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어느 겨울밤의 일
2017.07.13.
“후, 감이 좋은 영애네.”
복도의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이오지프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분명 기척을 죽였는데 어떻게 그걸 눈치챘단 말인가.
‘하긴, 만만히 볼 레이디는 아니지.’
이오지프는 웃으며 생각했다.
클로렌스 로에르는 어린 나이에도 가문의 휘광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조용히 사교계에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온 영애였다.
마치, 자신처럼.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클로렌스의 방 복도를 빠져나갔다.
‘책’을 가져오는 것이 목적이므로, 로에르 후작이 아직 퇴궁하지 않은 이상 티파티가 끝났음에도 이오지프는 이곳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마련된 응접실로 걸어가며 방금 들었던 대화를 분석했다.
엿들어 얻은 정보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로에르 영애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열었던 티파티가 갑작스러운 사람들의 난입으로 실패한 것,
로에르 영애는 제드가 걱정한 것처럼 루시펠라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
루시펠라에게 여자들 특유의 하찮은 싸움이 걸렸지만 그건 저 안에 있는 레인 남작 영애의 독단이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바로, 레인 남작 영애의 말이었다.
‘그리고 아이딘 영애도 대체 왜 그 여자 기사 이야기에 발끈해서는!’
당시 루시펠라가 정확히 어떤 행동을 했는지 이오지프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때 이오지프의 온 신경이 제드에게 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제드는 답지 않게 흥분해서 드러내 놓고 사람들 앞에 칼리드 루이르크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오지프가 인식한 상황은 루시펠라가 칼리드의 말에 반박했다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레인 영애에게 자세히 들은 루시펠라가 취한 태도는 확실히 이상했다.
왜 얀스가르의 귀족 영애가 그 얼샤의 여자 기사 에스텔 슈페르트의 일에 발끈했던 것일까.
제드는 이해가 갔다. 이오지프가 알기로 제드는 얼샤 정복전 이후로 한동안 저택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는 칼리드를 싫어함으로써, 얼샤 정복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미묘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루시펠라 아이딘은 왜?
어라?
그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칼리드 루이르크와 분명 깊은 연관이 있었다. 그때, 황궁에서 칼리드를 보고 이성을 잃어버렸던 루시펠라의 모습을 이오지프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칼리드가 누구인가? 그는 망국 얼샤의 공작이자 기사였다.
‘얼샤’가 루시펠라와 칼리드의 공통점이었단 말이다.
이오지프는 그때, 루시펠라가 영지로 내려가기 전 일부러 대면시킨 이들의 모습을 기억했다.
루시펠라의 동요는 이오지프의 눈으로도 똑똑히 보였고, 칼리드 루이르크는 ‘하인트 공작의 약혼녀’ 이외에는 그녀라는 사람 자체에 아무 감흥이 없어 보였다.
‘아닌가? 어쩌면 루이르크 공이 티파티에 온 것도 어떤 징조였는지도 몰라.’
칼리드가 사적인 사교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오지프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한데 티파티에 루이르크 공작이 대체 왜 참여한 것일까.
그리고 루시펠라 역시도 그렇다. ‘그 여자 기사 이야기에 발끈했다’면, 대체 왜 그런 것일까?
여자를 비하하는 게 싫어서? 칼리드를 싫어하기 때문에? 제드처럼 나라의 배신자가 사라진 나라와 자신이 배신하고 죽인 상관에 대해 떠드는 게 구역질 나서?
아직 또렷하지 않지만 무언가 윤곽이 잡히는 것도 같았다.
에스텔 슈페르트, 얼샤. 이오지프는 그것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
다시 마차에 오른 그들은 백작가로 향해 가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안정된 상태였고, 그녀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후련해 보였다.
제드는 그것에 안심하곤 다음부턴 살기를 드러내는 데 각별히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루시펠라의 시선은 제드를 향해 있었다. 제드는 그녀가 신기했다. 이제 적어도 자신을 보며 못 볼 것을 보았다는 표정을 짓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제드는 대체 왜 그동안 자신이 그 시선에 익숙해져 버렸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아니, 그래도 지금은 안 그렇잖아, 좋은 게 좋은 거지.’
제드의 생각은 자기 멋대로 널뛰고 있었다.
그때, 루시펠라가 무언가 말하려 입술을 열다 닫았다. 제드가 그새를 놓칠세라 재빨리 물었다.
“몸은 괜찮나? 지금 기분은 어때?”
그 말에 루시펠라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제드와 눈이 다소 오랫동안 마주치자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제드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 지금 부끄러워하는 건가!’
분명 그거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분명 제드와 눈을 마주치고는 돌려 버린 것이다.
진짜로 아픈 건가? 그게 아니라면 저 귀여운 반응은 뭐란 말인가. 아니, 나는 저게 왜 귀엽지?
제드는 창밖을 보며 불쑥 튀어나온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저기…….”
그의 고개가 홱 소리가 날 정도로 돌아갔다.
그녀는 무어라 말하기 망설여지는 듯 입을 열다가 닫았는데, 그 머뭇거림을 본 제드는 당장 무슨 일이냐고, 어서 말하기만 하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숨길 줄 아는 남자였다. 그는 말해보라는 듯 눈짓만 까딱했다.
이오지프의 가증스러운 책벌레 연기를 보고 욕하던 제드였으나 이 순간만큼은 이오지프보다 더 탁월한 연기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내가 이상하지 않아?”
그 말을 들은 제드는 아연했다. 설마 그동안 몰랐던 것일까? 그 이상함에 대한 자각이 없다면 곤란한데.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제드의 말에 루시펠라가 대답했다.
“내가 생각해도 내 행동은 평범하거나 보통 사람이 할 만한 행동은 아니야.”
루시펠라는 제드에게 무한한 고마움과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반면 제드에게 함부로 대했다는 자각 역시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지금 눈앞에 있는 자신의 약혼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했다.
루시펠라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매우 신경 쓰였다.
“이상하지.”
역시 제드의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제드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으며, 그녀의 질문에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설마, 지금까지 잘 대해준 건 정신적으로 아픈 약혼녀를 위한 배려였던 건가.
루시펠라가 연유 모를 충격을 받고 있을 때 제드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애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나는 다 알고 있는 게 아니야.”
당연했다. 루시펠라 안에 에스텔이 있다는 것을 대체 제드가 무슨 수로 안단 말인가.
그녀가 품었던 배신감, 박탈감, 비통함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한데 새삼 당연한 것을 제드가 말해주니 이상했다.
그러나 제드가 이어 한 말은 루시펠라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사람에게 상처가 있다면 평소처럼 행동하기 힘들지. 나는 영애가 그런 일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아닌가?”
정확한 지적이었다. 루시펠라는 그의 날카로움에 새삼 놀랐다.
루시펠라 안에 에스텔이 있기에 폭주하고, 진정하고, 돌발 행동을 벌이고, 제드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했다.
그럼에도 제드는 그것을 덤덤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저 그녀에게 그가 모르는 상처가 있다고 생각해서.
“영애는 원래 이상했고, 이런 종류의 이상함이 불쾌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못 참아줄 정도는 아니야.”
그는 루시펠라의 동그랗게 떠진 눈을 보고 확인하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찌 되었든 약혼자잖아.”
이 순간 그는 얀스가르의 흑사자이며 많은 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제더카이어 하인트가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이었다. 그것도 꽤나 괜찮은.
약혼자이기에 그렇다고? ‘약혼자’란 특별해 보여도 결국 약혼이라는 단어에 묶여 버린 남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제드는 그 단어로 묶였다는 것만으로 그녀를 이해해 주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그렇게 나름의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군.”
“뭐가?”
루시펠라가 물음에 제드가 빙그레 웃었다. 루시펠라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 사람이 이렇게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나.
누가 이 사람을 전장의 흑사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누가, 그가 검으로 얼샤의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이던 침략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날카로워 보이는 그 얼굴에 곡선이 서리자 아이처럼 천진해 보였다.
분명 그의 미소는 언제나 그녀에게 지었던 비웃음이나 가식적인 웃음이 아니었다.
루시펠라는 인정해야 했다. 그 얼굴은 꽤나 근사했다.
루시펠라는 애써 자신의 감정을 갈무리했다.
아니, 지금 자신은 저 녀석이 죽은 자신을 칭찬해서 지나치게 사람을 좋게 보는 것이다. 이건 일종의 후광 효과였다.
루시펠라의 마음속에서 천둥과 벼락이 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제드가 말했다.
“영애와 나와 생각이 비슷하다는 게…… 아니, 의외는 아닌가. 영애는 항상 내가 하고 싶어 하던 행동을 대놓고 해댔으니 말이야.”
그랬었나? 항상 제드는 루시펠라에게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언제나 그녀의 행동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황태자의 급소를 걷어찼다고 했을 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영애가 나와 생각이 비슷하다는 걸 알고 조금은 통하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어. 그 점은 잘 맞을 것 같더군.”
그 점이 잘 맞다니, 그건 무슨 의미로 말한 거지?
루시펠라가 물어보려 입을 열었을 때 마차가 멈췄다. 백작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제드는 마차에서 내린 후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시펠라는 손을 뻗다가, 자신이 그와 손을 잡는 것에 어느덧 익숙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변화를 깨달은 루시펠라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루시펠라는 생전 처음 잡아보는 듯,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며 여태 것처럼 건성이 아닌, 살짝 힘을 주어 그의 손을 마주 잡고 그 온기를 느꼈다. 아주 살짝, 미묘한 울림이 가슴에 일었다.
그러자 루시펠라는 화들짝 놀라 제드의 손에 붙인 손가락을 떼었다.
그에 제드가 의아한 듯 루시펠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느 겨울밤, 쏟아지듯 많이 떠오른 별들 아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
“그렇게 고민하실 거면 편지를 보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에레네 부인이 루시펠라에게 말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루시펠라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리고 그녀를 보며 말했다.
“어떻게요?”
“아가씨가 티파티를 열 수도 있잖아요.”
“무리라는 거 알고 계시면서.”
현실적으로 차는 아직도 향이 좀 나고 색깔 빨간 물인 줄로만 아는 루시펠라에게 티파티란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물론 하녀들에게 맡길 수도 있겠지만, 하녀들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만능도 아니었고, 맡긴다고 해봤자 분명히 그녀의 손이 닿지 않은 것이 표가 날 것이었다.
“그전에 로에르 후작 영애가 초대에 응한다는 보장도 없고요.”
루시펠라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클로렌스 로에르 영애를 잡는다.’
여러 일이 있던 와중에 루시펠라의 머릿속에서 내려진 결론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보기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만큼 정보와 루시펠라가 익숙하지 않은 이곳을 알고 있을 것이다.
루시펠라가 곰곰이 생각한 결과 클로렌스는 그녀가 초대한 영애 중에 루시펠라에게 적대적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왜 그녀를 티파티에 그녀를 초대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남았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희망이 있지 않을까?
너무 낙관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문제는, 클로렌스 영애에게 어떻게 접근하냐는 것이었다.
우선 그녀는 저번 티파티에서 좋은 인상을 보여주기는커녕 칼리드와 대립하면서 분위기를 최악으로 몰아갔다.
“아무 연회나 가서 아는 척할 수도 없고.”
“아가씨에게 초대장을 주는 가문도 없을 텐데요.”
에레네 부인은 참으로 맞는 말만 하시는 분이었다. 너무 맞는 말만 해서 속이 쓰렸다.
“역시 포기해야 하나요.”
루시펠라가 허탈하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저번에도 그러다가 초대가 되지 않았나요? 혹 모르죠, 로에르 가문의 아가씨가 아가씨를 초대할지도 모르니까요.”
“에이, 그런 행운이 또 벌어질까요?”
“사실 그런 행운이 벌어지긴 힘들죠.”
루시펠라가 그에 헛웃음을 지었다. 위로를 하려면 위로만 해주지 에레네 부인은 또 너무나 솔직했다.
그래도 그런 행운이 정말 벌어진다면 분명 그녀와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
그런 생각과 동시에 노크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로이자였다.
그녀의 손에는 고급스러운 편지가 들려 있었다.
설마, 뭔가 익숙한 상황에 에레네 부인과 루시펠라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가씨, 로에르 후작가에서 초대장이 왔어요.”
루시펠라와 에레네 부인은 동시에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진짜로 초대장이 온 모양이었다.
***
드레스를 차려입고 후작저로 가는 동안에도 루시펠라는 긴가민가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클로렌스를 점찍으니 거기서 초대장이 온 게 아닌가. 운이 좋아도 지나치게 좋았다.
게다가 클로렌스는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에레네 부인의 말로는 무언가 수작을 꾸몄을 거라고 하는데, 글쎄, 루시펠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귀족 여인들의 간계는 상상을 초월한다.
‘로에르 후작가의 영애가 저번 티파티에서는 무해한 것 같아 보였어도 이조차도 의도한 것일 수도 있다’라는 게 에레네 부인의 의견이었다.
부인은 루시펠라가 클로렌스 로에르에 대해 안심해서는 안 된다고 확실하게 못 박았다.
과연 어떨까. 루시펠라는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시 찾아간 로에르 후작가의 저택을 보고서도 루시펠라는 망설이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해 버렸네.”
약속 시각보다 반 시간이나 더 일찍 와버렸다.
후작가의 사람들이 나와서 그녀를 맞이하곤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렇게 앉아 있기를 약 10분.
루시펠라는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기다리는 것이야 아무렇지도 않지만, 지나치게 빨리 와서 할 일이 없었다.
책이라도 읽어야 하나 했지만, 그녀가 어디 책을 읽는 고상한 취미가 있던가.
“저택을 구경해도 되겠어?”
루시펠라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방 안에 있던 하녀가 머뭇대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안방이나 부엌 같은 곳이 아니라 바깥만 살짝 구경하는 것은 괜찮겠지. 그때 제대로 보지 못한 유리 온실을 본다거나.
루시펠라는 후작가의 고급스러운 복도를 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후작가는 아이딘 백작가보다 절제된 듯하면서도 더욱 부유해 보였다.
“후작 영애는 아직 단장이 끝나지 않은 모양인가 봐?”
루시펠라의 물음에 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가 일찍 오는 바람에 피해를 끼쳤네.”
“아니에요. 아가씨는 본디 한 시간 전부터 모든 준비를 마치시는 분이에요.”
루시펠라는 하녀의 얼굴을 보며 클로렌스가 의외로 괜찮은 고용인이라고 생각했다.
이전, 막 깨어난 루시펠라를 대하던 하녀들의 얼굴과는 다르게 그 얼굴에 자부심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나 보지?”
“아, 그게, 둘째 도련님께서 갑자기 퇴궁하셔서…….”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남자와 또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해럴드가 싫었다. 얼굴을 보니 불쾌감이 자꾸 피어오르는 것을 봐서, 분명 루시펠라와 안 좋은 일로 엮였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럼 다시 안에 들어가 있어야겠네.”
“아, 그러시는 게 좋겠어요.”
저택을 구경한다는 소리에 머뭇거렸던 것도, 그녀가 해럴드와 만날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모양이었다.
그녀가 응접실이 있는 복도를 걸어갈 때였다.
“나를 속였어?!”
바로 위층 계단에서 분노에 찬 해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자 하녀가 루시펠라에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계집애가! 여자들 사이에서 목소리 좀 크다고 나를 기만하는구나!”
그와 동시에 쨍그랑 소리와 짧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 클로렌스 영애의 목소리였다.
이게 무슨 개 같은 상황이지? 루시펠라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향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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