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레이디와 드레스
2017.08.14.
“뭐 하는 거야?”
루시펠라는 제드의 태도가 의아했다. 약속 시간보다 빨리 온 그 때문에 서둘러 나왔는데, 그녀를 보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던 것이다.
‘데리러 오기 귀찮았던 건가?’
그럴 수도 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데리러 오겠다고 한 사람은 그였는데.
그녀가 제드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그는 여전히 루시펠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제드?”
루시펠라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그는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루시펠라는 그의 시선이 자신의 옷에 향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옷차림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건가?
“안 어울려?”
루시펠라는 방금 자신이 제드에게 그것을 물어봤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입을 한 대 치고 싶었다.
그의 감상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그녀 자신이 기분 좋았으면 되었지! 아무래도 봄 날씨라 마음이 들뜬 모양이다.
“아니,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군.”
루시펠라의 자책과는 달리 제드의 표정이 덤덤했기에 루시펠라는 진정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정원을 가로질러 대기하고 있는 마차 앞으로 걸어갔다.
평소처럼 제드가 루시펠라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루시펠라는 웬일인지 그의 손을 잡지 않았다.
그에 제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레이디들은 마차에 오를 때 남의 손을 지탱하지 않으면 중심을 잡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루시펠라는 그의 손을 거절한 것이다.
루시펠라는 가볍게 마차에 오르며 중얼거렸다.
“바지는 이래서 편하다니까.”
아, 제드는 그녀가 자신의 손을 거절한 이유가 승마복을 입어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레이디들이 남자들의 손에 의지한 건 여자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입은 옷 때문에 거동이 부자연스러웠던 때문이다.
마차 의자에 편하게 자리 잡은 루시펠라를 보고 제드는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언제 바지를 입은 적이 있었나?”
그에 루시펠라가 흠칫했다. 레이디인 루시펠라가 바지를 입었을 리가 있겠는가.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드디어 마차를 탈 수 있다는 것에 들뜬 나머지 이런 말실수를 했다.
“예전에 한 번 입어보긴 했어, 그냥 궁금해서.”
루시펠라는 눈을 굴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했다. 제드는 별달리 의심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호기심에 바지 정도는 입어볼 수 있지 않겠는가.
루시펠라는 지긋지긋한 치마를 벗어버리자 해방감을 느꼈다.
앉을 때도 주름을 신경 쓰지 않아서 좋았고, 속치마와 겉치마 때문에 묵직하게 아래를 잡아끄는 것 같은 특유의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아서 더욱 좋았다.
“어쩌면 레이디들이 잘 움직이지 않는 건 옷차림 때문일지도 몰라.”
언제나 입는 드레스의 무거운 치마는 거추장스러워서 움직이려고 해도 움직일 수 없을 테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제드가 루시펠라의 혼잣말에 대답했다.
“어?”
그녀가 깜짝 놀라 제드를 보았다. 사실 제드로서는 방금 루시펠라의 행동을 보고 무심결에 말한 것이었으나, 그녀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레이디 중에 기사가 생기지 않는 건 치마 때문인지도 모르겠군. 움직이기가 불편할 테니 말이야.”
제드가 말을 덧붙였다. 그런 건가? 루시펠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에스텔은 자신이 여자임에도 기사가 된 이유가 검술에 재능이 있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검술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남자처럼 보이기 위해 바지를 입고 다녔다. 그 어린 나이에도 뒷골목에서 치마 두른 여자들이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골목에서 소녀가 아닌 소년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우연히 늙은 검사의 눈에 띄어 검술을 배웠다. 처음 그 검사는 그녀를 남자아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 가브라인 공작가에서도 여자였지만 그녀는 줄곧 바지를 입었다. 기사였을 때는 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그녀는 일평생 바지를 입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랬다. 치마와 바지를 입고 활동하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어쩌면 레이디 중에서도 에스텔과 같은 검술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치맛자락 때문에 그 재능을 썩히고 있는 게 아닐까? 그녀는 곰곰이 생각했다.
“왜?”
생각에 빠진 루시펠라가 의아했는지 제드가 물었다.
“아니, 맞는 말인 것 같아서.”
루시펠라는 제드의 생각에 솔직히 말해 감탄했다.
생각해 보면 제드는 생각하는 방식이 남들과 다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 다른 방식이 싫지 않았다.
그녀가 그녀의 생각을 말하려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또 웃네.’
제드가 미소를 지으며 루시펠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왜 저런 느끼한 표정이란 말인가. 자신은 무언가 호감을 살 행동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루시펠라를 좋아하나? 아니, 그런 것도 아닐 터다. 그동안 진짜 루시펠라가 벌였던 사고와 더불어 지금 그녀가 해왔던 행동이 있지 않은가? 그녀도 그 정도 판단할 이성과 양심은 있었다.
조금 전의 대화로 비웃을 만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그가 기분이 좋아서 웃었다는 소리인데, 뭔가 기분이 좋을 만한 이유가 있었나?
명확한 결론은 나지 않았다. 뭐, 그래도 웃어서 잘생겼으니 된 건 아닌가.
그녀는 언제나 단순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는 자신에게 위화감을 느꼈다. 자신이 왜 저 인간의 외모를 평가한단 말인가.
한번 좋은 점을 발견하면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해 버리는 게 자신의 큰 단점이었다.
아무리 그가 에스텔을 훌륭한 기사라고 말했어도, 그는 하인트 공작이다. 함부로 마음을 내주면 안 돼. 루시펠라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러고 보니 영애는 왜 그렇게 기마회에 가고 싶어 하지?”
이제 그만 대화하면 안 되나? 루시펠라는 급격한 피로를 느꼈다. 그녀는 제드와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이런 상황이 어딘지 불편했다.
에스텔일 때도, 루시펠라로서 처음 만날 때도 티격태격했는데 어쩌다가 지금 저 녀석의 애칭까지 부르는 상황이 된 걸까.
게다가 대화를 나누면 또 얼굴을 봐야 하지 않나. 자존심상 눈을 피하기는 싫었기에 루시펠라는 속으로 계속 투덜거렸다.
만약 여기서 대화를 끊고 싶다면 ‘알 필요 없잖아’라고 말하면 된다.
하지만 루시펠라도 양심이 있었다. 그 덕분에 지금 자신이 기마회에 가게 되는 것이다. 또 그냥 이 분위기를 깨는 게 달갑지 않았다.
“트라케너를 보고 싶었어.”
루시펠라가 입술을 움직여 작게 말하자 제드가 의아한 듯 물었다.
“말에 관심이 있나? 그러고 보니 영애는 말을 잘 타는 편이었지.”
어라, 이상하다. 아이딘 백작이 그냥 우연이라고 치부한 것을 제드는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건 제드가 똑똑해서 그런 건가? 아니면 그가 루시펠라에게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건가?
“대륙 최고의 말이라는 소리를 들어서…… 한 번 탈 수 있으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렇군. 영애는 말을 좋아하는군.”
제드가 루시펠라의 말에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좋아. 영애가 탈 수 있도록 노력해 보지.”
그가 시원스럽게 말을 이었다.
“정말?”
루시펠라가 몸을 틀어 기쁜 듯 물었다. 그 모습에 제드가 당황한 듯 표정이 굳었다.
루시펠라는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것을 깨닫고 이내 마차 의자에 등을 기댔다.
클로렌스나 에레네 부인이 경박하다고 잔소리할 것이었다.
“고마워.”
루시펠라는 조금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세상에, 역시 제드는 나쁘지 않은 녀석이었다!
루시펠라는 좀 전까지만 해도 제드에게 느꼈던 껄끄러운 감정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기마회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새파란 하늘에 구름이 뭉게뭉게 떠 있었다. 지나가는 길목마다 금색 햇살이 내리쬐었다. 말을 타기에는 너무나 완벽한 날씨였다.
얼굴에 미소가 절로 지어지며 콧노래가 흥얼흥얼 새어 나왔다.
그녀는 창밖의 꿈결 같은 풍경에 집중하느라 제드가 또다시 그 ‘잘생긴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
포에르 백작저는 황궁 주변에 위치한 다른 가문들과는 다르게 그린힐의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말을 관리하는 이들 가문으로서는 많은 말을 수용하며 기를 수 있는 넓은 초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있는 곳은 수도임에도, 이곳은 저택이 아닌 목장 같은 느낌이었다.
말을 달리게 하기 위해 마련되어 있는 넓은 운동장을 보며 루시펠라는 내심 감탄을 했다.
그녀의 기분은 지금 기쁨으로 붕 떠 있었다.
“이런, 하인트 공! 아이딘 영애! 여기서 보다니요.”
능글맞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제드와 루시펠라의 얼굴이 동시에 와그작 구겨졌다.
저 멀리서 이오지프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진초록색 승마복을 입고 있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루시펠라와 제드는 흠잡을 데 없이 우아한 예법으로 인사했다.
이오지프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두 분 다.”
오랜만이긴 개뿔. 루시펠라가 이오지프를 노려보았다.
“전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제드의 물음에 이오지프가 주머니에 있는 작은 책을 꺼내 들었다.
‘말을 탄 귀부인, 사랑에 빠졌네’라는 한눈에 봐도 어딘지 모르게 불건전해 보이는 책이었다.
“책 조사입니다. 역시 책 속에 있는 걸 현실로 보면 몰입이 더 잘된다니까요.”
이오지프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그 책에 몰입을 더해서 무엇을 하려고. 루시펠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떤 기사가 수행하고 있습니까?”
제드의 물음에 이오지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음, 루이르크 경…….”
그에 루시펠라가 움찔했다
“루이르크 경에게 부탁할 생각이었으나 오늘은 쉬는 날이라더군요. 그래서 1기사단 분들에게 좀 부탁했습니다.”
루시펠라는 욕설을 내뱉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일부러 루시펠라를 놀리기 위해 그런 것이다. 그가 대놓고 캐내려 하지 않았지만 이오지프는 루시펠라가 칼리드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슬쩍 제드를 쳐다보니, 제드는 황자를 대하는 정중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 저 녀석처럼 이성을 찾아야지. 루시펠라는 애써 자신을 가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영애, 제가 이 말을 안 했던가요?”
이오지프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루시펠라가 긴장했다. 저 인간은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안심하게 두지 않는 짓궂은 구석이 있었다.
“승마복이 굉장히 잘 어울립니다.”
“…….”
루시펠라는 저 남자에게 욕을 퍼부으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지 생각하며, 자신의 입에서 발사되려는 욕을 꿀꺽 삼켰다.
“정말입니다. 부드러운 몸 선이 드러나 참 아름답습니다. 다리가 이렇게 예쁜 줄 몰랐군요. 하인트 공도 영애의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그 말에 루시펠라의 혈압이 수직 상승했다. 이오지프가 제드에게 ‘그렇죠?’라고 묻기도 전에 그녀의 입이 먼저 열렸다.
“전하께서도 아름다우시네요.”
“……네?”
“승마복을 입으시니 정말 아름답습니다. 평소 크라바트만 착용하시니 잘 보이지 않았던 가슴 근육이 잘 보이네요. 다리도 가느다랗고 예쁠 거라 생각했는데, 울퉁불퉁 제법 근육이 잡혀 있고요.”
“…….”
“미래의 황자비 전하께서도 황자 전하의 미모를 정말 자랑스러워하실 거예요. 어머, 그러고 보니 전하께서도 황실에서 승마복만 입으셔도 괜찮으실 것 같네요!”
원래 말로 하는 공격이라는 것은 공격인지 아닌지 애매하게 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게다가 지금 이건 돌려 말하는 것도 아니어서 트집 잡을 만한 구석이 없었다.
루시펠라는 일부러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이오지프를 바라보았다.
“영애에게 참 과분한 칭찬을 받는군요.”
그와 동시에 어디서 풋,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어디서 난 소리지? 그녀의 고개가 돌아갔다. 딱히 소리를 낼 만한 뭔가는 없었는데. 착각인가?
그녀의 시선이 제드를 향했다. 제드는 여전히 흠잡을 데 없는 정중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제드가 그 소리를 낸 건 아닌 것 같은데.
“루시!”
살짝 어색하게 흐르던 분위기가 밝은 목소리가 들리며 전환되었다.
루시펠라가 고개를 돌려 보니 클로렌스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루시펠라와 다른 채도의 밝은 빨간색 승마복을 입고 있었는데, 화려한 색임에도 불구하고 클로렌스의 아름다운 외모와 무척 잘 어울렸다.
클로렌스는 제드와 이오지프를 바라보더니 이내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치마가 아니라 바지를 입고 있는데도 클로렌스의 인사는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황자 전하와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아, 영애, 영애도 승마복이 잘 어울리십니다. 참 아름…… 아, 아닙니다.”
이오지프가 말을 하려다가 루시펠라의 눈치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클로렌스는 이오지프가 어색하게 말을 끊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이군, 로에르 영애.”
제드의 말에 클로렌스가 이오지프에게서 제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이에요, 각하.”
“로에르 후작께서는 건강하신가?”
“아버님이야 언제나 강건하시죠. 언제나 둘째 오라버니가 폐를 끼치지 않는지 걱정하고 있답니다.”
클로렌스가 미소를 지으며 답하자 제드가 미소 지었다.
“해럴드 경은 충분히 잘 해주고 있어.”
루시펠라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상하네? 같은 미소였는데도 제드의 사교적인 표정과 그때의 표정은 달랐다.
본디 이성에게도 루시펠라처럼 대하는 줄 알았더니 아닌 모양이었다.
그것을 관찰하다가 시선을 돌렸을 때 루시펠라는 이오지프와 눈이 마주쳤다. 이오지프가 웃으며 입을 움직였다.
‘왜, 질투나?’
개소리. 루시펠라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이오지프가 황족이라는 것을 생각해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저런 부류의 인간은 상대하면 더욱 귀찮게 하는 사람이었다.
“공작 각하가 이곳에 오시다니, 믿기지 않아요. 사실 수도에서는 거의 모습을 볼 수 없는 분이시니까요.”
“약혼녀가 오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제드가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그 부드러운 시선에 루시펠라는 장단을 맞춰주려 억지로 웃었다. 역시 뭔가 달랐다.
“어머, 두 분이 사이가 좋으시네요. 부러워라.”
그렇게 말하며 클로렌스가 루시펠라의 팔짱을 꼈다.
제드와 클로렌스의 시선이 다시 마주했다.
뭐지? 뭔가 찌릿한 시선이 오고 간 것 같은데 착각인가?
에스텔이었을 때 가졌던 짐승과 같은 직감이 분명 뭔가가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사이가 안 좋을 이유가 없으니까.”
제드가 루시펠라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그것도 모자라 제드는 루시펠라의 클로렌스가 팔짱을 낀 반대쪽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갑자기 왜 다가오는 건데? 졸지에 두 사람 가운데에 서 있는 루시펠라는 당황스러웠다.
“각하께서 이곳에 오셨다면, 각하가 말을 모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건가요?”
“기회가 있다면 그러겠지. 그렇지만 오늘은 약혼녀를 위해 온 거라서.”
“어머나, 아쉬워라. 그래도 가능하시다면 꼭 보여주세요.”
“그러도록 하지.”
클로렌스의 사교적인 말에 제드 역시 친근하게 화답했다.
어색하게 가운데에 껴 있으면서 루시펠라는 이 둘의 대화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그것이 꼭 귀족들의 대화 정석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지.”
“가요.”
어? 루시펠라는 클로렌스와 제드를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클로렌스와 제드가 서로 마주 보며 말했다.
“각하, 저쪽에 여자들끼리 마련된 자리가 있어요.”
“내 약혼녀는 나와 동반하기로 되어 있어서 말이야. 포에르 백작부인이 초대하지 않아서 저쪽에 가도 될지 모르겠군.”
“백작부인의 일이라면 괜찮아요. 제가 있잖아요.”
“영애를 못 믿는다는 게 아니야. 그저 약혼녀를 내가 데리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영애께서는 어차피 포에르 백작부인에게 인사를 해야 한답니다. 그럴 거면 미리 인사부터 나누는 게 좋지 않을까요?”
대체 이 둘이 무슨 대화를 하는 거지? 왜 자신이 어딜 가는지를 자기들끼리 떠드는 것일까. 그래도 이것을 보고 ‘신경전’이라고 파악할 정도면 그녀도 성장했다는 것일까.
그녀가 혼자 뿌듯함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가지. 트라케너를 타고 싶다고 했지?”
“가요. 우선 인사부터 먼저 하죠.”
또 같은 상황. 두 사람이 싱글거리는 얼굴로 자신을 동시에 바라보자 루시펠라는 왠지 이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어졌다.
슬쩍 이오지프를 바라보니 그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듯했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