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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73화 (73/173)

#73화 수수께끼

2017.11.09.

“죄송하지만 각하, 저는 제 방에 아무도 들이라고 한 적이 없는데요.”

칼리드를 보자마자 루시펠라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녀의 차가운 반응에 로이자의 얼굴이 굳었다. 뒤따라온 집사와 시녀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루시, 그렇게 말하면 실례잖니.”

그때, 루시펠라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는 아이딘 백작이 서 있었다.

“내가 네 방에 가도 된다고 허락했다.”

“……레이디의 방을요?”

루시펠라가 조용히 물었다. 여자의 방에 약혼자나 가족이 아닌 남자를 함부로 들이는 것은 금기시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지양되는 일이었다.

“공작 각하께서 네가 그때 음료를 잘못 마시고 돌아가고 나서도 걱정이 많으셨다고 하시는구나. 이렇게 신경 써주시는데, 공작 각하께 무슨 무례냐. 어서 사과드리려무나.”

루시펠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아이딘 백작의 표정이 단호한 것을 보니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백작, 제가 마음이 앞서 급작스럽게 방문한 것이니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칼리드가 호의적인 말투로 그를 만류했다.

“아닙니다. 이전에는 적어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저런 불손한 언사는 훈육을 시켜야 마땅한 일입니다.”

저놈에게 죽어도 고개 숙이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녀가 곤란해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새끼. 루시펠라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제대로 일어나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혔다.

“예상치 못한 방문에 당황하여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시길.”

“아닙니다. 저야말로 너무 무례했습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이전과 달라진 자신의 태도를 보며 조소했다.

예전 에스텔은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말하고,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를 바로 표현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편의를 위해서 고개를 숙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다.

“여기 영애를 위해 꽃을 가져왔습니다.”

루시펠라는 그 꽃을 당장에라도 짓밟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얌전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백작이 만족한 것을 본 루시펠라가 말했다.

“제가 정말 몸이 좋지 않아 각하를 오래 뵐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쉬어도 되겠습니까?”

꽃을 잡은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쯤 하고 꺼져.

루시펠라가 칼리드를 보며 눈으로 말하자, 칼리드가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얼굴을 보았으니 되었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영애.”

“…….”

온갖 핑계를 대며 그녀의 속을 긁어놓을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칼리드는 순순히 물러났다.

루시펠라는 그에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종종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뭐라고? 루시펠라가 고개를 번쩍 들자 칼리드가 가식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인 녀석이 저지른 실수 때문에 이렇게 몸이 편찮으신 게 아닙니까? 이런 성의만은 거절하지 말아주십시오.”

루시펠라가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으로 싫다고 말했다.

하지만 백작은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을 외면했다.

그녀와 칼리드의 관계를 떠나 백작 영애와 공작의 관계로 따지자면 칼리드는 선심을 쓴 것이었으며, 이것을 대놓고 거절하는 것은 확실히 이상하며, 무례한 짓이었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지만, 행여나 약혼자가 오해할까 봐 겁이 나네요.”

그에 칼리드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하인트 공작이 문제로 삼으면 제가 대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언제든지 방문하십시오.”

“아버지!”

루시펠라가 백작을 부르자 그는 엄한 표정을 지었다.

루시펠라는 백작이 자신의 딸이 무엇을 해도 용인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가 어린 루시펠라가 방만하게 굴도록 두었던 이유는 백작의 허용 범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로부터 고립된 루시펠라가 무례를 저지를 이유는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진짜 루시펠라의 협소한 인간관계와는 달리 그녀는 제드라는 약혼자가 있었고, 2황자와 자주 이야기를 나눴으며, 같은 계파인 칼리드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은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될 사람들이 아니었단 말이었다.

칼리드는 루시펠라를 보며 미소 지었다. 백작의 허락에 루시펠라는 더 저항하기를 포기했다.

그리하여 칼리드는 백작저에 자주 출입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꽃을 가져왔어.”

칼리드가 방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의도했는지 마침 하녀들이 없을 때 들어온 그가 꽃을 테이블 위에 두며 말했다.

꽃은 화려한 분홍색 장미였으며 새하얀 안개꽃이 섞여 있었다.

“내가 네놈한테 꽃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루시펠라가 바로 꽃다발을 들어 바닥에 던지며 싸늘하게 말했다.

꽃이 흩어졌지만 그것을 선물한 칼리드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마치 이럴 줄 알고 있었다는 태도였다.

“너무하군, 에스텔. 예쁜 꽃으로만 골라왔는데.”

“그 입 닥쳐.”

루시펠라가 이를 악물며 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잔뜩 날이 선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며 칼리드가 미소 지었다.

“몸은 아직도 안 나았나? 강한 약을 쓴 것도 아닌데, 그 육체는 상당히 약한 모양인가 보군. 역시 꽃보다는 맛있는 음식이 좋았겠어.”

“…….”

“그러고 보면 네가 뭘 좋아했지? 3년 전이라 가물가물한데.”

“…….”

“그렇지. 너는 먹을 거면 아무거나 잘 먹었어. 기억나? 그때 마물 시체도 먹어야 하는지 고민했잖아.”

마치 평범한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칼리드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그에 소름이 돋았다.

“나가.”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지만 그 말은 칼리드에게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 사과, 사과도 좋아했었지. 지금이 사과가 열리는 계절은 아니지만…….”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루시펠라가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칼리드는 그녀의 표정을 훑어보더니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하잖아, 에스텔? 널 보고 싶으니까.”

“대체 왜? 넌 날 죽였잖아!”

“에스텔, 너를 죽인 거랑 내가 네게 가진 애정은 별개야.”

“야, 이 미친 새끼야!”

말이 통하지 않았다.

루시펠라는 결국 화를 내며 손에 잡히는 것을 아무거나 던졌다. 그러나 칼리드는 아주 익숙하게 그녀가 던진 화병을 잡았다.

“에스텔, 조금 더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루시펠라 아이딘과 칼리드 루이르크는 그간 아무런 대화가 없었는데 자꾸 이러면 의심받잖아. 넌 항상 나를 걱정시켜.”

다정하게 어르는 말, 그 이전과 같은 칼리드의 표정. 그녀는 자신이 이상한 것인지, 칼리드가 완전히 미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칼리드를 보고 싶지 않았고,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심지어 그녀는 칼리드가 자신에게 입을 맞췄다는 것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런데 칼리드는 그런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가 거의 사정하듯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아무 생각도 없어. 에스텔, 너는 언제나처럼 날 믿어주면 되고, 나는 네 곁에 있으면 돼.”

“…….”

“그냥 그렇게 살아, 에스텔. 레이디로, 아무런 위험도 없이 그냥 살아. 나를 미워해도 좋고, 날 죽이려고 해도 좋아. 그러니까 날 밀어내지만 마.”

“개소리하지 마. 내가 밀어내도 밀려날 생각도 없으면서.”

그 말에 칼리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에스텔.”

루시펠라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녀석이 대체 왜 이러지? 그가 자신을 죽였다는 자각은 있는 걸까? 만약 있다면 대체 왜 스스럼없이 마치 ‘화가 난’ 그녀를 대하는 것처럼 자신을 대하는 것일까.

“언제나 곁에 있을게. 도움을 청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청해도 좋아. 나는 평소와 같으니까.”

부드러운 음성, 칼리드는 그녀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 다정한 옛날처럼 돌아갈 수 있다고 유혹하는 것 같았다. 루시펠라는 그것에 괴로워져 소리쳤다.

“나가, 나가라고!”

“네가 원한다면.”

칼리드는 주저 없이 방 밖으로 나섰다. 그녀는 발치에 떨어진 꽃을 보며 괴로운 신음 소리를 흘렸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그들 사이에 왜 이런 일이 벌어졌고, 자신은 왜 저 녀석을 증오해야 하는 것일까.

그녀는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 후로도 칼리드는 매일같이 그녀를 방문했고,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꽃을 두고 갔다. 루시펠라는 그와의 만남을 피했으며, 그 역시 억지로 그녀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루시펠라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닷새 후였다.

그날, 그녀는 칼리드가 올 시간에 맞춰 몸단장을 했다.

“아가씨, 공작 각하께 아가씨가 아프시다고 제가 말씀드릴게요.”

로이자의 천진한 말에 루시펠라가 피식 웃었다.

“안 그래도 돼. 그냥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루시펠라는 덤덤하게 말했다.

“왜요? 아가씨는 공작 각하를 안 좋아하시잖아요.”

“로이자, 너는 좋아하는 모양이야?”

루시펠라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으니 로이자가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잘생겨서 좋아요.”

“그래, 잘생겼지. 그래서 내 약혼자가 오해라도 할까 봐 겁이 나.”

“역시 그러셨군요!”

로이자가 납득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확실히 말해두려고.”

“아가씨가 옳아요.”

로이자가 활기찬 목소리로 말하자, 미소가 지어졌다.

혼란스러움과 분노에 매몰되는 것도 계속되면 지겨워지는 법이다. 그녀는 혼자서 분노하는 것보다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공작 각하께서 오셨어요.”

하녀의 말에 루시펠라는 로비로 나가 그를 맞았다.

그는 루시펠라가 처음으로 자신을 맞이하자 의아한 표정을 하더니 이내 기쁜 표정을 지었다.

“영애, 설마 영애께서 절 마중 나와 주신 겁니까?”

“네.”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리드가 나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마음을 가라앉혔기에 그녀는 이 행동에 눈썹만 살짝 찌푸릴 뿐이었다.

“각하, 잠시 이야기 좀 나눌까요?”

루시펠라가 그를 이끌었다. 칼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준비된 응접실로 그를 데려갔다.

사용인을 모두 물리고 그녀가 방문을 닫았다. 칼리드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걸어오며 말했다.

“누가 엿듣는 기척은 없지?”

“그래.”

칼리드의 대답에 루시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팔짱을 낀 채 칼리드가 아닌 방 안에 있는 사물들을 차례대로 보았다.

말을 꺼내기 싫을 때 에스텔의 버릇이었다. 칼리드는 그것을 알고 있기에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내게 말을 거는 건 처음이네, 에스텔.”

“너랑 대화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단호하며 차가웠다.

칼리드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입을 열었다.

“왜 날 찾아오는 건데?”

“저번에도 말했잖아, 그냥 네 얼굴을 보고 싶어서, 네 곁에 있고 싶어서라고.”

“내가 그걸 싫어한다고 하는데도?”

“내가 너를 보고 싶었으니까. 요새는 얼굴을 안 보여줘서 슬프지만 말이야.”

루시펠라가 그에 실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깨물다가 주먹을 꼭 쥐며 물었다.

목소리가 저절로 떨려왔다.

“그래, 한번 물어보자, 칼리드.”

칼리드가 물어보라는 듯 따스한 표정으로 루시펠라를 보았다. 그녀는 그 표정이 역겨워 보고 있기 괴로웠다.

“날 좋아했어?”

“응.”

칼리드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건, 나를 이성으로서 본 거란 말이지?”

“그래. 널 여자로 좋아했어.”

“언제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그 말을 들은 루시펠라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항상 에스텔 옆에 서 있던 칼리드.

그런 그를 우정으로, 가족과 같은 애정으로 곁에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성적 끌림에 대해 고민해 보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지만, 이 녀석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칼리드를 생각하는 것처럼 칼리드 역시 자신을 똑같이 대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같이 검을 쓸 수 있기에, 동료로, 동등하게 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관계가 칼리드가 자신을 좋아했기 때문이라면, 그 관계는 과연 무엇이었던 걸까.

같은 곳에 서서 이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왜 죽였던 거지?”

그 말에 칼리드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심장은 두근거렸다.

“사랑했다면서. 그런데 왜 날 죽였지? 너라면 내 마지막을 지켜줬어야 하지 않았나?”

루시펠라의 말에 칼리드의 얼굴이 굳더니 점점 일그러졌다. 그 표정을 본 루시펠라가 놀랄 때였다.

“너는 그렇게 항상 이기적이었지! 네 옆에 있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은 채!”

“…….”

루시펠라가 눈을 크게 떴다. 칼리드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에스텔, 너는 항상 내게 잔인했다. 넌 내게 너무도, 가혹했어!”

“그래서 나를 죽였단 거야?”

루시펠라가 참지 못하고 소리치자 칼리드는 입을 다물었다. 또다시 이들 사이에 침묵이 자리했다. 그녀는 애써 진정하며 질문을 바꿨다.

“그렇다면 넌 왜 나라를 배신했지? 너 역시 그간 기사로서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켜왔잖아.”

“나라를 지켜? 얼샤를 말하는 건가?”

칼리드가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말했다.

“처음부터 그 얼샤라는 나라는 내게 쓰레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어.”

“뭐?”

“에스텔, 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어떤 것도 알려 하지 않았지. 너는 내가 네게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도 몰랐고, 어떤 마음으로 네 곁에 있었는지도 알지 않았지. 네게 중요한 것은 검과 나라를 지키는 기사로서의 의무가 다였어.”

“그건…….”

“에스텔, 왜 한낱 평민 여자였던 네가 기사가 된 것일까? 왜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비아누스 선왕은 너를 그 자리에 앉혔을까.”

루시펠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저, 국왕이 좋은 사람이니까. 그녀의 실력이 그만큼 뛰어났으니까. 그렇게만 생각했다.

“너는 순수했고, 그 안에서 단연 빛나던 사람이었어. 기사단원들은 그래서 너를 따랐지. 하지만 네게 그 기회를 준 건, 단지 네가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야.”

“…….”

“바로, 그 나라가 썩었기 때문이지.”

칼리드가 루시펠라와 거리를 좁혀왔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칼리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힘없이 물었다.

“그게, 네가 나라를 배신한 이유란 말이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

그 미묘한 미소에 루시펠라는 답답해졌다.

“수수께끼 놀이를 하자는 건가?”

그녀는 화가 났다. 기껏 저놈의 일을 들으려고 자리까지 마련했는데, 그는 알 듯 말 듯 한 말만을 들려주며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재밌는 생각이 들었어, 에스텔.”

그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나에 대해 직접 알아보는 거야.”

“내가 왜?”

“그야 궁금해하니까. 나는 네게 알려주지 않을 거야. 내가 너에 대해 생각했듯, 너도 나에 대해 생각했으면 좋겠어.”

그는 루시펠라의 표정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나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 나를 미워해도 좋아. 복수심을 불태워도 좋아. 그게 날 생각해 준 거라면 더없이 행복할 테니까.”

미친놈. 이게 자신이 알던 이가 맞나? 그녀는 등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유를 끝까지 말해주지 않겠다고? 최소한의 이해의 기회 역시 포기한 채 미움을 받겠다고?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너 같은 것 따윈 잊어버리고 내 삶을 사는 게 더 이득일 텐데.”

루시펠라의 차가운 말에 칼리드가 잔웃음을 터뜨렸다.

“에스텔, 내가 아는 넌 절대 그러지 못할 거야.”

확신하지 말라고 루시펠라가 말하려 할 때 칼리드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뒤처리로 시토라 기사단의 절반이 죽었어. 도망간 녀석들을 제외하고 나는 그 녀석들을 모두 넘겨주었지. 이들은 내가 배신한 척했던 거라고 생각했어, 나중에 진실을 알았을 때 그 녀석들의 표정을 네가 봤어야 했는데.”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 먹을 걸 좋아하는 바트도, 발이 날래던 체이시도, 가장 나이가 어렸던 꼬마 리델도 모두 다 내가 넘겼어.”

그녀의 머릿속에 자신을 따르던 시토라 기사단의 단원들이 떠올랐다. 그 해맑은 얼굴들이, 그들의 굳건한 신뢰가. 왜 그 녀석들의 얼굴을 잊어버렸던 걸까.

“너, 이 새끼가!”

“그들을 죽인 자들이 누구인지 알아? 하인트 공작가의 기사들이었어! 제더카이어 하인트는 주저 없이 그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어. 공작은 그 녀석들의 목을 깔끔하게 잘랐지.”

제드의 이름이 나오자 루시펠라가 입을 다물었다. 칼리드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놈들은 죽어가면서도 의연하더군. 그들은 최후까지 싸우며 소리쳤어. 우리의 별, 우리의 이슈타르, 에스텔을 위하여! 정말 걸작이지 않아?”

미움을 흐트러뜨리고 이해를 하려 했지만, 그 마음은 이내 흩어졌다. 이 순간 루시펠라는 눈앞의 이 녀석을 증오했다.

배신, 배신이란 그런 것인데 대체 왜 그걸 몰랐던 걸까. 왜 이해를 하려고 그에게 물어봤던 거지? 그녀는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자신마저 증오스러웠다.

“너, 대체 왜! 대체 왜 그랬냐고! 그 녀석들은 너도 잘 따랐는데! 대체 왜!”

“에스텔, 너도 죽인 나야. 그 녀석들이 내게 얼마나 큰 의미가 될 것 같아?”

칼리드가 속삭였다. 그녀가 이를 갈았다. 그녀는 그의 뺨이라도 때리고 싶어 손을 휘둘렀으나, 손목은 허망하게 칼리드의 손에 잡혔다.

“복수해도 좋아.”

그녀가 손을 잡아 빼려고 했지만, 그는 손을 꽉 쥔 채 자신의 얼굴에 들어 올렸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대로 이놈의 목을 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다시 에스텔이 되어 저놈을 죽이고 싶었다.

“이 레이디의 작은 손으로 어떤 복수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거 놔!”

그러나 그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도 그는 루시펠라의 증오에 아주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익숙한 목소리에 루시펠라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얼굴을 찌푸린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도 오랜만에 보는 이의 모습이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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