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그는 동화를 바라지 않았다
2017.10.02.
“다 끝나셨습니까? 어서 가셔야 합니다.”
“알고 있어.”
제드가 말에 올랐다. 한가롭게 마차를 탈 만한 여유 따윈 없었다. 루시펠라를 만나고 로에르 후작 일가와 인사한 것만으로도 벌써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출발하지.”
제드의 몸짓에 말이 밤의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며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리게 될 것이다.
기쁜 일로 가는 것도 아니었으며, 고된 여정이 예상되었다. 가서도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지라 제드의 심기는 불편해야 마땅했지만, 말을 타기 전 보았던 그의 표정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것을 눈치챈 버나드가 힐끔거리며 기사들과 눈짓을 교환했다. 그들도 버나드와 똑같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앞서 나가기에 제드의 표정은 알 수 없었으나 이상하게도 왜 이렇게 저 뒷모습이 경쾌해 보인단 말인가. 기우겠지. 버나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따라잡으려 말을 몰았다.
한편, 맨 앞에서 달려가는 제드는 웃고 있었다. 참 귀엽지 않던가. 정말로 시간을 내서 그녀를 만난 보람이 있었다.
이번에 내려가면 오랫동안 루시펠라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고민 끝에 발걸음을 돌려 루시펠라에게 갔다.
그는 이미 이오지프가 루시펠라의 근처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알짱거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이오지프는 제드와 약혼할 어떤 여자든지 그런 식으로 접근할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루시펠라를 따라다니는 건 예상보다 좀 집요했지만.
이오지프는 황위를 강하게 열망한다. 그랬기에 이오지프 녀석이 루시펠라를 회유할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이오지프는 아주 아슬아슬하지만 적어도 지켜야 할 선을 알고 있는 이였으며 황위 싸움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자신의 신념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제드는 아버지가 그렇게 빠져 있던 정치를 혐오했다. 루시펠라에게 마음이 있다고 한들 그 부분은 별개인 것이다.
본디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이들이 귀족이란 족속들이었고, 제드는 루시펠라가 어떤 이득을 바라 그를 움직이려 한다면 황위 싸움을 제외하곤 기꺼이 움직여 줄 생각이 있었다.
이것은 이용당해도 마냥 그녀가 좋다는 순정이 아닌, 숨쉬듯 자연스러운 일이라 그런 것이었다.
사랑은 타산 없이 순수하다고 하지만, 사랑과 계산은 양립할 수 있었다. 서로 이용하는 것은 숨쉬듯 당연하였으며, 제드는 그것을 싫어했지만 어느 정도 받아 들이고 있었다.
그가 꿈꾸는 것은 그냥 사랑이었지, 동화와 같은 완전무결한 순수한 사랑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용당하는 것이 불쾌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루시펠라가 이오지프의 회유에 넘어가서 그를 설득하려 했더라도 실망을 할지언정 그녀를 밀어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목적 때문에 그녀가 접근해 온다면 그 기회를 이용해서 루시펠라의 마음을 앗아가 버리는 자신의 목적을 이룰 생각마저도 하고 있었다.
본디 전술의 기본은 역공이었으며, 제드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랬기에 로에르 후작가에 도착했을 때, 이오지프가 루시펠라를 휴게실에 데려다주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그는 불쾌한 감정만을 느꼈지 분노는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루시펠라가 미묘한 표정으로 서 있었을 때, 제드는 자신의 마음이 사정없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제드는 직감적으로 이오지프가 루시펠라에게 무언가 입을 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놈이 무슨 말을 했기에 그녀가 고민에 빠져 있었던 것인가? 루시펠라의 표정은 분명 이전과 달랐다.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막상 다가오자 제드는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과연 루시펠라는 어떤 행동을 보일까?
이오지프가 할 말은 뻔했다. 그를 설득하라고 하겠지. 유혹하라고 할 수도 있었다.
만약, 루시펠라가 선택하는 수단이 유혹이라면 그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이용이라는 게 사실 당연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드는 꼬인 감정이 들어 일부러 루시펠라의 얼굴색을 지적했다. 그녀는 당황하며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제드는 그것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이내 결심하듯이, 이오지프에 대해서 낱낱이 얘기했던 것이다.
‘사람 하나는 잘 봤지.’
제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영지 내에 일어난 골치 아픈 일 때문에 머리가 아파야 마땅했으나, 머리가 지끈거리기는커녕 꼭 환하게 불이 켜진 것 같았다.
어떻게 그걸 대놓고 줄줄 말할 생각을 했을까. 생각만 해도 입에 미소가 절로 걸렸다.
이오지프가 허튼소리는 하지 않았을 테고, 그가 제시한 건 어느 것보다 매력적일 터다.
그런데 루시펠라가 그것보다 자신을 선택해 준 것이다. 만약, 이게 유혹하는 거라면 분명 그녀는 고단수일 것이다.
그래, 생각해 보니 루시펠라는 사람을 믿겠다고 했다. 사람의 호의를 의심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누군가를 이용할 수도 있다는 건, 그녀의 인간성에 대한 모독이었다. 제드는 자신이 루시펠라를 믿지 못했던 것을 반성했다.
“당신이 날 오해할 거잖아. 나는 그런 게 싫어!”
그는 루시펠라의 얼굴을 떠올리며 웃었다. 실망시키는 게 싫냐는 말에 그쪽이 오해하는 게 싫다고 둘러댔다. 결국 두 개 다 같은 말이 아닌가.
제드는 바보가 아니었다. 루시펠라의 행동에는 분명 그에 대한 호의가 존재했다. 희망이 없는 건 아니라는 소리였다.
“각하, 앞을 조심하십시오!”
다급히 들려온 말에 그가 황급히 앞을 보았다. 말이 어느덧 강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마터면 밤중에 의도치 않은 목욕을 할 뻔한 제드는 고삐를 잡아당겨 방향을 틀었다.
“약혼자라서 그러는 거야, 약혼자라서!”
여전히 제드의 귓가에는 루시펠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말할 때 그녀의 뺨은 분명히 새빨갰다.
그때 손가락으로 뺨을 한 번 쿡 찔러봤어야 하는데, 그건 좀 아쉬웠다.
그러다가 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런데 이오지프는 그녀에게 어떤 제안을 한 것일까.
그 역시 루시펠라에 대해 조사한 지 오래였다. 한데 그녀에게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또 있다는 것일까.
제드가 얻을 수 있는 정보도 많았지만, 그 음침한 황자놈이 얻을 수 있는 정보 역시 만만치 않았다.
루시펠라가 이오지프의 제안을 거절한다는 걸 보니 협박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고, 그렇다면 뭔가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건가?
그렇다면 이오지프가 아니라 자신이 들어줄 수도 있는데, 왜 그에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일까.
그럼에도 루시펠라가 원하는 게 있다는 사실에 제드는 안심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은 가장 강력한 약점이 되니까. 예를 들어 제드에게 루시펠라가 약점이 되어버렸듯이 말이다.
어리석게 그녀를 마음에 둔 걸 너무 많이 표를 내버렸다.
이오지프 녀석이 그렇게 눈치를 챌 만큼.
그래도 포옹은 분명 따스했지. 이번엔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등을 감싸왔다.
연인의 포옹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지만, 제대로 힘주어 마주 안았다는 게 어딘가.
게다가 잘생겼다고도 했다. 그는 자신의 잘생긴 외모가 새삼 자랑스러웠다.
마지막으로 본 루시펠라의 표정은 묘하게 서운해하는 것 같았다.
어서 일을 끝내야지. 가자마자 처리하고 바로 수도로 갈 것이다.
그의 얼굴은 심각하다가 풀리다가를 반복했다.
제드는 자신이 루시펠라를 보고 싶어 할 거라는 것을 알았다. 일이 끝나고 바로 수도로 가면, 그때는 계속 볼 수 있게 결혼을 해야겠다.
“각하, 조금만 천천히 가주십시오!”
버나드의 외침을 무시한 채 제드는 더욱 빠르게 말을 몰았다.
***
마차에서 내린 루시펠라는 저택 정원을 천천히 걸어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아까 칼리드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열흘 후, 칼리드의 저택.’
클로렌스는 칼리드가 사교계에서 딱히 활동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그가 움직이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가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걸까.
“루시, 돌아왔니?”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작이었다. 루시펠라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다녀왔어요.”
“로에르 후작께서는 대접을 잘 대해주더냐?”
“물론이죠.”
로에르 후작과 아이딘 백작은 연고가 없기도 했고 초대 또한 없어 저택에 남아 있었다.
백작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랑스럽다는 애정이 뚝뚝 흐르는 표정이었다.
“정말 루아나를 닮아가는구나.”
루시펠라는 그에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백작은 가끔씩 루시펠라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어머니, 루아나를 언급하고는 했다.
문득 루시펠라는 백작과 얼샤의 관계에 대해 떠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 루아나라는 이름을 들어도 별 감흥이 없었던 이유는 그녀가 루시펠라의 어머니였지 에스텔의 어머니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루아나를 언급한 이상 얼샤와 백작에 대해 캐볼 여지는 충분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얼샤 출신이었나요?”
루시펠라의 말에 백작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걸 대체 어떻게 안 거니?”
“기억에 남아서요.”
루시펠라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에 백작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 어머니는 얼샤 출신이었단다.”
“그런데 아버지와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그 말에 백작이 걸음을 멈추며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이 대화가 자연스럽지 않은 건가? 아니, 그렇진 않을 것이다. 루아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자신이 아닌 백작 쪽이었다.
루시펠라가 그의 시선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그제야 백작이 입을 열었다.
“네 어머니가 양친을 잃고 조모부가 있는 이곳으로 몸을 의탁해 왔단다. 그때는 얼샤와 얀스가르의 관계가 우호적이었으니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지.”
루시펠라는 곰곰이 이 육신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은 루아나가 마지막으로 죽기 전의 기억밖에 없었다.
에스텔에게도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은 있다. 한데 루시펠라에게는 왜 그런 기억이 없지? 그런 기억이 안 나는 건가? 아니면 애초에 없었던 건가.
“폐하께서 어머니를 알고 있으셨던 것 같았어요.”
그때는 자신이 루시펠라라고 인지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이 부분을 캐볼 생각을 못 했다.
한데 황제는 분명 ‘루아나’라고 말하며, 그녀의 딸인 루시펠라에게 약간의 호의를 보였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 것일까?
루시펠라의 물음에도 백작은 별로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당연히 알고 계시겠지. 루아나는 오자마자 폐하의 말벗이 되었으니까.”
“말벗이요?”
그건 또 무슨 말이지?
백작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루시, 어머니께서 이소타 황녀 전하를 모셨던 시녀라는 건 알고 있니?”
‘이소타’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루시펠라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주먹은 바르르 떨렸다.
“당연히…… 모르죠.”
“얀스가르에 오기 몇 년 전 네 엄마는 얼샤의 왕궁에서 황녀 전하를 모시고 있었단다.”
“……그랬나요?”
이소타는 현 황제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동생이었다.
현 황제가 황위에 오르기 위해 살해한 남매들 중 유일하게 살려둔 누이.
한데 형제의 나라인 얼샤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 그녀는 얼샤의 마지막 국왕, 아렌트와 혼인을 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여동생이 얼샤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 하셨고, 루아나는 그 이야기를 곧잘 들려주고는 했지.”
그렇게 된 일이었구나. 얼샤의 왕궁에서 일했다면 자신과 루아나가 한 번쯤 만났을까?
아니, 나이를 계산해 보면 루아나가 일했을 때 에스텔은 뒷골목을 전전하고 있었을 터였다.
“폐하는 황녀 전하에 대한 그리움을 루아나의 말을 들으며 달랬단다. 네 어머니는 그 자체로도 밝고 아름다운 사람이었으니, 폐하가 네 어머니를 아꼈던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그렇게 말하는 백작은 회한에 젖은 듯했다.
누구나 다 사랑할 만한 여인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일까.
루시펠라는 백작의 우울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머니, 루아나는 참으로 백작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던 모양이다.
그래도 루시펠라의 어머니가 이소타 전하를 모셨던 사람이라니.
그녀는 이소타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녀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루시펠라는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얼샤와 아이딘 백작의 관계를 알고 싶었다.
이오지프는 아이딘 백작이 얼샤 독립 세력을 지원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근거 없는 의혹은 아닐 터였다.
“그럼, 어머니 쪽 친척들과 연락하고 있어요?”
루시펠라의 물음에 아이딘 백작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말했다.
“루시, 밤바람이 춥다. 이제 그만 들어가려무나.”
더 정보를 얻고 싶었지만 루시펠라는 여기서 멈춰야 함을 알았다.
“아버지는요?”
“난 조금 더 걷고 싶구나.”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필요한 정보는 아니었지만, 루아나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았다.
하지만 칼리드와의 대면과 더불어 예상치 못하게 이소타라는 이름을 듣자 마음이 심란했던 루시펠라는 백작의 안색을 살피지 못했다.
루시펠라가 안으로 들어가고 나자 백작은 한숨을 쉬며 등을 돌려 정원의 오솔길을 걸었다.
그는 생전에 아내가 좋아했던 장미 덩굴 쪽으로 다가갔다.
봄을 맞이해 장미 덩굴은 작은 꽃봉오리가 망울져 있었다. 아직 만개하려면 멀었으나 백작은 그것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쉐인.”
그가 입을 열자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백작보다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그보다 더 건장하며 탄탄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글쎄요,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루아나가 얼샤 출신이라는 걸 루시에게 내 입으로 말한 기억이 없다네. 무언가 이상하지 않나?”
백작은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루아나 님이 얼샤 출신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기억을 잃기 전 어떤 일로 들었던 게 기억난 게 아닐까요?”
“루시가 기억을 잃기 전의 성격이라면 내게 바로 달려와 물었겠지. 아니면 하녀 아이들에게 물었다는 게 내 귀에 들려왔거나. 얼샤는 마지막 복속국이 아니던가.”
루시펠라가 사교계에서 활동하는 동안 얀스가르와 얼샤는 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어머니가 얼샤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예민하며 날카로웠던 그의 딸은 당장 확인을 해왔을 것이다.
“최근 누군가가 말해주었다는 게 더 정확한 추측이겠지.”
“…….”
“루시가 얼샤 쪽에 대해 떠보려는 것 같았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가씨는 그저…….”
“아니, 분명 떠보려고 했네.”
아이딘 백작은 단호했다. 그는 루시펠라가 들어간 저택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있는 방문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그것을 바라보던 아이딘 백작은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그때의 충격으로 루아나에 대해 떠올리기도, 입에 담기도 싫어하던 아이인데, 제가 먼저 루아나에 대해 물어볼 리가 없지.”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기억을 잃어버렸지.”
아이딘 백작은 손을 들어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루시는 기억을 잃은 이후로 루아나를 정말로 닮아가고 있어. 그 성격까지 말이야.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쉐인의 대답에 아이딘 백작이 쓰게 웃었다.
“그래 봤자 하인트 공작 녀석이 결국 우리 루시를 데려가겠지.”
그에 쉐인이 물었다.
“그렇게 싫으셨다면, 약혼하지 않으셨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혼약을 파기할 수도 있고요.”
“아집을 부리고 싶지는 않네.”
“…….”
“대가는 루아나로 충분해.”
그 말에 쉐인이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했다. 우울한 침묵이 두 남자 사이에 자리해 있었다.
백작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쉐인, 루시가 그간 외출하면서 접촉한 이들이 누구인지, 우리가 얼샤 쪽과 접촉했다는 정보가 누구에게 흘러갔는지 알아봐 주겠나.”
“알겠습니다.”
말이 끝남과 함께 그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이딘 백작은 루시펠라의 방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간, 그의 두 눈에는 서늘한 증오의 빛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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