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일그러진 환희와 키스
2017.11.02.
“아가씨!”
로이자가 걱정스럽게 그녀를 부르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녀는 손을 내 저은 채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녀는 입으로 손을 틀어막았지만 소용없었다.
“우웩!”
그녀는 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냈다.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씹어 삼킨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우우욱!
이제는 신물밖에 나오지 않음에도 그녀는 계속 구역질을 해댔다.
몸속에 있는 것을 모두 게워낸 후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기침하기 시작했다.
얼굴은 압력 때문에 붉게 물들었고 몸은 바르르 떨렸다. 몸에 힘이 없었기에 일어서지 못하고 그녀는 주저앉아 있었다.
“주인님께서 걱정되셨는지 아가씨가 주무실 때 보고 가셨어요.”
로이자가 그녀의 어깨를 부축하며 말했다.
“그렇구나.”
루시펠라는 심드렁하게 말하며 겨우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그가 걱정한다고 해봤자 별로 와 닿지 않았다.
그녀는 초점 없는 멍한 눈으로 앞을 보고 있었다.
입에서 여전히 쓴맛이 났으나 개의치 않았다. 로이자가 뭐라고 걱정 어린 말을 건네고 있었으나 루시펠라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로이자의 그 땍땍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로이자.”
“네?”
“좀 나가 줘.”
“…….”
상처받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로이자가 서운한 표정으로 방 밖으로 나갔다.
방에 혼자 남게 된 그녀는 몸을 일으켜 결국 침대 위로 엎어지듯 쓰러졌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손등으로 입술을 계속해서 닦고 또 닦았다. 입술이 퉁퉁 부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또다시 속이 좋아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 그녀의 일상은 이렇게 혼자 생각에 잠겼다가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토하는 것의 반복이었다.
그가 먹인 독약의 후유증일까, 아니면 몸이 거부하는 것일까.
“어쩌면 둘 다인지도 모르지.”
구토로 쉬어버린 목소리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그 미친 새끼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떠올리며, 그녀는 혼란스러움과 증오에 이를 갈았다.
“보고 싶었어. 너무나도 보고 싶었어, 에스텔.”
그 역겨운 인사에 그녀는 정신을 차리곤 에스텔이 발버둥 쳤다.
칼리드가 그녀를 뒤로 돌려세웠다. 여전히 허리는 잡혀 그들의 몸은 밀착해 있었다.
그녀의 두 눈과 칼리드의 자색이 마주치자 칼리드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것은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각하, 이거 놓으시…….”
“네가 네 검을 망설이지 않고 잡았다는 걸 잊지 마.”
“그냥 우연히 눈에 띄는 검을 잡았을 뿐이에요! 어서 이거 좀 놔주시죠?”
“에스텔.”
칼리드가 소름 끼치도록 달콤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이 역겨우면서도 루시펠라는 그 다정한 음성에 울컥했다. 칼리드의 자색 눈동자는 애절했다.
“내가 정말 너를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어?”
그의 손이 루시펠라의 턱을 쓸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알아차린 것이다. 칼리드는 자신이 에스텔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시치미를 뗄까?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그러다가 그녀는 그의 두 눈을 보며 마음을 바꿨다. 그를 속여 넘기기는 불가능했다. 이런 시답잖은 함정을 파놓은 것은 그녀가 에스텔이라고 확신했기에 가능한 거니까.
“처음부터 알아차렸던 거야?”
그 말에 칼리드의 두 눈에 환희가 깃들었다. 그는 오랜 벗을 만난 듯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하지.”
“정말로?”
“널 속일 수는 없네. 처음에는 널 못 알아봤어. 하지만 계속 보니 너라는 걸 바로 알았지.”
칼리드는 손을 들어 루시펠라의 두 눈 바로 아래를 엄지로 쓸며 속삭였다.
“네 두 눈 안에 이렇게 네가 살아 있는데 어떻게 너를 못 알아볼까.”
두 눈에 자신이 살아 있다고? 외양이 다른데 어떻게 그녀를 발견했단 말인가. 그러나 한편으로 칼리드가 그녀를 알아봤다면, 이놈의 묘한 태도가 이해가 갔다.
“그럼 내가 이곳에서 술을 마신 것도 네가 꾸민 짓이었던 거로군.”
그에 칼리드가 웃으며 말했다.
“하인들에겐 항상 풀어졌잖아. 에스텔, 네가 마신 술은 아주 귀한 독이 들어 있어. 심장이 빨리 뛰면 뛸수록 더 취하게 만들거든.”
“……너, 그럼 그걸 경매로 보여주었던 것도!”
“본래 네 검을 네게 보여주고 싶은데 어쩔 수 없었어. 감히 네 검에 욕심을 내는 돼지새끼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거든. 그래도 아버지의 검으로도 너를 끌어내기에는 충분하더군. 자선 경매는 참 좋은 거라고 생각해.”
다정한 말투와는 달리 그가 담는 말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사실은 아주 가끔 헷갈리고는 했어. 에스텔, 너는 정말로 레이디 같았던 적이 많으니까 말이야. 너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을 하곤 했지.”
루시펠라는 레이디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칼리드 앞에서도 최대한 가면을 쓸 수 있었다.
“하인트 공작과 약혼했다며 손을 잡고, 붙어 다니는 것만 해도 그래. 에스텔, 너라면 제더카이어 하인트를 만나자마자 목을 따버렸을 테니까. 이상하잖아?”
“…….”
“너는 지나치게 레이디스러워서 때때로 나를 혼란스럽게 했지. 나는 확신이 필요했어. 그래서 여러 함정을 팠어.”
“너…….”
“트라케너를 타는 네 모습 참 아름다웠어. 여전하더구나.”
칼리드가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에 루시펠라는 소름이 끼쳤다.
“그것도 네 짓이었구나.”
클로렌스가 함부로 말을 옮길 리가 없었다. 에스텔이 평소 트라케너를 타고 싶어 한다는 것은 칼리드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에스텔과 루시펠라가 동일인이라고 생각했다면, 칼리드는 루시펠라가 트라케너를 타고 싶어 한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가정이 맞는지 시험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여러 번 그녀를 시험에 처하게 했다.
트라케너를 자신만만하게 모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칼리드의 가정은 진실로 굳어져 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무도회도?”
“바로 그렇지. 널 위해 마련했어.”
이곳에 온 것도, 하인의 실수로 술을 마신 것도, 술을 마셔서 휴게실에 간 것도, 이 휴게실에서 그녀가 우연히 에스텔의 검을 발견한 것도 모두 계획되어 있었다.
즉, 이 무도회는 루시펠라에게서 에스텔을 끌어내기 위한 칼리드의 무대였던 것이다.
이 새끼는 얼마나 많은 덫을 쳐둔 것일까.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언제나 꼼꼼하며 철두철미한 성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가끔 그녀에게 말하지 못하는 계략을 짠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목표로 삼을 때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줄은 몰랐다.
어떻게 저놈이 자신을 알아차렸다는 간단한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는가. 허리를 답답할 정도로 끌어안은 칼리드를 바라보며 루시펠라는 눈을 감았다.
“그래, 칼리드, 네 눈은 속일 수 없었구나.”
그녀는 체념한 듯 몸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칼리드가 그에 단단히 잡은 그녀의 허리를 풀어줄 때였다. 루시펠라는 자신의 치맛자락 아래, 허벅지에 두었던 단검을 꺼내 엄청난 속도로 그의 목에 겨눴다.
칼리드가 재빨리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막았다. 칼리드 역시 이 기습에 당황한 듯했다.
“그렇다면 내가 네 목을 따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겠지?”
루시펠라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칼리드는 반사적으로 잡은 그녀의 손목에 시퍼런 빛을 내는 단도가 들려 있는 것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그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네놈 집에 내가 이런 준비 없이 오지는 않았을 거라는 건 알았어야지.”
그러자 칼리드의 입가에 서늘한 곡선이 서렸다. 그는 루시펠라의 표정을 보더니 이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에스텔! 너는 이런 애였지. 정말 네가 살아 있다는 게 실감이 나는구나.”
루시펠라는 칼리드의 웃음을 보며 소름이 주욱 끼쳤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각이 없는 것인가?
칼리드는 루시펠라의 손목을 잡은 채 그녀와 몸을 밀착했다.
루시펠라가 그의 목을 찌르려 팔을 움직였지만, 칼리드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
그녀의 손목은 너무나 쉽게 칼리드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그러나 칼리드는 더욱더 얼굴을 그녀의 얼굴 근처에 가져다 대었다.
그에 단검의 날카로운 날이 그의 목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흘렀다.
대체 이 녀석이 왜 이러는 걸까? 그녀가 알던 칼리드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칼리드의 태도가 새삼 낯설었다. 그는 마치 미친 것 같았다.
그때, 칼리드의 얼굴이 훅 다가오더니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파고드는 물컹한 감촉을 느꼈다.
그녀는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칼리드가 자신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을 흔들어 떨쳐 내려고 했지만 칼리드가 그녀의 턱에 손을 대 고정해서 움직일 수 없었다.
치욕스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녀는 단검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왜 이 행위가 벌어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건 사랑하는 이들끼리의 애정 표현이 아니던가? 한데 그것을 왜 칼리드가 자신에게 하고 있는 것인가?
그의 입술은 거칠게 그녀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입을 벌리지 않으려는 루시펠라와 그녀의 입술을 비집어 열려는 아슬아슬한 줄다리기가 계속되었다.
억지로 원하지 않는 행위를 당한다는 굴욕감.
거부할 수 없는 이 엄청난 악력 차이에 그녀는 절망감과 심지어 두려움마저 느꼈다.
그녀가 입을 움직여 그의 입술을 콱 깨물었다. 그러자 칼리드의 입술에 붉은 피가 터지며 그가 고개를 떼어냈다.
상당히 세게 깨물었음에도 칼리드는 별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기괴한 모습에 루시펠라는 겁에 질렸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에 맺힌 피를 닦아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에스텔. 정말 레이디가 되어버렸구나. 별로 안 아픈데.”
“닥쳐!”
그녀가 단검을 쥔 팔에 힘을 주었지만, 그 손은 여전히 그에게 잡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칼리드는 여유로워 보였다.
그녀는 악을 쓰고 싶었다. 죽일 수 있다. 바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죽일 수 있는 무기도 있있지만 실패하며 이렇게 농락당했다.
당장 눈앞에 있는 남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정말 약해졌어, 에스텔.”
칼리드가 나머지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치자 단검이 떨어졌다.
단검이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가 났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에 칼리드에게 손목만 붙잡혀 있었다.
“이 배신자 새끼!”
“배신자라고? 에스텔, 너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루시펠라의 욕설은 칼리드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칼리드가 부드럽게 말했다.
“얼샤를 배신한 건 너도 똑같아. 얀스가르의 귀족으로 행세하며 그들과 어울리며 그들 사회에서 생활해 왔잖아. 그 제더카이어 하인트의 약혼녀로서 말이야.”
“…….”
“네가 얼샤의 기사라면 황제를 대면했을 때 죽였어야지. 아니면 적어도 네가 그렇게 싫어하던 하인트 공작의 목 정도는 따버렸어야지. 아렌트 전하의 원수 정도는 갚아야 하지 않겠어? 전하의 목을 자른 건 하인트 공작이야.”
“이 새끼가!”
“아니면, 제더카이어 하인트는 결혼하기 좋은 남자인 모양이야. 너도 어쩔 수 없는 여자인지라 그놈에게 끌렸던 거지?”
이번에 그녀의 손이 매섭게 칼리드의 뺨을 때렸다. 칼리드는 피하지 않고 가만히 맞아주었다.
“너 역시 이렇게 살아와 놓고 왜 나를 배신자라고 매도하는 거지? 너 역시 배신자야, 에스텔.”
그 말을 들은 루시펠라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칼리드가 힘주어 잡은 손목에 힘을 뺄 때였다.
루시펠라가 그의 다리를 걷어차, 그의 품 안에 벗어나 재빨리 뛰어갔다.
“언제나 말재간이 뛰어나구나. 날 안다면 내가 네 시답잖은 말장난에 놀아나진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야지.”
“에스텔.”
“모르는가 본데, 내가 말하는 배신은 얼샤에 대한 배신이 아니야. 나에 대한 배신을 말하는 거지. 얀스가르 인들은 적어도 날 팔아넘기지는 않았거든.”
“……에스텔, 언제나 너는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데 뛰어나구나.”
칼리드의 말에 루시펠라가 차갑게 미소 지었다.
“얼샤를 위해서 마냥 날뛰다 뒈지기엔 내 목숨이 너무 소중해졌거든. 에스텔은 검을 잡지 말았어야 했다면서? 그것도 나를 끌어내기 위한 네 계략인가?”
“맞아.”
“그렇지만 넌 그때 진심이었던 거지.”
칼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 더욱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그녀가 뒷걸음질 치고, 드디어 방문을 열었다. 시야에 복도가 보이자 안심이 되었다. 드디어 밀폐된 공간에서 저 위험한 놈과 단둘이 있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에스텔!”
“네가 내게 어떤 짓을 했는지 알아?”
방에서 나가기 전 그녀는 아주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듯 그의 타액이 묻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았다. 그 경멸의 눈빛에 칼리드가 움찔했다.
“널 증오해, 칼리드.”
그 말을 끝으로 루시펠라는 뒤를 돌아본 채 연회장으로 향했다. 차라리,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저 녀석과 잠시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은 방금 일어난 혼란스러운 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칼리드가 바로 그녀를 뒤쫓아와 그녀를 붙잡았다.
몇 마디의 실랑이 후 루시펠라는 그가 완전히 미쳤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날 죽여, 에스텔.”
“……!”
“네 증오를 받는 것도 내겐 축복이니 말이야.”
“죽인다면 죽어줄 거야?”
“아니, 발버둥 칠 거야. 그래야 살아 있는 널 오래 볼 수 있으니까.”
그때, 칼리드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차마 이미 그렇게 하려 하고 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만약 그 말을 하면 저 새끼의 얼굴이 승리감으로 물든 것을 보게 될까 봐.
그리고 지금 그녀는 며칠 전 일어났던 그 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를 자극했다.
칼리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궁극적으로 얀스가르인들과 함께하며, 그녀는 얼샤 독립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또렷했던 에스텔로서의 자의식이 흐려졌다.
그녀 역시 얀스가르인이 되어가는 것일까.
칼리드가 그것을 지적하자 자신 안의 모순이 극명하게 보였다. 그녀는 머리를 휘휘 저었다.
생각해 봤자 소용없는 걸 붙들어서 무엇 하겠는가. 그는 칼리드를 떠올렸다.
그는 마치 에스텔을 죽인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루시펠라는 듣고 싶지 않았다.
독을 바른 단검에 찔려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왜’인지 듣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듣고 싶지 않았다. 왠지 저놈의 이유를 듣는 순간, 자신이 당했던 부당한 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게 될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에스텔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환하게 변했던 그의 얼굴은 분명 그 옛날의 칼리드와 같았으니까.
그녀는 손을 들어 입술을 계속해서 닦았다. 아직도 그 역겨운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흔든 것도 모자라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에스텔에게 있어 칼리드는 친구이자 가족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칼리드는 그녀의 형제였다.
그런 그놈이 정말로 그런 의미로 자신을 바라봐 왔던 걸까? 그렇다면 왜 그녀를 죽인 것일까.
알 수 없었다.
그저 남아 있는 것은 불쾌감밖에 없었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끙끙거리며 앓아누웠다.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칼리드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복수를 도와주겠다는 이오지프도, 친한 친구였던 클로렌스도,
그리고 자신의 약혼자인 제드조차도.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