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68화 (68/173)

#68화 포획

2017.10.23.

“그게 그 여기사의 검이라고?”

“야나스산 강철을 사용했대요, 세상에나.”

“검은 좋은 걸 쓴 모양이네.”

루시펠라는 얼굴을 찡그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야만 했다.

어떻게 매번 이렇게 거슬리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건지, 그리고 왜 자신은 그것을 알면서도 여기 있는 것인지 회의감이 들 때 칼리드가 말했다.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건 경매에 내놓을 물품이라고 했다. 저건 자신의 검이 아닌데? 사람들이 저 검을 에스텔의 검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경매를 진행하겠다는 건가.

야나스산 강철이라는 것 이외에는 에스텔의 검이 저 검이라는 증거가 없었다. 게다가 그 강철은 육안으로 절대 구분이 불가능했다.

그녀의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왜, 지금 이딴 짓을 벌이는 거지? 자신의 이름을 팔아서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건데? 왜 죽은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입에 올려 또 욕되게 하는 건가? 칼리드, 너는 왜 내가 죽어도 가만두지 않는 거지?

술기운이 올라오며 이성이 끊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려 제드를 찾았다. 꼭 이럴 때면 제드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제드는 자신이 현재 에스텔이 아니라 루시펠라임을 알려주는 이였으며, 언제나 흔들리던 그녀를 잡아주었다. 그러나 제드는 지금 이곳에 없었다.

그녀가 곤란할 때, 그는 이곳에 나타나지 않는다.

루시펠라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그 녀석을 의지하게 된 거지.

적국의 기사였던 그 녀석의 연락을 기다리고, 그 녀석을 걱정하고. 대체 왜?

루시펠라는 종잡을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의 연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해졌다.

그때 칼리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검은 가브라인 공작가의 가보입니다. 제 아버지가 물려주신 검이지요.”

루시펠라는 그에 안심했다. 적어도 그 검을 속여서 팔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그럼 에스텔 슈페르트의 검이 아닌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건 폐하께서 제게 하사하셔서 저로서도 내놓기 힘든 물건인지라……. 이 검도 꽤나 가치 있답니다.”

“그 검을 보여주세요!”

사람들이 칼리드에게 요청했으나 칼리드는 의미심장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보여주지 마, 보여주지 마.

칼리드가 자신의 검을 가지고 있는 것도 불쾌하지만, 그것을 구경거리로 삼는 것은 더 불쾌했다.

아까도 저 검이 그녀의 검이라고 착각했던 이들이 그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며, 드는 불쾌함을 겨우 억눌렀다.

“영애, 왜 그러나요?”

레인 남작 영애가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루시펠라는 조용히 심호흡했다. 다시 표가 나지 않게 가면을 쓰자. 다른 레이디들처럼.

루시펠라는 행여 자신이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할까 봐 조용히 사람들 뒤로 물러났다.

“그 검은 다음에 보여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보여 드릴 준비를 해두지 않아서요.”

그에 사람들은 아쉽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다가 칼리드가 내놓은 매물에 관심이 생겼는지 그 검을 이리저리 관찰하기 시작했다.

“에스텔 슈페르트가 썼던 검이라는 게 중요하다면, 이것도 가끔 그녀가 사용하기도 했답니다.”

“…….”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아주 가끔 그녀가 검이 없을 때 칼리드가 검을 빌려주고는 했으니까.

검사가 자신의 검을 빌려준다는 것은 신뢰의 표시였다.

한데 그 신뢰의 의미를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해 들먹여? 개새끼! 미친 새끼.

루시펠라는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저런 걸 썼다니, 기사는 진짜 기사였네요. 신기해라.”

“무거워 보이는데 말이죠.”

“검을 휘두르다가 넘어지지 않으면 다행이게요?”

그에 사람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루시펠라는 그것을 보며 칼리드에게 이는 살의를 애써 가라앉혔다.

칼리드는 에스텔에 가해지는 어떤 모욕에도 침묵하고 있었다.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멎었다.

“제 검이 뜻 있는 분에게 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천천히 손을 들며 가격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금액이 사람들 입에서 나왔다. 루시펠라는 칼리드의 검을 바라보았다.

‘뜻 있는 분’에게라고? 저 검을 가질 가장 ‘뜻 있는 인간’은 바로 칼리드였다.

에스텔에 대해 차치하고서라도 자신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검을 자선 파티 때문에 팔아치우겠다는 건가.

비록 가브라인 공작이 살갑지 않은, 검에 미친 사람이었지만 저 검은 그의 아버지의 유품이자 그와 그의 아버지가 속했던 가문의 마지막 가보이기도 했다.

그는 얼샤에 대한 미련을 그렇게 끊어냈던 걸까. 새삼 실망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더욱더 실망하게 되었다.

어렸을 적, 에스텔은 병에 걸린 노인을 보살펴 준 적이 있었다. 노인은 젊었을 적 다른 귀족가의 기사로 있었으나, 나이가 들어 은퇴하면서 몰락해 버린 기사였다.

덕분에 에스텔은 그에게서 검술을 배웠다. 뒷골목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검술은 너무나 유용했다. 노인이 죽어서 남긴 낡은 검은 에스텔에게 분명 소중한 것이었다.

혈육으로 이어지지 않았음에도 에스텔에게 그 검은 소중했다. 그 검이 부러지기 전까지도, 그녀는 그 검을 애용하고는 했다.

칼리드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에스텔을 이해해 주었던 것일까?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버지의 검을 적국의 귀족들에게 팔아치우는 이가, 그녀를 진정 이해해 주었던 것일까?

경매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얼샤의 검으로 유명했던 가문이 남긴 가보다.

가격을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루시펠라는 계속 뒤로 빠졌다.

경매를 진행하는 시종이 10만 골드라고 소리치기 시작하자, 가격을 부르는 소리는 점점 더 뜸해졌다. 저 무리에 끼고 싶지 않았다.

그때였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영애?”

칼리드가 다가왔다. 루시펠라는 주먹을 꾹 쥐며 칼리드를 바라보았다.

“아니요, 몸이 좋지 않아서요.”

“그러고 보니 아까 얼굴이 빨갛더군요.”

역시나, 아까 눈이 마주쳤을 때 그것을 본 모양이었다.

“별문제 없어.”

“영애?”

“제게 신경 쓰실 시간이 있으면 경매에 신경을 쓰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왔다.

칼리드는 그것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이 이상 말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사람들이 힐끔힐끔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딘 영애가 술을 음료수로 착각해서 마셨다나 봐요.”

보다 못한 레인 영애가 대신 말해주었다. 그에 칼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휴게실에서 잠시 쉬는 게 좋겠군요. 루벤.”

칼리드가 부드럽게 말하며 하인을 불렀다. 아까 술을 준 어리숙한 소년이 다가왔다.

“레이디께 쉴 곳을 안내해 주렴.”

그에 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펠라 역시도 그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 녀석의 얼굴을 보다가는 또 폭주해 버릴지도 모르니까.

집에 돌아가는 게 좋을까 생각했지만 돌아가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으며, 겨우 이 집에 왔는데 마냥 그 기회를 날리기는 아깝다고 생각했다. 혹시 모르니 하다못해 집 구조라도 알아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100만 골드에 낙찰되었습니다!”

칼리드의 시선이 사회자에게로 향한 순간, 루시펠라는 인사 없이 발걸음을 떼었다.

그에 하인이 루시펠라를 졸졸 따라와 말을 건넸다.

“아가씨, 휴게실을 가실 거면 이쪽으로 오세요.”

루시펠라는 하인을 따라 어둑어둑한 복도를 걸었다. 루시펠라가 술에 약한가, 아니면 분노한 탓인가.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괜찮으세요?”

루시펠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어질어질했기에 루시펠라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휴게실은 아직 멀었어?”

“아, 금방 도착할 거예요.”

술에 취한 탓인가. 괜히 휴게실까지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잠시 후 루시펠라는 안내된 휴게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쩐지 머리가 몽롱했다.

방은 희미한 촛불만이 밝혀져 있었다.

“아가씨, 여기서 잠시 쉬고 계세요.”

하인의 말에 루시펠라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머리가 핑 돌았다.

루시펠라는 이 술이 생각보다 독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루시펠라가 처참하게 술에 약하거나.

“내가 혹시 잠들거든 깨우러 와주겠니? 혹 깨지 못하면 레인 남작 영애 좀 불러줘.”

칼리드의 집에서 혹시라도 잠드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네, 그렇게 할게요.”

소년이 시원스럽게 대답하자,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홧홧한 얼굴, 두근거리는 심장. 루시펠라는 소파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

“기사, 에스텔 슈페르트에게 보검을 하사하니, 그대는 나라의 검으로서 소임을 다하라.”

국왕 파비아누스가 검을 내렸다. 에스텔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무릎을 꿇었다.

얼마나 기대해 왔던 일인가!

기사가 된 것도 자신에겐 행운이었는데 국왕 폐하가 직접 검을 하사하셨다.

루시펠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국왕 옆에 서 있는 왕자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왕자비는 눈을 반짝이며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공작님은 이걸 보고 좋아하려나.’

그녀가 단장이 되기 몇 달 전, 공작이 마물 토벌전에서 전사했다. 그는 자신의 제자인 에스텔이 새로 창설된 기사단의 단장이 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에스텔은 씁쓸하게 웃으며 검을 받았다.

반짝이는 강철. 국왕은 신뢰가 깃든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슴이 뿌듯했다.

“그 소임, 목숨을 바쳐 이행하겠습니다.”

평민 여자가 기사가 되었고, 그 기사는 단장이 되었다. 그 아래서 못마땅해하는 기사들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에스텔은 자신은 실력이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대가 고난의 길을 겪을 것을 잘 알고 있네.”

국왕이 단 아래에 내려와 따스한 시선으로 에스텔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국왕은 언제나 에스텔에게 따스한 사람이었다.

에스텔은 국왕의 눈을 보며 아니야, 할아범, 이라고 말하려 입을 떼었다가 다물었다.

지금 여기서 평소 국왕을 대하듯 말한다면 얼마나 많은 파문이 일어날지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라를, 얼샤를 잘 부탁하네.”

“맡겨주십시오.”

보검과 직위 수여식이 끝나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뒤에 서 있는 이는 칼리드였다.

칼리드는 미소 지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에 에스텔은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국왕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 칼리드와 함께 새로운 기사 동료들을 만나러 연무장으로 향했다. 갓 단장과 부단장이 된 그들의 발걸음은 절도가 있었으며, 무거웠다.

그리고 이들이 인적이 드문 회랑에 다다랐을 때였다.

“이야! 칼리드, 야! 봤어? 이거 봐! 이게 야나스산 강철이래!”

그녀가 방방 뛰며 소리쳤다. 그 와중에도 검은 꼭 끌어안고 있었다.

“진정해, 에스텔.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어차피 뭘 해도 욕할 인간들인데, 뭐!”

평민 계집이 기사가 되었고 단장이 되었다. 그에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비난을 해왔던가.

처음에는 나름 얌전히 굴어도 보고 근엄한 척 노력도 해봤으나 사람들은 질리지도 않고 욕을 해댔다.

“그래도, 에스텔.”

칼리드의 어조에 에스텔이 얼굴을 찌푸리며 방방 뛰던 몸을 다시 얌전하게 했다.

에스텔이 히죽히죽 웃자 칼리드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너라면 안 좋겠냐? 이거 엄청 가벼워! 너도 들어볼래?”

에스텔의 말에 칼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시선이 여전히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에스텔에게 닿았다.

“축하해, 에스텔.”

“응.”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던 에스텔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칼리드, 우리 국왕 할아범 말이야. 진짜 대단한 것 같지 않아? 그냥 내가 검을 잘 쓴다고 날 기사로 받아준 것도 모자라서, 기사단까지 만들어주다니!”

에스텔은 계속해서 신나서 재잘거렸다.

“정말 좋은 사람이야! 내가 이 나라에 태어날 수 있었던 건 행운이야. 정말 목숨 바쳐 이 나라를 지키겠어!”

그렇게 혼자 떠들던 에스텔은 칼리드가 묘하게 가라앉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에스텔은 자신의 처지와 칼리드의 처지에 생각이 미쳤다.

그녀는 아차 싶었다. 귀족으로 태어나 가브라인 공작이 된 그가 에스텔의 부관으로 일하게 된다는 것은 에스텔이 생각해도 좀 기분 나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내가 또 눈치가 없었나 보네.”

“어?”

“단장 말이야. 사실은 네가 되었어야 했는데.”

“…….”

“내가 너무 눈치 없이 좋아했어.”

에스텔의 말에 칼리드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시원한 바람이 칼리드와 에스텔의 머리를 간질이다 지나갈 때였다.

칼리드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이내 푸훗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칼?”

“그런 쓸데없는 데에 눈치를 키우느니 다른 쪽에도 눈치를 키우는 게 어떨까?”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아무것도.”

칼리드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더니 웃음기 서린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네가 미안해하거나 내 눈치를 봐야 할 이유는 없어, 에스텔.”

“…….”

“나보다 네가 강해서 단장이 된 거다. 거기에 어떤 유감도 가지고 있지 않아.”

자색의 두 눈은 단호했다. 그 안에 서린 것은 무한한 애정과 더불어 강철보다 단단한 신뢰였다.

에스텔은 그에 안심했다.

“하지만 너 얼굴이 아까 안 좋았잖아?”

“그걸 알았나?”

“당연하지.”

에스텔이 다가가 칼리드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우리가 몇 년간 이렇게 친구로 같이 살았는데, 모르는 게 이상해 안 그래?”

“그렇군.”

“어서 말해봐. 다 들어줄게. 무슨 일이야?”

칼리드가 에스텔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눈을 가늘게 접으며 기운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드디어 칼리드의 진심을 듣는 건가? 그녀가 심각한 표정을 할 때였다.

“그냥, 우리 단장님이 이렇게 예쁘신데 누가 채가면 어떡하나. 나 혼자 독점할 수 없으니 질투가 확 끓어올라서 말이야. 기분이 좋을 리가 없잖아.”

에스텔이 그 말을 듣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칼리드의 등을 퍽 쳤다.

“이 새끼가 진짜!”

“난 진심이야, 에스텔!”

“이날까지 장난질이야? 죽어라, 죽어!”

“에스텔, 그만 때려, 난 진심이라고!”

이 빌어먹을 놈! 그런 말을 하지 말래도 꼭 입을 연다니까.

에스텔은 화가 나 그의 등짝을 계속 때렸다.

***

“음…….”

루시펠라는 눈을 떴다. 어둑한 천장이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얼마나 잠든 거지? 그러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있는 초가 조금밖에 줄어들지 않은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게실은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듯 인기척 없이 고요했으며, 이따금 창문 사이로 바람이 새는 듯 커튼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양 손바닥을 뺨에 대보니 얼굴에 아직도 미약한 열이 느껴졌다. 그래도 이젠 견딜 만했다.

루시펠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저택을 조금이라도 봐두려면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헉!”

자신의 눈앞에 갑주를 입은 기사가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경계태세를 취하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기사가 아니라 기사들의 갑주가 진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보통 무가는 자신의 가풍을 강조하기 위해 응접실에 갑옷을 진열하기도 하는데, 여기도 그런 모양이었다.

이런 식으로 자길 드러내는 놈은 아닐 줄 알았는데, 이런 취미도 있었나 보지?

루시펠라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갑옷을 하나하나 구경했다.

갑주들은 모두 검을 땅에 꽂아 지팡이처럼 지탱하고 서 있는 특유의 위엄 있는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그렇게 갑옷을 보던 루시펠라의 시선이 한곳에서 멈췄다.

멍했던 그녀의 정신이 순식간에 맑아졌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그 갑주에게 쥐어져 있는 검을 보았다.

“……설마.”

아니겠지. 루시펠라는 입술을 깨물며 그 갑주의 바로 앞으로 갔다. 그녀의 시선은 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그 검에 손을 뻗어 힘을 주었다.

단단히 고정되어 있을 줄 알았던 검은 손에서 너무도 쉽게 빠져나왔다.

루시펠라는 하마터면 검의 무게 때문에 넘어질 뻔했다. 결국, 그녀는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검을 매만졌다.

“왜 이 검이…….”

왜 자신의 검이 이곳에 있는 걸까.

꼭 흔하디흔한 장식용 검들 중 하나처럼.

그녀는 말로 형용하지 못할 아릿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죽는 날까지 가지고 있던 검이다. 국왕에게 받은 그때부터 자신의 분신처럼 사용했다.

“…….”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검은 관리가 잘된 듯, 여느 때처럼 미끄러지듯 검집에서 분리되었다.

모를 리가 없다. 손잡이에 새겨진 작은 흠 하나하나 자신이 만든 것이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이 감촉. 그러나 루시펠라에게는 지나치게 무거운 이 검, 그 검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그녀는 이 말도 안 되는 우연에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잠깐, 우연이라고?’

우연한 사고 때문에 우연히 들어온 휴게실에, 우연히 과거 ‘에스텔’이 썼던 검을 발견한 자신.

루시펠라가 문득 깨달은 사실에 몸을 세운 뒤 이곳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미 누군가가 팔로 자신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등 뒤에 누군가가 서 있는 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꼭 가둬지듯, 그는 자신을 끌어안은 이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녀는 그 품에서 벗어나려 몸에 힘을 주었지만, 허리에 단단하게 감긴 팔은 풀릴 줄을 몰랐다.

손에 있는 검은 떨어진 지 오래였고, 그녀는 거미줄에 포획되어 버린 나비처럼, 그렇게 무력하게 잡혀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이 남자가 누군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는 처음부터 인기척을 숨기고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루시펠라가 자고 일어나는 모습을 보며 최종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어쩌면 시종이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도 계획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일단 술을 잘못 마신 것부터가 그의 계획이었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숨소리가 뒷목의 솜털을 곤두서게 했다.

그는 지금 울고 있는 것일까. 환희하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다.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존재는 연약하고도 이렇게나 뱀과 같이 교활했다.

모든 것은 계획된 것이었다.

언제부터 알아차린 것일까. 어디서부터가 그의 큰 계획의 일부였던 것일까.

처음 왕궁에서 만났을 때? 아니면 영지로 내려가는 길에 재회했을 때? 마물로부터 같이 도망쳤을 때? 아니면 백작령의 성에서? 티 파티 때?

어디서 그녀를 알아챘단 말인가!

이오지프도 그렇게 실마리를 많이 얻었음에도 루시펠라가 에스텔이라는 결론조차 내리지 못했다. 그런데 어디서 그것을 알아차렸단 말인가.

“……고 싶었어.”

“…….”

“보고 싶었어. 너무나도 보고 싶었어, 에스텔.”

“…….”

“아아, 네가 너무 그리웠어.”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길 수 없는 숨소리, 기쁨이 묻어나오는 매끄러운 음성.

그 옛날처럼 그의 말과 행동은 너무나 부드러웠지만, 허리를 옭아맨 팔은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것 같은 진득한 집착이 어려 있었다.

루시펠라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 녀석은 처음부터 자신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고.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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