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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43화 (43/173)

#43화 어떤 소녀

2017.07.27.

“사람의 관계란 알다가도 모르겠군.”

보고를 받은 제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지금 그는 루시펠라가 요사이 클로렌스 로에르와 함께 자주 외출한다는 보고를 듣고 있었다.

사실, 그는 버나드가 보고한 정보의 일부는 미리 알고 있었다. 그녀가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 소문이 귀에 들어오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 소문에 따르면 루시펠라는 클로렌스와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상단에 들려 옷과 장신구들을 직접 본다고 했다.

루시펠라가 나뭇잎이 세공된 백금 진주 목걸이를 좋아한다는 것 역시도 어디까지나 소문으로서 제드의 귀에 들어왔던 것이다.

소문치고는 지나치게 자세했으나 제드에겐 그런 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제드는 물론 루시펠라를 위해서 그 목걸이를 사진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어쩌다가 정보를 습득한 것이지, 그것을 얻어서 이용하려고 그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소위 말하는, ‘좋아하는 여자의 정보를 모두 알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찌질하고 집착이 심한 음침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는 건데?”

사실 그가 진짜 궁금한 것은 그것이었다.

그의 통찰력으로도 클로렌스와 루시펠라의 사이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버나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영애가 다시 한 번 후작저를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라고 합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에 버나드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제드를 보았다.

제드는 애써 그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다.

“로에르 영애가 아이딘 영애를 이용하는 거 아니야?”

“그런 건 아닌 것 같은 게…….”

“아닌 것 같은 게?”

“로에르 후작 영애께선 아이딘 백작 영애를 따라다니면서 소위 말하는 ‘잔소리’를 하셨다고……. 아무래도 이용하는 관계에 잔소리는 좀…….”

버나드 말이 맞았다. 이용하는 관계라면 구슬려서 데리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잔소리’는 어울리지 않았다.

심지어 루시펠라라는 사람은 사교계의 평판과 인간관계 모두 엉망이었기에 사실 ‘이용’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민망했다.

“잔소리라니,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제발 좀 촌스러운 것만 고르지 마세요’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아니, 그녀가 언제 촌스러웠던 적이 있었나! 가을 연회 때도 그렇고, 영지에서도 그녀는 촌스럽지 않았다.

제드는 심미안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가 보기에 루시펠라는 촌스럽지 않았다. 역시 로에르 영애는 루시펠라에게 좋은 목적으로 다가간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감히 그녀를 촌스럽다고 해? 그가 무어라고 말하려 할 때였다.

“또 얼마 전, 아이딘 영애께서 나뭇잎처럼 세공된 백금 진주 목걸이를 좋아하시는 걸 보고, ‘이제 심미안을 기를 때가 되지 않았냐. 촌스럽다는 말을 하기도 아깝다’라고 말씀하셨답니다.”

“뭐?”

“그게, 나뭇잎이 크다고 누가 보면 태초의 별의 부족 장신구라고 착각할 거라고…….”

“…….”

묘사를 들어보니 어떤 모양인지 상상이 간 제드는 사실은 주문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그 목걸이를 사지 않기로 했다.

인정하고 싶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목걸이는 촌스러웠다.

제드가 그걸 선물해서 루시펠라가 하고 다닌다면, 루시펠라가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루시펠라는 그걸 선물한 제드에게 화를 내겠지. 그가 루시펠라가 마음에 들어 했던 목걸이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모를 테니까.

“…….”

이걸로 아이딘 백작저에 방문할 명분이 사라졌다.

제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루시펠라와는 티파티 이후로 전혀 만남이 없던 상태였다.

약혼한 사이끼리 같은 수도에 있으면 차라도 한잔하자고 초대를 하거나 아니면 편지라도 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

뭐, 약혼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니 어쩔 수 없겠지?

혼자 불만에 차 있다가 혼자 납득해 버린 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실제로 본 버나드는 자신의 상관의 ‘섭섭해서 풀죽은’ 표정을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바라보며, 저 표정을 어서 자신의 눈앞에서 치우기 위해 말했다.

“아, 포에르 백작가에서 이번에 대량으로 말을 들여온다고 합니다.”

“그래?”

제드의 얼굴이 흥미로 물들었다.

포에르 백작가는 북쪽 고원의 땅을 가지고 있으며, 그곳에서는 질 좋은 ‘트라케너’라는 품종의 명마가 생산되었다. 귀족들과 황실기사단의 군마들은 모두 포에르 가 군마의 혈통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제드 역시 포에르 백작가의 말을 선호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가 애용하는 말의 품종 역시도 트라케너였고, 하인트 가의 마차를 끄는 말 역시도 트라케너의 혼혈이었다.

“작위 승계 이후로 좋은 품종의 말이 씨가 말랐다고 하던데 그건 아닌가 보지?”

“그게, 이드리스, 아니, 포에르 백작부인께서 이번에 수도로 올라오시면서 오랜만에 봄맞이 ‘기마회’를 여신다고 트라케너뿐만이 아니라 다른 품종의 말들까지 가져온 모양입니다.”

“아아, 이드리스 공녀 말이군.”

멜로즈 이드리스는 이드리스 공작가의 외동딸로, 몇 개월 전 포에르 백작과 혼인해 백작부인이 되었다.

이드리스 공작가와 포에르 백작가가 황태자파에 가담했기에 사실 이들의 결합은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이번에 수도에 다시 자리를 잡으실 예정입니다.”

“하긴, 그 사람이 수도를 두고 지방에만 있을 리가 없지.”

제드가 멜로즈를 떠올리며 말했다. 버나드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내에 몇 안 되는 공작가의 공녀는 이 수도의 화려한 사교계에서 이름을 떨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는 언제나 화려한 옷을 입고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며 약한 이들을 찍어 누르기를 즐겼다. 그런 성격은 아버지인 이드리스 공작과 판박이였다.

“이번 기마회를 크게 열 생각인가 보지?”

“네.”

제드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여자들도 가겠군.”

“그럴 겁니다.”

“아이딘 백작 영애는 초대되는 건가?”

제드의 물음에 버나드가 대답하려 했으나, 제드가 답을 먼저 내렸다.

“당연히 안 가겠지.”

제드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녀가 그런 곳에 참석하는 성격은 아니니까 말이야.”

그의 목소리엔 살짝 기운이 없었다.

***

“전하 앞에서 무엄하다!”

하인트 공작, 가스파르 하인트의 노성에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 윤기 나는 매끄러운 흑발이 사르락거리며 흘러내렸다. 바다같이 새파란 푸른 눈이 의아함을 띄었다.

“이상하네요, 전하께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왜 무엄한 건가요?”

“전하의 가족에 대해 함부로 입에 담는 일이다. 그것이 왜 무엄하지 않는가?”

공작이 위협적인 표정을 지었으나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저밖에 없잖아요. 경께서 직접 이소타 님을 보셨나요?”

“공주님에 대한 소식은 영애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폐하께 보고가 올라가고 있다. 영애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지내신다더군.”

“그래요?”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그 무례한 태도에 슬슬 하인트 공작의 얼굴에 분노가 서릴 때 그녀가 고개를 돌려 국왕, 바이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들은 바완 다르네요. 저는 이소타 님이 얼샤에서 언제나 얀스가르를 그리워하고 계신다고 알고 있는데 말이에요.”

“…….”

“그 보고에도 적혀 있나요? 하루에 한 번 웃으면 많이 웃으신다는 것도, 언제나 얀스가르가 있는 쪽을 바라보시는 것도, 누군가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시는 것도 말이에요.”

“…….”

“전하, 이소타 님이 정말로 얀스가르를 그리워하고 계신다는 걸 모르시나요?”

“영애!”

새파란 눈동자가 맑게 반짝였다. 그 두 눈에 한 점의 더러운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족이잖아요, 전하.”

“영애, 마지막으로……!”

“경, 경도 동의하잖아요. 머나먼 타향에서 얼마나 가족이 그립겠어요. 그렇게 생각하시죠?”

“나는!”

하인트 공작이 난감한 듯 바이두를 바라보았다.

열일곱, 성년을 갓 지난 소녀. 그 혈연이라는 게 얼마나 허망한 울림인지 충분히 알고도 남을 나이였으나, 이 소녀는 지나치게 순수했다.

하인트 공작 역시도 비슷한 심정인 듯했다.

귀족 중에 혈연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되, 이용할 때는 철저히 장기 말로써 이용하는 게 그들의 규칙이었다.

그러나 국왕 바이두는 처음으로 두 눈이 흔들렸다.

그 누구도 국왕을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아내들도 그러했다.

본디, 치밀한 계산에 의해 맞이한 아내들인지라 원래부터 그를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이 세상 모두가 바이두를 사람의 감정을 초월한 그 무언가로 생각한다. 아니, 그가 그렇게 만들었다.

정복왕이 된 이래로 붉은 피의 길을 걸어가며 그는 자기 자신마저 자신이 인간인지 아닌지 헷갈리고는 했다.

“이소타 님에게 안부 편지를 보내주세요, 그래 주실 거죠, 전하?”

여기 있는 어리석을 만치 순수한 여자가 처음으로, 그를 가족을 그리워하는 평범한 사람으로 대했던 것이다. 그것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좋다.”

그는 고독하며 절대적인 자리를 원하면서도, 또한 평범한 사람으로서 취급받기를 원했다.

그런 그의 욕구를 채워주는 인간을 만났다면 응당 평범한 인간으로서 대하는 게 도리였다. 그는 희열을 느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루아나, 루아나 바네사예요.”

여자가 미소를 지었다. 낡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바이두는 이 여자가 상당한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증거로, 하인트 공작마저도 매료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바이두는 젊은 하인트 공작의 시선이 그 여자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루아나, 짐에게 이소타에 대해 들려주거라.”

국왕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에 루아나가 환히 웃으며 그것 보라는 듯 하인트 공작을 바라보았다.

하인트 공작은 그녀의 눈을 피했다.

실로 재미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루아나의 재잘거리는 이야기를 들었다. 말라비틀어져 갈라진 땅에 내린 단비와도 같은 그 이야기를.

“아바마마.”

나긋한 목소리에 황제가 감았던 눈을 떴다. 잠시 졸았던 모양이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둘째 아들, 이오지프에게로 향했다.

이오지프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깨어나시길 기다렸습니다만. 잠이 길어지시면 침전에서 주무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무슨 일로 온 거지?”

“단순한 문안 인사입니다. 요새 책만 읽어 아바마마를 뵙는 데 소홀한 것 같아서…….”

이오지프가 말끝을 흐렸다. 보통 때 같았으면 그것이 못마땅해 지적했을 터였지만 그는 그대로 두었다.

요새 그는 부쩍 자신이 노쇠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꾸지 않던 옛날 꿈을 꾸다니. 과거가 그립기라도 했던 것인가. 그는 자조했다.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어떤 분의 이름을 자꾸 부르셨습니다.”

“무슨 이름을?”

“어, 그, 그러니까, 루…… 루…….”

“루아나.”

“네, 네,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던 이오지프는 자신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크다는 것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

“아바마마, 혹 어떤 분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황제는 이오지프의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고 미소를 지었다.

“신경 쓸 것 없다. 테미르의 어미와 네 어미를 제외하고는 여자를 은애하여 가까이 둔 적은 없느니라.”

“그, 그런 의도로 여쭤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오지프가 황제의 눈을 피하며 더듬거렸다.

황제의 올리브색 눈이 이오지프를 훑었다. 이오지프는 여전히 황제와 제대로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오지프.”

“말씀하십시오.”

부드러운 말투, 항상 싱글거리며 웃는 얼굴. 책, 특히나 로맨스를 좋아하는 괴짜 황자. 이오지프는 언제나 못 미더운 아들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황제의 입에서는 꾸중 대신 뜬금없는 말이 나온 것이다.

“네가 황위를 물려받을 테냐?”

그 말에 순간 정적이 일었다. 이오지프의 두 눈이 커지며, 언제나 피하던 황제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 아바마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다.”

황제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읽을 수가 없었다.

“황위는 아바마마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그리고 형님께서 황태자이시고요! 저, 저는 그런 질문조차 대답할 자격이 못 됩니다.”

이오지프가 덜덜 떨었다. 그는 흡사 무릎을 꿇기라도 할 태세였다.

황제는 그것을 보더니 이마를 지그시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

“그냥 해본 말이었다. 가보거라.”

이오지프는 그제야 집무실을 나갈 수 있었다. 헐레벌떡 도망치듯 뛰어가 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

“기마회라고?”

“네.”

클로렌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펠라의 얼굴이 환하게 물들었던 탓이다.

“말이라니. 세상에, 기마회라는 건 말도 타보는 행사라는 거지? 온갖 종류의 말이 다 모여 있으러냐?”

“당연하죠.”

한쪽은 존대를 하고 한쪽은 반말을 하는 대화는 부자연스러웠으나, 어느새 이들 사이에 고착화된 지 오래였다.

“그 유명한 트라케너를 볼 수 있는 거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며 클로렌스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루시, 아무리 그래도 말보다는 눈앞에 있는 드레스나 장신구에 눈을 반짝여야 레이디가 아닐까요?”

클로렌스가 손으로 장신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루시펠라의 표정이 축 처졌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다 반짝이는 걸로밖에 안 보이는데…….”

“보석과 관련된 가문의 영애가 저보다 이런 걸 모르면 어떻게 해요! 그러니 저번처럼 고대인이 차던 목걸이 같은 걸 선택하겠지요.”

“나는 그거 나쁘진 않았던 것 같…….”

루시펠라는 클로렌스의 눈을 보고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하녀들이 꾸며준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적어도 어느 것이 유행인지는 알아야 했다.

클로렌스는 하녀들에게 지나치게 의존적인 루시펠라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 티파티에서처럼 입만 다물고 있을 거냐’라는 클로렌스의 말에 이끌려 번화가를 돌아다닌 것도 몇 주째. 하지만 루시펠라의 심미안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자, 다시 보세요. 이게 바로 피죤 블러드.”

“아, 그건 기억나.”

클로렌스가 가리킨 보석을 보며 루시펠라가 말했다.

보석이 꼭 핏빛처럼 붉어서 유달리 기억에 남았던 보석이다. 이것이 루비 중에서 최고 등급이라고 했지? 한데 왜 사람들은 피는 징그럽다면서 피를 닮은 보석은 이렇게도 좋아하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루시가 착용하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나야 뭘 장식해도 예쁘겠지.”

루시펠라의 말에 클로렌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을 말한 건데 그게 웃긴 일인가.

“맞아요! 루시는 솔직한 점이 좋아요. 겸양의 미덕을 갖춰야 하는 건 너무나 따분한 일이거든요.”

루시펠라는 거기에 두 뺨이 붉어졌다. 딱히 솔직해지고자 한 건 아니었는데, 이게 호감으로 비칠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제 장신구는 오늘 충분히 봤으니 이제 나가자.”

“그래요.”

클로렌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펠라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전처럼 오후 늦게까지 보는 게 아닌가 내심 걱정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클로렌스는 오늘 쉽게 물러날 모양이었다.

바깥으로 나가자 기사들이 루시펠라와 클로렌스를 따라왔다. 호위받는 것보다 호위하는 것이 익숙해 언제나 불편했지만, 클로렌스와 같이 다니면서 이것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길거리를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던 클로렌스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 머물렀다.

“루시, 서점에 들러야 하는데 같이 갈래요?”

“서점?”

“이번에 새로 나온 시집이 있어서 그걸 직접 사고 싶네요.”

“나는 상관없어.”

서점이라는 곳은 루시펠라와 연이 없는 곳이었지만, 클로렌스와라면 못 갈 것도 없었다.

잠시 후 도착한 서점은 넓었고,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그러나 장신구나 드레스를 파는 깔끔한 샵과는 다르게 너저분했다.

“여긴 다른 곳과는 다른데?”

“책은 여기가 가장 많아요. 다른 데 가면 제가 구하려는 시집이 없거든요. 위층에 올라가서 주인과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잠깐 구경하고 계실래요?”

“그래.”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렌스가 사라지자 루시펠라는 조용히 서점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서점은 한산했으며, 조용하며, 특유의 종이 냄새가 풍겼다.

그녀는 책장에 꽂혀진 제목만 봐도 어려운 책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려나? 그러면 시간 때우는 김에 책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그러다가 그녀는 자신이 자진해서 책을 읽는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깨닫고 놀랐다.

세상에, 이건 ‘에스텔’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다.

이렇게 나날이 자신이 발전하는구나, 싶어 루시펠라는 혼자 뿌듯해했다. 읽을 책을 둘러보던 그녀의 시선이 ‘얼샤 왕국의 흥망’이라는 책에 머물렀다.

우습게도, 에스텔은 이런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책읽기를 싫어했으며, 모든 지식은 칼리드가 알려준 것이었다.

루시펠라는 의식적으로 맨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 보았다. 그러곤 ‘에스텔’이라고 표시된 부분에 손가락을 올렸다.

“얼샤 왕국에 관심이 있으신가 봅니다.”

그 순간 바로 귀 뒤에서 훅, 끼치는 숨소리에 그녀는 하마터면 욕을 하며 책으로 그 사람을 후려칠 뻔했다.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루시펠라가 뒤를 돌아보자 방긋거리며 웃는 이오지프의 모습이 보였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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