가장 강력한 집단이었고, 대륙 모두가 순식간에 2황자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가 등에 업은 귀족 세력은 아직 황태자와 비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를 찬양하는 목소리는 그만큼 거대했다.

계절이 채 넘어가기도 전에 아무 세력도 없던 2황자가 황태자보다 더 강력한 존재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에 귀족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차마 황태자를 지지할 수 없던 이들, 방관하던 이들, 황태자를 지지하려던 이들, 모두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불안한 봄의 끝, 여름의 초입에 1년에 한 번 열리는 사냥대회가 열렸다.

“번거롭네.”

거울 앞에 선 이오지프가 안경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는 이제껏 입어왔던 사냥 복장 중에서 가장 화려한 사냥 복장을 입고 있었다. 다만 안경은 어울리지 않았다.

“벗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는 게 좋겠지?”

윈터의 제안에 이오지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두었다. 이오지프가 안경을 바라보았다.

“이로써 괴짜 행세는 안녕이로군.”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도 그동안 껴왔던 걸 벗으니까 아무런 안전장치도, 숨을 곳도 없이 맨몸으로 나온 기분이야.”

“…….”

“그동안 아무도 내게 기대를 하지 않았으니 행동하는 데 편했던 게 사실이고.”

이오지프는 중얼거리며 낯선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항상 안경으로 가로막혔던 시야는 거슬리는 것 없이 깨끗했다. 준수한 얼굴은 화려한 사냥 복장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잘하셔야 합니다.”

“알아.”

문인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무인 계통인 귀족들은 이오지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약해 보였던 2황자가 황위 싸움에 등장한 것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황태자의 수족이 되어버린 2기사단도, 심지어 묵묵히 황제만 떠받들던 1기사단도.

그들은 검을 들지 못하는 황제는 황제로 모시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니 이번 사냥대회가 아주 중요한 거겠지.”

사냥대회는 귀족들의 활동을 통해 무력을 뽐내는 장이었다.

만약 이곳에서 이오지프가 무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인다면, 그들의 생각도 달라질 것이다.

이오지프는 별 걱정하진 않았다. 선대 하인트 공작 덕분에 그의 무예는 어느 정도 상당한 수준에 오를 수 있었다.

“전하께서 발톱뿐만이 아니라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지고 있다는 걸 그들도 알아야 할 차례입니다.”

“그런 시적인 표현을 쓰다니, 경도 내 곁에 오래 있었나 보군.”

이오지프의 말에 윈터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참, 하인트 공작께서 오늘 갑자기 참여하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합니다.”

“그 녀석이? 스트레스라도 풀 작정인가.”

제드는 수도의 행사에 잘 참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 이렇게 참여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무슨 일이 있어서일 것이다.

일전, 황궁에서 마주했던 제드의 표정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이 매서웠다.

그는 무엇에 기분이 나쁜 것인지,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오지프는 차마 루시펠라에 대해 말할 수가 없었다. 자칫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제드와 영원히 척을 질 것이 분명했다.

“아이딘 백작 영애도 참석한다고 했지?”

“네.”

“자세히 봐둬야겠군.”

루시펠라의 육신을 가진 에스텔, 그리고 제드. 이오지프는 에스텔이라는 인간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면밀히 관찰할 필요를 느꼈다.

이오지프는 현재 얼샤의 독립에 대해 그녀에게 말한 상황이다.

만약 윈터 경에게 들었던 대로 그녀의 애국심이 뛰어난다면 그는 분명 이오지프의 제안을 수락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제드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에스텔이 왜 이 제안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인지도 의아했다.

사실 이렇게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후환의 싹이 될 에스텔을 제거하는 것이 더욱 간단하며 옳은 일일지도 몰랐다.

“……나도 지나치게 인간적이군.”

이오지프가 중얼거렸다. 모든 것은 루시펠라의 행동에 달려 있었다.

“출발하지.”

이오지프가 문을 나가면서 말하자 윈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

“시원하네요.”

“원래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해.”

사냥대회는 수도의 성 바깥, 말라카라는 작은 산에서 열렸다.

각 가문의 문양을 새긴 화려한 마차가 모여들어 지정된 장소에 섰다.

남자들은 시종들과 사냥 준비에 열심이었고, 여인들은 천막 아래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편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클로렌스를 보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절망적인 표정이었던 그녀는 환한 표정을 지은 채 사람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아직 약혼 단계이지만, 클로렌스는 이미 황자비와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던 그때 아주 많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디 아파요?”

“아니.”

“루시, 다시 만나고 나서부터 자꾸 멍하게 있는 거 알아요?”

“미안해.”

클로렌스의 핀잔에 루시펠라가 순순히 사과했다. 클로렌스는 루시펠라의 표정을 보고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나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사냥이 시작인가 봐요.”

“그러게. 이번에 황제 폐하는 참여하지 않는 건가?”

“그런가 보네요. 매년 참여하셨는데, 이상하군요.”

황제는 따로 마련된 천막 아래 앉은 채 시종들의 부채질을 받고 있었다.

왜 그는 사냥에 나가지 않지? 건강이라도 안 좋나? 루시펠라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도 어서 가요.”

말라카 산으로 출발하기 전 귀족 여자들은 약혼자, 또는 남편에게 자신의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남자들은 답례로 자신의 브로치를 건네주곤 했다.

손수건은 ‘당신의 무사를 기원합니다’라는 의미였고, 브로치는 ‘그대에게 영광을 바치겠습니다’라는 의미였다.

또한 특별한 사이가 아니더라도 일방적으로 여자가 사모하는 남자에게 손수건을, 남자가 사모하는 여자에게 브로치를 주곤 했다.

산 입구에 마련되어 있는 울타리에 선 루시펠라는 생각에 잠겼다.

제드는 브로치를 준비했을까? 아니, 자신의 손수건을 받아들일까? 손수건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제드와 헤어졌던 게 마음에 걸렸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하나둘 다가오기 시작했다.

루시펠라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제드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정확히 루시펠라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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