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그리움이라는 것
2017.10.12.
“각하!”
그 목소리와 동시에 제드의 검이 깔끔한 선을 그리며 마물을 베어냈다. 마치 섬광과도 같은 빠르기였다.
그와 동시에 마물에게서 피가 튀었다. 제드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잘린 마물의 머리를 발로 짓이겼다.
“정말 끈질기군.”
그가 쓰러진 마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시체 뒤에는 늑대와 비슷한 모습을 지닌 마물, 우라스(Uras)들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날카로운 송곳니의 색깔은 희생자들의 붉은 피가 채 사라지지 않아 붉었다.
“떼 지어서 몰려다니는 건 개새끼들 특성인가?”
마물들은 눈으로 보기에도 끔찍한 기괴한 모습들을 하고 있기도 했지만, 보통은 짐승들이 기이하게 변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습성도 그들과 비슷하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늑대나 들개의 특성상 이들 역시도 똑같았다.
한 도시가 순식간에 몰락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무리 지어 공격하는 데 빠른 속도로 대응할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백작 일가가 도시를 버리고 도망친 게 용서되지는 않겠지만.
제드는 그때 별안간 느껴지는 빛에 한쪽 눈을 찡그리며 그 빛이 온 쪽을 올려다보았다.
신호가 온 것이다.
제드가 손가락 두 개를 올리자 신호를 본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퇴각하기 시작했다.
우라스들이 그들을 쫓았으나, 후미에 있는 기사들에게 목숨을 내주어야 했다.
일정 거리가 벌어지자 제드는 검을 들어 검끝으로 우라스들을 가리켰다.
그 신호에 골짜기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궁사들의 화살비가 쏟아져 내렸다.
포물선을 그리며 쏟아지는 화살들은 우라스의 등에 사정없이 꽂혔다.
그에 선두에 있던 우라스들이 비명을 지르며 제드 일행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마물들과 기사들의 난전이 다시 벌어졌다.
마물의 날카로운 이는 기사들의 갑옷을 우그러뜨렸으며, 기사의 검 역시 마물들의 심장을 찔러 생명을 거두었다.
제드는 그 와중에 단연 돋보였다. 그가 가는 궤적마다 마물들의 시체가 쌓이고 또 쌓였다.
그에 후방에 있던 기사들의 눈빛에는 감탄과 존경이 어렸다.
제더카이어 하인트는 언제나 영웅이었으며, 자신의 목숨을 내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기사 중의 기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가 된 마물들을 내려다본 제드는 일을 다 마친 자 특유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 이렇게 나타난 건지, 마물들은 죽이고 죽여도 또 나오고는 했다.
“복수의 남신 아레스도 참 끈질기군.”
그는 짜증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자신을 섬기지 않고 비웃던 인간들에게 복수한 남신 아레스.
이슈타르에게 패했어도 재앙의 힘을 남겨두어 끊임없이 인간을 전쟁 속으로 내몰았다. 마물은 아레스의 잔재라고 했다.
“그 이야기는 신관 앞에서 하지 마십시오.”
“그럼 그놈들이 검 들고 뒤처리를 하라고 하던지.”
버나드의 말에 검에 묻은 피와 살점을 헝겊으로 닦아낸 제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오자마자 자리 잡을 새도 없이 마물들을 없애기 위해 강행군을 해왔다. 야행성인 녀석들이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토벌했다.
“그렌 남작이 백작을 잡아와야 할 텐데 말이야.”
“곧 잡아올 겁니다.”
“그러길 바라야지.”
초반에 이 녀석들을 잡았다면 적어도 증식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녀석들의 특성상 개체수가 큰 힘이라 번식이 비정상적으로 빠르다는 것 정도는 이미 지침서에 나와 있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피해를 일으킬 일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는 이를 갈았다.
“돌아가지.”
그는 뒤처리를 기사들에게 맡기고 성으로 향했다.
성으로 향하던 제드는 문득 자신이 루시펠라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자마자 마물의 습격 때문에 그럴 틈이 없었다.
‘기다리고 있을까?’
루시펠라는 분명 그에게 편지를 쓰라고 했다. 한데 의례적으로 한 말은 아니겠지.
피곤이 몰려왔다. 제대로 잠을 자지 않아 입안이 모두 헐어 숨을 쉴 때마다 아려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는 루시펠라를 생각하고 있었다.
말을 타고 가로지르는 도시의 상태는 심각했기에 아무래도 당분간 수도로 돌아가기는 힘들 것 같았다.
제드는 그것을 깨닫고 눈썹을 찌푸렸다.
수도에서 있었던 일이 꼭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상했다. 그는 수도를 싫어했다. 권력의 중심부에 있을수록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두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루시펠라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는 수도로 향하고 싶었다.
제드는 문득 피를 뒤집어쓴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언제나 익숙한 살육자의 모습이었다.
향수 냄새보다 피비린내가 익숙한 삶을 살았다. 기사로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그런 삶을 살아가겠지.
사람들은 기사들의 고귀한 기사도와 명예를 추앙하지만, 이들의 실체가 마물과 다름없는 살육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것은 제드의 또 하나의 모습이었다. 숨 쉬듯 익숙한, 보이지 않는 모습.
루시펠라라면 이것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좋아할까? 싫어할까? 아니면 두려워할까.
사실 싫어한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그냥 이런 모습을 두 번 다시 보이지만 않으면 된다.
어느덧 지평선에 해가 저물고 있었다. 노을 지는 하늘의 색이 예전 루시펠라와 함께했던 때와는 다르게 핏빛처럼 붉어 보였다.
그대도 이 노을을 보며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그래 준다면, 가라앉은 기분도 조금은 좋아질 것 같은데.
제드는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
클로렌스는 채비를 마치고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심으로 인해 얼굴은 초췌했으며, 약해진 몸으로 인해 화장을 했음에도 창백했다.
클로렌스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진한 분홍색의 드레스는 클로렌스의 하얀 피부와 아주 잘 어울렸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방 바깥으로 나섰다.
“오늘도 예쁘구나, 클로렌스.”
다정한 아버지의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애정이 서린 칭찬. 그러나 왜 이것이 텅 빈 공허처럼 느껴지는 것인가.
“황태자 전하께서도 너를 아껴주실 거다.”
그 말에 고개를 돌려 후작을 바라보자, 후작이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여자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건 다 너를 만나기 전의 일이란다. 어차피 전하의 곁에는 네가 서 있게 되어 있어. 가문도, 품위도 없는 그저 그런 영애들과 너는 다르지 않으냐.”
“그저 그런 영애라는 건, 루시, 아니, 아이딘 영애를 말하는 건가요?”
클로렌스가 비웃듯 후작에게 묻자 후작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클로렌스, 너는 어련히 잘 처신하는 아이니 네 인간관계에는 간섭하지 않겠다. 하지만 혼사가 공표되고 식을 올리기 전까지는 아이딘 백작 영애와의 교류는 중단하는 게 좋겠구나.”
인간관계에 간섭하지 않다니, 그 인간관계 중에 결혼도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닌가.
클로렌스는 그에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 말에 후작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클로렌스의 저조한 기분에 맞춰주려고 생각한 듯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오늘 황태자의 부름에 입궁하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클로렌스는 이렇게 아침부터 단장에 열을 올려야만 했다.
클로렌스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클로렌스가 적당히 타협할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클로렌스는 그렇게 자라왔기 때문이다.
이윽고 마차에 올라 황궁으로 가는 동안 후작은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클로렌스에게 말을 붙였으나, 그녀는 대답하고 싶지 않은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황궁에 당도했다.
그녀는 봄을 맞아 아름답게 꾸며진 황궁의 정원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후작과 함께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동안 클로렌스의 얼굴은 더욱더 어두워져 갔다.
응접실로 들어가니, 소파에는 먼저 도착한 듯 황태자가 앉아 있었다.
“어서 오시게, 후작. 그리고 영애.”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에 모습을 보는 황태자의 모습은 이전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클로렌스가 가장 싫어하는 시선으로 인사를 올리는 그녀를 훑어보았다. 그 뱀과 같이 음흉하게 느껴지는 시선에 절로 얼굴이 굳었다.
“영애, 그렇게 딱딱한 표정을 짓지 않아도 돼.”
오만한 표정으로 황태자가 말했다. 후작이 눈치를 주자 클로렌스는 만개한 꽃처럼 얼굴에 활짝 미소를 머금었다.
정신 차리자, 클로렌스, 이곳은 황궁이며,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는 황태자다. 그리고 이자는 속이 좁고 포악한 사람이다. 심기를 거슬렀다간 나중에 어떤 보복을 할지 모른다.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클로렌스의 표정을 보고 황태자가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내 다음에는 손등에 키스를 올리지.”
더욱 끔찍한 소리였다. 후작의 자랑스럽다는 눈빛을 뒤로한 채 클로렌스는 평소처럼 가면을 쓴 채 웃었다.
이상하게도 황태자에게 역겨움을 느끼는 감정은 변함이 없는데, 가면 쓰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귀족으로 태어난 이상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황태자비로서도, 황후로서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것 또한 자신에게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녀의 마음은 또다시 약해졌다.
후작과 황태자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클로렌스는 멍하게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귀족 여인이 겪는 삶이다.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거다.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마련한 자리인데 대체 뭐가 문제인가. 어쩌면 꽤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 분노와 슬픔에 이어 그녀에게 체념이 다가오고 있었다.
‘루시, 틀렸어요. 방법 따윈 없어요.’
며칠 동안 고민했지만 결론은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클로렌스로서는 거부권이 없었다. 도망을 간다면 가문은 보복당할 것이며, 아프다고 말하며 몸져누워도 금방 들통나게 되어 있었다.
아마 황족을 모독한 죄로 큰일을 당하게 되겠지.
최후로 생각해 둔 방법은 그녀의 몸을 크게 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선택하기에는 그만한 각오가 필요했기에 클로렌스는 차마 선택할 용기가 없었다.
“클로렌스, 나는 폐하를 알현하고 오겠다.”
“네?”
클로렌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후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아버…….”
“전하와 이야기를 나누렴, 클로렌스.”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자 클로렌스는 거부할 수 없었다.
후작이 방을 떠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이 뱀처럼 음험하게 빛났다.
***
“너무도 경솔했습니다! 어떻게 대업에 대해 그렇게 가볍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윈터의 목소리에 이오지프는 의자에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 전하가 아셨을지도 모릅니다. 마주치셨다면서요?”
“마주쳤지.”
시온 로에르의 생일 파티 때 이오지프는 루시펠라가 있는 휴게실로 향하는 제드와 마주쳤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서로 격식 있는 인사를 나누었으나 이오지프를 보던 제드의 눈빛은 뜨거웠다.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는 것 같았다.
“어쩌겠어, 그땐 그렇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는걸.”
이오지프는 아이딘 백작가에 얽힌 일을 생각하자마자 루시펠라를 이쪽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직감이라는 게 있단 말이야.”
“그래서 막무가내로 나섰단 말입니까? 이제껏 숨겨오던 걸 그렇게 쉽게 드러냈다고요?”
“윈터 경, 경도 그 직감으로 얻은 사람 중 하나가 아니던가?”
1기사단 내, 황실 근위대 소속 부단장 윈터.
그는 이전부터 1황자가 황태자가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사람 중 하나였다.
참고로 윈터는 소설만 보는 괴짜 2황자도 싫어했다. 그러나 차라리 2황자가 황태자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오지프는 연무장에 혼자 남아있는 윈터에게 자신을 드러냈다.
윈터는 당연히 이오지프를 따랐다. 윈터는 자신의 생각을 단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었기에 이오지프가 자신을 포섭한 계기가 궁금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했다. 바로 ‘직감’ 때문이었단다.
안경을 쓰며 책만 보는 샌님이기에 겁이 많을까 생각했지만 이오지프는 상당히 과감한 편이었다. 그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아군과 적군을 구분해 냈다.
그 ‘직감’이라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 세력도 없는 2황자가 이만큼이나 세력을 불려왔던 것은 그의 신중함과 더불어 사람을 보는 그의 능력 덕분일 것이다.
“그렇다면 제시한 조건이 겨우 소원 이뤄주기라니, 지나치게 포괄적이지 않습니까?”
“그런가?”
이오지프가 코웃음 치자 윈터는 화를 내고 싶었다. 이오지프가 윈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딘 백작 영애는 분명히 원하는 바가 뚜렷해. 내가 그걸 들어줄 수 있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런 강력한 감정이 없었다면, 대체 왜 황궁에서 앞뒤 가리지 않고 루이르크 경을 보자마자 뛰어내리려고 했겠어?”
아직도 선연히 기억났다. 한 사람을 인식하자마자 얼굴에 퍼져 나가던 경악, 분노, 그리고 새파란 증오를.
그것을 어떻게 실성했다는 말로 넘어갈 수 있겠는가.
그런 짙고도 강력한 감정을 가진 이가 소원이 없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이오지프는 아이딘 백작 영애라면 제드를 움직일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섣불리 압박을 가하다가는 제드를 영원히 적으로 돌릴 거라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묘한 확신이 있었다. 원하는 일이 있는 이상, 이오지프를 완전히 떨어뜨릴 수 없다는 확신.
“그리고 이젠 들켜도 상관없어.”
“…….”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아예 희망이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서 말이야.”
이오지프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황위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이젠 비밀로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황위 싸움은 시작되었으니까.
윈터는 이오지프가 마냥 무모하게 일을 저지르진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숨겨왔던 세월만큼 화려하게 터뜨리고 싶은데, 사정이 여의치가 않군.”
만약 2황자에게 자금이 충분했다면 이번 화재로 피해를 입은 쪽에 기부함으로써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다.
국민은 2황자의 이름을 외칠 테고, 길드에 관련되어 있는 상인도, 상인과 거래하는 귀족도 그에게 우호적이 될 테니 말이다.
“윈터 경은 화재 구역에서 계속 수고해 줘.”
“걱정 마십시오. 제 기사들이 사비를 털어 보급해 주고 있습니다.”
“회복은 어느 정도 되었나?”
“거의 되지 않았습니다.”
“부황께서도 이번 일에는 상당히 대응이 느리시군. 물가가 장난이 아니게 요동칠 텐…… 어?”
“무슨 일이십니까?”
이오지프의 눈썹이 일순 찌푸려지더니, 그가 이내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친애하는 아바마마께서는 백성을 가지고 놀고 계신가 보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아니야. 화재 구역에 대해서 지원을 아끼지 말도록 해.”
이오지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십니까?”
“형님에게 가봐야지. 금족령이 풀리셨다는데 제대로 인사도 안 드렸잖아.”
황태자가 다시 제 권한을 찾았는데도 이오지프의 표정은 여유가 넘쳐 보였다.
윈터는 그 모습에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경도 이만 가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윈터는 궁금증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이오지프가 말해주지 않으면 굳이 캐묻지 않았다. 이오지프는 그런 윈터의 성격을 좋아했다. 그는 복도를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황태자는 지금 기분이 아주 좋았다. 거의 한 계절 동안 묶였던 발이 드디어 풀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테미르는 아직 그를 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사실 끝까지 황위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테미르를 후계자로 지목한 이유는, 그만큼 다음 대 황위에 대한 황제의 의지가 확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이오지프가 황위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가는 황제에게 견제당하고 제거될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요사이 이오지프의 생각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황제는…….
그때 이오지프는 복도 저 너머에서 누군가가 뛰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너무나 의외의 인물에 이오지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로에르 영애?”
이오지프의 물음에 그녀가 멈춰 섰다. 이오지프의 시선이 굳었다. 클로렌스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두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감정적으로 잘 흐트러지지 않는 이가 무너진 모습이었다. 클로렌스가 훌쩍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머리는 어딘지 모르게 헝클어져 있었다.
이오지프의 시선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자 가느다란 목덜미에 남은 붉은 손자국이 보였다. 그에 클로렌스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명백한 두려움의 기색이었다. 이오지프는 이 영애에게 아주 불운한 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제가 어떻게 해드릴까요, 영애?”
“…….”
“못 본 척 넘어가 드릴까요, 아니면 황궁에 무사히 벗어나도록 도움을 드릴까요?”
클로렌스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가 슬며시 걱정되어 입을 열려고 할 때 클로렌스가 이오지프의 두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전하의 방에서 잠시 쉬게 해주세요.”
이때까지 이오지프는 클로렌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결심을 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에게도 그 특유의 직감이 통하지 않던 날이 있었던 것이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