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비틀린 관심
2017.07.31.
“황자 전하를 뵙…….”
“쉿, 몰래 도망쳐 나온 겁니다, 영애.”
루시펠라가 황급히 인사하려 하자 이오지프가 그녀를 만류했다.
저 인간이 왜 여기 있는 거지? 게다가 이 상황은 또 뭐란 말인가.
하긴, 생각해 보면 이 이오지프라는 인간은 뜬금없는 곳에서 나타나곤 했다.
루시펠라가 혼자 납득하는 것을 본 이오지프가 웃으며 그녀의 바로 뒤에서 책을 빼냈다.
“얼샤의 역사를 찾으신다면 그 책보다 차라리 이 책이 더 이해하시기 쉬울 겁니다. 아무래도 그 책은 얀스가르인이 쓴 거라 지나치게 얀스가르식 사관이 들어가 있어요.”
“글쎄요, 그저 눈앞에 있어 보고 있던 터라…….”
루시펠라가 덤덤한 표정으로 말하자, 이오지프가 활짝 웃었다.
“에이,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영애. 얼샤에 관심이 많은 거 다 알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번 로에르 후작가에서도 그러셨잖습니까.”
로에르 후작가에서의 일을 저 사람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러다 루시펠라는 이오지프도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제드 때문에 깜빡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황궁에서 도망 나왔다면 얌전히 있지 왜 루시펠라를 발견하고 찾아온 것인가. 참 귀찮은 남자였다.
“그러다니, 무슨 말씀인가요?”
“에스텔 말입니다.”
그에 루시펠라의 몸이 움찔했다. 이오지프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뭐지? 저 능구렁이 같은 놈이 무언가 눈치챈 건가? 충분히 가능했다. 루시펠라는 이오지프라는 황자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긴장한 표정으로 이오지프를 보자, 이오지프가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영애는 얼샤의 여기사, 얼샤의 샛별! 에스텔 슈페르트의 애호가가 아닙니까! 여자임에도 검을 든 기사가 존경스러우신가 보죠?”
아무래도 제멋대로 단단히 오해하는 모양이었다. 루시펠라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에이, 제겐 숨기지 않으셔도 된단 말입니다.”
그는 집요했다. 루시펠라는 그에 짜증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 보면 이 이상한 황자는 우연치고는 지나치게 자주 마주쳤다. 설마, 일부러 마주한 건가?
저런 부류의 인간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엮이면 안 될 놈이다. 루시펠라의 직감과 판단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위층에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전하.”
결국 루시펠라는 대놓고 그를 피하기로 했다. 노골적으로 그와의 대화를 끝마치려 했으나 이오지프는 굴하지 않았다.
“친구라면…… 오, 로에르 후작 영애입니까? 요즘에 친하게 지낸다고 들었습니다.”
딱히 숨기고 다닌 건 아니었지만, 2황자가 그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자신에 대한 정보가 남의 귀에 흘러들어 간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것을 드러내 놓고 알고 있다는 사람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루시펠라의 사교적인 표정이 사라지고, 경계 어린 표정만이 남아 있었다.
“전하께선 제게 참 관심이 많으신가 보군요.”
결국 루시펠라의 입에서 나온 비아냥거림에 이오지프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분명 상냥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분명 한두 번 검을 휘둘러 본 손이 아닌데도, 몸을 단련한 적이 없는 척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물론이지.”
그의 말투가 달라졌다. 안경 너머 웃느라 가늘게 접혔던 이오지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가 성큼, 루시펠라와 거리를 좁혀왔다. 그에 루시펠라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지만, 빌어먹게도 그녀의 뒤는 책장이었다.
기묘한 분위기였다. 금방이라도 숨결이 닿을 것 같은 거리.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루시펠라는 당장 그 손모가지를 부러뜨리고 싶었지만 저놈은 황자였고, 심지어 그녀는 그럴 힘도 없었다.
“영애, 난 그대에게 관심이 있어.”
“…….”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때 퍽, 하는 소리가 들리며 이오지프가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냈다.
루시펠라가 손에 잡히는 가장 두꺼운 책을 이오지프의 발등 위에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어머, 죄송해요, 전하! 제가 힘이 없어서 책을 떨어뜨렸지 뭐예요.”
이오지프가 애써 웃고 있었다. 그녀의 손바닥 두께만 한 두꺼운 책이었고, 일부러 모서리부터 떨어뜨렸으니 아프긴 엄청 아플 것이다.
“가, 갑자기 전하께서 다가오니 놀라서…… 용서하세요.”
루시펠라가 호들갑을 떨며 용서를 구하려 무릎을 꿇으려 하자, 이오지프가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만류했다. 상당히 아픈 모양인지 그는 아직도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 알고 있으니까, 그 뻔히 보이는 연기는 그만하지, 영애?”
2황자가 조용히 속삭였다. 불쾌한 심리가 여실히 드러나는 말투였다.
그에 루시펠라의 기분이 더 좋아졌다.
“그러는 전하께서는 좀 떨어져 주시죠. 갑자기 얼굴을 들이대며 제게 관심이 있다고 말씀하시면, 약혼자가 있는 제가 너무 놀라지 않겠어요? 호호.”
실로 가증스러운 웃음이었지만, 루시펠라는 이제 이런 웃음에 익숙했다.
루시펠라가 또 두꺼운 책을 꺼내려는 것을 본 이오지프가 한 걸음 물러섰다.
다시 숨을 쉴 공간이 생기자 루시펠라는 이오지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를 지나쳐 갔다. ‘저런, 너무 아프시겠다’라는 의례적인 염려의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영애의 그런 모습도 참 매력적이야.”
“전하의 매력에 대한 기준이 좀 특이하시나 보네요.”
“내가 어디에 매력을 느끼는지 알려줄까?”
“알고 싶다고 말하지는 않았답니다.”
이오지프가 루시펠라에게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루시!”
클로렌스의 목소리에 그녀와 이오지프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클로렌스는 냉큼 루시펠라의 옆에 서더니, 치마를 들어 올리며 우아하게 인사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저게 레이디의 품격이다. 루시펠라는 감히 따라 할 엄두도 나지 않는 우아함이었다.
이오지프는 이 대단한 인사를 봐도 별로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는지 담담하게 인사를 받으며 웃었다.
“이런 곳에서 로에르 영애를 뵙게 되다니 행운이로군요.”
“저야말로 황자님을 보다니 행운입니다. 오늘은 무슨 책을 얻으러 오셨나요?”
“하하, 오늘은 책을 얻기보다는 도망을 나왔답니다. 부황(父皇)께서 갑자기 이상한 말씀을 하셔서요.”
“폐하께서요?”
“아, 갑자기 황위를 물려받을 생각이 없냐고 하시지 뭡니까.”
“네에?”
클로렌스보다 루시펠라가 놀라서 소리쳤다. 이 와중에도 클로렌스는 존경스럽게도 눈만 크게 뜨며 놀라움을 표하고 있었다. 이오지프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셔서 하마터면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습니다.”
“폐하께서 그런 생각이 있으셨다면, 이유가 있었겠지요.”
클로렌스가 미소 지으며 사교적으로 말했다.
“아니요. 저는 이런 책만 좋아하는 사람인데요, 뭐.”
이오지프가 웃었다. 그러더니 클로렌스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을 보며 말했다.
“아, 러스킨 브라우닝의 신간이 발매되었군요.”
“네.”
“이거 참, 흥미롭군요! 영애가 이 시인의 시를 좋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보통 여자들은 이런 장중한 시보다는 연애 시를 좋아하니까요.”
“어머, 레인 남작 영애도 이 시인을 좋아한답니다. 아름다운 시를 탐하는 데 남자와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클로렌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에 이오지프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여자를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클로렌스가 미소 지었다.
어라? 루시펠라는 난감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웃으면서 무언가 오가는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일까?
“전하! 전하, 어디 계십니까?”
그때, 서점 바깥에서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크, 도망친 게 벌써 들켰나 봅니다. 그럼 레이디들, 다음에 또 봅시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이오지프가 재빨리 서점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황실 기사 몇이 뛰어와 루시펠라와 클로렌스에게 이오지프가 사라진 곳을 묻자, 그녀들은 그가 사라진 방향을 손가락으로 정확히 가리켜 주었다.
서점 밖으로 나온 클로렌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2황자 전하는 알 수 없군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에 클로렌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괴짜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봐요. 역시나 황족이네요. 방심할 수 없군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
루시펠라는 클로렌스에게 순수하게 감탄했다. 루시펠라가 보기에 이오지프의 연기는 가증스러웠지만, 그만큼 뛰어났기에 남들이 쉽게 알아채지 못했다.
이오지프와 클로렌스가 나눴던 대화가 평범하다고 생각했는데 엄청난 단서가 있었던 모양이다. 루시펠라의 물음에 클로렌스가 웃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직접 제게 말씀하셨잖아요.”
“뭘?”
“황위를 물려받을 생각이 없냐고, 폐하께서 말씀하셨다고요.”
“그래서 도망쳤다고 하지 않았어? 그게 그렇게 중요한 말이야?”
“아니요. 이 경우는 달라요. 루시도 알아들어야 해요.”
클로렌스가 조용히 말했다.
“폐하께서 2황자에게도 황태자 전하처럼 똑같이 기회를 줄지도 모른다는 말이랍니다. 황태자라고 꼭 황위를 물려받는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거기까진 나도 이해했어.”
황제가 드디어 황태자의 정무를 멈춘 건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 이유가 바로 ‘자신’이 원인이었다는 것도. 황제가 결국 모든 것을 알게 되어 그에게 ‘처분’을 내렸다고 아이딘 백작이 직접 말해주었던 것이다.
“아니요. 문제는 그게 아니에요, 루시.”
“그럼 뭔데?”
“황자 전하의 발언은 전하가 황위에 아예 관심이 없지는 않다는 걸 드러낸 거예요.”
“아까도 말했지만, 그 사람, 지금 황궁에서 도망쳤다니까?”
“정말 싫었다면 왜 굳이 그 사실을 제게 이야기했을까요?”
“뭐?”
그도 그랬다. 만약에 황위를 원하지 않았다면 도망치면 그뿐이다. 그런데 황제가 한 말을 왜 루시펠라와 클로렌스에게 한단 말인가. 그것은 누군가가 이런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고 말한 것과 똑같았다.
루시펠라와 다르게 클로렌스는 막강한 세력을 가진 로에르 후작가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 아버지는 황태자, 아니, 황태자 전하를 따르잖아. 그걸 왜 내 앞에서 말한 거지?”
그에 클로렌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지금 황태자 전하가 발이 묶인 게 루시 때문이라고 했었죠?”
“그렇지?”
“그렇다면 루시가 전해준 정보를 저쪽에서 기꺼이 받아들일까요?”
그것도 그랬다. 거기를 차인 놈이 루시펠라가 전한 정보를 기꺼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
그 사실이 퍼지지 않았더라도, 황태자가 루시펠라에게 위해를 끼치려 했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 이들이 ‘루시펠라’가 얻은 정보를 기꺼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거기까지 계산이 끝난 모양이로구나.”
루시펠라가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클로렌스가 말했다.
“으음, 정말로 2황자 전하가 바보 같아서 이런 말을 떠들고 다녔을 가능성도 있겠지만요.”
“아니, 네 말이 맞을걸.”
루시펠라의 확신 어린 대답에 클로렌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루시, 그러고 보니 아까 ‘어떻게 알았어?’라고 물었잖아요. 그 말은 루시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건가요?”
“검을 다뤄본 게 분명한 사람이 꼭 샌님처럼 행동하잖아.”
“전하가 검을 다뤄봤다고요? 2황자 전하는 검과 전혀 관련이 없으신 분이라던데요?”
“그러니까. 우연히 손이 닿았는데, 손바닥 감촉이 검을 한두 번 잡아본 손이 아니라서…….”
“손이요? 황자 전화와 손을 잡으셨다고요?!”
“아니, 책이 떨어져 있어서 주우려다가 닿은 거야. 오해하지 마. 그러니까…….”
이게 설명하기가 애매한데. 우선 그의 손의 감촉과 기묘한 걸음걸이, 첫 만남 때 무거운 책을 거뜬히 들었던 악력. 그런 소소한 요소에서 소위 말하는 ‘냄새’를 맡았을 뿐이었다.
루시펠라가 설명하려고 고민하는 것을 본 클로렌스가 말했다.
“루시, 루시는 레이디로서의 능력은 거의 없는 것 같은데 무언가 다른 능력은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뭐?”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클로렌스는 확실히 감이 날카로웠다. 루시펠라는 클로렌스의 예리함에 가끔 감탄하고는 했다. 게다가 분석력까지 뛰어났다. 저렇게 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할까. 루시펠라가 생각에 잠길 때였다.
“아∼ 맞다. 기마회! 말하고 싶었는데요. 루시, 기마회에 가고 싶은 거예요?”
“당연하지!”
“포에르 가에는 멜로즈가 있다는 거 알고 있는 거죠?”
“멜로즈?”
루시펠라의 되물음에 클로렌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게 누군데?”
그렇게 물으면서도 루시펠라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또 진짜 루시펠라가 알고 있는 사람인 모양이다. 그러면서 불쾌한 감정이 마구마구 솟아올랐다.
“영애를 제일 지독하게 괴롭힌 사람이 멜로즈 이드리스라는 것도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그랬어?”
심장이 쿵쿵거렸다. 루시펠라가 괴롭힘을 당해서 괴로워했다는 기억은 있다. 하지만 누가 괴롭혔는지 딱히 신경 쓰지 않으려 했기에, 그 부분에 대한 생각은 미뤄두고 있었다.
“기억이 날 것도 같아.”
“…….”
클로렌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루시펠라를 보았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래서 그 영애가 날 초대하지는 않을 거라 이 말이지?”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그렇구나.”
루시펠라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착실하게 몸을 단련해 저질 체력에서 일반인의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그럼에도 이것을 활용할 데는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공작 각하에게 부탁해 봐요.”
“뭐? 누구?”
“하인트 공작 각하요.”
갑자기 거기서 제드가 왜 나오지? 의아한 표정을 짓자 클로렌스가 말했다.
“기마회는 원래 남자들끼리만 모이던 친목회인데, 남자들이 파트너를 데려오면서 여자들까지 참여가 가능해졌어요. 그러다 여자들에게도 초대장이 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인기가 많아졌죠.”
“그래? 그 이유가 뭔데?”
웬일로 여자들에게까지 초대장이 날아간 것일까? 클로렌스는 그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승마복 때문이에요.”
“승마복?”
“여자들이 유일하게 입을 수 있는 바지가 승마복이잖아요? 그 말은 즉, 여자들이 각선미를 뽐낼 수 있다는 소리예요. 그리고…….”
클로렌스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
그것을 다 들은 루시펠라가 으엑, 하며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마회는 언제나 치렁치렁한 드레스만 입는 여자들이 바지를 입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는 것은 루시펠라로서도 통감했다.
그런데 그 바지를 입는 이유가 단순히 활동이 편해서가 아닌 치마 아래 숨겨왔던 각선미를 뽐내기 위해서라는 것이 루시펠라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말을 타는 여인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면 그것이 그렇게 관능적이라고 했다.
이는 겉으로는 보수적이지만 퇴폐적인 사교계에서 귀족 여인들이 색다른 방법으로 이성에게 자신의 매력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남자들만 참여했던 기마회는 승마복을 입은 여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성적 매력 때문에 여자들에게까지 확대되었던 것이다.
기마회는 단순히 말만 타는 행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가지가지 하네. 바지를 입는다고 그걸 또 다리만 쳐다봐?”
실로 한심해서 치가 떨릴 정도였다. 남자랑 똑같은 바지를 입었다고 그걸 또 자신들의 눈요깃감으로 삼기 위해 여자들을 초대하는 거라니.
더구나 말을 타서 얼굴이 빨갛게 물들면 그냥 힘든 모양이라고 생각하지, 그것에 또 이상한 상상을 덧붙이다니. 여자가 무엇을 해도 발정 날 족속들이었다.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흠흠. 여하튼, 남자들은 여자들과는 달리 기마회에 파트너를 데려올 자격이 있어요. 포에르 백작가와 하인트 공작가의 관계가 나쁜 건 아니니까, 하인트 공작 각하라면 분명 영애를 데려가도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차라리 아이딘 백작에게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아이딘 백작가와 포에르 백작가는 가깝다고 알고 있는데, 아이딘 백작에게도 초대장이 올 것이니 말이다.
루시펠라는 여전히 기묘한 태도를 보이는 백작을 떠올렸다. 그러다 루시펠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생각해 보니 백작은 몇 주 후에 영지에 내려간다고 말했다. 초대장을 받아도 갈 수 없다.
결국 답은 제드라고? 그래도 그 녀석에게 무언가 부탁해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말들을 보고 싶었다.
“…….”
루시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 방법밖에 없는가.
“내가 간다고 하면 그 사람이 데려가 줄까?”
“승마복이 몸매를 드러낸다고 싫어하는 남자들도 있지만, 저는 공작 각하가 데려가 주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왜?”
“그야 영애가 가고 싶어 하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가고 싶어 하니 데려가 줄 거라니. 꼭 그놈이 루시펠라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흔쾌히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태도였다.
“왜 네가 나보다 더 확신하는 건데.”
“글쎄요?”
클로렌스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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