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공손하게 부탁하는 법
2017.08.07.
“무슨 일로 방문한 거지?”
제드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담담하게 물었다. 그러나 버나드는 그 광경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비록 표정은 느긋했을지언정 서 있는 자세나 책상을 보고 그의 동요를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표정인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 제드의 힘이 빠졌던 두 눈에 어느새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 찾아왔다고, 만나뵐 수 있겠냐고 하십니다.”
“어서 응접실로 모셔와.”
“네.”
하인이 다시 뛰어나가고 제드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옷차림을 바라보더니, 옷매무새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영애가 뭘 좋아하지?”
“네?”
“다과 말이야.”
그런 것까지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버나드가 말했다. 사실 조사를 안 한 건 아니었다.
“딱히 가리는 것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만 먹는 양이 적어서, 사실 어느 걸 좋아하시는지도 불분명하고요.”
“먹는 양이 적다고?”
제드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니 픽픽 쓰러지는 게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그녀 특유의 체형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루시펠라는 상당히 마른 편이었다.
제드는 집사를 불러 최대한 다양한 종류의 다과를 준비해 오라고 시켰다.
하지만 기껏해야 쿠키밖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에 공작저 하인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제드는 결국 거울을 보기 위해 자신의 방까지 걸어갔다. 흐트러짐 없고 완벽하다고 말할 차림새였지만 제드는 신경 쓰이는 부분을 자꾸 보고 또 보았다.
우선 자신의 옷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갈아입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결국 그는 크라바트를 다시 매는 걸로 합의 보며 방 밖으로 나섰다. 그러곤 대기하고 있던 집사에게 물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나?”
“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 자신의 집 복도가 신경이 쓰였다. 물론 이 저택은 아직 돌아가신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사실 아버지도 그렇고 자신도 그렇고 그다지 뭘 두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복도에 있는 건 겨우 야나스산 강철로 만든 검이나 의전용(儀典用) 검, 아니면 갑옷뿐이었다.
레이디가 보기엔 너무 살풍경하지 않은가.
그는 복도의 갑옷들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나중에 그녀가 돌아가면 저 갑옷들부터 치워야겠다고 다짐했다.
느긋하고 여유롭게 걸으려고 제드는 노력했지만 걸음은 자꾸만 빨라졌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어디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조바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마음은 이미 통제를 벗어난 뒤였다.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는 루시펠라의 동그란 뒤통수가 눈에 보였다. 그에 제드의 입꼬리가 자신도 모르게 올라갔다.
루시펠라는 언제나처럼 그 까만 머리를 반 묶음으로 묶어 내리고 있었다. 보라색 리본이 예쁘게 매듭지어 있었다.
제드는 지금 이 순간 루시펠라의 그 검은 머리가 좋았다.
그녀가 방향을 살짝 틀어 움직이자, 그녀의 새하얀 목과 어깨의 능선이 눈에 들어왔다.
봄이라 옷차림도 가볍게 한 모양인지 드레스의 색깔은 리본 색과 똑같은 라일락 빛이었다.
루시펠라는 그가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그를 기다리는 모습에 제드는 연유 모를 만족감을 느꼈다.
아까까지만 해도 기분을 잠식하던 자책감과 불쾌한 기분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영애.”
그가 루시펠라를 부르자 그녀가 몸을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제드는 그녀의 반응이 의아했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자 안심했다. 다행히 자신에게 크게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았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루시펠라가 치맛자락을 살짝 잡으며 우아하게 인사했다.
뭐지? 다른 사람인가. 순간 제드는 의아함을 느꼈다. 슬프게도 제드는 루시펠라가 가장 에스텔스러울 때의 모습만 목격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영애, 지금 어디가 아픈가?”
“아니요, 아프지 않아요.”
오히려 그는 불안감을 느꼈다. 지금 이렇게 거리를 두자는 건가? 이게 정상적인 말투였지만, 무례한 말투에 이미 제드는 적응이 되어버렸다.
제드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았다. 루시펠라의 양 볼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역시 어디가 아픈 건가? 아프지 않으면 저런 말투가 나올 리가 있나? 제드는 저 어색한 말투를 왜 쓰는 건지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 말투는 뭐지? 적응되지 않는군.”
제드의 물음에 루시펠라는 대답 대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곤 허리를 숙이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포장한 상자를 제드에게 내밀었다.
빨간 리본이 묶인 새하얀 상자였다.
“이게 뭐지?”
“선물이에요.”
선물, 선물이라니? 그런 귀여운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제드는 루시펠라를 힐끔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한 것을 넣은 게 아닐까, 그는 리본의 매듭을 풀었다.
저 성격에 평범한 걸 선물하진 않을 것 같은데? 이상한 약초라던가 아니면 나뭇잎이라던가. 아니면 돌멩이려나?
온갖 상상이 제드의 머릿속을 동동 떠다녔다. 상자를 열어보자 나온 것은 제드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초콜릿?”
“…….”
“뭐지?”
요즘 수도 그린힐에서 유행하고 있는 디저트인 초콜릿이었다.
그 독특한 향과 달콤한 맛으로 남녀노소에게 두루 선호되어 선물로 각광받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선물이기에 오히려 더 의심하는 제드였다.
“각하의 댁에 처음으로 방문하잖아요.”
“…….”
자꾸 정상적인 행동을 하니 제드의 불안감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심각한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영애, 솔직하게 말해봐. 이러는 이유가 있지?”
제드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의 어조는 더없이 진지했으며 그의 적갈색 두 눈은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문제는 자신의 선에서 처리할 생각이었다.
역시 로에르 후작 영애가 괴롭힌 게 틀림없다. 아니면 아이딘 백작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래, 그럴지도 몰랐다.
“혹, 아버지 때문에 그런 건가?”
“엥?”
그 물음에 루시펠라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제드는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루시펠라는 다행히 더 물어보지 않고 커다란 두 눈을 되록되록 굴렸다.
“그러니까…….”
결국 루시펠라가 큰마음을 먹은 듯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각하, 기마회 때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되나요?”
“뭐?”
제드는 방금 들은 말을 머릿속에 다시 되풀이했다.
기마회, 데려가 줄 수 있냐, 나를.
똑똑히 이해했다. 아까까지도 그 화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기마회?”
“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드를 올려다보았다. 그 절실한 두 눈을 바라보자 마치 ‘보고 싶어’, ‘가고 싶어’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제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 위에 올린 초콜릿을 한 번, 루시펠라의 간절한 얼굴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했고,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 분석이 다 끝났다.
“싫은데?”
당장에라도 ‘그래’라고 대답해야 했지만, 제드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제드의 예상대로 루시펠라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
“선물에 성의가 없어. 그리고 부탁 역시도 속이 빤히 보여 굉장히 불쾌하군.”
“…….”
제드는 루시펠라의 요구에 자신이 강자라는 것을 파악해 버렸고, 아까까지 더러운 남자가 되어버린 자신에 대한 반성은 깨끗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얼굴에 여실히 새겨진 실망의 기색이 재밌어 제드가 속으로 웃었다.
“선물은, 각하가 좋아하는 게 뭔지 몰라서 가장 괜찮은 걸로 사왔어요. 이걸 싫어하는 건가요?”
물론 선물이 성의가 없다는 건 아니었다.
초콜릿은 가격대가 있는 선물이었으며 무난했으니.
“난 단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영애는 약혼자의 식성 따윈 모르는 건가?”
사실 제드는 단 걸 그렇게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는 딱히 선호하는 게 없었다.
그 말에 루시펠라가 크게 당황했다.
“그러는 그쪽…… 아니, 각하도 제 식성을 모르는 건 똑같잖아요.”
그러자 제드는 억울해졌다. 알아보지도 않으려 한 것과 알아보려는 시도는 했는데 정보를 못 얻는 게 어떻게 똑같은가.
“영애가 식사량이 적어서 식성이 조사가 불가능했다는 걸 미리 말해두지.”
“내가 밥을 적게 먹는 것까지 알다니, 어떻게…….”
루시펠라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차, 제드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의 개인적인 정보를 일방적으로 그가 조사한 것이 아니던가.
물론 루시펠라에 대한 뒷조사는 나쁜 쪽이 아니라 좋은 쪽으로 쓸 생각이었지만, 분명 기분 나쁠 만한 일은 맞았다. 제드는 긴장해서 루시펠라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노력은 생각도 안 해봤는데…….”
루시펠라가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그녀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제드는 어이가 없었다. 설마, 이 부분에 대해 어떤 경각심도 없단 말인가. 게다가 ‘노력’이라니……. 이 떳떳하지 못한 행위가 ‘노력’이라고 표현되자 제드는 기묘함을 느꼈다.
루시펠라는 생각에 잠긴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알겠어요, 각하. 제가 노력이 부족했던 건 인정하죠.”
그녀가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그리고 각하께 제가 그동안 무례했던 건 사과할게요. 생각해 보니 제가 지나쳤던 것 같아요.”
루시펠라가 이렇게 순순한 적이 있던가? 루시펠라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치 꼭 강아지처럼 초롱초롱 빛났다.
제드는 역시 봐주는 게 좋을까 생각했지만, 며칠간 그를 고민에 빠뜨린 루시펠라에게 나름의 짓궂은 복수를 하고 싶었다.
남은 몰아치는 감정과 후회에 괴로워했는데, 상대적으로 루시펠라는 그런 무거운 고민 따윈 하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루시펠라가 조금 더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렇다면 영애의 노력을 봐서 결정하도록 하지.”
“무슨 말이죠?”
“약혼녀로서 어떻게 할 건지 내게 보여줘. 우리가 약혼은 했어도 남들 앞에서는 지나치게 소원하게 보였던 게 사실이잖아. 아니, 거의 나만 노력해 왔지.”
사실 남들 소문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제드에게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냥 그가 말한 건 개소리라는 뜻이었다.
그가 예상했던 루시펠라의 행동은 그녀가 앞으로 살갑게 그에게 웃어준다는 다짐이나, 공식 석상에서는 팔짱을 끼겠다거나, 안부 편지를 정기적으로 보내겠다고 하는 그런 소소한 변화였다. 그것만으로도 제드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었다.
하지만 루시펠라는 그 소리를 듣고 멍한 표정을 짓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본 제드는 이제 슬슬 놀리는 건 그만하고 승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입을 열려던 그 순간이었다.
자신의 가슴과 어깨에 작은 무게감이 실리더니, 별안간 볼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새가 작은 부리로 나무를 쪼듯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충분히 느껴졌다.
제드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제야 자각할 수 있었다.
루시펠라가 그의 볼에 입을 맞춘 것이다.
특유의 부드러운 향내가 코에 훅 끼쳤다가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제드의 가슴에 살짝 얹어져 있던 루시펠라의 손이 떼어졌다.
제드는 멍한 표정으로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여지는 게 중요하다면, 앞으로는 이런 노력 정도는 할게요.”
“…….”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도 루시펠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그 말투에 비해 표정은 ‘됐냐?’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참으로 그녀다웠다. 제드는 이 기묘한 상황이 어이가 없어 픽, 웃었다.
그것을 본 루시펠라의 얼굴 전체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것이 비웃음으로 느껴졌는지 루시펠라가 그동안 해왔던 노력을 깨고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아, 더러워서 못 하겠네. 진짜!”
그 툴툴거리는 말에 제드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 어색한 예의 바른 말투와 선물한 초콜릿, 볼 뽀뽀까지. 그녀가 겨우 기마회에 한 번 가자고 애썼던 게 너무나 명확히 보였다.
비록 얼마 안 가 깨지고 말았지만, 계산적인 행동이라도 이렇게나 원하는 게 투명하게 보인다면 반감보다 오히려 호감이 들지 않겠는가.
“영애.”
“안 갈 거야, 안 간다고!”
루시펠라가 고함을 지르더니, 등을 돌려 바깥으로 나갔다.
제드는 루시펠라가 부끄러워서 일부러 더 소리 지르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 계속 웃었다.
재밌다. 너무 재미있다. 만약 평생을 맞이해야 하는 반려를 선택할 수 있다면, 굳이 약혼으로 얽매이지 않아도 제드는 루시펠라를 선택할 것이다.
한참 웃음을 터뜨리던 제드는 웃음을 멈추고 응접실을 돌아보았다.
루시펠라가 떠나간 자리가 휑했다. 여기서 또 그녀를 놓치면 저번과 같은 꼴이 되고야 만다. 그는 자신이 그간 했던 고뇌를 되풀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제야 들었다.
“영애!”
제드가 재빨리 이름을 부르며 복도로 나서자 루시펠라는 이미 저 멀리 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도 아침마다 체력단련을 꾸준히 한 모양이었다. 참 빠르기도 했다.
“기다려, 영애!”
그러자 그녀의 걸음이 더 빨라졌다. 어떻게 저렇게 빠를 수가 있지? 제드는 혀를 차며 복도를 뛰어갔다.
그렇게 하인트 공작가에서 추격전 아닌 추격전이 벌어졌다.
한편, 루시펠라는 계속해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힐을 신은 몸이 위태롭게 흔들렸으나, 그녀는 대책 없이 발을 콱콱 내딛고 있었다.
며칠간 고민했다. 결론은 그래도 꼭 가보고 싶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녀는 클로렌스에게 조언을 구했다. 클로렌스는 루시펠라가 저지른 짓을 듣고 루시펠라를 꾸중했다.
부탁을 받는 제드의 입장에서는 직접 대면하지 않고 서신, 그것도 ‘그따위 말’(클로렌스는 진짜로 그렇게 말했다)로 부탁을 하면 누구라도 거절할 것이라는 게 그녀의 ‘꾸중’의 주요 내용이었다.
또한 클로렌스는 루시펠라의 말투를 지적하며 레이디처럼 말해야 한다고 했다.
사실 그녀의 무례한 말투가 클로렌스나 제드의 관대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녀 역시 무언가를 희생해야 했다.
루시펠라는 클로렌스의 조언을 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행동한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고역이었지만 나름 노력했다. 왜냐하면 루시펠라는 제드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루시펠라의 몸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들 사이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진짜 루시펠라는 레이디였고 신붓감으로 적절했으니.
그러나 에스텔이 들어옴으로써 모든 게 비틀렸다.
자신은 지금 루시펠라의 육신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데 그것을 자꾸 간과해서 무례한 행동을 해버린다. 그래서 루시펠라는 일단은 제드에게 충실하자고 다짐했다.
그의 볼에 입을 맞춘 것은 그녀 나름의 의지 표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드는 기마회에 데려가 주는 게 마치 꼭 권력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닌가.
제드의 비웃는 표정을 보자 루시펠라는 제드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멸감과 수치심이 들었다. 이 이상 못 한다! 그냥 안 가고 말 것이다!
그녀는 한시라도 이 지긋지긋한 공작가를 벗어나 아까의 기억을 없애 버리고 싶었다.
“기다려, 영애!”
기다리긴 뭘 기다려! 루시펠라는 욕설을 속으로 삼켰다.
마차가 현관 앞에 바로 대기해 있으니 그대로 타서 영원히 저놈과 안녕, 하면 된다. 결혼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루시펠라가 모퉁이를 돌아 계단으로 향했다. 그때, 계단의 나무 틈에 구두 굽이 걸려 몸이 휘청였다. 낮은 굽이 아니었기에 순식간에 몸이 중심을 잃었다.
“루시펠라!”
몸이 기우는 와중에 그녀는 제드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이왕이면 에스텔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살짝 아쉬움을 느끼는 순간 그녀의 몸이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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