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그녀가 필요한 이유
2017.09.25.
“왜 그 사실을 제게 밝히시는 건가요, 전하?”
루시펠라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제아무리 정치에 관심이 없는 그녀라도 잘 알고 있었다. 황태자가 결정된 시점에서 황위를 원한다고 입을 여는 것은 위험부담이 컸다.
“영애라면 이야기를 듣고도 비밀로 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아무도 제 말은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그런 거잖아요.”
얼마 전까지 실성했다는 소문이 돌았던 자신이었다. 자신이 이오지프에 관한 말을 하더라도 누가 믿겠는가.
게다가 이오지프는 아이딘 백작가의 미심쩍은 행보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할 거라는 계산이 끝나고 말한 것이다.
얍삽한 인간 같으니라고. 루시펠라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그를 바라보자, 이오지프가 부정하지 않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황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영애의 도움이 필요해서 말했어.”
“도움?”
이오지프의 말에 루시펠라가 물었다. 2황자를 황위에 올리기 위해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만약, 내가 황위에 오르게 된다면 영애의 소원을 들어주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소리에 루시펠라의 두 눈이 떠졌다. 그렇다면 칼리드에게 복수할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루시펠라는 이오지프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안경 아래 있는 눈은 간절하며, 절실해 보였다. 그러나 그 절실함을 믿고 그를 도와줘야 하는가?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이오지프는 얼샤의 독립에 대해 말했다. 루시펠라는 단 한 번도 이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리엄에게 미안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오지프의 입에서부터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나요?”
그러나 루시펠라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지나치게 충동적이었으나, 자신이 가장 원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에 이오지프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내 외척 가문은 이드리스 공작가나 포에르 백작가에 비하면 형편없어.”
이오지프는 한숨을 쉬었다.
“나를 지지하는 이들은 학자들과 군소 귀족들뿐이지.”
“승산이 없는 싸움이네요.”
황태자는 이드리스 공작가가 뒷받침하고 있다. 위세가 꺾였지만 포에르 백작가도, 바반드 백작가도 강력한 세를 지니고 있는 가문이다. 이젠 그녀도 안다. 그런 사람들과 맞서 싸우겠다고? 차라리 포기하는 게 빨랐다.
“영애는 말의 힘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있군.”
이오지프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영애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내게는 가장 강력한 가문의 지지가 필요하지. 명망 있고, 부유하며, 강력한 무력을 가진 가문 말이야.”
루시펠라는 그 가문을 잘 알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얀스가르에 벌어졌던 몇 번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그 명예가 드높은 가문, 넓은 영지에 풍부한 자원과 철강을 가진 부유한 가문, 무기 제작 길드가 모여들어 가장 질 좋은 무기와 뛰어난 무력을 지닌 기사들을 보유한 가문.
바로 루시펠라의 약혼자의 가문, 하인트 공작가였다.
“나는 하인트 공작가의 도움이 필요해.”
제드의 도움이 필요하다라…….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인트 공작가는 이드리스 공작가, 아니, 그보다 더욱 거대했으며 제국에 영향력 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왜 자신에게 나오지? 루시펠라가 의아하게 생각할 때였다.
“나는 영애가 제드를 설득해 주었으면 좋겠어. 그게 내가 바라는 도움이야.”
“…….”
“제드는 영애에게 호의적이지. 그 어떤 이들보다 영애를 감싸고 있어. 영애라면 제드를 설득할 수 있을 거야.”
호의적이라니, 그것이 호의적이라고 해서 부탁을 들어줄 만한 문제던가. 루시펠라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왜 하인트 가문이죠?”
강력한 이름을 지닌 가문이라면, 로에르 후작가나 키르케스 후작가가 존재했다. 로에르 후작가는 부유했고, 키르케스 후작가 역시도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
“선대 하인트 공작이 나를 지지해 주었기 때문이지. 선대 공작이 비공식적으로 나를 지지했기에, 나 역시 이 살벌할 판에 끼어들 각오를 했거든.”
제드의 아버지가 이오지프를 지지했다고? 루시펠라가 눈을 깜빡였다.
“제드와 나는 선대 하인트 공작에게 같이 검을 배운 사이지. 그 녀석과 나는 친구야.”
이오지프와 제드가 친구라고? 그러고 보면 제드는 묘하게 이오지프와 자주 엮였다.
“그렇다면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되는 게 아닌가요?”
친구라면 그 정도 부탁 정도는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 말에 이오지프가 씁쓸히 웃었다.
“난 그 녀석을 모르는 게 아니야. 가까운 만큼 그 녀석이 얼마나 이 일을 혐오하는지 알 수 있지. 나로서는 설득할 수 없어.”
“전하가 안 되는 걸 제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세요?”
“되게 만들어야지. 영애는 약혼녀잖아.”
이오지프의 말을 알아들은 루시펠라의 표정이 굳었다. 이오지프가 말하는 것은 이전 루시펠라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제드를 유혹하라는 말과 똑같았다.
그에 무언가가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레이디로 적응하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려 했지만, 방법은 없었다. 결국 이오지프가 바랐던 것도 똑같은 것이다.
“영애가 제드에게 부탁해. 제드 녀석의 마음이 영애에게 확실히 향하도록 한 뒤, 그를 이 싸움에 끌어들여 줘.”
확인 사살을 하듯 이오지프가 다시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꼈다. 루시펠라는 이오지프가 보지 못하도록 소매 안의 주먹을 꼭 쥐었다.
“만약 내가 도와드리지 않겠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루시펠라의 말에 이오지프가 피식 웃었다.
“정석대로라면 아이딘 백작이 그 자금을 어떻게 운용했는지 파헤치고, 얼샤에 흘러들어 간 것을 빌미로 반역죄로 몰아 멸문시키는 게 답이겠지. 아이딘 가문 역시 나와 대척점에 서 있는 가문이니 하나라도 없애는 게 맞겠지.”
어느 나라에서도 반역죄란 가장 무겁게 처벌되는 대상이었다. 만약, 이오지프의 말대로라면 가문이 무너지고, 자신은 최대 사형, 최소 노예가 될 것이다.
지금 자신을 협박하는 건가. 루시펠라는 얼굴이 굳었다. 이오지프가 그 표정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영애, 나는 영애 같은 사람들에게 그런 협박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잘 알아.”
그렇지만 그 말을 꺼냈다는 것 자체가 이오지프의 수많은 가정 아래 실행할 수 있는 일이란 말이었다.
“나는 어떠한 것도 하지 않겠어. 이건 영애 스스로가 결정할 일이야. 아이딘 백작에게 말해도 좋아. 물론 백작이 움직인다면 나 역시 손을 쓸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야.”
그 말인즉슨, 아이딘 백작에게 말하지 말라는 소리와 똑같았다.
“영애 역시도 알 거야. 형님이 다음 황위를 잇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그는 루시펠라가 대답하지 않자 이오지프가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그저 영애는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찰해. 영애는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대답해 줘. 시간은 많지 않아.”
황위 싸움이라는 가장 치열한 권력 싸움의 중심부에 갑자기 끼어들게 되다니, 루시펠라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황위 싸움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무엇을 보라는 거죠?”
이오지프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황위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어. 바로 영애 때문에.”
뭐? 자신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루시펠라가 눈으로 묻자 이오지프가 말했다.
“형님이 금족령을 당하고 포에르 백작가와 이드리스 공작가가 부황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지. 영애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게 믿겨져?”
“저 때문이 아니라 저를 공격하려 했기 때문이겠지요.”
루시펠라의 말에 이오지프가 미소를 지었다.
루시펠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나 그때 서점에서 클로렌스에게 황위에 대해 말했던 것도 의도했던 것이다. 이오지프는 수면 아래에서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저 남자가 얼마나 영민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을 그렇게 잘 숨길 수 있는 이라면 황제의 재목으로 저 남자만 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볼게요.”
여기서 루시펠라가 말할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시간은 언제나 제한이 존재해.”
“하지만 그 시간제한이 오늘까지인 건 아니죠.”
루시펠라의 말에 이오지프가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쉬듯 말했다.
“이제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데, 실례지만 전하, 제가 혼자 있을 시간을 주실 수 있나요?”
루시펠라의 무례할 법한 축객령에도 그는 기분이 상하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오지프로서는 그녀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성공인 셈이었다.
“좋은 대답 기대하지.”
이오지프가 짧은 인사를 남기며 휴게실 밖으로 나갔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복수할 방법을 찾은 것 같은데, 그 방법이 문제였다. 이오지프는 제드를 끌어들이고 싶어 한다.
정말로 제드를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나? 꼭 이래야만 하나?
그러다가 루시펠라는 문득 왜 제드가 사람을 믿지 않는 건지, 믿지 말라고 했던 건지 깨달았다.
제드는 이런 환경에서 자라왔던 것이다.
그가 가진 힘은 거대했고, 모두가 그를 이용하려고 했다. 루시펠라 역시도 지금 이오지프에 의해 그를 이용할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영애, 영애가 사람을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그만큼 처음 사귄 친구가 소중하겠지. 하지만 수도는, 아니, 수도뿐만이 아니라 권력과 관련되어 있으면 사람들은 모두 가면을 쓸 수 있는 법이지.”
역시 그건 제드의 경험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이오지프는 제드가 친구라고 말했다. 그러나 친구마저도 그를 자신의 권력에 이용하기 위해, 그의 약혼녀를 회유하는데 제드는 그를 진정한 친구라 여길 수 있을까.
“공작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구나.”
정말로, 진짜 다 좋은 게 아니었다. 루시펠라는 칼리드의 아버지, 가브라인 공작을 떠올렸다.
그들이 기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마물 대토벌 때 전사한다.
부귀를 추구하지 않았지만, 그는 얼샤 왕족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공작 위를 지니고 있던 가문이었다. 무뚝뚝하며 검에 미쳐 있던 그 남자. 그 남자도 이런 일을 많이 겪었던 것일까? 그리고 어린 칼리드는?
당시 에스텔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나라가 어떻고, 권력이 어떻고, 이런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으며, 생각해 봤자 평민인 그녀에게 와 닿지 않는 먼 나라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검이 전부였고, 그 검으로 나라를 지키는 것만이 중요했다.
“왜 이렇게까지 복잡해지는 건데.”
그녀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검을 휘두르기만 하는 간단한 삶을 살아가면 안 되는 건가. 그런 힘만 있다면 고민하지 않고 칼리드에게 복수를 해줄 수 있을 텐데.
그렇지만 복수를 원한다면 앞뒤 가릴 게 없지 않나? 제드를 유혹하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찝찝하지?
나는 정말로 복수를 하고 싶기는 한 건가?
육신이 바뀌었기에 이런 것인가?
자신이 원하는 게 대체 무엇인가?
얼샤의 독립이 걸려 있는 문제다. 그렇다면 루시펠라는 이오지프를 강력하게 지지해야 마땅했다. 그렇다면 이오지프의 제안에 따라야 하는 건가?
‘아니, 아니지. 우선 나와 관계없이 2황자는 얼샤를 독립시킬 생각이야.’
루시펠라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이오지프가 제시한 것은 얼샤의 독립과 그녀가 소원을 가지면 이뤄주겠다는 말이었지만, 얼샤의 독립은 루시펠라가 아니더라도 이오지프가 계획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오지프가 이뤄준다는 소원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루시펠라는 흠칫했다. 누구지? 클로렌스인가? 아니면 하녀일 수도 있다.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겨우 노크 소리임에도 심장이 빠르게 방망이질했다. 꼭 잘못한 것을 들킨 것 같았다.
설마, 칼리드는 아니겠지? 아까 자신을 집요하게 붙잡으려던 칼리드가 떠올랐다. 대답을 안 하는 게 나으려나? 아니,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서 문을 열고 들어오면 어떻게 하지? 이곳은 사람이 없는 외진 휴게실이다.
아니, 침착하자. 루시펠라는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똑똑.
다시 노크 소리가 들리자 루시펠라가 말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렸다. 루시펠라가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자 문 앞에는 의외의 사람이 서 있었다. 루시펠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녀의 약혼자가 연미복이 아닌 망토를 두른 외출복을 입은 채 서 있었다.
설마 이오지프와 대화를 들은 건 아니겠지. 루시펠라가 불안한 표정으로 제드를 바라보았다. 그에 제드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조금 늦었군.”
제드의 그 말에 어쩐지 긴장이 탁 하고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루시펠라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맞아, 많이 늦었잖아.”
“그래서 기다렸나?”
“좀 기다렸지.”
루시펠라의 대답에 제드가 빙긋 웃었다. 하여튼, 잘생긴 인간이 웃음으로 때우려고 한다니까. 루시펠라는 툴툴거리면서도 마음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 있나? 표정이 별로 안 좋군.”
“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표났나? 루시펠라가 두 눈을 굴렸다. 그에 제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영애는 건강에 대해 항상 염두에 둬야 할 것 같아.”
“난 이제 충분히 건강해.”
진짜였다. 매일 아침 꾸준히 백작저 안을 걸어 다니고, 클로렌스와 함께 외출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루시펠라의 체력은 늘었다. 물론, 에스텔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졌지만 말이다.
“얼굴이 창백한 건 알고 있나?”
“그, 그래?”
뭔가 숨기는 게 그렇게 표가 났나? 루시펠라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창백하긴 개뿔, 얼굴은 복숭앗빛이 돌았다. 그럼 그렇지. 루시펠라가 제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 눈엔 좋아 보이는데.”
“착각했나 보군.”
제드는 그렇게 말하며 루시펠라에게 다가왔다.
“휴게실에 왔으면 앉는 게 어때? 계속 이렇게 서 있을 거야?”
“금방 떠나야 해. 잠깐 얼굴만 보러 왔어.”
“떠난다고?”
루시펠라의 물음에 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급한 일이 생겨서 영지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
“…….”
루시펠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제드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야?”
“마물이 내 도시 하나를 습격한 모양이야.”
“세상에!”
루시펠라의 얼굴이 심각함으로 물들었다. 얀스가르도 마물이 나타나는 것은 똑같은 모양이었다.
“그러면 여기 오지 말고 곧바로 영지로 내려갔어야 하지 않아? 왜 여기 온 거야?”
“영애의 얼굴을 보러 왔어.”
루시펠라의 눈이 커졌다.
“오겠다고 말해놓고서, 안 온다면 영애가 나를 기다릴 테니까.”
“나는 딱히 기다리려는 게…….”
아까 기다렸다고 말해놓고서 부정하는 것은 우스운 꼴이었다. 습관적으로 부정하려는 말이 나왔다가 쏙 들어갔다. 제드는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당분간 볼 수 없을 테니까.”
영지에 내려가면 보통 한 달은 기본이다. 제드는 공작이고 관할하는 도시는 한두 개가 아니니 거의 두 달은 족히 걸릴 것이다. 어쩌면 1년 정도는 안 돌아올지도 모르지.
그가 이곳에 없다. 만나지 못한다.
기분이 이상했다.
원래 접점이 없는 게 자연스러운 사이였다. 그녀가 루시펠라가 되었어도 그렇게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10년을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짧으면 두 달, 길면 1년 정도 헤어지는데 왜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가.
“서운한가?”
“아니, 안 그래.”
루시펠라는 또다시 습관적으로 부정했다. 그럼 그냥 빨리 갈 것이지, 대체 왜 이곳에 와서 내 반응을 보는 것인가.
루시펠라가 그를 올려다보자 제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영애가 제드에게 부탁해. 제드 녀석의 마음이 영애에게 확실히 향하도록 한 뒤, 그를 이 싸움에 끌어들이란 말이야.”
이오지프의 음성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칼리드에게 복수하기 위해 제드를 유혹한다. 제드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든다. 루시펠라도 이제 어떠한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기다릴까 봐 급한 와중에도 그 사실을 알리러 이곳에 와주었다. 그런 사람이 품는 호의를 이오지프를 위해, 자신의 복수를 위해 이용한다.
루시펠라는 제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얼굴. 이젠 그녀도 안다. 어떤 감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드는 분명히 그녀에게 호의를 품고 그녀를 배려하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영애?”
루시펠라의 두 눈이 빛났다.
절대로 마음을 이용할 일은 없을 것이다. 고민 따윈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만약, 이오지프의 말을 따른다면 루시펠라는 그를 배신하는 것이다.
배신. 그녀는 뼈아픈 배신을 당했으며, 지우지 못할 상처를 입었다. 그 짓을 남에게도 하라고? 죽은 자신을 여태껏 훌륭한 기사라고 기억해 준 저 남자에게? 절대로 못 할 짓이었다.
“나 할 말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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