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50화 (50/173)

#50화 잠들어 있는 사자를 깨우다

2017.08.21.

멜로즈 포에르 백작부인.

루시펠라나 클로렌스처럼 아주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미형의 얼굴에 세련된 옷차림과 더불어 날렵한 몸매를 지녀 주변의 탄성을 일으키는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로에르 영애!”

“백작부인, 오랜만이에요.”

클로렌스가 마주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멜로즈가 반갑다는 듯 뛰어와 클로렌스의 두 손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루시펠라는 이들의 대화에 진정 레이디들의 무서움을 느꼈다. 어딜 봐도 둘은 죽고 못 사는 동무 사이로 보였기 때문이다.

제드와 클로렌스의 대면을 보고 그래도 귀족적인 대화법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뿌듯해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영애는 못 본 사이에 더욱 아름다워지셨네요.”

“백작부인께서는 점점 세련되어지시네요. 사실 지금 부인 앞에 서는 것도 비교되어 민망할 정도예요.”

“영애야말로 무슨 그런 과찬의 말씀을 하세요.”

멜로즈가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친밀감을 담은 눈빛을 주고받은 그녀가 클로렌스에게서 떨어지더니 루시펠라를 지나쳐 사람들에게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며 인사했다.

무시라는 방법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보고 있으려니 치가 떨리게 유치했다.

루시펠라는 클로렌스와 눈짓을 교환했다. 멜로즈가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한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몸을 그녀에게로 틀었다.

그러곤 루시펠라를 쳐다보더니 뒤에 앉아 있는 클로렌스를 향해 과장스러운 어조로 걱정하듯 말했다.

“로에르 영애, 영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요?”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클로렌스가 부드럽게 물었다.

“요새 하인트 공작 각하께서 수도의 업무에 복귀하셨다면서요? 한데 로에르 경께서 힘드신가 봐요. 영애가 가까이할 리 없는 사람이 영애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말이에요.”

루시펠라는 살짝 긴장했다. 멜로즈는 로에르 가문의 차남, 해럴드 로에르가 1기사단의 제드의 휘하에 있기 때문에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의 약혼녀인 루시펠라에게 접근했냐고 물어보고 있었다.

클로렌스가 루시펠라와 가까이한다고 간접적으로 불쾌함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제가 아버님께 말씀드려 볼까요? 어려워하지 말고 말씀해 보세요.”

클로렌스가 그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전장의 흑사자께서 이런 것에 신경 쓰시지 않는다는 건 저보다는 총명한 부인께서 더 잘 아시지 않나요?”

클로렌스의 말은 미묘했다. 제드가 루시펠라를 싫어해서 신경을 안 쓴다는 건지, 아니면 제드 자체가 여자들 사이의 알력 싸움에 관심이 없다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던 탓이다.

멜로즈는 딱히 제드 때문이 아니라 클로렌스가 어떤 의도가 있어 루시펠라를 옆에 두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멜로즈가 입을 열려고 하자 클로렌스의 입이 먼저 열렸다.

“그리고 로에르 후작가는 한 번도 어렵지 않았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누군가에게 잘 보여야 할 만큼 말이에요.”

클로렌스의 얼굴에는 미소가 서려 있었고 목소리는 사근사근했으나 루시펠라는 그녀의 두 눈에 서린 불쾌감을 읽을 수 있었다. 멜로즈의 말은 자칫하면 로에르 후작가를 무시하는 것으로 보일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멜로즈 역시 클로렌스의 불쾌감을 읽고 얼굴이 살짝 굳었다.

클로렌스는 평소에 이런 종류의 말을 유하게 받아넘기는 편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클로렌스가 루시펠라를 끌어들여 자신과 맞섰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로렌스가 말을 이었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멀리 봐서 보이지 않던 좋은 점들을 발견할 수 있어요. 그렇죠, 부인?”

“맞는 말을 하시네요.”

“제 ‘가까이’ 계시는 분들은 모두 좋은 분들이랍니다.”

클로렌스가 상냥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둘러보며 미소 지었다.

루시펠라는 클로렌스에게 몇 번째 하는지 모를 감탄을 했다.

지켜준다더니, 검과 방패가 아닌 부드러운 말과 다정한 미소만으로도 클로렌스는 루시펠라를 지키고 있었다.

“때론 가까운 나무를 보는 것보다 멀리서 숲을 보는 것이 더 현명할 때가 있는 법이죠. 새겨듣도록 하세요, 영애.”

멜로즈는 웃고 있었으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불편한 기색이 느껴졌다. 그녀는 지금 웃으며 경고를 하고 있었다. 가까운 나무를 보지 말고 멀리서 숲을 보라고.

그것이 이드리스 공작가와 포에르 백작가, 그리고 미래의 황태자가 황제가 될 경우를 생각하라는 것을 그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나지막한 경고에도 클로렌스는 생긋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맞는 말씀이시네요. 부인의 말은 명심할게요.”

분명히 클로렌스가 그녀에게 굽혔으나 표정도, 말투도 굽히지 않는 듯한 우아한 태도였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클로렌스의 표정을 본 멜로즈가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표적을 루시펠라로 바꾼 듯했다.

한 걸음, 두 걸음, 멜로즈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루시펠라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딘 백작 영애. 준비한 게 많으니 부디 느긋하게 즐기다 가시길.”

그녀는 다른 이와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루시펠라에게 살갑게 인사했다.

멜로즈의 시선이 루시펠라의 몸을 훑다가 그녀의 왼쪽 어깨로 향했다.

“어머, 실밥이 묻어 있네요.”

그녀의 하얀 손이 루시펠라의 어깨로 향하자, 루시펠라보다 약간 더 큰 멜로즈의 허리가 살짝 숙여졌다.

“그래, 이곳에라도 구질구질하게 붙어 있어야지?”

비웃음 서린 싸늘한 음성이 조용히 루시펠라의 귓가에 울렸다. 그 명백한 적의에 그녀의 시선이 멜로즈를 향했다. 먹구름이 낀 하늘 같은 회색 눈에는 혐오가 절절히 서려 있었다. 멜로즈는 삐뚜름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에 루시펠라가 생긋 미소를 지으며, 처음부터 없는 실밥을 떼려는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옷은 아침에 제 하녀들이 철저히 점검해서 실밥이 붙어 있을 정도로 구질구질하지는 않을 거예요, 부인.”

그녀는 멜로즈의 손을 꽉 쥐었다. 비록 악력은 약하지만,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 아닌가. 어디를 누르면 가장 아픈지 잘 알고 있기에 루시펠라는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말했다.

멜로즈가 비명을 지르려던 입을 다물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몸을 뗐다.

“오랜만의 나들이라고 준비를 참 철저히 하신 모양이네요.”

멜로즈가 웃었다.

“부디 사고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영애에게 저번 황궁에서처럼 사고가 자꾸 일어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황태자 전하께서도 슬퍼하실 거예요.”

점점 잊혀가는 루시펠라의 황태자와의 염문과 황궁 호수 투신 사건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에 영애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염려 너무 감사드려요, 부인.”

그에 굴하지 않고 루시펠라가 상냥한 어투로 말했다. 언제나 적개심을 숨기지 않던 루시펠라의 얼굴은 심지어 미소마저 서렸다.

멜로즈는 완벽하게 달라진 루시펠라의 모습에 당황한 듯했다.

당연했다. 진짜 루시펠라는 언제나 감정적이었고 적개심을 가득 드러내던 사람이었으니, 지금 그녀의 모습을 보면 달라 보이는 게 당연했다.

루시펠라가 멜로즈를 싫어하다 못해 증오하는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에스텔은 진짜 루시펠라로 살아오며 그녀가 어떤 환경에 처했는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고 있었다.

마냥 생각 없이 벌였을 거라 생각한 행동이 사실은 복잡한 사정에 의해, 감정에 의해 벌어졌던 것임을 진짜 루시펠라의 기억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그녀는 루시펠라를 믿기로 했다.

설령 그녀가 어려서 멜로즈를 단순한 감정에 의해 그런 무례한 언사를 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어도 멜로즈가 그녀에게 가했던 행동은 부당했다.

이 육신 안에 있는 인간은 에스텔이며 전혀 다른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저 사람에게 굴하는 것은 진짜 루시펠라에게 미안하지 않겠는가. 분명 증오를 한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트라케너를 떠나서, 그녀는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자신은, 그녀가 업신여기고 괴롭힐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으니까.

그녀는 지지 않을 생각이었다.

***

“대체 여긴 무슨 속셈으로 온 거지?”

“무슨 속셈이냐니. 제드, 그렇게 말하면 서운해. 아이딘 영애를 뺏긴 화풀이를 내게 하면 안 되지.”

제드의 시선이 싸늘하게 이오지프를 훑었다.

그들은 루시펠라 일행과 헤어지고 남자들을 위해 마련된 테이블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날 속이는군. 네가 이전에 황궁에 나와서 영애와 만났던 걸 알고도 묵인했어.”

“이런, 알고 있었나 보네?”

이오지프가 입매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그런데 제드, 영애를 감시하고 있었던 거야? 그건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은데?”

“황태자가 사람을 보내 위해를 가하려 했던 게 얼마 전이야. 내가 그 정도 방비도 안 해둘 것 같나?”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제드는 굳이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이오지프는 그럼에도 납득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의 안경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그가 경박한 발걸음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제드, 나는 아이딘 백작 영애가 참 좋아. 방금 영애가 내게 한 행동도 그래. 나보고 아름답다니. 얼이 빠지긴 하더군. 아, 너 웃음 참는 거 다 보였어.”

“네 표정을 보면 너도 웃었을걸.”

“그래서 영애가 말하는 걸 들어보니, 분명 칭찬을 들었는데 묘하게 기분이 나쁘더군. 그래서야 황족 모독죄로 처벌도 할 수 없겠던데. 왜 그런 감정이 들었던 걸까.”

이오지프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황족 모독죄라는 엄청난 소리에 제드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름답다’, ‘승마복이 잘 어울린다’로 처벌한다면 괴짜라는 소문에 이어 미친놈이라는 소문이 돌겠지.”

“농담이야. 그렇게 진지한 표정 짓지 마.”

이오지프가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본 제드가 그의 눈을 관찰하듯 훑어보았다. 여전히 그는 빈틈이 없었고, 속내를 알아낼 수 없었다.

그의 표정을 간파해 내진 못하더라도, 그가 원하는 것을 알면 그가 왜 이러는지, 그러니까 왜 그의 약혼녀에게 그리 집착하는지 파악은 가능했다.

“영애에게 관심 가지지 마.”

“우와, 독점욕인 거야? 제드, 정말 영애에게 깊게 빠졌구나.”

이번에 제드는 그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그에 이오지프의 눈동자가 커졌다가 다시 가늘게 휘어졌다.

“제드, 설마 내가 영애에게 위해를 끼칠까 봐 그래? 난 형님 같은 사람이 아니야.”

“그래. 너는 확실히 황태자 같은 사람은 아니지.”

제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너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야, 이오지프.”

제드의 말에도 여전히 이오지프는 이미 그런 말을 예상했다는 듯 얼굴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 모습을 한 치의 미동도 없이 바라보던 제드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내가 목표라면 나에게만 집중하는 게 어때?”

마치 사자가 으르렁거리며 경고하는 듯한 음성이었다. 누군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음성이었지만 듣는 사람의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자꾸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접근한다면 네가 바라는 것과 반대로 내가 네 적이 될지도 모르니까.”

제드의 적갈색 눈이 서늘한 빛을 머금었다.

전쟁터가 아닌 이곳, 평화로운 수도에서 제드는 언제나 귀족적이며 이성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왔으나, 이오지프는 그가 필요할 때 얼마나 잔혹해지는지 알고 있었다.

그 살벌한 경고와 위협에 불구하고도 이오지프의 두 눈은 반짝였다.

제더카이어 하인트, 그는 정말 모르는 걸까?

그 말인즉슨, 제드는 언제나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자신의 능력에 따른 ‘위험성’을 그에게 드러낸 것이다. 필요하다면 그는 위험이 되겠다고 직접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의 약혼녀 때문에.

언제나 웅크려 왔던 흑사자가 기지개를 켜듯, 그 느른한 몸이 드디어 일어섰다.

***

기마회가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었는데, 루시펠라는 팔짱을 끼고 그것을 보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클로렌스가 내민 차와 디저트를 마시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마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루시, 그 표정 숨기는 게 어때요?”

이게 유희라니, 루시펠라에게는 너무 시시했다. 그녀가 지금 말을 타러 가지 않는 이유는 하나였다.

저 답답한 마장에서 말을 타게 된다면, 자신은 미쳐 날뛰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였다.

스리슬쩍 제드를 보니 제드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뭔데, 트라케너 태워준다면서. 이렇게 약속을 어기는 거야?

루시펠라가 속으로 꽁알거렸다. 그녀는 계속해서 제드를 힐끔힐끔 보았다. 그는 루시펠라 쪽에 시선도 두지 않았다.

저렇게 얀스가르 귀족들에게 둘러싸인 것을 보니, 저 인간이 얀스가르 내에서 무시 못 할 권력을 가졌다는 것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그러면서 심통이 났다.

그녀가 턱을 괴지 않으려고 노력할 때였다.

“꺅!”

마침 말에 오르던 레인 영애가 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말이 앞발을 자꾸 움직여 놀란 듯했다.

도움을 주는 하인은 어디 있나 보니, 나이가 어려 보이는 소년은 이런 경험이 처음인지 레인 영애의 행동에 같이 당황하고 있었다. 저러다 나중에 저 소년이 크게 혼이 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루시펠라는 혀를 차며 레인 영애에게 다가가 말의 고삐를 짧게 쥐고 말을 진정시켰다.

“말을 처음 타보나요?”

루시펠라의 물음에 레인 영애가 자존심이 상한 표정을 지었다. 딱히 자극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아니요. 오라버니를 따라 몇 번 타봤거든요! 혼자 탈 수 있어요!”

레인 영애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말이 계속 앞발을 긁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움직이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마구간에만 있다 보니 좀이 쑤셨나 봐요. 비명을 지르면 말이 흥분하니까 조금만 소리를 죽여요.”

“하지만!”

“쉿.”

루시펠라의 말에 레인 영애는 입을 다물었다. 아직도 그녀의 눈동자는 불안한 듯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게 무릎으로 안장을 꽉 조이면 안 돼요. 다리를 편하게 두세요. 허리를 펴고, 턱을 아래로 당기세요. 아, 등자에 발을 다 집어넣으시지 말고 조금 빼세요.”

루시펠라가 레인 영애의 허락을 구하는 듯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그녀의 발을 등자에서 살짝 잡아 뺐다.

“고삐는 꽉 쥐지 않고 그냥 편안하게 앉아 있으면 돼요. 레인 영식께 배우신 대로 하시면 돼요.”

루시펠라가 보기에 그 오라버니라는 인간에게 제대로 배운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또 기분 나빠할까 봐 애써 상냥하게 말했다.

그에 레인 영애가 안정된 자세를 하자 말 역시도 편한 모습을 보였다.

“제가 고삐를 이끌고 천천히 걸어볼게요.”

루시펠라가 살짝 걸음을 떼자 말이 그대로 움직였다.

레인 영애는 긴장한 듯 고삐를 꼭 쥐고 앞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몇 걸음 걷자 익숙해졌는지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자, 이번에는 놀라지 않고 잘 몰 수 있겠지?”

“네, 네!”

하인에게 고삐를 넘겨주며 루시펠라가 말을 건네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가려고요?”

“저도 말을 타야죠. 그리고 혼자 타실 수 있다면서요?”

루시펠라의 말에 레인 영애가 우물쭈물한 표정을 지었다.

귀엽네.

루시펠라는 피식 웃었다. 에스텔은 스물셋이었고, 레인 영애는 자신이 알기로는 열일곱 살 정도였다. 그녀에 비하면 한참 어린아이라는 것이었다.

“말을 탈 때까지 할 일도 없겠다, 그럼 조금만 걸어볼까요?”

루시펠라가 다시 말고삐를 잡아 쥐었다. 레인 영애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두 뺨이 붉어진 게 루시펠라가 호의를 베푸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루시펠라의 걸음이 떨어지자 말이 천천히 따라 걸었다.

순한 암말인 모양인지, 속도가 느려서 답답할 텐데도 차분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반 바퀴를 돌았을까. 레인 영애가 멈춰달라고 하더니 뚱한 표정으로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애, 됐어요. 이제 혼자 탈 수 있어요.”

“네?”

“영애가 계속 이러시면 영애가 제 하인을 자처한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런가? 루시펠라가 멜로즈 쪽을 보니, 그쪽 사람들이 루시펠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 별로 상관없는데, 괜찮겠어요?”

“네, 괜찮아요. 이대로 가다간 로에르 영애가 제게 또 화를 낼 텐데요, 뭐.”

루시펠라가 클로렌스 쪽을 바라보자 클로렌스가 살짝 뒤에서 루시펠라를 따라오고 있었다.

못마땅한 표정인 걸 봐서 당장 멈추라고 말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고, 고맙다는 말은 하죠. 저는 인사는 했어요.”

레인 영애의 말에 루시펠라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고삐를 놓고 다시 쉼터 쪽으로 걸어갈 때였다. 땅을 울리는 커다란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모든 이의 시선이 울타리 너머 남성용 마장을 응시했다.

순식간에 지나갔으나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트라케너다!

세상에! 내가 이걸 다시 보다니! 루시펠라의 눈이 반짝반짝 거렸다.

루시펠라는 제드를 찾았다. 한데 그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냥 약속 따윈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루시펠라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영애, 말에 대해 잘 아시나 보네요.”

이런, 낭패다. 클로렌스가 마장에서 말을 타고 있고, 그녀가 혼자 있는 상황에서 멜로즈가 말을 건네왔다. 그녀의 옆에는 그녀를 따르는 익숙한 얼굴들이 밉살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전 영지에 내려갔을 때 배운 적이 있어서요.”

“말에 대해 해박하셨군요. 마구간지기보다 더 잘 아시는 것 같아요.”

“아아.”

그 말에 여자들이 따라 웃었다.

루시펠라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멜로즈가 사정없이 그녀를 비꼬고 있었다.

“그렇게 서 계시지 말고 말을 타보세요. 아, 맞다. 말을 잘 아신다면 ‘그 말’을 타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요.”

“아, 설마 그 말이요?!”

“세상에!”

무슨 말? 설마 트라케너인가? 호기심이 일었다.

“‘그 말’을 끌고 오렴.”

멜로즈가 지시하자 곁에 있던 하인이 마구간으로 뛰어갔다.

“영애도 자주 보지 못할 테니 잘 봐두세요. 이럴 때나 봐야죠.”

멜로즈가 비꼬았지만 루시펠라는 그 말을 담고 있지 않았다. 하인이 끌고 오는 말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털은 보드라운 황금빛으로 반짝였고, 차안대를 한 눈은 사슴 눈망울처럼 맑았다.

말의 훌륭한 자태에 루시펠라의 두 눈이 감탄으로 크게 떠졌다. 멜로즈가 그것을 보고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트라케너와 일반 말의 혼종이에요.”

트라케너의 혼종이라는 말답게 우아한 몸 선을 가진 그 말은 확실히 아름다웠다.

“이 말을 타면 정말 아름답게 보일 거예요. 이 새하얀 갈기 좀 보세요. 모든 이의 시선을 끌걸요?”

확실히 타보고 싶었다.

루시펠라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홀린 듯 말에게 다가갔다. 말은 유순해 보였고, 안장은 편해 보였다.

“타보실래요?”

“아니요.”

루시펠라가 단칼에 대답했다.

타고 싶은 건 타고 싶은 거고, 아닌 건 아닌 거다. 멍청하게 적이 타라고 내밀어 권유하는 걸 왜 타겠는가?

루시펠라의 칼 같은 대답에 멜로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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