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레이디는 기사의 이름을 부른다
2017.08.10.
제드는 거의 뛰어가다시피 했다. 한데 겨우 따라잡았다고 생각하던 찰나 루시펠라가 계단에서 균형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었다.
제드는 기사였고, 뛰어난 민첩함을 지니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 짧은 순간 그는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싸고 다른 손은 계단의 난간을 잡아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계단에서 사이좋게 구르는 꼴사나운 사고는 면했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하마터면 벌어질 뻔한 사고에 아찔함을 느꼈던 그가 자신의 품에 안긴 루시펠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루시펠라 역시 놀란 표정으로 그의 품에 안겨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제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루시펠라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그대로 계단에 걸터앉았다.
“예전부터 지적하고 싶었는데, 체력 단련이랍시고 돌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균형 감각도 단련해야 하는 게 아닐까?”
루시펠라는 정말 사람의 마음을 한시도 가만두지 않았다. 선대 하인트 공작의 죽음 이후로 그가 가장 놀랐던 순간이었다.
“그건!”
루시펠라가 반박하려는 듯 고개를 돌려 제드를 바라보았다.
제드와 루시펠라가 동시에 멈칫했다. 둘의 사이가 지나치게 가까웠기 때문이다.
루시펠라의 호흡은 뛰느라 빨라져 있었고, 제드 역시도 아까의 일 때문에 심장이 빨리 뛰고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곧장 입술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제드의 두 눈에 루시펠라의 사과처럼 빨갛게 익은 두 뺨과 새하얀 피부가 보였다.
손은 여전히 루시펠라의 허리에 가 있었고, 그녀의 머리카락에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루시펠라의 붉은 입술이 보였다. 아까 볼에 닿았던 그 입술의 감촉은 부드러웠다…….
제드는 순간 이성을 잃고 그녀의 입에 입을 맞출 뻔한 것을 초인적인 인내로 참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다리 위에 루시펠라가 걸터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무거운 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옷 위로 느껴지는 감촉이었다.
제드는 빨리 자세를 바꿔야 한다는 의무감에 휩싸였다.
“좀 비켜주지?”
“말하지 않아도 그럴 거거든!”
루시펠라가 툴툴거리며 난간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드는 재빨리 자신의 몸 상태가 어떤지 점검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펠라가 제드를 한번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영애, 잠깐만.”
“왜!”
그래도 이번에는 무시하기지 않기로 했는지 루시펠라가 날카로운 어조로 되물었다. 그는 또 그 모습에 웃음이 나오려던 걸 참았다.
“적당히 해. 진짜, 그럴 권리가 있다고 마음대로 휘두르는 거 정말 추한 거 알…….”
“같이 가지.”
“어?”
루시펠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루시펠라의 두 눈이 순식간에 기쁨으로 반짝거렸다.
제드는 그에 만족을 느꼈다.
아무렴, 역시 그런 촌스러운 목걸이를 선물하는 것보다 이런 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그는 초인적인 인내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누르며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루시펠라의 두 눈이 살짝 불안한 듯 흔들렸다.
“그 어색한 존대는 쓰지 말 것.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쓰도록 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 듣기 괴롭군.”
“……그게 그렇게 괴롭나? 클로렌스도 그렇게 말하던데.”
클로렌스? 제드는 로에르 후작 영애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루시펠라를 보고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는 그녀의 약혼녀가 아니던가. 어째서 먼저 만나고 이야기를 나눈 그보다 나중에 만난, 심지어 친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로에르 후작 영애와 벌써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된 건가.
이건 부당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뒤에 나오는 말은 지극히 충동적이었다.
“그리고 이름.”
“응?”
“‘각하’나 ‘그쪽’이라고 부르지 말고, 앞으로는 내 이름을 부를 것. 나도 이름이 있는 사람이야, 영애.”
“싫어.”
루시펠라가 단번에 거절했다. 그에 그의 기분이 빠른 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지금 그녀에게 거절할 권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클로렌스 로에르는 되고 자신은 안 된단 말인가?
루시펠라가 말을 이었다.
“그쪽 이름은 지나치게 길어. 제더카이어라고 어떻게 매번 불러?”
“그럼 제드라고 줄여 부르면 되잖아.”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펠라는 졸지에 얼렁뚱땅 그를 ‘제드’라고 부르게 되었다. 제드 역시도 얼렁뚱땅 그의 애칭을 부를 권리를 루시펠라에게 넘겨주었다.
“좋아. 앞으로는 그렇게 부르도록 하지, 제드.”
“…….”
그에 제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자신이 생각보다 괜찮은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그의 이름을 이렇게 부르는 사람이 황제와 이오지프 이외에는 모두 죽고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오지프는 그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 특유의 능글맞음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었으며, 황제는 그 권위 때문에 이름을 부를 수 있었던 사람이다.
루시펠라가 이름을 부르자, 그는 자신이 언제부터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던 건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울림이 지나치게 기분 좋다는 걸 깨달았다.
정작 이름을 불러주었던 그녀는 제드가 이름을 불림으로써 느꼈던 감정이 무색할 만큼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제드는 어딘지 모를 아릿함을 느끼며 자신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일부러 평정을 가장해 말했다.
“그리고 사고는 치지 말도록.”
“당연한 거 아니야? 그쪽의 평판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할게.”
루시펠라는 신이 난 듯 활짝 웃었다.
그 웃음에 제드의 마음이 이상하게 울렁였다. 그가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 그때였다.
“좋아, 그럼 됐어. 고마워!”
“……?”
제드는 방금 자신의 감상적인 분위기가 순식간에 와장창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돌아갈게. 그때 봐!”
“잠……!”
제드가 붙잡을 새도 없이 루시펠라가 손을 흔들더니 그대로 계단에서 내려갔다.
참으로 산뜻한 작별이었다. 제드는 멍하게 그녀가 사라져 텅 빈 계단을 응시했다.
지금이라도 쫓아갈까?
아니, 내가 왜!
제드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아까는 내리려고 애썼던 입꼬리를 억지로 들어 올려 미소 지었다.
“그래, 이런 인간이지…… 이런 인간이었어.”
사실 기마회가 용건이었으니 그녀의 성격상 바로 돌아가는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처음 온 집에 눌러앉아 책이라도 읽다 가겠는가? 당연한 일. 그래,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는 애써 루시펠라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안 그러면 또 며칠간 분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좀 더 열과 성을 다해 고맙다고 하면 어디가 덧나나. 아니면 그게 고맙다는 그녀가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인 건가. 이해하려 했지만, 서서히 번져 나가는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아니, 아니지. 그래, 아니지. 더러운 남자가 되지 않은 걸로 만족해야지.”
그는 루시펠라가 환하게 웃고 기분 좋게 돌아간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기뻐하던 루시펠라의 얼굴을 억지로 떠올리니 신기하게도 분노가 가라앉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라는 게 이상했다.
제드는 손을 들어 루시펠라의 입술이 닿았던 곳을 매만졌다. 아까의 감촉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부드러웠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무 짧았어.”
제드는 아쉬운 듯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뺨, 정확히 그녀의 입술이 머물다 간 곳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누군가와 사귀면서 신체 접촉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 역시도 욕구에 충실하며 서로 간의 관계에 마냥 닫혀 있던 사람은 아니었으니.
게다가 루시펠라와는 이미 입을 맞춘 사이였다.
결혼할 약혼녀, 관계로 묶였기에 신체 접촉을 해도 딱히 이런 행위가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게 왜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아파서 제정신이 아닐 때 한 키스가 아닌, 그녀 스스로가 원해서 한 것이기 때문일까.
제드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집무실로 걸어갔다. 그 와중에 그는 부하를 불러 루시펠라가 제대로 돌아갔는지 확인하도록 명령했다.
“아가씨께서는 돌아가셨습니까?”
버나드가 간이 책상에 앉아서 서류를 정돈하고 있었다. 제드는 대답 대신 책상 위에 있는 상자를 집어 뚜껑을 다시 열었다. 그러곤 동그란 초콜릿을 들어 입에 넣었다.
특유의 향과 더불어 쌉싸름한 맛, 그리고 달콤함이 느껴졌다.
“그리 나쁘진 않은 맛이군.”
버나드가 의아한 표정으로 제드를 바라보았다.
***
여자는 티테이블에 앉아 손에 들린 편지를 읽어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맞은편에 앉아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남편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남자는 그녀의 커다란 목소리에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말 그대로야. 하인트 공작이 파트너로 약혼녀를 지목했지.”
“대체 왜!”
“공작이 아이딘 영애에게 빠져 죽고 못 사나 보지. 그 여자는 얼굴 하나는 끝내줬잖아.”
그가 낄낄거리며 홀짝이던 술잔을 기울여 벌컥벌컥 마셨다.
그녀, 멜로즈는 그런 남편의 모습을 혐오스럽게 바라보았다.
이드리스 공작가의 공녀인 멜로즈는 적어도 자신이 공작 또는 황족에 버금가는 인간과 혼인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결과는 어찌 되었나.
포에르 백작가가 건국부터 왕을 보좌한 유서 깊은 가문이긴 하지만, 기껏해야 말이나 관리하는 가문밖에 더 되나?
게다가 남편이 될 인간은 갓 백작 위를 물려받은 성격 나쁜 젊은이였다.
이드리스 공작가가 친정인 그녀에게 폭력을 쓰지는 못했지만, 멜로즈는 남편의 폭력적인 성격에 이골이 나 있었다.
멜로즈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깨물었다.
하인트 공작과 함께 이곳에 온다고? 지금 그 여자가 공작과 약혼했다고 자신을 비웃으러 오는 건가?
그 촌스러운 여자가 아직도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린 모양이었다.
멜로즈는 자신을 독기 어린 시선으로 쏘아보던 루시펠라를 떠올렸다.
사실 초대해서 그녀가 황궁에서 벌인 멍청한 짓을 두고두고 비웃어주고 싶었지만, 루시펠라가 그 의기양양한 면상으로 자신을 비웃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초대하지 않았다.
멜로즈의 목적은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는 것뿐이었다. 루시펠라에 대한 건 나중으로 미뤄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감히 이렇게 나오겠다고?
“가만두지 않겠어.”
멜로즈의 회색 눈이 차갑게 빛났다.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 여보. 그런 거에 전문인 사람을 알고 있지.”
“누군데요?”
포에르 백작이 대답 대신 씨익 웃어 보였다. 멜로즈 역시 누군가를 떠올렸다.
“하인트 공작이 알게 되면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요?”
“괜찮아, 괜찮아. 모르게 하면 되는 거니까.”
포에르 백작은 황태자와 비슷한 부류였다. 강한 사람에게는 비굴하며, 남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즐기는 가학적인 사람.
술을 마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던 그 두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
“기마회에 꼭 가야 하는 거니, 루시?”
백작은 영지로 떠나는 당일에도 못마땅한 듯 루시펠라에게 물었다. 루시펠라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왜요, 포에르 백작도 저를 별로 안 좋아하는 건가요?”
이드리스 공작처럼? 루시펠라는 뒷말을 생략했다.
아이딘 백작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누가 널 싫어하겠니! 그런 사람이 있으면 데려와 보렴!”
절대 그럴 일이 없다는 듯 아이딘 백작이 소리쳤다. 루시펠라는 입술을 뻐끔거렸다. 아마 사교계 사람 대부분이 그녀를 싫어
하지 않을까. 오랜만에 본 백작의 팔불출 같은 모습에 그녀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루시는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단다! 내가 포에르 백작에게 말을 해놓았단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는데. 어차피 그녀야 트라케너만 보면 된다. 만져도 보고, 탈 수 있으면 더 좋고!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해주겠다!”
그 말에 루시펠라는 눈을 반짝이며 덥석 물었다.
“아버지, 거기서 말 한 마리만 사주시면 안 돼요?”
아이딘 백작이 루시펠라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말을 타다가 다치려면 어쩌려고 그래. 절대 안 돼!”
쳇. 루시펠라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백작은 그것도 모자랐는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승마복, 그 승마복을 내 딸이 계속 입는 걸 어떻게 보라고! 나는 그 꼴 못 본다.”
“그냥 승마복인데 입는 게 뭐가 어때서…….”
루시펠라는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엄밀히 말하면 자신은 친딸이 아니기에, 자신에게 돈을 쓰게 하는 게 껄끄러워 루시펠라는 의식적으로 절약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말 한 필 가지고 이렇게 쪼잔하게 나오다니. 불만이 뭉게뭉게 솟아올랐으나 루시펠라는 애써 그 마음을 억눌렀다.
“알았어요, 아버지.”
어쩔 수 없지. 사달라고 강요할 수도 없지 않겠는가. 그녀에겐 재산이라는 게 없으니. 백작의 의사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구경만 하는 걸로 만족할게요.”
시무룩한 말에 백작이 움찔했다.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었지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대신 예쁜 장신구들을 많이 사주겠다.”
“알겠어요.”
루시펠라의 고분고분한 대답에 백작이 미소 지었다
“금방 다녀오마.”
“네.”
백작이 포옹하려고 했으나 루시펠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백작이 한숨을 쉬며 마차에 올랐다.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며 루시펠라는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봄의 시작이었다.
***
제드는 루시펠라와 함께 기마회에 가기 위해 아이딘 백작저에 막 도착했다.
바람은 선선했고, 날은 따뜻했고, 그야말로 기마회에 완벽한 날씨였다.
완연한 봄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의 약속 때문인지 루시펠라를 기다리는 제드의 마음은 평소와는 달랐다.
하인트 공작저뿐만이 아니라, 아이딘 백작가도 봄에 맞춰 화려하게 정원을 꾸며놓았다.
바람이 한번 불어오자 정원 가운데에 위치한 꽃나무에서 피어오르는 달콤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제드에게 계절이란 그저 온도와 풍경이 살짝 변하는 시기였기에, 그는 봄이라고 해서 마음이 들뜨는 부류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어딘지 모르게 들떠 있었다.
그때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와 꽃나무의 꽃잎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는 눈처럼 흩날려 파란 하늘을 수놓는 꽃잎의 연분홍색이 마음에 들었다.
“영애는 아직인가?”
“이제 곧 준비를 끝내고 내려오실 겁니다.”
사실 약속 시간에 늦지는 않았고, 제드가 좀 빨리 도착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조바심이 났다. 그렇지만 또 기이하게도 이 기다림이 싫지 않았다. 이 상반된 감정에 그는 실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루시펠라가 걸어 나왔다.
“제기랄.”
그가 먼저 중얼거린 말이었다.
제드는 왜 승마복이 보수적인 사람들이 못마땅해하는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걸어오는 루시펠라의 모습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거의 대부분 아래로 늘어뜨리던 머리를 하나로 높게 올려 시원하게 목선이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적포도주 색 재킷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녀의 몸에 딱 맞아떨어져 가늘고 날렵한 허리와 더불어 풍만한 가슴이 더욱 부각되어 보였다.
새하얀 승마바지 역시 딱 달라붙어 있었는데, 그녀가 걸음을 옮기자 언제나 치마 사이로 숨겨져 있던 쭉 뻗은 다리가 드러났다.
너무나 매력적인 여체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모습에 자극을 받는 자신에게 한심함을 느꼈다. 노출이 심한 드레스를 입을 때도 괜찮았는데…….
그냥 남자들이 입는 평범한 옷을 입은 것뿐이다. 그것에 일일이 의미 부여를 하며 자극을 받다니, 꼭 음흉한 인간 같지 않은가.
그때 루시펠라가 그를 발견하곤 눈을 마주하며 다가왔다. 그녀의 두 눈은 여전히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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