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내게 반하지 마
2017.08.24.
멜로즈는 루시펠라를 말에 태우고 싶은 모양이었다.
“우리 가문에서 특별히 준비한 말인데, 그래도 싫은가요?”
“아니요, 싫은 건 아니랍니다. 그저 제가 준비가 덜 돼서요.”
“무슨 준비요?”
“아, 말 안 했나요? 오늘 공작 각하와 함께하기로 했거든요. 지금 그걸 기다리고 있답니다.”
루시펠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번 싫으면 싫은 거지 왜 저렇게 강요 아닌 강요를 하는 걸까. 저러니까 더 수상했다.
그녀는 절대 저 말을 타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제드의 핑계를 댔다. 이럴 때나 그 사람 핑계를 대지 누구 핑계를 대겠는가.
“그렇지 말고 공작 각하가 오시기 전에 한 번 타보는 게 어떨까요? 모처럼이잖아요.”
“글쎄…….”
멜로즈의 말에 루시펠라가 날 선 말투로 대답하려 할 때였다.
“영애는 탈 말이 따로 있어서 말이야.”
루시펠라는 그 목소리에 멜로즈와 다른 이들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루시펠라가 뒤를 돌아보자 제드가 서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루시펠라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루시펠라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 대신 눈에 힘을 주었다.
‘왜 이제 온 거야.’
루시펠라의 무언의 힐난에도 제드는 완벽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그러곤 부드럽게 속삭이듯 말했다.
“날 찾았던 건가?”
우에에에엑! 이 인간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루시펠라는 토할 뻔했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이런 건 좀 심하지 않은가.
“포에르 백작에게 허락을 받느라 늦었어. 트라케너, 타보고 싶다고 했잖아.”
루시펠라가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 인간이 와줌으로써 곤란한 일이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루시펠라가 벌어지지 않는 입으로 애써 말하자, 제드가 따스한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기류를 보며 멜로즈가 말했다.
“두 분 사이가 이렇게 좋을 줄이야. 정말 귀감이 되는군요.”
멜로즈의 말에 제드가 말했다.
“아니, 이런 유서 깊은 거대한 행사를 ‘안전하게’ 개최하는 것이 더 귀감이 되는 법이지.”
제드의 말에 멜로즈 영애의 웃는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지금 제드는 허튼수작을 부리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말이 준비되었습니다, 각하.”
하인들이 제드에게 다가왔다. 제드가 그녀를 바라보며 손을 잡아끌었다.
루시펠라가 사라지자 멜로즈 영애의 입가에는 어두운 미소가 걸렸다.
루시펠라와 제드는 하인들을 앞세우고 뒤에서 천천히 그들을 따라 걷고 있었다.
“고마울 때는 고맙다고 말하는 것도 방법이야, 영애.”
제드가 조용히 말했다.
“이렇게 늦게 와놓고서 무슨 개소리야.”
루시펠라가 환하게 웃으며 드러난 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폭언을 내뱉었다.
“아까 말한 대로 포에르 백작에게 허락을 구하느라 늦었어.”
“그래서,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데?”
“그냥, 그 말을 사겠다고 했지.”
“뭐, 뭐?!”
루시펠라가 걸음을 멈추고 소리쳤다. 그러다 이내 주위를 흘낏 둘러보더니 소리를 낮추었다.
“그게 얼마인데 대체……!”
“하인트 공작가에 그런 재력도 없는 것 같나? 내 애마가 트라케너야. 포에르 백작이 이번 말은 한 번 타보고 결정하라더군.”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방금 들은 사실에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그 말인즉, 하인트 공작가에 트라케너가 있다는 거야?”
“당연하지.”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는 속으로 우쭐해져서 대답했다.
“그럼 처음부터 그 말을 태워줬으면……!”
그럼 이 고생은 안 했을 텐데! 루시펠라가 억울한 표정을 짓자 제드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트라케너를 타고 싶다면 자신의 집에서 말을 태우는 방법이 있었다. 왜 그걸 생각 못 했지?
물론 그도 변명할 거리는 있었다. 트라케너를 타고 싶었다는 소리는 이곳으로 오는 마차 안에서 들었다는 말이었다.
“아니, 됐어. 사실 그쪽이 내게 말을 태워줘야 할 의무는 없는 법이지.”
루시펠라는 혼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제드는 안심했다.
“원래 다른 사람이 말을 타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래, 뭐. 어쩔 수 없는 법이지. 나는 그냥 다 이해했을 텐데…….”
루시펠라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말투에선 서운함이 뚝뚝 묻어나왔다.
그에 제드는 당황스러웠다. 졸지에 약혼녀에게 말을 태워주기 싫어서 일부러 말하지 않은 쪼잔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영애, 그러니까 나는…….”
“아니, 괜찮아. 정말 괜찮다니까?”
문제는 정말로 안 괜찮아 보인다는 거였다. 제드는 자신이 쪼잔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자 억울해졌다.
“아, 그럼 우리 영지에 왔을 때도 그 말을 탔었나? 그 말이 있었다면 알아봤을 텐데.”
“아니, 그건 혼종이었어. 그러니까 싸움이 벌어지면 바로 토벌전에 갈 생각이라서 비싼 말을…….”
“아하, 그렇구나. 그렇게 말을 아끼는 사람이었구나. 그런 사람도 있으니까 뭐.”
제드는 왠지 자신이 엄청난 잘못을 한 것 같았다. 그에 루시펠라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나란히 걷던 그녀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져, 제드를 지나쳐 저만큼 앞서 가는 하인의 바로 뒤로 따라갔다. 그녀의 뒷모습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말이 준비된 남성용 마장 입구에 다다르자 루시펠라의 걸음이 멈추었다.
제드는 그제야 루시펠라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말이 준비된 곳이었다.
제드는 트라케너를 보고 감탄했다. 아까 달렸던 말보다 더욱 좋은 말 같았다.
루시펠라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좋은가? 말을 좋아하는 레이디라니, 생각해 보면 정말 특이하긴 했다.
“아까 달렸던 게 이 말이야?”
그에 제드가 대답하려 했으나, 루시펠라의 고개는 하인을 향해 있었기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요, 아까 달렸던 말은 저기에서 쉬고 있어요.”
“말이 안대를 하고 있네?”
“아, 그건 차안대(遮眼帶)야. 말은 사람처럼 앞을 볼 수 있지만, 측면 시야도 발달해서 자칫 사람이 발견 못 한 것에 놀라 날뛸 수 있으니 눈을 전부 가리지 않고 측면만 가려주지. 이 말은 좀 예민한 편인 모양이군.”
제드가 겨우 끼어들어 말하자 루시펠라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루시펠라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어서 제드의 말에 심드렁한 것이었으나, 제드는 아직도 그녀가 화난 건가 싶어 마음이 편치 못했다.
루시펠라가 손을 뻗어 말의 목과 주둥이를 어루만졌다. 매끄러운 털을 쓸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곧이어 그녀가 말에 오르려다 생각이 난 듯 뒤를 돌아보았다.
“아, 맞아.”
루시펠라가 제드의 바로 근처로 다가왔다. 그러곤 제드의 옆에 서더니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뭐지? 또 볼 뽀뽀라도 하려는 건가?
그러다 그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멍청한 소리를 내뱉을 뻔했다. 등 뒷덜미가 찌르르 울리며 간지러운 감각이 느껴졌다.
“사람들에게 당신이 내게 말 타는 걸 가르쳐 줬다고 말해줄 수 있어?”
소곤거리는 작은 바람, 숨결 특유의 온기가 귀에 닿았다.
제드가 놀란 눈을 돌리니 루시펠라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말을 탈 수 있다는 걸 모르시거든.”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듯 루시펠라가 귓속말을 해왔다. 제드가 슬쩍 하인들을 쳐다보니 그들은 알아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루시펠라의 행동에 잠시 동안 평정을 잃었다는 것에 민망함을 느꼈다.
“어려운 일은 아니야.”
그래서 그는 명확하게 승낙의 의사를 표현하기보다는 다소 애매한 대답을 했다. 그에 루시펠라의 몸이 떨어져 나갔다.
아직도 귓가는 그녀가 속삭이고 있는 듯 간질간질했다. 그는 자신이 살짝 흥분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가 느끼는 감정과는 다르게 그녀는 태연했다.
“여러 가지로 신경 써줘서 고마워.”
루시펠라가 말 쪽으로 다가가자 제드는 냉정을 되찾고 손을 뻗어 그녀의 몸을 지탱해 주었다.
루시펠라는 꽤나 능숙한 자세로 말 위에 올랐다.
“와, 역시 시야가 다르네. 엄청 높아.”
활짝 미소 지은 입가, 반짝거리는 얼굴 표정. 호의를 베풀었던 입장에서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은 대가였다.
보통 저 정도 크기의 말에 타면 기사 중에서도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던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영애, 내가 같이 따라가 줄까?”
혼자서 말을 탈 수 있는 이들이야 많았지만 그래도 위험하지 않나?
그러나 루시펠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혼자서 탈 수 있는 건 제드도 잘 알고 있잖아.”
사실 그녀의 기마 실력을 보면 가볍게 마장을 도는 것 정도는 문제없었다.
제드 역시 그걸 알기에 일부러 남성용 마장을 쓰겠다고 포에르 백작에게 말한 것이다.
그럼에도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그녀의 옆에 붙어 있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도 그녀의 입장에서는 실례임이 틀림없었다.
제드는 아이딘 백작령에서 루시펠라와 같이 말을 탔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습격에서 도망치느라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말을 탔던 루시펠라의 자세는 완벽했었다. 그것을 떠올린 제드는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영애의 모습, 기대하지.”
“보고 반하지나 마.”
루시펠라가 고삐를 쥐며 대답했다.
보통 때의 그녀였으면 ‘그쪽에게 보여주려고 말 타는 건 아니거든?’이라고 말했겠지만, 기분이 좋았기에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이 아무렇게나 나왔다.
그 자신만만한 태도에 제드가 피식 웃었다. 그에 루시펠라가 눈을 커다랗게 떴으나,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아이딘 백작은 딸이 말을 탈 수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던 건가?
제드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변함없이 딸에게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름다운 장신구와 드레스를 사준다고 해서 딸이 기뻐할 거라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피존 블러드를 숨기기 위해서, 딸의 기쁨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드레스를 선물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참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이딘 백작 영애는 어쩌고 오셨습니까?”
제드가 쉼터에 다다라 의자에 앉자 포에르 백작이 다가왔다.
“영애는 혼자서도 말을 잘 타지.”
“그렇습니까? 아이딘 영애가 기마도 했다니 의외의 사실이군요, 만약 알았다면 진즉 기마회에 초대했을 겁니다.”
“그땐 초대해도 소용없었을 거야. 내가 가르쳤거든.”
제드는 루시펠라의 부탁대로 자신이 그녀를 가르쳤노라고 말했다.
“사이가 정말 좋으시군요.”
백작의 말에 제드는 내심 불쾌해졌다. 꼭 그녀와 사이가 안 좋은 게 당연한 일이라는 듯 말하지 않나. 제드는 무심하게 말을 내뱉었다.
“영애가 감사를 전해달라더군.”
“어려운 부탁이 아니잖습니까.”
포에르 백작이 사교성 있게 대답했다. 제드는 그것을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제드는 저 젊은 백작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황태자와 붙어 다니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대 포에르 백작도 여색을 밝히는 한심한 인간이었지만 그 아들은 더욱더 악질이었다.
“아름다운 약혼녀를 둬서 참 좋으시겠습니다.”
“백작이야말로 포에르 백작부인처럼 훌륭한 아내를 맞이하다니 좋겠군.”
“무슨 그런 말씀을.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결혼하더니 제 아내의 미색이 좀 떨어지고 있습니다. 아이딘 백작 영애는 다르지 않습니까? 여전히 아름답지요.”
자신을 낮추는 것은 겸손이라 칭찬할 만하지만, 그 겸손의 수단이 왜 제 아내가 된 것인가. 제드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오, 아이딘 영애가 말을 타는군요!”
언제 다가왔는지 이오지프가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꽤나 컸는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마장으로 향했다.
“아이딘 영애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하인트 공? 꼭 소설에서나 나올 것 같은 모습입니다.”
이오지프가 황홀한 표정을 한 채 말했다. 제드는 그 모습에 불쾌했으나, 그가 황자라는 점을 생각해 입을 다물었다.
제드의 시선도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마장으로 향했다.
루시펠라는 보통 속도로 말을 움직이다가 이내 속보(速步)로 말을 몰기 시작했다. 그에 루시펠라의 몸이 들썩거리며 하나로 묶어 올린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하는 것을 느끼자, 제드는 이상한 감정에 한숨을 내쉬었다.
***
‘변함없이 잘생긴 녀석.’
루시펠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순간 머릿속을 지배하던 제드의 목소리를 지웠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은 사람이니까.
루시펠라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기준에서 좀 쪼잔한 사람이긴 해도, 이렇게 말을 탈 기회를 줬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루시펠라는 우선 다른 말보다 더 높은 시야에 적응하기 위해서 가볍게 말을 몰았다.
말은 루시펠라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참 똑똑한 말이었다.
마음대로 달릴 수 없는 속력이 아쉬웠으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을 진정시켰다.
‘너도 참 답답하겠구나.’
높이에 익숙해진 루시펠라는 고개를 돌려 보았다.
여성용 쉼터에 있는 이들 전부가 루시펠라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멜로즈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루시펠라는 멜로즈가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 채 마장 끝으로 말을 몰아 여유롭게 한 바퀴 돌아 다시 입구로 갔다.
바람은 불어왔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으며, 마장 입구에 만들어진 호수는 예쁘게 반짝거렸다.
그때였다. 말이 사납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루시펠라가 당황해 고삐를 조이며 말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말은 도무지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말의 침이 사방으로 튀며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다 이내 앞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 바람에 루시펠라는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루시펠라는 그 흔들리는 와중에도 중심을 잃지 않으려 다리에 힘을 주고 있었다.
“워, 워, 진정해!”
말이 고개를 치켜들었을 때 차안대 너머로 말의 눈이 보였다. 말의 두 눈은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실뱀벌레!’
루시펠라는 경악했다. 얼샤에 있을 때 보았던 하급마물이다.
이 마물은 오로지 말에게만 기생하는 마물로, 이들의 알이 들어 있는 물을 마시거나 이들의 서식지인 호수에서 목욕을 시킬 시 말의 뱃속에서 알을 까고 나와 잠복한다.
이들은 말이 섭취하는 영양분을 조금씩 섭취하기 시작하다가 성체가 되면 서서히 산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알을 낳기에 적당한 호수가 보이면 말을 조종하여 호수로 이끄는 것이다.
실뱀벌레에게 지배당하는 말의 두 눈은 초록색으로 변하며, 말의 복부가 물에 완전히 잠길 시, 이들은 일제히 말의 배를 뚫고 나와 말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한데 지금 말의 시야에 실뱀벌레가 알을 낳기 딱 좋은 장소인 호수가 눈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이 사태를 가장 쉽게 해결할 방법은 말의 시야에서 호수를 없애 버리는 거였지만, 지금 루시펠라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루시펠라는 이를 악물었다. 우연일까? 아니면 계획된 사고일까? 왜 하필 그녀에게 이런 말이 배정된 걸까.
그러다 그녀는 멜로즈가 만약 함정을 팠다면 그렇게 표가 나는 금색 말을 들이밀지 않았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것이 진짜 멜로즈의 함정이었던 것이다.
루시펠라가 지금 향하는 곳은 호수였다. 말이 저기서 빠져 죽게 되면 루시펠라는 다시 호수에 빠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 루시펠라는 호수에 빠져 우스꽝스러운 꼴이 될 것이다. 운이 좋으면 익사할지도 모르고.
루시펠라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루시펠라이자 에스텔이었다.
에스텔이 누구던가.
바로 말을 타는 이, 기사(騎士)가 아니던가!
루시펠라는 다시 조였던 고삐를 느슨하게 풀고 채찍을 세게 내려쳤다.
히히히힝!
말이 자극을 받자 훈련받았던 대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빠른 속도를 내던지, 루시펠라는 허리를 숙여야만 했다. 그래, 이렇게 속도를 내며 달리는 건 바라는 바였다.
루시펠라는 미소를 지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