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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66화 (66/173)

#66화 거래

2017.10.16.

클로렌스가 이오지프와 만나기 얼마 전, 그녀는 극심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후작이 자리를 비우고 난 뒤 그녀는 황태자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눈치가 없을 수 있는가. 황태자 성격의 심각함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영애와 이렇게 가까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

황태자가 클로렌스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기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광입니다, 전하.”

클로렌스는 어떻게 하면 황태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궁리했다.

몸이 아프다고 하면 너무나 노골적이었고, 할 일이 생각났다고 해봤자 황태자를 만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그 합당한 이유를 대야 했다. 문제는 그런 이유 따윈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었던가?”

“없었습니다, 전하.”

“그렇지. 영애는 언제나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어딘가로 가버렸지. 나는 항상 그게 아쉬웠어.”

위아래로 보는 그 시선이 꼭 자신을 핥는 듯 집요하고 역겹게 느껴졌다.

그녀는 살짝 자리를 옮기며 말했다.

“제가 어찌 함부로 전하께 말을 붙이겠어요.”

클로렌스의 겸양에 황태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니, 영애는 다른 사람과 다르지. 영애는 고귀하고 또…….”

황태자가 다시 그녀의 옆에 바짝 붙었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처럼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렇게나 아름답거든.”

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클로렌스는 그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지금 이런 곳에서? 그녀는 위협을 느꼈다.

“전하, 잠깐…….”

그녀가 눈을 내리깔며 일어서려 했으나, 어느새 손목은 단단히 잡힌 뒤였다. 제아무리 그녀라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고, 두려웠기에 판단력을 잃어버렸다.

“영애, 그거 알아? 나는 도망치는 새를 잡아서 날개를 뜯어버리는 걸 좋아해.”

클로렌스가 두려운 표정을 지을 때 황태자가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영애가 도망치려고 머리 굴리는 거 다 보여.”

위험 신호가 크게 울려 퍼졌다. 클로렌스가 잡힌 손목을 빼려 힘을 주었지만 황태자의 눈빛은 이미 돌변한 뒤였다.

“꺅!”

순식간에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손을 움직이려 했지만 두 손은 황태자에 의해 결박당한 상태였다. 클로렌스는 바들바들 떨었다. 황태자가 그것을 보며 웃었다.

“그만하세요, 전하!”

클로렌스가 소리치자 황태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만하긴 왜 그만해, 영애의 아비가 허락한 건데 말이야.”

표면적으로는 호의적이었던 황태자의 눈빛이 돌변했다.

“영애, 왜 후작이 여기에 영애와 나를 단둘이 남겨놨겠어?”

“……무슨?!”

아버지가 자신을 남긴 이유라니, 클로렌스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클로렌스는 일이 이렇게 되었으며, 저 남자와 단둘이 남았음에도 후작을 의심하지 않으려 했다. 그냥 아버지가 위험에 둔감하다고 생각하려 했다. 이 얼마나 안이하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는가.

“어차피 결혼할 사이인데 뭐 어때. 영애, 나는 많이 굶주렸어. 마땅히 내게 봉사해야지.”

그녀의 아버지는 일부러 자신과 황태자를 붙여놓은 게 분명했다. 행여나 그녀가 허튼짓이라도 벌일까 봐 이 결혼에 순응하게 하려고 그런 것이다.

“싫…….”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입이 틀어막혔다. 그녀가 마구 발버둥 쳤지만 황태자의 어떤 행동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

“가만히 있으라고 내가 명령하잖아!”

틀어막힌 입에서 손이 떨어지더니 목을 조여왔다. 그 엄청난 힘에 그녀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위협을 맛보았다.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 죽을 수도 있다. 이 황궁 안에서, 황태자에 의해 죽어도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저항을 멈추자 목을 조르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녀는 기침한 채 황태자를 올려다보았다.

“좋아,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있어야지. 내가 얼마나 영애를 좋아했는데 말이야. 영애가 부드러워지면 나도 부드러워질 수 있어. 미래의 황후로서 의무를 다해야지?”

황태자의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고 클로렌스는 포기하듯 눈을 감았다. 애초에 아버지도 외면한 자신이다. 벗어날 방법 따윈 없었다.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널 도울 수 있는 건 너뿐이야.”

그때, 클로렌스의 귓가에 루시펠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클로네스는 눈을 크게 떴다. 루시펠라는 방 어디에도 없었다. 있는 것은 짐승처럼 자신의 위에 올라탄 황태자뿐.

부모님의 말씀보다 그녀의 말이 먼저 떠오르는 것을 보면 자신은 루시펠라를 정말 좋아하긴 한 모양이었다.

“가문보다 중요한 건 너야!”

루시펠라의 표정,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그래, 가문보다 중요한 건 자신이다. 그깟 가문이 날 지켜주지 않고 내몰았는데 내가 이런 더러운 의무를 다해야 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자신은 인형이 아니었다.

몸을 지분거리는 손길을 참아내며 클로렌스는 생각에 잠겼다. 루시펠라를 떠올리자, 그녀가 저택에서 자신을 구해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무자비하게, 사정 봐주지 않았지, 아마?

기억 속의 그 발차기를 떠올리며 클로렌스가 무릎을 들어 올렸다. 황태자는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클로렌스는 황태자의 얼굴을 손으로 쓸며 미소를 보였다. 그에 황태자가 화답하듯 미소를 지으며 안심하던 순간,

클로렌스는 무자비하게 그의 중심을 걷어찼다.

“끄아아아악!”

퍽, 소리가 나며 그는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그에 클로렌스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빨개진 채 데굴데굴 구르는 그 모습을 보니 겁은 났지만 속이 시원했다.

‘더러운 새끼.’

차마 욕은 내뱉을 수 없었지만, 그녀는 마음껏 경멸 어린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또오오오! 제기랄! 또! 계집년에게 또!”

또? 무슨 일이 있었나? 클로렌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루시펠라가? 에이, 아니겠지.

클로렌스는 황태자가 루시펠라를 해치려 했다는 소리만 들었지, 정확한 사정은 모르고 있었다. 정답에 가까운 추측을 하며 클로렌스는 재빨리 방문을 열었다.

“가만 안 둘 거야! 여봐라, 저년을!”

자신을 가만둘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안 했다. 그리고 이 미친 짓을 계획해서 사람을 물렸을 거라는 건 애초에 알고 있었다. 클로렌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그녀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흐트러진 옷차림을 바로잡았다. 이런 상황에서 결혼은 절대 하지 않겠다.

그녀는 지금 당장 황궁에서 나가 의원에게 불임이 되는 약을 처방받을 생각이었다.

사실 여기까지가 그녀가 생각한 방법이었으나, 이 상황까지 벌어졌으니 치사량이 안 될 만큼 독약을 마시고, 현란한 글 솜씨로 황태자가 자신을 범하려 했다는 편지까지 남기고 자살을 시도할 것이다.

그래야 가문도 자신도 무사할 것이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화장이 번지면 안 되는데, 자꾸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문 따윈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아버지 역시도 지은 죄가 있으니 이 일을 들어도 크게 벌하지는 못하겠지. 설령 그녀를 버리더라도 루시펠라가 책임져 주겠지!

레이디로 살아오면서, 앞으로도 저지를 일이 없는 이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자 겁이 나는 한편 생각보다 후련하고 통쾌했다.

황궁 밖을 어서 나가고 싶어 전력으로 뛰어갈 때, 클로렌스는 복도 저편에서 걸어오는 이오지프와 마주쳤다.

이오지프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러다가 그녀의 목에 시선이 가며 그의 표정이 굳었다.

아뿔싸! 목에 졸린 자국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클로렌스는 시선을 피했다. 수치스러웠다.

“제가 어떻게 해드릴까요, 영애.”

“…….”

“못 본 척 넘어가 드릴까요, 아니면 황궁에 무사히 벗어나도록 도움을 드릴까요?”

이오지프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도움이라고? 그가 무슨 도움을…….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녀의 머릿속에 환한 불이 켜졌다.

불임약도, 독약도 먹지 않아도 된다! 그 잘난 가문에 엿을 먹이겠지만, 망하게는 하지 않을 방법이 떠올랐다. 저 눈앞에 있는 사람. 이오지프가 자신을 도와주면 될 일이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황족이다. 황족을 막을 수 있는 것은 황족뿐이다.

그리고 그녀가 제대로 판단했다면 저 남자는 어수룩한 척 자신을 숨기고 있었다. 그가 황위에 오르기를 원한다면 로에르 후작가의 외동딸인 자신만큼 매력적인 이는 없었다.

만약 로에르 후작 영애가 이미 2황자와 연인 사이였다면 이 약혼은 어떻게 될까? 황제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클로렌스의 머릿속에 차근차근 계획이 짜졌다.

“전하의 방에서 잠시 쉬게 해주세요.”

이것은 도박이었다. 그녀는 진짜 2황자가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모른다. 이 남자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 아니면 이 남자가 황태자보다 더 쓰레기일지도 몰랐다.

인생에서 경험할 수 없던 너무나 큰일을 당하고, 클로렌스의 판단력은 마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해결책이 필요했고,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오지프는 가장 이상적이고 완벽한 해결사가 되었다.

가문이라는 안온한 보호 아래서 위험부담 없이 살다가, 그런 쓰레기 같은 남자와 맺어지느냐, 불임이 되느냐, 독약을 먹고 자살하느냐를 선택하기보다는 저 남자가 훨씬 좋은 선택지였다.

그녀는 숨을 들이마시며 자신을 진정시켰다.

“자, 들어오세요.”

그녀는 2황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방은 소문대로 책이 빼곡한 서재와도 같았다. 그 어둑한 곳에 책 냄새가 풍겨오자 쉴 새 없이 뛰던 심장이 자연스럽게 진정되었다.

클로렌스는 이오지프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이오지프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오히려 그 두 눈에 자신에 대한 걱정마저 어린 것 같았다.

“여기서 쉬다가 가면 될 것 같군요. 원하신다면 책상 위에 종이 있을 테니 필요하실 때 시녀를 부르도록 하세요. 저는 나가 있겠습니다.”

만약 선택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가 유일한 해결책이라면.

클로렌스는 작은 확률에 자신을 걸어보기로 했다.

등을 돌려 방을 나가려는 이오지프의 허리를 껴안았다. 이오지프가 놀란 듯 몸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영애, 이게 무슨 짓이죠?”

막상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지만 클로렌스도 당황한 상태였다. 그가 입은 얇은 옷 아래, 단련한 자 특유의 단단함을 넘어 딱딱한 신체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온 오라버니보다 더욱더 단련된 듯했다.

“전하.”

다행히 이오지프는 화를 내지도 않았고, 불쾌해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황족의 신체에 함부로 손을 댔는데도 그는 그 죄를 물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에 용기를 얻은 클로렌스가 말을 이었다.

“황태자 전하와 제가 결혼을 한다더군요. 방금 전하를 뵙고 왔어요.”

그 말을 들은 이오지프가 그제야 클로렌스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있는지 깨달은 듯했다. 그의 표정이 슬며시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변할 때였다.

“아버지는 로에르 가에서 황후를 배출하고 싶어 해요. 그렇다면 저와 맺어지는 사람은 황제가 되도록 우리 가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는 말이죠.”

조용한 서재 안,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영애.”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하는 잘 아실 거라 믿어요.”

클로렌스는 더 설명하지 않은 채 이오지프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애매한 화법에서 정확히 그녀가 바라는 것을 유추하는 것은 그녀가 내건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만약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면, 그녀는 여기서 포기해야만 했다.

아니, 이오지프라면 알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발을 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이오지프는 꽤나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애는 내게 왜 이런 제안을 하지?”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 목소리는 언제나 들었던 가벼운 목소리와는 달랐다.

묵직하고 낮은 음성. 어째서인지 그 목소리에 심장이 다른 쪽으로 두근거렸다.

“그거야, 나는, 황태자 전하와 결혼하기 싫으니까요.”

“형님과 결혼하기 싫어서라. 참 애 같은 이유로군.”

“다르게 말해요? 황태자 전하와 결혼하기에는 제 인생은 너무나 소중하니까요.”

그 말에 이오지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바심을 느꼈다. 이 수다스러운 남자가 이렇게나 조용했었나? 그가 받아주지 않으면 이젠 어떤 길도 없다. 그녀는 초조해졌다. 이오지프가 물었다.

“만약 영애의 제안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지?”

“상관없어요. 어찌 되었든,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전하에게 안겼다고 말할 거니까.”

클로렌스의 단호한 말에 이오지프가 피식 웃었다. 그에 클로렌스가 용기를 내 그의 몸에 기댄 채 발돋움한 뒤 그 두 팔을 이오지프의 얼굴에 뻗었다.

“그리고 저는 이 자리에서 그럴 생각이고요.”

그녀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붉은 입술에 서리는 곡선에 이오지프의 눈이 커지며,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전하께서 절 거절하시지 않을 거라 믿어요.”

본디 이런 일은 가장 화려하게 벌여야 하니까.

이오지프는 그녀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었다.

클로렌스의 손이 조심스럽고 은근하게 그의 뺨을 쓸었다. 그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뺨에 다가가더니 아주 천천히 그의 안경을 벗겨냈다.

안경에 가려져 있던 이오지프의 날카로운 눈과 그녀의 눈이 마주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진정한 눈을 마주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서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지금, 영애의 유혹에 넘어간 멍청이일 수도 있어.”

“그렇다면 사람을 잘못 본 제 잘못이겠지요.”

그 말에 이오지프가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영애도 무모한 게 갈수록 친구를 닮아가는 것 같군.”

그에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열자 이오지프의 날카로운 눈매가 휘어졌다.

그의 얼굴이 이렇게 잘생겼었나? 클로렌스가 당황할 때 이오지프가 허리를 숙였다. 얼굴이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듯 가까워졌다.

“먼저 거래를 청한 건 영애야.”

그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똑같은 눈동자를 지닌 형제임에도, 분명 황태자와 똑같은 거리임에도 황태자만큼의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그녀의 두 뺨에 이오지프의 거슬한 손바닥이 닿았다.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 그의 얼굴이 다가왔다.

입술에 부드러운 입술이 얹어졌다. 아주 느릿하고 은근하게 입술이 닿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애가 타 입술을 벌렸다. 뜨거운 숨결을 주고받으며 남자와 여자는 서로 입술을 섞었다.

질척하고 야릇한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첫 키스는 이렇게나 자극적이었다.

클로렌스는 손에 들었던 이오지프의 안경을 떨어뜨렸다.

***

루시펠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칼리드의 집은 아이딘 백작가나 하인트 공작가, 로에르 후작가처럼 거대한 규모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작은 규모도 아니었다.

이 연회장의 크기만 해도 못 해도 방 다섯 개 정도는 합쳐 놓은 크기였다.

기둥은 섬세하게 세공되어 있으며, 샹들리에는 처음 연회를 연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맑게 반짝였다. 바닥 역시 걸을 때마다 맑은 굽 소리가 울렸다.

루시펠라는 마련되어 있는 테이블을 보았다. 그 위에는 형형색색의 음식들과 화려한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로에르 후작가의 파티에 견줄 수는 없었으나 세심하게 준비되었다는 것이 보였다.

연회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이었다. 사람들 대부분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야!’

클로렌스가 오지 않았다. 클로렌스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던 건 아니겠지.

‘아니,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을 준다고 했으니까.’

그냥 몸이 안 좋거나, 이곳에서 하하호호 웃을 기력이 없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파티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많은 힘을 소비하게 했으니까.

루시펠라는 클로렌스를 믿기로 했다.

“어머, 영애도 초대받았나 봐요?”

그 목소리에 루시펠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포에르 백작부인, 멜로즈가 서 있었다.

루시펠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여전히 멜로즈를 보면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루시펠라는 이드리스 공작가에 뭔가 원한이 있던 건 아닐까? 이드리스 공작을 보고도 기분이 나쁘다면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로에르 후작 영애가 안 오셨나 봐요. 뭐, 이제 있어도 어쩌겠어요. 이젠 옛날 같진 않을 텐데.”

그녀는 의기양양해 보였다. 루시펠라는 멜로즈의 자신감이 클로렌스와 황태자의 혼약에서 기인한 것을 깨달았다. 그 소식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클로렌스와 루시펠라가 친했지만 일단 루시펠라는 황태자와 질척한 연인 관계였고, 클로렌스가 황태자와 결혼하게 되면 그들이 멀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저 멍청한 이는 자신이 클로렌스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인 줄 아나 보다. 저렇게 대놓고 그녀에게 다가올 정도면. 루시펠라는 멜로즈를 한심해하며 입을 열었다.

“영애가 초대받아서 올 줄은 몰랐네요.”

루시펠라가 당당한 표정으로 말하자 멜로즈가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루이르크 공작 각하는 저희와 아주 긴밀한 사이인걸요.”

“제 말은, ‘초대’가 아니라 이곳에 ‘오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파티에 참여를 안 한 지 얼마나 되었죠? 그러니까 음, 약 두 달이 되었군요.”

루시펠라가 웃으며 말했다. 그에 멜로즈가 루시펠라의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제가 듣기론, 폐하께서 자중하라고 말씀하신 걸로 아는데, 자중에 두 달은 좀 짧지 않나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두 달은 충분히 긴 시간이랍니다. 저는 황태자 전하께 참여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서요. 황태자 전하께서 허락하셨으니 폐하께서도 허락하신 거랍니다.”

자신들을 이끄는 황태자의 권력을 믿고 나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저는 허락을 말하는 게 아닌데…… 아니요, 그만하죠.”

루시펠라는 웃으며 무시하듯 말했다. 그에 멜로즈가 애써 미소 지으며 물었다.

“오늘 황태자 전하도 방문하시는 거 아세요?”

뭐? 이건 의외였다. 루시펠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황태자가 무슨 짓을 하겠냐마는, 지금 여기서 마주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유감스럽게도 영애, 오늘 형님은 안 나오실 겁니다.”

루시펠라와 멜로즈가 동시에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봤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루시펠라와 멜로즈가 동시에 이오지프에게 인사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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