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이 피바다 속에서
2017.10.19.
“황태자 전하가 오시지 않는다니, 무슨 일이 있나요?”
멜로즈의 호기심 어린 물음에 이오지프가 대답했다.
“아바마마 심기가 매우 불편하시거든요.”
“폐하의 심기가요?”
“네.”
멜로즈는 ‘그러면 너는 왜 나온 거냐’라고 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말을 아끼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루시펠라도 같은 이유로 입을 다물었다. 저 남자가 어디 눈치껏 행동한 적이 있었나. 눈치가 있어도 일부러 없는 척 살아온 사람이었다.
“아, 아이딘 영애, 물어볼 게 있습니다.”
“어떤 것을 말씀하시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루시펠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남자가 왜 이러지? 보통 이오지프는 자신이 어떤 책 때문에 이곳에 온 건지, 수다스럽게 떠들면서 사람을 질리게 했다.
그러나 오늘은 지나치게 용건만 간단히 물었다. 게다가 이오지프가 멜로즈를 대놓고 쳐다보는 게, 아무래도 그녀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눈치를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멜로즈가 어정쩡한 모습으로 그녀와 이오지프를 번갈아 쳐다봤다.
“자리를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이오지프가 대놓고 말했다. 그 말을 하는 이오지프의 얼굴엔 이전처럼 생글거리는 웃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뭐지? 이제 저 더러운 성격을 드러내겠다는 건가?
멜로즈는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 아직 떠들썩한 사람들을 보며 그녀가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전하?”
그렇게 물어보면서도,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이오지프는 자신에게 협력 요구에 대한 ‘답’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오지프의 물음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로에르 후작 영애는 어디 있지? 오늘은 파티에 불참한 건가?”
루시펠라는 그 물음이 이오지프가 본론에 들어가기 전, 혹여나 클로렌스가 루시펠라에게 다가올까 봐 경계하여 묻는 물음이라고 생각했다.
“네.”
“혹시 오늘 온다는 연락은 없었나?”
“오기로 했는데 오지 않았어요. 어쩌면 늦게라도 올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대답이 이상한 걸까? 이오지프의 눈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루시펠라가 더 물어보려는 순간, 이오지프의 뒤에서 칼리드가 다가왔다. 그에 루시펠라가 흠칫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방문하셨다고 들었는데 여기 계셨군요.”
그에 이오지프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루시펠라에게만 알아들을 정도로 입을 움직였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무슨 일이 있나?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진지했다. 이오지프가 칼리드를 보며 활짝 웃었다.
“루이르크 공! 오랜만입니다. 오늘 파티에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곳에 꼭 한 번 오고 싶었거든요!”
“그렇습니까?”
“반역자, 크로웰 일가가 살았던 곳이 아닙니까! 유령이 나타난다는 소문을 들어서요.”
“…….”
루시펠라는 칼리드의 미묘한 표정을 보았다. 이 와중에도 그녀는 칼리드가 분노를 꾹 눌러 참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저택이 처형당한 반역자가 살았던 저택이라고 말하는 거나, 유령이 나온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자신이라도 한 대 쳐주고 싶을 게 분명했다.
“전하께 초대장을 보내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한데 유령이라니, 나오지는 않는 것 같군요. 만약 나왔다면 절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게 보면 유령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아이딘 영애?”
이번에는 왜 자신에게 말을 하지? 황태자에게 아무 말도 못 하니 그녀에게 괜히 곤란한 질문을 해 기분을 더럽게 만들려는 것이다.
루시펠라가 속으로 이를 뿌득 갈고 말했다.
“그러게요. 유령은 없나 보네요.”
대신 자신이 이렇게 살아 있지. 루시펠라가 대화하기 싫은 듯 고개를 돌리자, 칼리드가 이오지프에게 물었다.
“그런데 전하, 오늘은 괜찮겠습니까? 폐하의 심기가 많이 불편하실 텐데요.”
“그래서 빨리 돌아갈 생각입니다.”
이오지프의 말에 칼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심기가 불편하다고? 무슨 일이 있는 거지? 루시펠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
제드는 알현실의 주좌(主座)에 앉아 무릎 꿇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았다.
마일레 백작 일가였다.
제드의 두 눈이 무심하게 그들을 훑었다. 백작의 주위에 있는 기사들과 고개를 숙인 백작, 그리고 무서움에 떨고 있는 백작 일가의 모습이 보였다.
“가, 각하.”
백작의 얼굴은 도피로 인해 엉망이 되어 있었으며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봉신들이 알현실 가운데에 자리한 자줏빛 비로드 가에 일렬로 서서 하인트 공작과 무릎을 꿇은 백작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제드는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살 떨리는 침묵 속, 백작의 겁에 질려 헐떡거리는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제드가 백작에게로 한 걸음을 떼자 그가 소리쳤다.
“사, 살려주십시오! 각하, 제발 자비를!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
제드의 시선이 바로 뒤에 있는 이들을 향했다. 백작부인과 아이들이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
“마물의 수가 꽤나 많더군. 백작도 힘들었을 거야.”
제드의 말에 백작의 눈빛이 밝아지더니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봉신들이 수군거렸다.
“약혼녀를 들이더니 마음이 부드러워지셨나?”
“아니면 작위를 물려받으신 지 얼마 안 되어서, 온건한 처우를 보여주시려는 건가?”
“전쟁터에서라면 바로 투옥하고 처형하셨을 텐데 말이야.”
“젊은 공작 각하께서 왜 저러시지?”
그 수군거림은 제드의 귀까지는 닿지 않았으나, 제드는 그들이 대충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들은 젊은 공작인 제드를 불신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드는 딱히 영지의 후계자로서 두각을 드러냈다기보다는 전쟁터의 기사로서 활동했던 것이다.
제드를 따르는 이들은 무인 출신들이 대다수였고, 영지에만 처박혀 있던 이들은 그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젊다고 무시했으면 무시했지.
“그대가 영지를 받고 영주가 된 이유는 영지민을 지키기 위해서야. 영지민이 매년 세금을 바치는 이유기도 하지.”
그 말에 마일레 백작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갑자기 웬 훈계지? 적당히 하고 넘어가려는 건가?
제드는 안심한 듯한 백작의 얼굴에 대고 말을 이었다.
“같은 예로 기사와 병사들은 나라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고, 적군을 섬멸하기 위해 나라로부터 검과 창을 받는다.”
“…….”
“전투에서 도망가는 이들을 내가 어떻게 처리했을 것 같나?”
제드의 물음에 마일레 백작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 목을 친히 잘라 기강을 바로 세워왔지.”
그의 서늘한 목소리가 침묵이 끼얹어진 알현실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제드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것이 마치 먹이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맹수와도 같았다.
제드가 봉신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쳤다. 봉신들은 그것이 이것을 ‘지켜보라’는 제드의 명령임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제국 얀스가르, 바위의 서에 기록된 영지법에 의거, 에브라르 마일레, 마일레 가에 내린 작위를 환수하며 그대를 이곳에서 직접, 즉결 처분한다.”
제드의 목소리는 냉정했으며, 한 점의 감정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서린 것은 엄숙함도, 차가운 분노도 아니었다.
제드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이 섬뜩한 푸른 빛을 뿜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아니, 가족들만이라도 살려주십시오! 제발!”
그것이 에브라르 마일레의 마지막 말이었다.
제드가 검을 휘두르자 아주 깔끔하게 그의 목이 떨어졌다. 백작 일가가 현실을 자각하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제드는 이어서 일가의 뒤쪽, 무릎을 꿇고 있는 백작의 직속 호위기사 둘의 목 또한 베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사들은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목숨을 구걸했다면, 지금 상황은 더욱 더러웠을 것이다.
검이 공기를 가르는 섬뜩한 바람 소리가 몇 번 되풀이되며 섬광이 번쩍였다.
그에 알현실은 금세 피바다가 되었다. 봉신들은 행여나 눈을 피하기라도 하면 불호령이 떨어질까 식은땀을 흘리면서 그것을 지켜보았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처형이 끝나고 제드는 그 가운데에 있는 백작부인과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죽은 자신의 남편과 기사들을 보더니 제드를 보며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그 애처로운 모습에도 제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저 남자의 목을 한 달간 효시(梟示)한다. 또한 마일레 일가와 나머지 기사들은 사흘 후 광장에서 처형을 집행하겠다.”
여자부터 백작 일가의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제드의 뒷말은 생략되었지만 봉신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자비란 없었다. 이것은 제드가 봉신들에게 보여주는 서늘한 경고였다.
“끌고 가도록.”
기사들이 다가와 아이들과 백작부인을 잡아끌었다.
그때였다.
“이 악마!”
백작부인이 무너지는 몸에도 불구하고 악에 받쳐 소리쳤다.
“아스트라께서도 너를 구하시지 않을 거다, 이 악마야!”
죽기 전 마지막 발버둥인 듯 그녀의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듣기에도 섬뜩한 저주였으나, 제드의 표정에는 일말의 동요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서 끌고 가지 않고 뭘 하는가!”
보다 못한 버나드가 소리치자 그제야 기사들이 그녀를 끌고 사라졌다.
그러나 그녀는 끌려가면서도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버나드마저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섬뜩했으나, 정작 제드의 얼굴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제드는 조용히 검을 닦고 주좌에 다시 앉아 자신이 만든 피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살려달라고 빌었던 백작과 조용히 죽임을 당한 기사, 그리고 자신을 맹렬하게 저주하는 곧 죽을 이들.
그러나 제드는 그것에 놀라거나 겁먹지 않았다.
그는 무수한 사람을 죽여왔다. 그중에는 죄가 있는 자도, 죄가 없는 자도 존재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사람을 죽이면 죽일수록 그는 영웅이 되었다.
전장의 흑사자.
그러한 칭호와 존경은 다른 이의 피와 저주를 받는 대가로 얻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작 그 소리를 듣고 제드는 냉소했다. 그들에게 자신은 이지가 없는 잔혹한 짐승으로 보인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물론 그는 마일레 백작에게 분노했다. 그러나 그것은 명령을 어긴 자에 대한 분노, 애꿎은 영지민의 피를 흘리게 한 것에 대한 분노다.
하지만 그 분노라는 감정이 즉결처분을 결정하게 한 것은 아니었다.
영지민은 도망친 백작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영지의 수장인 그는 마땅히 본을 보여야만 했다.
온건한 처사 따윈 그의 머릿속에 없었다. 그래야 봉신들이 기어오를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며, 영지민 역시도 그의 결정에 만족하며 그를 따를 것이었다.
백작의 어린 아들을 죽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작위를 회수하고 평민으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제드는 후환이 될 수도 있는 자를 살릴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자신이 온정적인 모습으로 비치는 것 역시도 바라지 않았다.
공포란 사람을 지배하는 가장 쉽고도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이전에는 이것에 자괴감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권력을, 권력이 만들어둔 지침에 맹종하는 이들을 혐오했으나 자신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기에.
“전장의 흑사자 좋아하네, 쪼잔한 자식.”
그때, 얼샤 정복전에서 만났던 그 기사가 아니었다면 그는 언제까지고 자기혐오에 매몰되어 있었을 것이다.
“루시.”
자신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린 말에 버나드가 놀라 제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제드의 머릿속은 어느새 이 토벌전에 대한 뒤처리를 어떻게 할지보다는 사랑스러운 자신의 약혼녀로 가득 차 있었다.
만약, 이러한 장면을 보면 루시펠라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제드는 영지로 내려와 살생을 저지를 때면 습관적으로 루시펠라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의문을 가지고는 했다.
이해해 달라고 할 생각은 없다. 이것은 그가 응당 해야 할 일이었으니.
온정으로 이들을 감동시켜 교화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유치한 동화 속에나 나올 이야기였다. 애초에 말로 해결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그에게는 이런 잔인한 처사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왜 자꾸 자신의 이런 당연한 모습이 루시펠라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 답은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 이 모습이 얼마나 두렵게 비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루시펠라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괴롭히자 그는 피곤해졌다.
“네가 사람을 많이 죽이고 아니고는 나랑 전혀 상관없어. 나도 똑같으니까. 그런데 아무 목적도 없는 새끼한테 얼샤의 기사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면, 죽여 버리고 싶어.”
뜬금없이 에스텔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꼭 그 말은 루시펠라의 입에서 나온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 그는 어떠한 목적으로 사람들을 죽이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때, 그 기사 에스텔을 만났을 당시처럼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지는 않았다.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는 에스텔에게 하는 말인지, 루시펠라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속으로 생각했다.
***
루시펠라는 칼리드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루시펠라 역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빠져나왔다.
파티는 예상대로 아주 따분했다. 클로렌스가 없으니 더욱 그랬다.
“아가씨, 이거 드시겠어요?”
앳된 얼굴의 하인이 음료가 당긴 쟁반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마침 목이 탔던 그녀는 손을 내밀어 색이 신기한 파란색 음료를 마셨다.
음료는 상큼하고 달콤했다. 그러나 그것을 마시자 얼굴에 열기가 살짝 올라왔다.
“어, 이거 술이야?”
“네? 네!”
하인 소년이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루시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펠라의 육신의 주량이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에스텔처럼 술이 강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보아하니 아직 어린 녀석이었고, 쓸데없이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기에 루시펠라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면 잔을 받아 든 자신이 뭔지 물어봤어야 했다.
“가 봐.”
“괘, 괜찮으시겠어요?”
“안 괜찮으면 내가 알아서 할게.”
약간 목이 뜨거운 정도라 괜찮았다. 하인이 미안한 표정으로 더 무엇을 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손을 저었다.
그때였다.
“오늘 경매에 내걸 물건을 공개하겠습니다.”
칼리드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전부 그쪽을 쳐다보았다. 칼리드가 단상 위에 놓인 화려한 상자를 가리켰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오늘 열리는 파티의 주인공이었다.
자선파티라는 개념은 사실 간단했다. 파티의 주최자가 귀한 물건을 하나 내오면 참여자들이 경매 방식으로 그것을 구매하는 것이다.
물건값을 받은 주최자는 그것을 자신의 이름과 구매자의 이름으로 기부하게 된다.
돈을 주고 물건을 받으며, 선행까지 베푸는 것으로, 이러한 양식의 파티가 열린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경매에 그가 무엇을 내걸까? 루시펠라가 다른 귀족들처럼 상자로 다가갔다.
“영애, 괜찮아요?”
루시펠라가 뒤를 돌아보자 레인 영애가 서 있었다.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보니 귀가 살짝 빨간데, 열나는 거 아니에요?”
레인 영애는 루시펠라가 걱정되어 따라온 듯했다. 그녀는 레인 영애의 퉁명스럽지만 친절한 배려에 고마워 웃었다.
“아니에요. 술을 음료수로 착각하고 마셔서…….”
“아니, 술을 술이라고 시중드는 하인이 말도 안 했다고요? 이건 분명히 따져야 할 일이에요.”
“괜찮아요. 금방 깨겠죠.”
루시펠라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칼리드의 경매품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오늘 여러분을 뜻깊은 자리에 모시고 이렇게 뜻깊은 물건을 보여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칼리드는 웃고 있었다. 그때, 루시펠라와 칼리드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시선이 루시펠라에게 머물렀다. 아무래도 그녀의 얼굴이 평소보다 붉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칼리드의 시선이 루시펠라로부터 떨어졌다. 그는 자신의 옆에 있는 하인에게 손짓해 상자를 열게 했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선명한 색을 가진 자줏빛의 공단,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은 한 자루의 커다란 검이었다.
은으로 화려하게 세공된 검집 가운데에는 화려한 사파이어가 빛나고 있었다.
칼리드가 다가가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자, 검신이 샹들리에 빛에 비쳐 서늘한 빛을 뿜어냈다.
“이건, 그러니까! 그 검인가요?”
자비에 영애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 여자 기사, 에스텔 슈페르트의 검이요.”
그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검으로 향했다.
루시펠라는 그 검을 확인하려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가 슬쩍 칼리드를 보니 그는 아무 말 없이 사람들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저 검은 자신의 검이 아니다. 저 검은, 칼리드의 검이었다.
비록 보검은 아니었지만, 가브라인 공작가의 보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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