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56화 (56/173)

#56화 고백할 수 없는 이유

2017.09.11.

루시펠라가 입을 다문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깔끔한 기사단 정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 역시도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신기하다. 이상하게도 그를 보자 자신을 엄습했던 그 끈적하고 불쾌한 기분이 싹 달아나는 것 같았다. 저 잘생긴 얼굴 때문일까?

“제드.”

루시펠라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 그의 두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오히려 루시펠라는 제드의 표정 변화에 놀랐다. 제드가 다가와 루시펠라의 옆에 섰다.

“여긴 어쩐 일이야?”

“일이 끝났는데, 영애가 가극을 본다고 해서 와봤어.”

“또 내 뒷조사라도 한 거야?”

“영애, 저번 주에 내가 보낸 편지에 로에르 영애와 가극을 보러 갈 예정이라고 하지 않았나?”

“……맞다.”

그때 당시 루시펠라는 결국 고민을 하다가 먼저 편지를 보냈다. 약혼한 사이라면 정기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아야 한다고, 에레네 부인에게 또 한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한데 쓸 게 없어서 아무거나 잡다하게 적었기에 가극을 본다는 것도 편지 내용에 집어넣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정확히 여기라고 언급하진 않았는데?”

왜냐하면 루시펠라는 극장과 극 제목을 오늘 아침까지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애가 볼만한 연극은 이것밖에 없지 않나?”

“그런가?”

루시펠라가 조용히 납득했다.

‘오늘 하루 수도에서 하는 연극이 몇 개인데.’

뒤따라온 이오지프가 푸흡, 하고 비웃는 것도 모르고 제드는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왜 나를 보러 온 거야?”

루시펠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도 그건가? 약혼자에게 의무를 다하는 그런 거?

“이야기할 게 있어서. 영애만 괜찮다면 좀 걷고 싶은데.”

그 말에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들었던 불쾌한 기분이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그와 산책할 이유는 충분했다.

제드가 그에 웃으려다 그녀의 뒤에 있는 이오지프를 발견했다. 아주 미묘하게 그의 표정이 굳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제드는 이오지프를 보며 마지못해 인사했다. 이오지프는 그런 그들을 장난기 어린 눈으로 보더니, 클로렌스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공작. 아, 아아! 제가 저 아름다운 연인의 시간을 방해한 듯하군요. 영애, 우린 물러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머, 그렇군요. 하지만 제가 인사할 시간은 주시지 않겠어요?”

클로렌스가 제드의 앞에 나서서 인사했다. 제드의 눈이 클로렌스를 관찰하듯 훑었다.

클로렌스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내 약혼녀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준다는 건 들어 알고 있어. 영애에게 언제나 신세를 지는군.”

“아니에요, 루시와 같이 있으면 즐거운걸요.”

그에 제드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 사교적인 얼굴을 힐끔 바라보던 루시펠라가 제드에게 물었다.

“어디 갈 건데?”

그에 제드의 시선이 클로렌스에게서 루시펠라에게로 옮겨졌다. 설마 그녀가 일부러 그런 건가?

클로렌스의 눈이 커졌다. 그러다가 이오지프와 눈이 마주쳤다. 묘한 기류를 눈치챈 이들 특유의 눈짓이 오고 갔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이오지프가 웃으며 그녀를 따랐다.

뒤돌아 걸어가는 그들을 바라보던 루시펠라가 서둘러 사라지는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한편, 자신의 마차로 걸어가던 클로렌스는 어쩌다 황자와 함께 걸어가게 되었는지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이 괴짜 황자는 분명 성격대로 온갖 수다를 늘어놓을 게 뻔했다. 그러나 이오지프는 의외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에 의아함을 느낀 클로렌스는 힐끔 그의 옆모습을 보았다.

언제나 생글생글 웃고 안경에 가려 눈매가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표정이 없는 이오지프의 얼굴은 꽤나 준수한 편이었고,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서늘한 인상이었다.

그 시선을 눈치챈 이오지프가 클로렌스를 보며 미소 지었다.

“아이딘 백작 영애, 참 많이 변하지 않았습니까?”

이오지프가 그녀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루시, 아니, 아이딘 백작 영애가 많이 달라지긴 했죠. 소문도, 입지도, 그 모든 게 말이에요.”

애매한 귀족식 화법에 이오지프가 미소를 지었다.

“저는 아이딘 백작 영애의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크게 변화할 일이 있었나 싶더군요.”

“최근 목숨을 위협받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영애야 워낙 많은 고초를 당했으니까요.”

또다시 클로렌스가 애매하게 말하자 이오지프가 물었다.

“아이딘 백작 영애가 많이 고생하긴 했죠.”

“맞아요.”

이오지프가 그러더니 클로렌스를 보며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영애 역시도, 아이딘 백작 영애가 사교계에서 고립당하는 걸 지켜봤지 않았습니까?”

걸어가던 걸음이 뚝, 멈추었다.

“궁금합니다. 그동안 방관하셨던 분이 왜 지금은 아이딘 백작 영애와 가까워지려 하는 건지. 미래의 하인트 공작부인과 친분을 다져두려는 건가요?”

투명한 유리알 같은 눈을 한 채 이오지프는 해맑게 웃었다.

그의 얼굴이 순수해 보여도, 그 속에 가시가 숨겨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클로렌스는 애써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도 궁금하네요. 전하야말로 왜 아이딘 백작 영애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으신 거죠?”

“그거야 궁금하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백작 영애가 왜 그렇게 변했는지. 이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궁금증인데요.”

“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아요. 하인트 공작 각하도 그런 것 같고요. 그러한 의문은 로맨스 소설 때문에 가지신 건가요? 등장인물들의 성격 변화에는 마땅한 계기가 있으니까요. 아니면 전하의 심계에 다른 뜻이 있는 건가요? 아니면 설마…….”

클로렌스의 말을 끊고, 이오지프가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영애, 오해하지 마세요. 제 호기심은 순수하답니다.”

그에 클로렌스 역시 웃으며 말했다.

“제가 설마 전하의 본심을 오해할까요? 저 역시 상상력이 좀 과했나 봐요. 방금 보았던 가극의 내용을 떠올렸지 뭐예요.”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를 사랑하는 내용을 비꼬아 말하는 것이다. 이오지프는 클로렌스의 가시를 알아차렸다.

“하인트 공작의 약혼녀를 노리느니 차라리 사랑을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렇지요? 요새 소설을 읽어서 그런 건지 이런 상상력이 모난 쪽으로만 발휘되네요. 이 못난 상상력을 용서해 주세요, 전하.”

클로렌스가 공손하게 말하며 허리를 숙이자 이오지프는 그것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영애께서는 제 상상력이 과하다는 걸 지적하고 있나 보군요.”

“제가 어떻게 황자 전하를 지적하나요?”

그녀가 부채를 들고 입을 가리며 상냥하게 웃었다.

클로렌스의 예리한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방금 루시펠라에 대해 물어본 것만으로도 이오지프는 지나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과다.

서로가 자신이 뛰어난 것을 알고, 다른 이들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바보 취급하는 그런 부류.

재밌는 것은 서로가 이 점에 대해 간파한 것을 서로가 눈치챘다는 것이다.

“벌써 마차에 다다랐네요, 전하.”

클로렌스의 말에 이오지프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너무 아쉽군요. 영애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전하께서 절 이렇게나 좋게 봐주실 줄 몰랐네요.”

빈말로라도 같이 있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오지프는 미련 없이 손을 뻗어 그녀를 마차에 태워주었다.

짧은 작별 인사 후에 마차가 떠나고, 이오지프는 웃으며 그 마차를 바라보았다.

“로에르 후작가라…….”

로에르 후작가는 공개적으로 황태자를 지지하지 않은, 이른바 ‘중립’ 가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클로렌스 로에르는 누구와 혼약하게 될까.

“상당히 욕심나는 레이디네.”

이오지프가 웃으며 마차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얼굴뿐만이 아니라 사교적인 말투에 섞인 가시조차도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한편 클로렌스는 마차를 타며 얼굴을 찌푸리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저 괴짜 황자가 정말 루시를 좋아하는 거 아니야?”

클로렌스의 예민한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알기로 보통 이오지프의 행동 양식은 고정되지 않았다. 로맨스 소설을 핑계로 나타나고 싶은 곳에 나타나고, 그렇지 않은 곳엔 귀찮다고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런데 최근 루시펠라가 나타난 곳에는 이오지프가 계속 나타나고 있었다.

저번 서점에서 만났을 때는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하긴 했지. 오늘 가극만 해도 그렇다.

설마, 진짜 가극 내용대로인 거 아닌가? 정말로 공작의 약혼녀를 사랑하는 황자의 이야기가 극으로 만들어지는 거 아냐? 에이, 기우겠지.

클로렌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렇게 또 다른 오해는 싹을 틔워가고 있었다.

***

루시펠라와 제드는 광장을 걷고 있었다. 그곳이 아니면 마땅히 산책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발광석이 들어가 있는 푸른 가로등 빛을 뒤로하며 루시펠라는 서늘한 바람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까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데, 무슨 일이 있었나?”

루시펠라는 어쩐지 머쓱해졌다. 그렇게 흥분한 자신의 모습을 그가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가극 내용이 화가 나서.”

“아아. 그 연극 말하는 건가?”

“봤어?”

루시펠라의 물음에 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드 역시도 기사였기에 이런 예술과 동떨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귀족은 귀족인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억지로 데려갔지. 열세 살 정도에 본 것 같군.”

“그랬어?”

열세 살이 보기엔 이야기가 잔인하지 않나? 루시펠라가 생각에 잠길 때였다.

“너무 멍청한 이야기라서 참고 있기 참 역겹더군.”

“어?”

제드의 독설에 루시펠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드는 그것을 다른 쪽으로 오해했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자한테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도 못 하다가 결국 여자를 죽이는 얼간이 이야기로 기억하는데,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게 다른 건가?”

“아니, 그대로야. 그저 생각하고 있는 게 똑같아서, 그게 신기했을 뿐이야.”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결국 같은 남자에겐 아무 행동도 못 하고 여주에게 찌질대는 인간의 이야기라고 영애도 생각했나?”

“그래.”

제드는 재미있는 모양인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리고 여자도 왜 그런 찌질이를 사랑했는지 이해도 가지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지?”

“그래.”

“비극이 아니라 한 소심한 얼간이의 찌질한 삶이었지. 앉아 있던 시간도 아까웠을 거야.”

루시펠라도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제드도 마주 보며 웃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이들의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매만졌다.

그는 루시펠라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남자가 말을 못 했던 이유가 이해가 안 되진 않아.”

“무슨 소리야?”

“사랑을 고백하는 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의미도 되는 법니까. 그것마저도 상대에겐 커다란 부담이 되는 거지.”

루시펠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제드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사랑을 고백하는 게 왜 상대에게 부담이 되는 걸까? 그냥 받아주거나 거절하거나, 그렇게 대답한 후 친구로 남든지 아니면 남이 되든지 하는 관계를 훨훨 털어버리면 되는 게 아닌가.

“영애는 이해 못 하는 건가?”

“좋아한다면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되는 거고, 아니면 포기하면 되는 거고. 또 거절당하면 상대가 좋아할 때까지 매력을 드러내면 되는 거고. 아니면 다른 사람을 좋아하면 되는 거잖아. 말을 못 하면서 자리를 맴도는 게 이해가 안 가.”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는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물었다.

“영애, 영애는 사랑을 안 해본 건가? 왜 나보다 더 무지한 것 같지?”

상당히 실례되는 말이었다. 그에 루시펠라는 벌컥 화를 낼까 했으나, 어째서인지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사랑을 해본 적이 있냐고? 이성 간의 사랑을 말하는 것인가?

“글쎄.”

에스텔은 그런 사랑을 해보지 않았지만, 진짜 루시펠라는 황태자를 사랑했다. 그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만큼.

그렇다고 에스텔이 모든 것에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사랑 앞에 비이성적이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정이 든 지 얼마 안 된 동료를 위해서도 목숨을 바칠 수도 있는데 사랑하는 대상에게 무엇이 불가능하겠는가.

게다가 마음이라는 것을 칼처럼 끊어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루시펠라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만 해도 자신을 죽인 칼리드를 결과적으로 살려주지 않았는가.

그러나 잃을 게 많아 두려워서 말을 못 했다는 것은 루시펠라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말을 해 얻게 되는 책임을 지기 두렵다는 말이 아닌가? 책임을 지기 싫으면 여자 앞에 맴돌지 말던가, 깔끔하게 단념하던가. 그런 노력이라도 보여야 한다고 루시펠라는 생각했다.

“영애는 그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고백하면 어떻게 대할 거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되지.”

“만약, 그 사람이 주위를 맴돈다면?”

“그럼 끊어내면 되지. 귀찮잖아.”

사실 에스텔로서 고백을 받아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단칼에 잘라냈다.

그에 제드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그는 아주 살짝 혼란스러운 듯했다.

왜, 뭐가 잘못된 건가? 루시펠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황태자 전하처럼 말인가?”

거기서 황태자는 왜 나와? 생각해 보니 제드에게 자신은 황태자를 사랑하다가 그에 대한 미련을 끊어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녀는 말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

제드는 루시펠라의 답변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분간 그녀가 약혼녀라는 사실에만 만족해야 했다. 고백을 하면 망한다. 고백은 절대 안 된다. 위험 신호가 울려 퍼졌다.

황태자를 그렇게 좋아했다는 그녀의 깔끔담백한 태도를 보아라. 저렇게 칼 같은 성격은 아니다 싶으면 약혼이든 결혼이든 상관없이 그를 무 자르듯이 잘라낼 게 뻔했다.

“왜?”

“아니, 아무것도.”

제드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루시펠라는 그런 제드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또 말실수를 했나.

“아 참, 영애에게 할 말이 있어.”

미묘한 침묵이 지속되고 제드가 입을 열었다. 제드의 진지한 어조에 루시펠라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뭔데?”

“포에르 백작가의 말에 대해서 말이야.”

“응.”

“재판까진 가지 않을 모양이야.”

제드는 루시펠라의 표정을 보았다. 딱 봐도 덤덤한 게 아버지가 일을 무마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제드는 그것을 숨겨야겠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증거가 불충분해. 그게, 영애, 실뱀벌레라는 것까지는 찾아냈는데, 이게 어떤 경로로 말이 접촉했는지, 그 접촉한 게 사고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불확실해. 영애보고 나를 믿으라고 했는데 미안하…….”

제드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루시펠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냥 아버지가 하지 말라고 한 거 아니야?”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 제드는 루시펠라의 덤덤한 얼굴을 보며 놀랐다.

“아버지께서 이미 말씀해 주셨어. 아버지가 황태자파인 것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포에르가와 이드리스 공작가와 따로 척지고 싶지 않아 하는 것도 잘 알고 있지.”

시원시원한 태도였다.

저 사람에게 이건 상처가 아닌가? 딸이 다칠 뻔했다는 사실보다는, 그의 입지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 아래에 있으면 그래도 분명 상처이지 않았을까?

“그걸 말하려 했던 거라면 신경 쓸 필요 없어. 멜로즈 영애는 이쪽 나름대로 대가를 치렀고 아버지에 대한 건, 원래 그런 분이니 별로 신경 안 써.”

저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망과 좌절이 있었을까. 한데 그렇게 아무렇지 않아 하는 사람이 대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걸까.

루시펠라로서는 백작에게 커다란 기대를 안 했기에 덤덤한 것이었으나, 제드는 그것을 또 다르게 이해하고 서서히 화가 났다.

아이딘 백작은 눈이 삔 건가? 대체 왜 저렇게 사랑스러운 딸을 등한시한단 말인가!

“실뱀벌레를 알아내다니, 그것만으로도 노력해 준 거 충분히 잘 알고 있어.”

“만약 답답하다면 빨리 결혼…….”

“아, 그런데 트라케너는 어떻게 됐어?”

루시펠라와 그의 말이 동시에 나왔다. 제드는 ‘결혼’이라는 말을 다시 할까 말까 하다가 이내 한숨을 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은 잘 있어. 그 마물은 약초만으로도 사멸하더군.”

“와, 다행이다.”

루시펠라가 살짝 웃었다. 그에 제드는 이젠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되어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애가 원한다면 그 말을 선물…….”

“진짜?!”

말을 마치기도 전에 루시펠라가 거의 고함을 치듯 소리쳤다.

그에 찡, 하고 귀가 울려 제드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으나, 이내 루시펠라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사람의 눈이 어쩌면 저렇게 초롱초롱할 수 있단 말인가. 아까의 미소와는 달리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적군이 기습한 것처럼 그 얼굴이 마음속으로 들어왔기에 그는 루시펠라 얼굴로부터 눈을 돌려야만 했다.

#dark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