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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64화 (64/173)

#64화 레이디의 숙명

2017.10.09.

클로렌스는 그것을 깨닫자마자 방을 뛰쳐나갔다. 자신의 부모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목적지 없이 달려가는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그녀가 1층으로 내려갈 때, 마침 시온이 걸어오고 있었다. 시온은 언제나 차분한 자신의 여동생이 무너져 내린 것을 보고는 당황한 듯했다.

“클로렌스? 이게 무슨…….”

“오빠!”

어렸을 때처럼 클로렌스는 그를 ‘오라버니’가 아닌 ‘오빠’라 부르며 그 품에 와락 안겼다.

시온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무슨 일이지?”

“아버지가 날 황태자 전하와 결혼시키겠대!”

그에 시온의 표정이 굳었다. 이윽고 그는 올 게 왔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클로렌스의 두 눈에 시온의 표정 변화가 여과 없이 들어왔다.

“설마…… 오라버니도 알고 있었던 거야?”

클로렌스는 배신감이 든 표정으로 물었다. 시온의 표정에서 대답을 읽은 그녀는 울음기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그래, 그랬던 거야! 그래서 오빠도 해럴드 오빠가 어렸을 때부터 내게 한 짓을 말리지 않았던 거지?! 아버지가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을 테니까. 오빠는 아버지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잖아!”

시온은 클로렌스의 분노 어린 외침을 무표정으로 보더니 이내 딱딱하게 말했다.

“클로렌스, 어리광은 그만 부려라.”

“오빠가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어!”

그녀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클로렌스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그 애처로운 얼굴에도 시온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나는 싫어! 그 사람이 얼마나 끔찍한 사람인지 그동안 내가 똑똑히 다 봤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과 결혼해? 오빠라면 그런 사람과 결혼할 수 있어?”

“가장 높은 여인이 되는 일이다. 아버님도 널 생각해서 그런 거야.”

“내가 아니라 로에르 후작가를 생각해서겠지!”

클로렌스가 날카롭게 말했다. 조용한 후작가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시온은 다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가문을 위해 행동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그렇다면 가문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질 말았어야지. 우리가 특권을 누리는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나?”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쭈그려 앉아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온은 달래줄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누구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않아. 가주가 아닌 나도, 여자인 너도 말이야. 너는 해럴드 녀석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똑같군.”

오히려 실망마저 묻어 있는 그 음성을 듣자, 클로렌스는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이 들었다.

안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이 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더라도, 그저 적당한 사람과 결혼해서 무난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자신은 지금까지 이상적인 레이디가 되려고 노력해 왔으니까.

사교계에서 무시 못 할 세력을 가졌다고 해서 착각했다. 자신은 가문을 위하면 어디에서나 팔려갈 수 있는 몸이었다. 그저 아버지의 손짓 하나에 인생이 결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가문을 위해 팔려가는 신세는 매한가지인데 그동안 무슨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하고 아래로 내려다보았던 것인가. 그녀는 자신이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일단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려서 혼인하기 전엔 네가 하고 싶은 거라면 다 하도록 해주겠다. 그게 내가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야.”

시온의 냉정한 목소리에 클로렌스는 멍하게 자신의 앞에 있는 그의 두 다리를 응시했다. 절망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

“예정대로 연회를 연다고?”

편지를 읽으며 루시펠라가 중얼거렸다. 예정대로 연회가 진행된다고 한다. 대신 피해민을 위한 ‘자선 파티’라는 생소한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문구를 보고 루시펠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선 파티가 뭐지?”

루시펠라가 묻듯이 로이자를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로이자도 모르는 듯했다. 클로렌스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클로렌스에게서 연락이 없네.”

드레스 준비와 더불어 제드에게 신경을 쓰느라 루시펠라는 클로렌스에게서 며칠간 연락이 없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클로렌스와 함께했던 시간은 루시펠라에게 즐거운 시간이었다. 동성 친구를 사귄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클로렌스는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높았으며, 섬세하며, 사려 깊고 똑똑한 친구였다. 배울 점이 많았으며, 그녀가 레이디에 대해 가졌던 편견을 깨놓은 소중한 사람이었다.

사람이란 참 간사하게도, 클로렌스와 접점이 없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그녀와 연락이 안 되니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루시펠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거의 사흘간 연락이 안 되었다. 아무래도 후작가에 한 번 방문하는 게 좋지 않을까?

보통 클로렌스는 이 정도로 연락이 안 된다면 걱정하지 않도록 이유를 말하는 사람이었다.

“로이자, 나갈 채비 좀 해줘.”

이들 사이에 따로 방문을 알리는 서신은 필요가 없기에 준비는 간단했다.

채비가 끝나자마자 루시펠라는 주저 없이 마차에 올라 로에르 후작가로 향했다.

마차 안에서 생각에 잠긴 그녀의 얼굴은 살짝 찌푸려졌다.

해럴드가 또 괴롭히는 건가? 듣자 하니 해럴드는 2기사단들 일원들과 같이 지방 수행을 나갔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설마 그 얼굴 반반한 첫째가 그녀를 괴롭히고 있나?

어떤 놈이든 클로렌스를 괴롭힌다면 가만 안 둘 거다. 그녀는 각오를 단단히 다졌다.

마차에서 내려 현관으로 가자 마중을 나온 집사가 다가왔다. 루시펠라는 집사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클로렌스는?”

“방에 계십니다. 일단 아가씨께 먼저 알리겠습니다.”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인 뒤 후작가를 훑어보았다.

정원을 이따금 지나가는 사용인들은 불안한 상황에 놓인 이들 특유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목소리를 내면 큰일이라도 난다는 듯 속닥거리고 있었다.

설마 자신이 모르는 무슨 거대한 일이 벌어진 건 아니겠지? 루시펠라가 슬며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아가씨께서 모셔오라고 하십니다.”

하녀 한 명이 다가와 말했다. 그에 약간 안도가 들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만날 수 있는 상황이라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클로렌스에게 무슨 일이 있어?”

루시펠라가 걸어가며 묻자 하녀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은 확실한 모양이었다.

잠시 후, 클로렌스의 방문 앞에 다다랐을 때 하녀가 조용히 말했다.

“아, 아가씨가 많이 힘들어하실 거예요.”

“뭐?”

더 자세히 물어보기도 전에 하녀는 허리를 숙이고는 사라졌다. 루시펠라는 하녀가 사라진 쪽을 보다가 한숨을 쉬며 문을 두드렸다.

“클로렌스, 나 왔어. 들어갈게.”

“들어오세요.”

힘없이 들려오는 클로렌스의 목소리에 루시펠라는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눈 안으로 들어온 방 안의 광경에 루시펠라는 놀랐다. 방에 커튼이 쳐져 있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커튼 틈 사이로 살짝 들어오는 햇빛만이 적어도 창문이 어디 있는지는 분간하게 해주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어둡게 하고 있어?”

루시펠라가 커튼에 손을 올릴 때였다.

“그냥 두세요.”

“뭐?”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기에 루시펠라는 커튼을 걷었다. 그에 붉게 물든 클로렌스의 얼굴이 여과 없이 햇빛에 노출되었다.

설마, 맞은 건가? 루시펠라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너, 누가……!”

화를 내려던 루시펠라는 자세히 보니 클로렌스의 얼굴이 울어서 빨개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맞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분노가 가라앉는 것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누가 널 울렸는데?”

“루시…….”

클로렌스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우는 걸 달래주는 데에 약한 루시펠라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녀에게 다가가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에 클로렌스가 루시펠라를 꽉 껴안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루시펠라는 무슨 일인지 계속 캐묻는 것을 그만두고 조용히 클로렌스의 등을 쓸어주었다. 분명 보통 일은 아니기에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위로가 먼저였다.

“루시,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줘요.”

“무슨 말이야?”

설마 그녀가 자신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 그렇다면 괜찮았다. 루시펠라는 클로렌스가 어떤 잘못을 해도 이해해 줄 생각이 있었다.

“황태자 전하와 제가 혼인할 거래요.”

“…….”

그 말을 들은 루시펠라의 얼굴이 굳었다. 혼인? 혼인이라면 결혼을 뜻하는 게 아닌가. 클로렌스가 혼인을 한다고? 그것도 황태자와?

루시펠라가 경악한 얼굴로 클로렌스를 바라보자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루시, 루시가 원래 원했던 자리잖아요. 제가 그걸 뺏은 거라고요.”

“클로렌스, 일단 진정해.”

물론 황태자비도, 미래의 황후도 진짜 루시펠라가 원했던 자리기는 했다. 그녀가 무모하게 자살쇼를 벌였을 만큼.

그렇지만 지금의 루시펠라는 황후고 황태자비고 관심조차 없었다. 아마 클로렌스가 말하지 않았다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과하려고 일단 만나자고 한 거예요. 루시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테지만.”

루시펠라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몇 번을 말해, 클로렌스? 나 기억을 잃었다니까? 아니, 기억을 되찾아도 별로 상관하진 않았을 거야.”

루시펠라는 그렇게 말하며 클로렌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참 바보같이, 본인이 더 이 약혼에 혼란스러울 텐데도 루시펠라에게 사과부터 하는 것을 보며, 루시펠라는 클로렌스의 상냥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울음 뚝 그쳐. 난 괜찮으니까.”

루시펠라가 담담하게 말하자 클로렌스가 훌쩍였다.

“루시, 나는 싫어요. 그러니까…….”

클로렌스가 훌쩍거리느라 무슨 말인지도 모를 말을 하자, 루시펠라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알아. 그놈은 형편없는 놈이잖아. 사실 너도 결혼하기 싫은 거지?”

그 말에 클로렌스가 울컥한 듯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앙∼ 루시!”

간신히 그쳤던 울음이 다시 터지자 루시펠라가 당황해 움찔했다.

어른스러웠던 클로렌스였지만, 지금은 영락없는 그 나잇대의 소녀였다.

“나는…… 하고 싶지 않아요. 황후 따윈 되고 싶지 않아요.”

“…….”

“조금 더 이대로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는 적어도 제 의사를 존중해 주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제가 행복할 수 있는 결혼을 하게 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

“하지만…… 황태자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지 제가 더 잘 아는데, 루시를…… 그렇게 만들고 웃고 있었는데……!”

“…….”

“약한 사람에게 상처 주고, 괴롭히고, 즐기고! 나는 이소타 황녀처럼 되고 싶지 않아요!”

그에 루시펠라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표정이 서글프게 일그러졌다.

클로렌스는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하긴,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약혼이 아닌 ‘결혼’이다. 그렇다면 이미 황제가 찬성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니, 황제 쪽에서 먼저 결혼을 하자고 움직인 것일 수도 있었다.

“후작 각하는 아무 말도 없으셔? 후작부인께서는?”

“이 혼사를 추진한 게 부모님인걸요!”

가문의 부흥을 위한 수단으로 살아가는 것이 귀족 여자들의 삶이었다.

레이디들이 중시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가장 비싸게 팔리기 위해 외모를 치장하고, 교양을 쌓는 삶. 결혼이란 그런 것이었다.

루시펠라는 제드를 떠올렸다. 그와는 약혼으로 맺어졌고 곧 결혼할 사이였다.

워낙 정신없이 엮였기에 인식하지 못했지만, 루시펠라와 그는 정략결혼을 하게 될 운명이었다.

첫 만남부터 어차피 이혼할 거라고 못 박아두었기에, 정략결혼이라는 단어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끝까지 제드를 싫어하고 거부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자신 역시 거부할 권리가 있는 걸까?

루시펠라는 귀족들에게 있어 이 결혼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간과하고 있었다.

그 티 파티의 주인으로 군림하던 클로렌스가 해럴드의 난입에 자리를 빼앗겼던 것처럼, 후작의 명령이라면 꼼짝없이 시집을 가야 하는 것이다.

루시펠라는 그것에 불합리함을 느꼈다.

루시펠라는 엉엉 우는 클로렌스를 내려다보았다. 진저리나게 싫어하는 그 표정을 보며, 새삼 그녀는 레이디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그 서글픈 삶을 자각했다.

이전, 해럴드를 막아주었던 것처럼 루시펠라는 클로렌스를 이 곤경에서 벗어나게 할 힘이 없었다. 그것이 못내 분해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무도 날 도와줄 수 없을 거예요, 아무도!”

클로렌스는 절망에 차 소리쳤다. 루시펠라는 클로렌스를 자신의 몸에서 떼어내고, 그녀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아니야, 클로렌스. 할 수 있을 거야.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루시펠라는 클로렌스와 두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널 도울 수 있는 건 너뿐이야, 클로렌스. 너는 똑똑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릴 줄 알아. 그걸 잘 알고 있는걸.”

“그건 여기서 아무 소용이…….”

“분명 국가에서 진행하는 결혼인지라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을 거야. 그렇지?”

루시펠라의 말에 클로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자. 찾을 수 있어.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거야. 내가 같이 찾아줄게.”

“…….”

루시펠라의 말에 클로렌스가 울음을 멈췄다. 조용한 방 안에는 훌쩍거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결혼을 무를 수는 없어요. 아버지에게…… 가문에 누가 될 거예요.”

클로렌스가 조용히 말했다. 루시펠라가 그 말을 듣고 답답한 듯 말했다.

“그 가문과 네 아버지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잖아. 그걸 생각해서는 안 돼. 그러니 답이 보이지 않는 거야! 가문이 너를 버린 이상 가문과 네 뜻이 일치하는 선택지는 없어.”

루시펠라의 말에 클로렌스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안 되면 병에 걸렸다고 하고 누워버려, 가문의 위신이 상하긴 하지만 뭐 어때? 황태자와 결혼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가문보다 중요한 건 너야!”

“……그건.”

클로렌스는 루시펠라의 말에 머뭇대는 기색을 보였다.

“아니면 도망을 치던지!”

“루시, 그건 정말 큰일 날 소리예요!”

“내가 책임질게! 우리 영지에서 조용히 살아가면 되잖아!”

루시펠라가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흥분해서 나온 에스텔의 버릇이었으나, 그것이 꽤나 듬직하게 보였는지 클로렌스가 멍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런 말을 하니까 루시가 나한테 청혼하는 것 같잖아요.”

루시펠라는 그 웃음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에스텔이었으면 절대 클로렌스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원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기 싫다고? 거절하면 되지, 도망치면 되지, 그냥 노력하지 않은 거 아니야?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하면서 징징대는 거잖아. 여자인데도, 자신은 이렇게나 노력하고 있다.

그냥 레이디로서 누리고 싶은 걸 포기하고 싶지 않은 거 아닌가.

그러나 레이디로 살아본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가문만을 위해 살아오고, 가문을 위해서 길러졌던 이가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녀에게 검이 삶의 이유였던 것처럼, 이들에게도 가문의 부흥은 삶의 이유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가문을 버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루시펠라는 클로렌스가 안타까웠다. 만약 그녀가 도망친다고 한다면, 그녀는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최대한 그녀를 도와줄 생각이었다.

클로렌스는 웃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방법을 찾으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을 그녀도, 클로렌스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내가 곁에 있을게.”

루시펠라가 결국 할 수 있는 건 그런 뻔하고 상투적인 말밖에 없었다. 그러나 클로렌스는 눈물을 닦아내며 웃으려고 노력했다. 루시펠라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숨이 턱 막힐 것 같았다. 클로렌스는 헐떡거리는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포기하지 않을게요.”

“응?”

“정말 안 되면 드러눕는 한이 있더라도 발버둥 쳐볼게요.”

그에 루시펠라가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서글픈 오후였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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