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57화 (57/173)

#57화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2017.09.14.

“설령 말에 아무 문제가 없더라도, 무분별하게 타다가는 다칠 수 있어.”

“아니야, 안 그럴 거야! 신중하게 타면 되지.”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펠라의 새하얀 뺨에는 홍조가 서려 있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또한 미소가 걸린 루시펠라의 입술은 더없이 탐스럽게 붉었다.

제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미친 거지.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이오지프가 가끔 쳐들어와 읽어주었던 로맨스 소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새콤하고 달콤한 향기가 입안에서 감돌았다.

이오지프가 읽어주는 구절에 얼굴을 붉히는 제드에게 그는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보라며 속을 긁었다.

그때 그는 여자의 입술이 무슨 사탕이냐며 이오지프에게 독설을 퍼부었었다. 하지만 어쩐지 루시펠라의 입술은 로맨스 소설 속 묘사대로 달콤하기 그지없을 것 같았다.

왜 하필 지금 떠올린 게 로맨스 소설인 건지. 왜 하필 키스에 대한 묘사란 말인가! 지금이라도 군가를 떠올리면 그 장면이 사라질까?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제드의 머릿속에는 앵두, 붉은 입술, 새콤달콤이라는 단어가 둥둥 떠다녔다.

그는 루시펠라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안 된다. 만약 그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합의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입을 맞춘다면, 그게 희롱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미칠 노릇이었다.

“어디 몸이라도 아파?”

제드의 얼굴을 보고 루시펠라가 물었다. 그러자 제드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제 일 때문에 밤을 새웠어.”

“밤을 새우다니, 공작은 힘들겠네.”

루시펠라의 얼굴에는 살짝 걱정의 기색이 돌았다. 제드는 그에 졸린 척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하며 말했다.

“고개를 가누기조차 힘들군.”

“쯧쯧, 기사가 그렇게 약해서야.”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가 울컥했으나, 그는 피곤한 척하며 루시펠라의 허리에 팔을 감고는 은근슬쩍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잠깐 실례하지.”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졌으나, 그녀는 순순히 어깨를 내주었다.

그는 앞으로 그녀와 접촉하고 싶을 때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을 깨닫고 이 부당함에 대해 한탄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말 자신의 무게를 실어버리면 그녀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로 넘어져 버릴까 꽤나 힘 조절을 하고 있었다.

이마에 닿는 따뜻한 온기가 기분 좋았다.

“열이라도 나는 거야?”

“그럴지도.”

“하긴, 기사라고 아프지 말란 법은 없지.”

루시펠라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제드는 허리를 감싼 팔에 더 힘을 주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이 포옹 아닌 포옹에 루시펠라와 제드는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루시펠라는 저 인간이 이럴 정도면 정말 아픈가 보다 생각했기에 움직이지 않았고, 제드는 이 순간을 만끽했기에 굳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입을 떼지 않는 조용한 순간이 계속되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조금 세게 불어올 때, 제드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루시펠라를 바라보니 루시펠라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꼭 그래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접촉에 조금이라도 동요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루시펠라가 의아한 듯 묻자, 제드는 팔을 풀고 몸을 떼며 뚱한 표정으로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는 익숙하다는 건가.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황태자와 함께했을 때도 그녀는 이렇게 모든 것에 담담했을까?

딱히 그녀를 비난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그가 처음이 아니듯 그도 마찬가지였으니.

그러나 처음이 아니라는 그 사실이 못내 서운했다. 그것이 불만족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제드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시펠라는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제드는 자신이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걱정의 기색을 발견한 제드는 서운한 기분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걱정되나?”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제드가 묻자 루시펠라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식 따윈 없는 태도에 그제야 제드는 다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그렇게 웃으면서도 제드의 얼굴은 살짝 경직되어 있었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고 자신의 마음을 내주는 순간, 그 마음이 되돌아오지 않으면 사람은 외로워진다.

제드는 자신 안에 있는 질투를 발견한 순간 한 가지 걱정이 들었다.

만약 모든 게 그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이전, 이혼을 말하던 첫 만남처럼 순순한 이별이 가능할까?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마음에 담아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약 그렇게나 사랑했다는 황태자를 다시 마음에 담아버리면?

질투로 미쳐 버린 사람들은 많았다. 역사 속의 훌륭한 인물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우를 범해왔는가.

그렇다면 자신 역시 미치는 게 아닐까.

이 사람을 속박해 가두고, 이 사람이 사랑하던 모든 것을 사라져 버리게 하고, 자신만 보게 만드는 그런 이기적이며 폭력적인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는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이니까.

제드는 자신 안에 있는 흉포함을 발견하자 놀랐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강력한 감정이며, 파괴력을 동반한다는 것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는 재빨리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일어나지 않은 가정을 하며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이나 하는 짓이었다.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이 사람을 놓아줄 생각을 해야 했다. 아직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아직은.

***

“에취!”

에스텔이 재채기를 한 후 훌쩍거렸다.

“어디 아픈 거야?”

칼리드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에스텔이 고개를 저었다.

“꽃가루가 너무 많아서 그래.”

“그럴 만도 하지.”

그들은 샛노란 민들레 꽃밭에 누워 있었다. 둘 다 검술 연습을 하다 지쳐 나가떨어진 상태였다.

“에취!”

“에스텔, 그냥 일어나는 게 좋지 않을까?”

그 말에 에스텔은 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땅과 하나가 되려는 듯 땅에 더욱 몸을 밀착했다.

“지쳤어, 이대로 잘 거야, 잘 거라고.”

그러면서 에스텔은 에취, 다시 한 번 재채기를 했다.

콧물을 훌쩍거리며 그녀는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칼리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웃겨.”

“코가 빨개져서.”

에스텔은 그를 노려보았다. 누워 있는 칼리드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원래 이놈이 이렇게 잘 웃는 놈은 아니었는데, 재채기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나.

“에스텔.”

“응?”

칼리드의 자안이 누워 있는 에스텔을 눈에 담았다.

“너, 꽃이랑 잘 어울려.”

“그래? 내가 예쁜가?”

“그건 아니고.”

칼리드의 단호한 대답에 에스텔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옆으로 돌아누워 발로 그의 무릎을 살짝 걷어찼다.

“윽.”

“말 똑바로 해라.”

“네, 알겠습니다.”

칼리드가 순순히 대답하더니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러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칼리드는 에스텔을 한번 바라보더니 다시 눈을 굴려 민들레꽃을 잠시 응시하다가 이내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자 민들레 홀씨가 하늘 안으로 녹아 사라졌다.

길가의 헐벗은 이들이 추위에 얼어 죽지 않아도 되는 잔혹하고 시린 겨울이 지나가고 어느덧 봄이 찾아왔다. 에스텔과 칼리드는 봄날의 따스한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좋다.”

“뭐가?”

“다.”

칼리드가 환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에 에스텔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뭐가 좋다고 실실 웃는 거지? 요즘 좋은 일이라도 있나.

처음 만났던 열두 살 때는 인형같이 예쁘기만 할 뿐 말수가 거의 없던 놈이었는데, 만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는 무척 잘 웃었다.

사는 게 즐거운가 보지.

칼리드의 웃는 얼굴은 아름다웠으니, 에스텔은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며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칼리드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더니 부끄러운 듯 말했다.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어.”

또다시 바람이 불어와 민들레 홀씨가 공중으로 흩날렸다.

자신의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민들레 홀씨를 떼어내며 에스텔이 말했다.

“그러게. 이렇게 계속 쉬었으면 좋겠다.”

이 꿀 같은 휴식 시간이 언제까지나 계속되면 얼마나 좋을까.

검을 배우는 것도 분명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아무래도 엄격한 훈련보다는 이런 휴식이 더 좋았다.

“하, 그래도 곧 끝나겠지.”

에스텔이 한숨을 쉬며 대답하자 칼리드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말을 따라 했다.

“그래, 끝나겠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기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어린 나이에 기사가 된 만큼 더 노력해야 했으니까.

만약 쉬는 모습을 가브라인 공작이 본다면 그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본 칼리드의 얼굴은 어쩐지 서글퍼 보였다.

“에스텔, 일어나자.”

칼리드가 속삭이며 몸을 일으켰다. 정작 영원히 이 순간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사람은 그였음에도, 그가 일어남으로써 이 휴식시간은 끝이 났다.

칼리드는 에스텔에게 손을 뻗었다.

“에취!”

그의 손을 잡으려던 에스텔은 재채기 때문에 손을 잡는 대신 옷깃으로 코를 막았다.

“콧물 나왔어.”

훌쩍거리는 에스텔을 보고 칼리드가 결국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

“에취!”

클로렌스가 재채기를 했다. 루시펠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꼭 봄이 되면 이렇더라고요. 꽃이 많이 피어 있는 화원에서라면 더욱.”

그녀가 맹맹한 목소리로 말하며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루시펠라는 그것을 보며 웃었다. 에스텔 역시도 비슷한 체질이었던 것이다.

특히나 민들레 홀씨가 많이 날리는 곳에서 그녀는 더욱 자주 재채기를 했었다.

항상 봄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있던 일인데, 이제는 아무 일도 없었다. 육체가 바뀌고 나서 발견한 유일한 좋은 점이었다.

재채기라…….

루시펠라의 머릿속에 누군가와 함께했던 어느 평화로운 봄날이 떠올랐다.

그녀는 애써 그 기억을 지우며 말했다.

“자꾸 재채기하면 화장이 지워질 텐데 괜찮겠어?”

“…….”

클로렌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재채기를 하면 손수건으로 입을 가려야 하잖아.”

“아니,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어요.”

그럼 뭐가 문제지? 이해가 안 가서 그런 표정을 짓는 게 아니었나?

루시펠라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클로렌스가 말을 이었다.

“방금 루시에게서 너무 레이디스러운 말이 나와서 감탄해서 그런 거예요.”

“그, 그래?”

이거 기분이 좋아야 하는 건가 나빠야 하는 건가. 루시펠라는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아직은 준비에 부산스러운 연회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곧 준비가 끝날 것 같네.”

오늘은 로에르 후작가의 장남인 시온 로에르의 생일이었기에, 루시펠라는 클로렌스의 초대를 받아 와 있었다.

파티 준비를 어떻게 하는지 미리 봐두라는 클로렌스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커튼의 주름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쓰며, 사용인들이 음식을 가장 맛있어 보이는 위치에 배열하고 있었다.

새삼 파티 하나를 준비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 루시펠라는 다시금 깨닫고 있었다.

“나도 저런 준비를 할 줄 알아야겠지?”

“물론이죠.”

클로렌스의 말에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파티를 주최한다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왔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루시펠라는 연회장 벽에 기댔다.

“뭐 고민 있어요?”

클로렌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생일 연회의 준비는 클로렌스가 아니라 후작부인이 했고, 따라서 이들은 여유로웠기에 대화할 시간은 충분했다.

“그동안 너무 놀았던 것 같아서.”

“루시가요? 아닌 것 같은데?”

“…….”

“그동안 레이디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 왔잖아요.”

심미안을 기른답시고 매일매일 바깥에 나가 장신구와 드레스를 보고, 며칠에 한 번 티타임을 가져 사람들과 교류하고, 교양을 쌓기 위해 책과 연극을 보았다.

루시펠라는 나름 노력해 왔던 것이다.

물론 아직 심미안도, 교양도 어렸을 적부터 배웠던 이들보다는 못 했지만.

루시펠라는 괜스레 조급해졌다.

이래서야 칼리드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완벽한 레이디가 되는 것이 과연 그놈에게 복수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을까.

“예전에 말했던 그 ‘목표’ 때문인 건가요?”

클로렌스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루시펠라는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러나 클로렌스는 그 말이 긍정이라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여자가 남자 위에 설 만한 권력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루시펠라의 물음에 클로렌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대답했다.

“그 남자보다 지위가 높은 남자와 결혼해야죠.”

루시펠라가 예상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대답이었다.

“그렇겠지.”

“여자의 권력은 여자가 속한 가문으로 결정되니까요.”

“그렇다면 여자의 능력이 뛰어나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말이야?”

그 말에 클로렌스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리고 결국 그 권력이라는 것도 폐하로부터 위임받은 힘일 뿐이죠.”

클로렌스의 말에 루시펠라의 얼굴이 굳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가 기사로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녀가 검술이 뛰어나서이기도 했지만, 결국 국왕이 허락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권력이라는 것도 이 나라의 가장 위에 있는 황제가 아닌 이상 위임받은 것일 뿐이다.

“무력이 있다면 폭력이라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발아래 두는 게 가능하겠지요. 그렇지만 우린 그렇게 할 수 없잖아요.”

클로렌스의 말에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으로 얻어진 권력과 누군가와 결혼함으로써 이루어진 권력은 과연 같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그 모습을 본 클로렌스가 불쑥 물었다.

“루시는 황태자 전하에게 복수하려는 건가요?”

“뭐?!”

루시펠라가 소리쳤다. 덕분에 클로렌스와 루시펠라는 자신들을 힐끔힐끔 보는 사용인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아니야, 그런 거.”

진짜 루시펠라에게 황태자는 복수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그녀에게는 아니었다. 황태자는 그저 불쾌한 사람 중 하나였던 것이다.

“루시, 그러고 보니 황태자 전하에게 정말 전혀, 아무 감정이 없어요?”

“말했잖아, 나 기억 잃어버렸다니까.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아.”

“맞다.”

클로렌스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체 누구를 찍어 누르고 싶다는 소리예요? 설마 하인트 공작 각하?”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약혼으로 맺어진 복수 치정극이라도 찍을 일 있냐! 클로렌스의 생각이 더 이상한 쪽으로 나아가기 전에 루시펠라가 막았다.

“그럼 공작 각하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하인트 공작가 위에 있는 가문이 대체 몇이나 있다고 생각하세요?”

“…….”

맞는 말이었다. 루시펠라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제드에게 부탁해서 칼리드에게 복수해 달라고 말해야 한다는 건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레이디로서, 제드의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레이디로 소양을 쌓는 일이란 말일까. 새삼 알고는 있었지만, 막막했다.

“만약 내가 그 사람에게 부탁하면 그 사람이 내 뜻대로 행동해 줄까?”

제드는 칼리드를 싫어한다. 그러나 그렇게 싫어해도 그를 공격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제드는 행동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가 과연 루시펠라의 부탁을 들어 움직여 줄까?

“당연히 해주지 않을까요? 아내가 원하는 거잖아요.”

클로렌스의 말에 루시펠라가 씁쓸히 웃었다.

제드는 루시펠라의 요청을 들어줄 수 있는 권력이 있다.

이는 애정, 또는 제드의 호의에 기반한 것이다.

나쁜 녀석은 아니니 어쩌면 루시펠라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려면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그러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나? 만약 자신이 에스텔이라고 말하면 그는 믿어줄 것인가? 그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머리가 복잡해졌다.

“오늘 공작 각하도 오신다고 했죠?”

“응.”

클로렌스의 물음에 루시펠라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오늘 제드가 이곳에 오겠다고 루시펠라에게 서신을 보내왔다. 연극을 보고 헤어진 날 이후로 제드는 어째서인지 연락을 줄였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아니면 자신이 무언가 실수를 한 걸까.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에 빠졌던 루시펠라에게 파티에 참여하겠다는 그의 연락은 기꺼웠다.

“이런, 큰일이네요.”

“뭐가?”

“루이르크 공작 각하도 이곳에 오실 예정이니까요.”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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