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증오의 이유
2017.08.17.
이오지프가 웃는 모습을 본 루시펠라는 속으로 한숨을 쉬더니 클로렌스의 손을 잡았다.
“어차피 가야 한다면, 처음부터 포에르 백작부인에게 인사를 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결국 저는 초대받지 않았으니까요.”
“…….”
“당연하죠, 루시!”
클로렌스가 꽃처럼 아름답게 웃으며 말했다. 그에 비해 제드는 아주 살짝 눈썹이 찌푸려졌다. 물론 루시펠라는 그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트라케너는 나중에라도 보여주실 거죠, 각하?”
루시펠라가 웃으며 물어보자 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펠라가 본 제드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했고, 따라서 루시펠라는 지금 제드가 어떤 심정인지 알지 못했다.
“그럼, 나중에 보지. 로에르 영애도.”
그가 루시펠라의 어깨에 손을 한번 얹고는 등을 돌렸다.
“불쌍한 하인트 공작! 즐거운 시간 되세요, 영애들.”
이오지프는 과장된 말을 하곤 이내 제드의 뒤를 쫓았다. 클로렌스는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기분이 좋나 봐?”
“물론이죠. 오랜만에 이런 탁 트인 곳에 왔는데 왜 기분이 안 좋겠어요? 여기 이 호수 좀 보세요. 참 물이 맑네요.”
왠지 그게 이유가 아닌 것 같은데. 루시펠라는 미심쩍었지만 더 묻지 않고 클로렌스가 돌린 화제로 따라갔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건 아니네. 그래도 백작가에서 이런 호수까지 만들 줄이야.”
“그래요? 한데 어떻게 그런 걸 알아요?”
“수심이 얕잖아. 그리고 밑에 깔린 돌도 크기가 일정하고.”
“아, 그러네요.”
루시펠라는 살짝 허리를 숙여 돌을 던져 보았다. 소리와 물이 튀는 정도를 보니 물에 들어가면 허리쯤에나 찰 것 같았다.
“루시.”
클로렌스가 주의를 주었다. 돌멩이를 호수에 던지는 행위는 확실히 레이디들이 할 법한 행동은 아니었다.
“알았어.”
그녀가 대답했다. 햇빛이 호수의 잔물결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참 예쁜 풍경이었다.
루시펠라는 미소를 지었다.
여자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걸어가며 루시펠라는 이곳, 마장의 구조를 살펴보았다.
남자의 쉼터와 여자의 쉼터 정가운데, 강처럼 기다랗게 울타리가 쳐진 마장이 위치해 있었다.
맨 앞쪽에는 동그랗게 울타리가 쳐져 있었는데, 그곳이 여성용 마장인 듯했다.
마장이 쉼터의 가운데에 있었기에, ‘기마회’라는 말 그대로 사람들은 앉아서 다른 이들이 말을 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구조였다.
다시 남성용 쉼터를 바라보니, 이오지프와 제드가 길을 가다 멈춰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둘이 친하나?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나누는 거지?
루시펠라는 그 모습을 보다 클로렌스의 부름에 이내 몸을 돌려 걸어갔다.
쉼터는 정오가 넘어가면서 따가워지는 봄볕을 막아주기 위해 천막이 쳐져 있었다.
몇 개의 커다란 테이블에는 친분이 있어 보이는 여자들끼리 각각 앉아 있었다.
루시펠라가 클로렌스와 함께 한 테이블로 다가가자 미리 와서 착석해 있던 귀족 여자들의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대부분 클로렌스의 티파티에 참석했던 영애들이었다.
그중, 붉은 머리의 레인 영애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반가워요.”
루시펠라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자, 몇몇 영애가 사교적인 미소로 답했다.
반면 몇몇 영애는 눈이 마주하니 마지못해 인사를 해왔다. 마지막으로, 레인 영애 같은 부류들은 못마땅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루시펠라는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의자를 가지고 장난칠 줄 알았는데, 이번엔 안 그랬네?”
“아무리 그래도 하인트 공작 각하께서 직접 데려온 거잖아요.”
루시펠라가 속닥거리며 묻자 클로렌스가 대답해 주었다. 그렇구나,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테이블 쪽으로 돌렸다.
“아이딘 영애가 왜 여기에 온 거죠?”
그때, 레인 영애의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시비조에 클로렌스가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는 것 같았다.
“로에르 영애의 티파티 때처럼 여기도 망쳐 놓기라도 하려는 건가요?”
그 말에 루시펠라는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애, 저는 그때 제가 한 말이 실수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뭐라고요?”
“그리고 티파티도 제가 망친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그게…….”
“처음부터 살짝 어긋났었어요. 예를 들면 의자라던가. 그렇지 않나요?”
루시펠라가 레인 영애가 쳐놓은 장난을 은근히 언급하자,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클로렌스를 바라보았다.
그에 클로렌스의 싸늘한 눈빛이 레인 영애에게 닿았다.
레인 영애의 장난에 대해 루시펠라가 알고 있다는 것은 클로렌스가 루시펠라에게 이를 말했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루시펠라를 클로렌스가 받아들였다는 의미도 되었다.
그것을 깨달은 레인 영애가 억울함을 가득 담아 클로렌스를 바라보았다.
그때 루시펠라가 말했다.
“그렇지만 제 행동도 현명한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
“그러니 영애께서 옆에서 도와주시겠어요?”
“……무슨 말을 하는 거죠?”
“저는 사실, 곁에 사람이 없다 보니 이런 예법에 대단히 서투르답니다.”
루시펠라가 자존심을 세우지 않고 숙이고 들어갔다.
레인 영애는 그것을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루시펠라를 적대하느냐 노선을 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녀가 클로렌스의 눈치를 보다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제가 어느 가문의 누구인지도 모르는 영애에게 무엇을 가르쳐 드릴 수 있겠어요.”
루시펠라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달리아 레인 남작 영애잖아요? 이젠 기억하고 있답니다.”
“…….”
“사실 영애의 이름과 가문을 알고 있던 건 아니지만, 영애의 빨간 머리는 예뻐서 언제나 기억하고 있었어요.”
루시펠라의 말에 레인 남작 영애가 얼굴을 찌푸리더니,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클로렌스가 레인 남작 영애가 그녀의 빨간 머리를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을 루시펠라에게 넌지시 알려준 모양이었다. 레인 영애는 그것이 루시펠라를 받아들이라는 클로렌스의 은밀한 의사 표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거 감사한 칭찬이군요.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알겠어요.”
레인 영애가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단은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다.
루시펠라가 빙그레 웃었다. 레인 남작 영애가 이런 단순한 칭찬에 바로 넘어갈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그저 그녀는 루시펠라의 말에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이곳은 사교계였고, 사교의 철칙은 구태여 적을 만들지 않은 것이었다. 특히 자신이 따르는 클로렌스가 방관하는 듯하면서 여러 암시로 압박을 주고 있다면 더더욱.
날 섰던 분위기가 누그러지자 레이디들이 안부 인사를 물으며 소소한 대화를 시작했다.
루시펠라 역시도 이전과는 달리 사교적인 미소를 띠며 그 대화를 경청했다.
클로렌스의 지원이 있으니 대화에 끼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한참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저기 포에르 백작부인이 오시네요.”
아, 드디어 오는 건가?
루시펠라가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화려한 자수가 수놓아진 초록색 승마복을 입은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긴 갈색 곱슬머리를 하나로 묶어 내렸으며, 먹구름이 낀 하늘 같은 회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루시펠라가 그녀, 멜로즈의 이목구비를 인식함과 동시에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싫었다. 저 여자는 싫다!
루시펠라는 극렬하게 느껴지는 감정에 당황했다. 황태자를 보았을 때보다 더욱 강한 감정이었다.
루시펠라는 저 여자를 격렬하게 증오하고 있었다.
왜? 그녀를 따돌리고 괴롭혔기 때문에?
루시펠라는 마음속으로 진짜 루시펠라에게 물어보았다.
그와 동시에, 진짜 루시펠라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멜로즈는 처음부터 자신을 적대시한 것은 아니었다.
어린 그녀는 루시펠라보다 1년 늦게 사교계에 입문했고, 친척이었던 그들이 인사를 주고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반가워요, 아이딘 백작 영애.”
그때 멜로즈는 공작부인의 손을 잡고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멜로즈의 살가운 인사를 무시했다.
“영애?”
멜로즈는 루시펠라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나에게 말 걸지 마, 역겨우니까.”
루시펠라가 차갑게 대답했다. 멜로즈는 루시펠라의 흉흉한 표정과 폭언에 놀라 이드리스 공작부인의 뒤로 숨었다. 이드리스 공작부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야단을 쳤다.
“이게 무슨 무례인가요!”
그때부터 멜로즈와 루시펠라의 관계는 최악이 되었다. 영지에서 수도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루시펠라와 달리, 수도의 큰 세력을 가진 이드리스 공녀가 세력을 모으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가장 속상했던 것은 아버지, 아이딘 백작이 멜로즈와 친하게 지내라고 당부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의 편이 아니었으며, 배신감과 마음을 타고 흐르는 절망감에 치를 떨었다.
싫었다. 루시펠라는 그녀가 너무나 싫었다. 싫어하는 사람을 좋게 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멜로즈 역시 그녀를 싫어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수도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루시펠라는 세력 따윈 존재하지 않았고, 친구들을 어떻게 사귀는지도 몰랐으며, 멜로즈 공녀처럼 현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루시펠라는 금세 자리를 잡은 멜로즈에게 밀렸다. 그녀의 괴롭힘 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멜로즈는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싫어하는 이유를 알아내기보다는, 싫어할 만한 이유를 만들어주겠다고 행동하는 쪽에 속했다.
시작은 루시펠라의 무례한 태도였을지언정, 루시펠라에게 향했던 집요한 괴롭힘을 이끌어 나갔던 인물은 멜로즈였다.
루시펠라가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 역시도 나중에 친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사람들과 사귀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아름답다는 장점을 지녔으니 다가오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러나 살갑게 말을 건넸던 이들이 다음 날이면 멜로즈의 곁에 있었다. 루시펠라에게 춤을 신청하려던 남자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춤을 출 듯 접근하다가도 멜로즈의 눈치를 보며 물러났다.
멜로즈는 루시펠라를 소위 말하는 ‘벽의 꽃’으로 만들어놓고 신나게 비웃었다.
원래부터 멜로즈를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멜로즈는 루시펠라를 철저한 외로움으로 몰아넣었다. 그녀가 숨 쉬는 것 하나, 움직임 하나에 모든 제동을 걸었다.
루시펠라는 그녀를 증오하면서도 그녀의 모든 것을 질투했다. 그녀의 지위, 그녀의 부,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그러나 아무리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로부터 선물받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어도, 그 격차는 해소되지 않았다.
성격은 더욱 삐뚤어졌고, 포악하다는 소문까지 붙어 루시펠라는 결국 혼자가 되었다. 아름다운 얀스가르의 샛별은 그렇게 고립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 기억을 떠올렸던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짙은 증오가 멜로즈의 괴롭힘 때문이라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대체 왜 루시펠라는 초면부터 멜로즈를 싫어했던 것인가?
그들이 만났던 첫 기억은 누가 봐도 루시펠라의 잘못이었다. 멜로즈는 그녀에게 어떤 악의도 없었으며 심지어 호의까지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대체 왜 일방적으로 화를 내고 적의를 드러내게 된 건가? 그 근본적인 이유가 가장 중요한 게 아닌가? ‘괴롭힘’이라기에 루시펠라의 증오는 멜로즈만을 향하고 있었다.
‘알려줄 거면 그 이유를 알려줘!’
루시펠라가 말을 건넸지만, 강한 불쾌감만 들 뿐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루시.”
클로렌스가 속삭이자 루시펠라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또 떠오르는 과거에 멍하게 생각에 잠겨 있었던 모양이다.
이 정도 감정의 크기라면 애초에 방문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멜로즈와 루시펠라의 관계를 너무 얕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를 괴롭혔다고 듣긴 했어도, ‘그게 뭐 어때서. 나는 말을 보고 싶은데 내가 왜 피해?’라는 감정이 우선했기에, 그녀는 굳이 이곳에 와 있었다.
진짜 루시펠라가 이 정도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포에르 백작부인, 멜로즈도 못지않게 루시펠라를 싫어할 수도 있었다. 레인 영애가 그녀에게 갖는 적개심이랑은 차원이 다를 사이인 것이다.
이윽고 포에르 백작부인과 그녀를 따르는 사용인들이 가운데 테이블 앞에 섰다.
루시펠라의 심장이 다시 쿵쾅거리며 뛰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찌푸려지는 얼굴을 애써 사교적으로 꾸미려고 노력했다.
‘너한테는 싫은 사람이지만 나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야.’
루시펠라는 자신 안에 있는 진짜 루시펠라에게 말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클로렌스가 걱정스러운 듯 루시펠라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안심하라는 듯 살짝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우리 포에르 가의 기마회에 참석해 주시다니, 정말 기뻐요.”
멜로즈의 억양과 목소리는 상냥하고도 우아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멜로즈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참석자들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제가 초대하지 않은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에 한 테이블에서 억누른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멜로즈의 시선이 대놓고 루시펠라를 향했다. 그녀의 회색 눈이 루시펠라를 향하자 그녀는 연유 모를 역겨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꾹꾹 눌러 삼키며 생긋 웃어 보였다. 그에 멜로즈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녀는 당황해하는 듯하더니 이내 표정을 추슬렀다.
“여러분들을 위해 가장 순한 조랑말들을 준비했어요.”
그녀가 손으로 한쪽을 가리키자, 살짝 거리가 떨어져 있는 마구간이 눈에 들어왔다.
“말을 몰 때 가장 타는 이들을 예쁘게 보이게 하는 말이기도 하죠.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말을 타는 우리의 모습은 신사분들에게 아름답게 보여야 해요. 그렇지 않나요?”
그에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루시펠라는 기묘함을 느꼈다. 클로렌스의 말로, 왜 여자들이 기마회를 선호하는지 알고는 있었다.
여성의 풍만한 몸매를 부각시키는 승마복과 함께 언제나 창백한 화장을 선호하던 귀부인들이 볼이 붉게 달아오른 채 말을 타는 활동적인 모습에서 남자들은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레이디들에게 참가 자격이 주어졌다. 심지어 여자들의 마장은 남자들과는 달리, 제대로 기마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좁았다.
그렇다면 목적은 기마가 아니라 여자들은 보이기 위한 구경거리라는 소리인 것일까. 말을 탄다는 행위는 남자나 여자나 똑같은데 말이다.
여자와 남자가 똑같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씁쓸했다.
“말을 처음 타보시는 분들도 걱정하지 마세요. 아주 순한 말과 더불어 담당 하인들이 도와줄 거랍니다. 파트너가 있으신 분들은 파트너의 도움을 받으셔도 괜찮고요.”
멜로즈의 손짓에 기수로 보이는 남자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자, 우리는 저쪽, 마장에서 말을 타고 놀면 돼요. 커다란 경마장은 남자분들이 이용할 곳이에요. 오늘은 기사분들이 많이 참여해 주셨으니, 좋은 구경을 할 수 있겠네요, 그렇죠?”
루시펠라의 예상대로 울타리로 동그랗게 막아둔 장소가 여성을 위한 마장임이 분명했다.
생각만 해도 답답할 것 같아. 루시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수다나 떨며 준비가 되기를 기다릴까요? 차를 준비해 왔답니다.”
짝, 짝, 멜로즈가 두 번 박수를 치자 하녀들이 찻잔을 테이블 위에 놓기 시작했다. 자신에게만 차를 대접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루시펠라의 앞에도 찻잔이 놓여졌다.
“혹, 이상한 차는 아니겠지?”
“루시, 다 들리겠어요.”
루시펠라는 어떻게 할까 하다가 찻잔에 입을 가져다 대며 적당히 마시는 척했다. 다행히 그녀가 차를 마시는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시 다른 화제가 시작되었다. 슬쩍 멜로즈 쪽을 보니 그녀는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보아하니 루시펠라의 테이블은 마지막에서 두 번째였다.
루시펠라가 작게 물었다.
“뭔가 함정이라도 마련해 놨을까?”
“글쎄요.”
클로렌스가 속삭였다. 그녀는 루시펠라의 찻잔이 줄어 있지 않은 것을 보며 말했다.
“차를 마시지 않은 건 잘하셨어요. 안 보일 때 차를 버리세요, 루시.”
클로렌스의 말에 루시펠라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재빨리 차를 버렸다. 그것을 확인한 클로렌스가 속삭였다.
“보통 곤란한 일이라면, 남자들이 오지 않는 이런 자리에서 벌어지는 법이죠. 그러니 유의해요.”
“그래?”
“이런 방식의 싸움은 사실, 밖에서 보면 좀 유치하거든요.”
그건 그렇다. 차를 그녀에게만 내어주지 않는다거나, 의자를 준비하지 않는다거나, 그것이 괴롭히려는 본인에게는 진지한 일일지는 몰라도 바깥에서 보면 상당히 유치한 행위였다.
“저라면 본격적으로 기마가 시작되기 전에 끝낼 거예요.”
클로렌스의 말에 루시펠라는 새삼 그녀의 무서움을 느꼈다. 적이 되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응?”
“멜로즈가 루시를 괴롭혔을 때는 곁에 아무도 없었잖아요?”
“그랬지.”
“지금은 제가 있어요.”
분명 그녀의 목소리는 작고 여렸지만, 어떤 힘이 있었다.
루시펠라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클로렌스를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거 안심되는데.”
루시펠라가 웃으며 말하자 클로렌스 역시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레이디가 자신을 지켜주게 될 줄이야. 신기하게도 그것이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마음이 따스해지며 든든해졌다. 이전 시토라 기사단의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처럼.
그때 멜로즈가 루시펠라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클로렌스와 루시펠라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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