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유한한 시간 속에서
2017.10.05.
“폐하!”
쿨럭쿨럭!
섬뜩한 기침 소리와 함께 바이두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그에 시종들이 놀라 달려왔다. 바이두는 손을 들어 그들을 막았다. 입을 틀어막은 다른 쪽 손 사이로 피가 새어 나왔다.
“의원을 부르라!”
놀란 시종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바이두는 입에서 손을 떼며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주름진 손에 선명한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무수히도 죽여왔던 타인의 피가 아닌, 바로 자신의 피였다.
그의 입가가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큭큭거리며 낮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영원한 전성기는 없다.
그렇게 자신을 불태우며 천하를 호령했을 때 그는 자신의 젊음이 무한할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은 어느덧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필요 없다.”
그는 시종이 내민 손수건에 피를 닦았다. 비록 몸은 쇠약해졌을지언정 그의 두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종들은 황제의 말에 의문을 갖지 않은 채 그 말에 복종했다.
“테미르, 테미르를 불러 와라.”
계절이 한 번 지날 동안 황제는 황태자의 문안 인사도 받지 않았으며, 의도적으로 그를 모든 것으로부터 배제했다.
또한 황궁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기에 황태자는 봄의 축제에서도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고, 파티에 참석해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할 수도 없었다.
황태자를 불러오라는 말에 시종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오랜만에 황제가 황태자를 찾은 것이다. 행여나 황제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질세라 그들은 재빨리 황태자의 거처로 향했다.
황제는 황좌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그도 마냥 방관하며 지켜볼 게 아니라 마땅히 움직여야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테미르가 알현실로 들어왔다. 허둥지둥 달려온 것인지 그의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아바마마를 뵙습니다.”
테미르가 무릎을 꿇으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바이두는 그를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바라봤다.
숨 막히는 정적이 알현실에 자리했다.
“아, 아바마마……?”
테미르가 그를 불렀지만 황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무언의 시선이 오가고 결국 테미르가 황제의 두 눈을 피했다. 황제의 시선을 마주하기엔 그의 눈빛이 지나치게 매서웠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황제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반성은 끝났느냐.”
“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바마마.”
그 말에도 황제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 딱딱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테미르가 입을 열며 어떻게든 말을 이어갔다.
“제 부족함에 대해 되돌아보았습니다. 아바마마께서 지적하신 게 무엇인지 이젠 똑똑하게 알았습니다.”
“무엇이냐.”
“완벽해야 한다는 점을 간과했습니다. 황제는 완벽해야 합니다. 후환이 될 자는 모두 제거해야 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또다시 서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참 후 황제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그게 네가 찾은 답이라면 그것 역시 정답이겠지.”
황제의 어조가 한결 부드러워지자 테미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자신이 정답을 말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황제는 그 부분에 대해 더 말을 잇지 않고 말했다.
“금족령은 오늘로 풀렸다, 테미르. 다시 일을 시작하도록 하려무나.”
“정말이십니까?”
테미르가 환하게 웃었다. 이제야 그는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어디에도 나갈 수 없어 좀이 쑤시던 차였다.
테미르의 얼굴을 관찰하던 황제가 불쑥 물었다.
“네 아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말에 웃고 있던 그의 표정이 굳었다.
“아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그러고 보니 네가 이오지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구나.”
“그놈은 한심한 놈이 아닙니까. 언제나 책만 읽고, 제 눈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겁쟁이입니다.”
“그래?”
황제의 얼굴은 여전히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한데 갑자기 그놈 얘기는 왜 하십니까?”
“후환은 제거한다고 했는데, 네 답대로라면 이오지프 역시도 제거함이 옳지 않겠느냐.”
그에 테미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어쩐지 금방 넘어간다고 했더니 이것을 물어보려고 하신 모양이었다.
황제는 나약한 것을 싫어한다. 테미르는 황제의 시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죽일 가치도 없습니다.”
“…….”
“살려둬 봤자 아무것도 하지 못할 녀석입니다. 살아 있어도 죽어도 아무 위협도 되지 못한다면 굳이 번거롭게 죽이지 않는 게 낫습니다.”
테미르의 답은 칼날처럼 차가웠다.
그는 차마 황제 앞에서 자신의 형제를 죽이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아우인 이오지프에 대해 애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황제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다는 말을 듣고 혹 분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제아무리 자신들의 형제를 죽이고 황위에 올랐던 황제지만, 자신의 자식들이라면 태도를 달리할 수도 있었다. 테미르는 그 점까지 계산에 두었던 것이다.
“그래도 네 하나밖에 없는 아우에게 지나치게 냉정하구나. 혈육에 대해 애정이 없다니, 짐은 참 우려스럽다.”
그 말에 미소 짓던 테미르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대체 황제는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테미르는 이를 가는 대신 과장스러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바마마,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라온 아우입니다! 제가 어찌 그 녀석에게 칼을 들이대겠습니까? 아까 말했던 것은, 그저 왕족으로서 냉정하게 그 녀석의 처우에 대해 이야기한 것뿐입니다. 저는 그 녀석을 동생으로 아끼고 있습니다.”
황제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다행히도 잘 넘긴 모양이다. 테미르는 안심했다. 그러나 바이두의 눈동자에는 아들에 대한 차가운 조소가 깃들어 있었다.
“네게 혼담이 와 있다.”
“혼담이요?”
테미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혼담이 들어온 적은 많았다. 그러나 황제는 아직 시기가 아니라며 혼담을 대부분 다 유보해 왔다.
황태자비가 내정되어 있지 않았기에 그간 딸을 가진 귀족들은 혹시나 모를 미래를 대비해 황제에게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여왔다. 황태자의 결혼은 황제의 강한 권위를 더욱더 강력하게 만들어주는 요소 중 하나였다.
“네가 거절하고 싶다면 거절해도 좋다.”
“어느 가문의 여식입니까?”
그 와중에도 테미르는 자신이 결혼할 여자가 못생긴 추녀는 아닌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는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별 볼 일 없는 가문이면 거절하고 좋은 가문의 여식이라면 받아들이고, 첩은 따로 들여야겠군. 테미르가 그렇게 생각할 때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은 테미르는 눈을 크게 떴다.
“저, 정말입니까?”
“그래.”
테미르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나 괴로웠던 계절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행운이 덩어리째 굴러들어 오고 있었다.
“제가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제겐 과분한 가문인 것을요!”
“아직 공식적으로 공표하지는 않았으니, 함구하고 있도록 해라. 알겠느냐?”
“네, 명심하겠습니다.”
테미르는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음산하게 빛났다.
***
“수도 서부에서 산불이 났다고?”
루시펠라의 물음에 로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인트 공작령에는 마물, 수도 서쪽은 산불. 어디에서도 바람 잘 날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불은 껐어?”
“아니요, 그쪽이 상업 지구였는데, 그쪽까지 불이 번졌대요.”
루시펠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불이 산에 이어 사람이 있는 곳까지 옮겨 붙었다니, 건조한 봄날은 이래서 문제였다.
“사람들은 많이 다쳤어?”
“다행히 1기사단이 바로 파견되어 사람들이 많이 죽지는 않았는데, 길드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라 피해가 막심한가 봐요.”
상업 지구는 시장과 더불어 생산 길드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다.
수도의 큰 시장이 그곳에서 열렸으며, 수도에서 쓰는 물건들은 대부분 그곳에서 생산되었다.
그래도 인명 피해가 많지 않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재산을 잃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목숨을 잃으면 미래도 없는 법이었으니까.
루시펠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 폐하께서 손쓰시겠지요.”
“그럼 다행이지.”
루시펠라는 소파에 앉았다. 그러곤 옆에 서 있는 의상실 직원을 보며 말했다.
“그럼 드레스는 맞추지 않아도 될 것 같네.”
루시펠라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의상실 직원이 말했다.
“아가씨, 아직 드레스 치수를 다 재지 않으셨어요.”
“루이르크 공작이 파티를 열 리가 없잖아. 지금 이런 사고가 일어났는데 하하호호 웃으며 춤이나 추겠어?”
루시펠라의 말에 로이자와 의상실 직원이 시선을 교환했다.
“왜 그래?”
루시펠라의 물음에 로이자가 말했다.
“아니요, 너무 상식적인 말씀이시라서…….”
“상식적인 말이라고?”
“아니, 보통 폐하의 명이 없는 이상 파티를 취소하지는 않거든요.”
“그럼, 계속한다고?”
“혹시 모르니까 드레스는 맞추셔야 할 것 같아요.”
루시펠라는 얼굴을 찡그렸다. 치수를 재고 색깔별로 천을 얼굴에 대보는 것에 질려 있었는데 이 짓을 더 해야 하다니. 한숨밖에 안 나왔다.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 과연 클로렌스가 소개해 준 의상실 직원답게 꼼꼼했다.
덕분에 루시펠라는 지금 거의 반나절을 드레스 맞추기에 매여 있었다.
“여기저기서 난리네.”
“네?”
“아니, 하인트 공작령도 그렇고, 수도 서부도 그렇고…….”
그 말에 로이자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았다. 루시펠라의 표정은 심각하게 변해 있었다.
약 사흘이 지났다. 제드에게서 편지가 올 법했지만 아직까지 소식이 없었다. 제아무리 수도와 공작령의 거리가 멀다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 늦었다.
그래, 뭐 자신의 존재가 그렇게 기억할 만한 그런 존재는 아니니까. 그래도 편지를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도착했다는 편지 한 장 정도는 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
이전 제드가 루시펠라에게 품었던 생각을 그대로 하며 루시펠라는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이런 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다. 만약 제드가 편지를 보내지 못할 상황이라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제드는 마물 토벌전을 간 것이다.
설마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니겠지? 생각 없이 소규모로 갔다가 마물이 생각보다 대규모라서 포위당했다던가. 아니면 협력을 약속한 귀족이 제시간에 군대를 보내주지 않아 위기에 처했다던가. 아니, 몸을 다쳤을 수도 있다!
루시펠라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줄줄이 생각했다.
혹 군대를 보내야 하는 게 아닐까? 자신이 내려가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아가씨, 팔 좀 펴보세요.”
“응.”
“여기 소매는 레이스를 다는 것보다는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화려한 루비 팔찌가 보이는 게 낫겠네요.”
“그래, 알아서 해.”
루시펠라는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편지를 써볼까?”
“공작 각하께요?”
의상을 맞추다가 뜬금없이 나온 말인데도 로이자는 마치 루시펠라의 생각을 읽는 것 같았다.
“아, 아니!”
“에이, 아가씨. 제가 아가씨 마음을 모르겠어요.”
로이자의 말에 루시펠라가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삐죽였다.
요즘 로이자는 지나치게 자신에 대해 잘 알았다. 말도 거침이 없어졌다. 지적하고 싶었으나, 아가씨를 닮아간다며 집사가 로이자에게 꾸지람한 것을 목격한 이후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혼난다고 또 훌쩍이는 걸 보는 것보다는 나았기 때문이다.
“한데 가신 지 사흘밖에 안 지났어요. 상황이 정리되면 편지도 보내주시지 않을까요?”
“원래 도착하자마자 보내야 하는 거 아니야?”
“아가씨는 보내셨어요?”
루시펠라의 말에 그녀는 곰곰이 생각해 보다 말했다.
“아니.”
하지만 그때는 우리 별로 안 친했단 말이야. 루시펠라는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지금과 그때가 무엇이 다른 거지?
그때, 먼 길을 떠난 루시펠라는 제드와 편지를 주고받는 것에 대해 어떠한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영지로 내려가도 도착했다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으며, 제드의 안부 인사가 담긴 편지가 없어도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당시 그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까.
자신의 마음이 달라진 것일까? 편지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하자 루시펠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누군가에 대해 생각하고 덧그리는 자신이 낯설었다.
칼리드에게도, 다른 동료에게도 이런 적은 없었던 것이다.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
칼리드의 파티는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는데, 그 파티에 대한 생각보다 지금 그에게 연락이 안 오는 게 더 신경 쓰이는 걸 보면 말이다.
***
클로렌스는 눈을 크게 뜬 채 자신의 부모님을 보았다.
“아니죠?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어머니.”
이럴 수는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클로렌스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식에 이미 그녀의 얼굴은 초조함이 드러난 지 오래였다.
“제가 황태자 전하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요?”
“왜 말이 안 되느냐? 너도 혼기가 찼고, 황태자 전하도 이제 정말 혼인해야 할 때란다.”
“아버님!”
후작의 태연한 목소리에 클로렌스는 비명과도 같이 소리쳤다.
“왜 하필 황태자 전하죠?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황태자 전하는, 황태자 전하는……!”
그 포악하고 더러운 성격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황태자는 그녀를 볼 때마다 가끔 뱀과 같은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고는 했다. 시녀와 하녀들을 학대한다는 소리 또한 들었다. 루시펠라가 호수에 뛰어들자 낄낄거리며 웃었던 그다.
한데 그런 미친 인간과 결혼한다고? 평생을 함께해야 한다고?
클로렌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로에르 가에서 황후를 배출하는 거란다. 가문을 위해 영광으로 여겨야지.”
“그럼 저는요!”
클로렌스가 배신감 어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클로렌스! 황후가 될 여자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다니! 교육이 좀 필요할 것 같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누구지? 자신의 아버지가 맞는가?
아버지는 로에르 후작가의 외동딸인 자신을 아꼈다. 비록 둘째 오라버니인 해럴드가 학대하는 것을 방치하긴 했지만, 그녀는 사랑받았다고 생각했다.
비록 혼인을 하게 되더라도, 그녀는 적어도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남자와 혼인할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후작은 그녀에게 들어온 많은 혼담을 거절하며 클로렌스에게 말했던 것이다.
“모든 가문이 눈에 차지 않아. 어떤 가문에 시집보내더라도 너에게는 아깝구나.”
“조금 더 너를 곁에 두고 싶단다.”
“클로렌스, 너는 가장 뛰어난 남자에게 시집보낼 거다.”
그때, 그 말을 했던 표정과 한 치도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후작이 말했다.
“나라에서 가장 높은 여인이 되는 거란다. 기뻐해야지.”
“싫어요, 저는 싫단 말이에요!”
그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머리로는 이미 이 혼사가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도움을 청하려 자신의 어머니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어머니, 제발 뭐라고 말 좀 해주세요! 제발 말려주세요! 싫어요. 황후가 되고 싶지 않아요!”
후작부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클로렌스, 내가 언제나 말했지? 난폭한 남편을 들일 수도 있는 법이니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해럴드에게 학대를 당할 때 그녀의 부모님은 그렇게 말했다. 그것을 떠올리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설마……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건가요?”
클로렌스는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를 처음부터, 황태자 전하와 결혼시킬 생각이었던 거예요?”
해럴드가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방치한 것도, ‘난폭한 남편을 얻을지도 모르니 참으라’고 말한 것도, 혼기가 찰 때까지 혼인시키지 않은 것도 모두 그녀의 미래는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나?
클로렌스는 제발 아니길 바라며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자신의 부모였기에 이들이 표정으로 어떤 말을 하는지 클로렌스는 똑똑히 알았다.
정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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