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폭로와 포옹
2017.09.28.
“무슨 말?”
제드의 물음에 루시펠라는 다시 한 번 망설였다. 이것을 말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을까.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드는 인내심 있게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아, 급한 일이 있다고 했지. 그럼 다음에…….”
“아니, 여기서. 기다릴 수 있어.”
꼭 기회를 주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미 말하기로 한 것이다. 루시펠라는 낮은 한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황자 전하와 만났어.”
“그렇겠지. 이곳에 있었으니까.”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에 루시펠라는 어쩐지 맥이 빠졌다.
그러면서도 제드는 더 말해보라는 듯 루시펠라의 두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황자 전하께서는 다음 대 황제가 되고 싶다고 했어.”
“그래, 그 녀석이 내게도 그렇게 말했었지.”
역시나 이오지프의 말대로 제드와 이오지프는 가까운 사이인 모양이었다.
“전하와 친구야?”
루시펠라가 물었다. 제드는 피식 웃었다.
“거기까진 아니야. 우리 아버지 밑에서 같이 검을 배운 일종의 동료지.”
역시나. 이오지프는 제드를 친구라고 했지만, 제드는 이오지프를 친구라 하지 않았다. 이오지프와 제드의 사이에서는 그런 거리가 존재했다.
“그래서?”
제드가 말을 내뱉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미 알고 있다면 이오지프의 비밀을 더욱 지켜줄 의리 따윈 없다.
“나보고 당신을 설득하라고 했어.”
“설득?”
“그러니까, 당신이 내게 호의적이니 내가 말을 하면 당신이 내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말했어. 그러니까…….”
“내가 영애의 부탁을 듣고 황위 싸움에서 그 녀석의 편을 들어줄 거라고 이야기했다고?”
“그래.”
어이없다는 듯한 제드의 물음에 루시펠라가 답했다.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진 것이 아니다. 그를 이용한 것도 아니며, 그에게 황위 싸움에 참여하라는 말도 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한순간에 그를 이용할 생각을 했다는 것에 대단한 잘못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한데 그걸 내게 왜 말하는 거지?”
제드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래, 누군가 자신을 이용한다니 화가 나기도 하겠지. 루시펠라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신뢰를 배반하고 싶지 않아서야. 혹여 그쪽이 다른 길을 통해서 내가 황자 전하에게 그런 부탁을 받은 걸 알았다고 한다면, 내게…….”
루시펠라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그다음 말은 뻔했다. 그러나 그 뻔한 말 때문에 크게 놀랐다.
“내가 영애에게 실망할 것 같아서?”
제드가 정확히 짚어 되물었다. 그래, 실망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실망할 것 같아서 말을 했다고? 지금? 그의 ‘실망’이 대체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루시펠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해할 것 같아서!”
“무엇을 오해한다는 거지?”
제드의 물음에 루시펠라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이오지프가 한 말은 간단했다.
좋게 말하면 제드가 루시펠라가 하는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에게 더욱 호의를 품게 하라는 말이었지만,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그를 유혹하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하는 유혹을 제드가 오해하지 말라는 말인가?
말이 이상하지 않은가.
루시펠라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이 말을 듣고도 당신한테 아무 말도 안 한다면, 내가 당신에게 진짜 호의를 보여도 그 진심을 의심할 거잖아. 나는 그런 게 싫어.”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았어.”
제드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루시펠라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을 납득시키려고 노력하는 이 같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자신을 이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삶은 생각만 해도 끔찍해. 그런 게 싫었다고.”
아,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루시펠라는 얼굴을 벽에 쿵쿵 박고 싶었다.
말을 그럴듯하게 하고 싶었지만, 말이 계속 꼬였다. 역시 말을 너무 충동적으로 한 것이다.
제드의 입가에 미소가 서리기 시작했다. 아니, 뭐가 그렇게 우스운데. 루시펠라가 그를 노려보자 제드가 말했다.
“나를 생각해서 그렇게 말했다는 건 알겠어.”
“그래, 약혼자라서 그런 거야, 약혼자라서!”
그녀는 가장 편리한 대답을 했다.
“물론, 당신이 내가 부탁한다고 해서 그런 걸 함부로 결정 내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잘 알아.”
“맞아. 나는 황위 다툼에 끼어들 생각이 없어. 누가 어떤 식으로 부탁해도 말이야.”
제드의 말에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그럼, 그래야지. 그래도 황위 싸움에 대해서 칼 같은 단호함을 보이니 그 점은 좋았다. 그래서 이오지프가 루시펠라에게 설득하라고 부탁했을 터였다.
“…….”
“왜?”
루시펠라는 또다시 자신을 관찰하는 제드의 시선을 느꼈다.
“내 말에 대해 별로 유감이 없나? 영애의 부탁에도 안 된다고 하는 거잖아.”
“나를 위해 가문과 목숨을 걸어달라고? 그거 가지고 서운해할 거였으면 내가 그쪽에게 왜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인간은 자신을 뭐라고 생각한 거지?
루시펠라의 억울해 보이는 얼굴을 본 제드가 다소 맥이 빠진다는 얼굴을 했다.
왜, 이것에 대단히 서운해해야 하는 일이었나? 그렇지만 가문의 존망을 내건 황위 싸움이 아닌가. 그거 가지고 서운함을 느껴야 한다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뭐, 영애의 그런 점이야 알고 있었으니.”
제드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
“그래서, 어떤 조건으로 협력을 부탁받은 거지?”
“어?”
“조건 말이야. 이오지프가 마냥 자기 이상을 들이대지는 않았겠지.”
역시 말을 너무 성급하게 했다.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기에 순간의 충동으로 무작정 제드에게 말한 것이 잘못이었다. 당연히 무언가를 부탁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약속하게 마련이다. 제드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루시펠라는 입을 다물었다. 얼샤의 독립. 소원. 그것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소원, 이라고 애매하게 대답한다고 해도, 그는 루시펠라의 소원이 무엇인지 캐물을 게 뻔했다.
“내가 들어줄 수 없는 건가?”
제드가 황제가 되지 않는 이상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루시펠라는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물었다.
“내가 말하면 들어줄 거야?”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그거 기쁜데?”
정말이었다.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들어줄 거라고 말하는 망설임 없는 대답에 그의 호의가 느껴졌다. 이 사람은 이제 자신을 싫어하거나 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건 확실했다.
“그래서 그게 뭐지?”
“어?”
“그게 무엇인지 정도는 알아야 움직여 주지.”
루시펠라의 바람을 제드에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루시펠라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을 본 제드의 얼굴이 굳더니 이내 찌푸려졌다. 갑자기 왜? 루시펠라가 의아한 모습을 하며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마치 그는 억울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렇게 웃음으로 대답을 때우는 건 어디서 배운 거지? 로에르 후작 영애에게서 배운 건가?”
“말하자면 그렇지. 왜 이상해?”
“아니, 그게…….”
제드는 말을 잇지 않았다. 대단히 못 볼 꼴을 본 듯한 그의 표정에 루시펠라의 기분이 살짝 나빠졌다.
“그러는 그쪽도 늦어놓고서 웃음으로 때운 건 똑같잖아.”
“뭐?”
제드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루시펠라는 그에 말했다.
“얼굴 잘생긴 거 믿고 그냥 웃는 건 그쪽도 매한가지면서, 그런 표정을 짓는 건 또 뭔데. 내 웃는 얼굴이 그렇게 이상해?”
“하.”
제드가 어이없다는 듯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뭐, 화를 내기라도 하게? 남은 기껏 생각해서 고민하다가 말해주니까, 이렇게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제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래, 영애가 나를 잘생겼다고 생각한 건 알겠어. 이쯤 해두지.”
“뭘 이쯤 해둬?”
“영애의 소원이 뭔지, 이오지프의 조건이 뭔지 더 묻지 않겠어.”
“…….”
“그래도 신뢰를 지켜주려 한 영애에게 고맙다는 말은 해야겠지. 웃음으로 안 때우고.”
제드가 웃으며 속삭였다.
어라, 이 녀석 왜 이렇게 가까운 거지? 루시펠라가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이미 그의 한쪽 손은 어깨에 올려져 있었고, 다른 손은 이마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의 손이 앞머리를 쓸었다.
뒤이어 이마에 닿는 보드라운 입술의 느낌에 어쩐지 뺨이 붉게 물들었다.
이마에 하는 키스는 애정과 더불어 정중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루시펠라는 자신이 지나치게 그를 의식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힐끔거리며 쳐다보자 제드가 낮게 속삭였다.
“말해줘서 고마워, 영애. 영애가 이런 일을 겪게 된 것에 대해 사과하지. 그 녀석에게 그만두라고 내가 말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영애가 곤란해지니 아무 행동도 하지는 않을 거야.”
“알아.”
제드가 이오지프를 막아준다면 굉장히 든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오지프는 다시는 루시펠라에게 접근하지 않겠지. 그러나 함부로 입을 놀린 루시펠라에게 적의를 가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나? 또한 그녀에게 보복을 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리 괴짜이며 허술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황위를 노리는 2황자이다.
루시펠라는 제드가 마냥 자신을 보호해 주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점이 좋았다. 루시펠라가 자신의 선에서 이오지프를 끊어낼 수 있다는 것은 믿어준다는 소리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도 만약 그 녀석이 계속해서 협박한다면 내게 말해. 그 점은 내가 막아줄 수 있어.”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일이 이렇게 됐는데 떠나야 하다니, 발이 떨어지지 않는군.”
제드는 은근슬쩍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그녀를 살짝 끌어안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서로 연인 관계도 아니고 사람들이 있어서 약혼자 행세를 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한 데에서 유난이다. 아니, 이건 그건가?
‘전우애!’
그래, 그렇다. 기사들끼리 징그럽긴 했지만, 어떤 녀석들은 출정하기 전 꼭 포옹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기도 했다.
마지막 전쟁에서 그녀도 동료들끼리 포옹하지 않았던가. 제드는 마물 토벌전에 참여하고, 그녀는 지금 배웅을 해주는 상황이었다. 기사인 그에게 이런 인사는 어색한 것이 아니겠지.
그러고 보면 칼리드와도 그랬다.
칼리드와 포옹을 하다가 무방비한 등을 찔렸다. 그것을 떠올리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안고 있는데 갑자기 등이 불에 타는 고통이 느껴질 것 같은 느낌. 금방이라도 등이 찔려 몸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느낌.
루시펠라는 속으로 미친 생각이라고 되뇌며 팔을 들어 올려 그의 허리를 감쌌다. 그에 그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푸훕.”
덩치 큰 인간이 그렇게 움찔거리는 게 상당히 우스웠기에 루시펠라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덕분에 루시펠라를 잠식할 뻔했던 죽음에 대한 정신적 외상은 금세 사라져 버렸다.
“몸 조심히 잘 다녀와.”
“그, 그러지.”
키가 작아서 폭 안기는 형태가 되었지만, 뭐 그게 대수인가.
루시펠라는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먼저 껴안은 건 저쪽인데 왜 자꾸 몸을 꿈틀거리나. 에잇. 루시펠라는 기사답게 허리를 껴안은 팔에 힘을 더 주었다.
“마물 때문에 한심하게 죽지 말고.”
“안 죽어. 대신 죽여야 할…….”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방금 뭔가 엄청 살벌하게 말한 것 같은데. 루시펠라는 포옹에 집중하기로 했다. 따뜻한 게 나쁘진 않은 기분이네. 제드가 손을 들더니 루시펠라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확실히 만난 보람은 있군.”
“어?”
“아니, 아무것도.”
스르륵 포옹이 풀리며 제드가 루시펠라로부터 떨어졌다.
방금까지 그녀를 감싸던 온기가 사라지자 어쩐지 그 품이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제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출정할 때 그녀는 동료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했다.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일말의 불안감은 언제나 사라지지 않았다.
“편지 하지.”
“응. 꼭 해.”
루시펠라의 대답에 제드가 웃었다.
이제 저 얼굴을 볼 수 없다니 이상했다. 수도에 이 녀석이 없다니, 어쩐지 무척이나 허전해질 것 같았다.
***
루시펠라가 연회장으로 다시 나오자 클로렌스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루시!”
루시펠라가 미소 지었다.
“하인트 공작 각하가 오셨어요. 만나셨나요?”
“응, 아까까지 같이 있었어.”
루시펠라의 대답에 클로렌스가 루시펠라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클로렌스가 말을 이었다.
“공작 각하가 떠나서 서운해요?”
“아니?”
서운한가. 아니, 서운한 건 아닌데. 서운한 걸까? 루시펠라는 그렇게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서운한 게 맞는 것 같네.”
그 녀석과 악연처럼 만났지만, 그래도 도움받은 게 더 많았으니. 루시펠라로서는 분명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다.
나쁜 녀석도 아니었으니, 마물 토벌전이라니 걱정도 되고.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당연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에게 이상한 죄책감이 들었다.
“아, 황자 전하는?”
“하인트 공작 각하와 인사하시더니 바로 돌아가셨어요.”
“그렇구나.”
루시펠라는 무미건조하게 말을 내뱉었다. 당장 이오지프에게 거절한다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낌새를 알고 빨리 도망친 건가. 루시펠라가 생각에 잠길 때였다.
“아, 황자 전하가 혹 무슨 말씀을 하시지 않았나요?”
“무슨 말을?”
루시펠라가 움찔했지만 태연한 척 되물었다. 그러나 클로렌스에게 그 움직임은 너무도 눈에 잘 보였다.
“흠, 아니에요.”
클로렌스가 모른 척하는 건 줄도 모르고 루시펠라는 일부러 말을 돌렸다.
“루이르크 공작 각하는?”
“저기, 저쪽에 서 계세요.”
클로렌스의 턱짓에 그녀의 시선이 연회장 한가운데로 향했다. 그의 곁에는 레이디들이 상당히 많았으며, 무언가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더 쉬다 나오지 않아도 돼요? 루이르크 공작 각하께서는 빨리 돌아가실 생각이 없어 보여요.”
“어차피 내 약혼자는 영지로 내려갔고, 루이르크 공작 각하도 아까 티 파티에서의 일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는데 나만 유난 떠는 건 우습잖아.”
루시펠라가 웃으며 칼리드를 관찰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칼리드는 좋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언제나 입기 싫어하는 연미복을 잘 차려입고 있었다. 그 익숙하고도 낯선 모습에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여전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모양이었다.
그때, 칼리드가 무어라고 말하자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영애가 눈에 띄게 기쁜 표정을 했다.
“루이르크 공작은 사교계에 잘 안 나온다고 했지?”
“네.”
“그렇다면 왜 지금 이렇게 다니기 시작한 걸까.”
“생각해 봤는데, 본격적으로 정계에 나서려고 그런 게 아닐까요?”
“그동안 황태자 전하 앞잡이로 행동했는데도 부족한 거야?”
“그때는 그냥 그 자리에서 만족했겠지만, 사람은 모르는 법이죠.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게 더 좋아졌을 수도 있잖아요. 아니면 황태자 전하가 움직이지 못하니 눈이 되라는 명령을 받았다거나.”
“어느 쪽이든 다 추악한 이유로구나.”
루시펠라의 말에 클로렌스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저번부터 묻고 싶었는데, 루시는 왜 루이르크 공작 각하를 싫어해요?”
“…….”
루시펠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클로렌스는 그것만으로도 루시펠라의 대답을 짐작한 듯했다.
“황태자 전하와 관련되어 있어서?”
“그것도 이유 중 하나지.”
루시펠라의 서늘한 대답에 클로렌스가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루시펠라의 시선은 칼리드를 향해 있었다.
“무슨 대화를 하고 있을까.”
“네?”
“저 두 사람 말이야. 자비에 영애였나?”
“아, 그건…….”
클로렌스가 루시펠라에게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 루시펠라와 칼리드의 눈이 마주쳤다.
칼리드가 루시펠라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가 걸어오기 전까지의 짧은 순간, 루시펠라는 그의 두 눈을 피하지 않았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영애?”
“네, 충분히 쉬다 나왔으니 괜찮아요.”
루시펠라의 대답에 칼리드가 다행이라는 듯 미소 지었다. 클로렌스가 웃으며 말했다.
“루시, 공작 각하께서 흥미로운 말씀을 해주셨어요.”
이들의 대화가 더 길게 이어지기 전에 클로렌스가 대화의 목적을 짚고 나섰다. 그에 칼리드가 말했다.
“네, 영애께서 쉬고 있으셔서 직접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이렇게 말할 기회가 생기는군요.”
“……무슨 말인데요?”
“공작가에서 작은 연회를 열 생각입니다.”
“작은 연회요?”
“사실, 저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연회를 열어본 적이 없어서요. 해서 이번에 사람들을 초대할까 합니다만, 영애도 참여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연회를 연다고? 그의 집에서? 그가 연미복을 입는 것을 싫어하는 만큼이나 파티에 참여하는 것을 싫어했는데, 직접 그가 개최한다는 말인가?
그가 이해 가지 않았지만, 그녀는 일부러 태연한 척했다.
“그때가 언제인가요?”
“열흘 뒤. 열흘 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루시펠라는 어떻게 할까 생각했다. 저 녀석의 얼굴을 보는 것은 그녀에게 고역이었다. 그럼에도 저 녀석의 집은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만약을 위해서 말이다.
“좋아요.”
“로에르 영애에 이어 아이딘 영애까지. 아주 즐거운 연회가 될 것 같군요.”
칼리드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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