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어리석은 기사와 훌륭한 기사
2017.07.06.
제드가 루시펠라가 앉은 의자의 등받이에 손을 올렸다. 그에 제드의 손가락이 루시펠라의 어깨에 살짝 닿았다.
어째서일까. 그가 뒤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루시펠라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그가 살짝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약혼자로서 위장하듯 미소를 지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얼굴을 보자 왠지 안심이 되었다.
제드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영애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해럴드 경 역시 정신을 차린 듯 벌떡 일어섰다.
“단장님……!”
“인사는 내가 아니라 내 뒤에.”
제드가 짧게 말하며 손을 움직여 어느 지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오지프가 생글생글 미소 띤 얼굴로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2황자는 해맑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사람들의 표정이 전부 기묘하게 변했다.
“전, 전하, 여긴 어찌 오신 겁니까!”
“그야 책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로에르 후작저의 서재에만 존재한다는 책, ‘돌아와요, 약혼자!’를 보기 위해서지요. 이 소설로 말할 것 같으면 흔한 소재를 사용한 것 같지만 세상 사람들이 예상한 고정 관념을 탈피한 소설로서…….”
이오지프가 책에 관해 설명을 늘어놓자 사람들의 표정이 ‘그럼 그렇지’로 변했다.
이오지프는 황궁 도서관에서 틀어박혀 잘 나오지 않는, 이른바 책벌레로 유명했다.
그런 그가 움직일 때면 오로지 자신의 책 내용을 실제로 경험하고 싶거나, 아니면 희귀한 책을 구할 때였다.
사실 황궁 도서관이라는 것도 책을 광적으로 수집하길 좋아하는 이오지프가 황실의 서재를 개방하여 만든 것이었다. 좋은 책은 나눠 봐야 한다는 게 그가 입버릇처럼 하고 다니는 말이었다.
“여하튼 제가 그 책을 갑자기 보고 싶지 뭡니까. 그래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하인트 경과 1기사단 분들에게 호위를 부탁해서 찾아뵈었습니다. 그런데 글쎄! 하인트 경의 약혼녀인 아이딘 영애가 마침 여기 계신다지 뭡니까. 서로 맺어지게 될 사람들을 제가 어떻게 임무 수행 중이라고 떨어뜨려 놓겠습니까. 하여 이 아름다운 유리 온실에 찾아오게 된 거랍니다. 한데, 이야∼ 이렇게 많은 분이 계실 줄이야. 반갑습니다!”
이오지프가 제드와 자신이 이곳에 온 경위를 지나치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모두 황궁의 괴짜가 한 말이니 그러려니 넘겼다. 벌써 이들은 피곤해하는 듯했다.
루시펠라의 정신은 이오지프의 그 장황한 거짓말보다 오로지 제드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왜 이 사람이 이곳에 온 걸까.
제드는 이오지프의 설명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꼭 그것이 이 상황을 수치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아, 실례. 하인트 경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던 도중이었죠. 마저 이야기하시죠.”
이오지프가 제드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그 어색한 상황에 제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수치스럽다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하인트 공?”
그러나 아까부터 칼리드는 제드의 말을 그냥 넘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서늘함까지 묻어 나오는 말에 다시 분위기가 조여들었다.
제드가 칼리드를 노려보았다.
“인사할 시점을 기다리느라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었는데, 듣자 하니 가관이더군. 공은 기사의 명예를 모욕할 생각인가?”
“설마요.”
칼리드가 부드럽게 응수했으나 제드는 화가 나 보였다.
루시펠라는 의아했다. 그가 화를 내는 이유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선봉에 서서 얼샤를 짓밟던 침략자였고 에스텔의 적이었다. 모욕당한 이는 에스텔이며 제드가 아니지 않은가?
“공이 해왔던 짓은 기사로서 용납할 수 없는 짓이야.”
그럼에도 제드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하인트 공께서는 상당히 위험한 말을 하시는군요, 저는 얀스가르에 항복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한 겁니다. 한데 그 행위가 잘못되었다니요.”
“전후 사정을 떠나서 나라와 상관을 배신한 게 기사로서 할 짓은 아니지. 더군다나 이곳의 귀족들과 자신이 배신한 그 상관에 대해 입을 놀리다니, 구역질나서 못 견디겠군.”
“가, 각하.”
“후회하지 않는다고? 나 같으면 그에 대한 건 입에도 꺼내지 않을 거야. 그 구질구질함이 수치스러워서라도 말이야.”
해럴드 경이 중재를 하듯 제드를 불렀지만, 그가 눈짓 한 번 보낸 것만으로도 해럴드는 조용히 물러났다.
“황제 폐하가 인정하긴 했지만 공은 얼샤의 귀족이었고, 얼샤를 지키겠다고 폐왕(廢王) 앞에 맹세했지.”
“그랬지요.”
“기사는 검으로 나라를 지키는 거지 검으로 나라를 배신하는 게 아니야. 그렇지 않은가, 해럴드 경?”
그에 해럴드 경이 어버버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드가 서늘하게 말했다.
“그 상관이 잘못되었더라도 말입니까?”
“우리 얀스가르에 협조적이었다고 해서 그 사실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를 이해 못 했나 보군. 아니면 이해하지 못한 척하는가?”
제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대체 왜 이 남자는 루시펠라가 한 말을, 머릿속에서 할까 말까 되풀이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인가.
그는 얀스가르의 고위 귀족이고 얼샤를 멸망시키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던 남자다.
“그렇다면 공은 병사들의 목숨이 사라지더라도 그렇게 하실 생각입니까?”
루시펠라는 제드가 대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병사들을 희생시키지 않고 전쟁을 지속할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빠져나가지 못할 질문에 제드가 피식 웃었다. 마치 그 질문을 예상했다는 태도였다. 그에 루시펠라의 두 눈이 커졌다.
“구질구질한 변명은 그만하지, 공. 사람들의 목숨이 그렇게 중요했다면 나라를 그 모양 그 꼴로 방치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 안 그런가?”
그러나 그의 대답은 루시펠라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거였다.
그녀와 더불어 칼리드의 얼굴이 굳었다. 칼리드의 입이 열렸지만 제드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공의 상관인 에스텔 슈페르트는 적어도 기사로서 자신이 할 일을 한 거야. 기사가 검을 들어 나라를 지킨다. 거기엔 대의도, 명분도 필요 없지.”
왜 지금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일까. 왜 듣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은 칼리드가 아니라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제드인 것일까.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그때, 제드의 눈이 루시펠라와 마주쳤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루시펠라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갈색 눈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왜 성별이 문제라고 말하는 거지? ‘여자’라 어리석었다고 상관을 죽인 변명거리를 찾아대는 건가? 검을 들고 싸우는 사람들에게 성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사느냐 죽느냐일 뿐.”
제드의 말에 온실 안은 서늘한 정적이 맴돌았다.
루시펠라는 칼리드를 힐끔 보았다. 그러다 그녀는 칼리드의 손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는 화가 나면 에스텔처럼 주먹을 꽉 쥐는 버릇이 있었다.
저 녀석이, 칼리드가 화가 난 거다.
그러나 칼리드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 두 자안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공께서는 정말 기사의 귀감이 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공은 기사의 수치지.”
제드가 얼굴에 드리운 미소를 지우며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원래 제드가 타인들 앞에서 이렇게 감정을 잘 드러내는 사람인가?
그녀는 제드를 많이 보진 않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표정을 관리하려고 애썼던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자리에서 평정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아니, 지금 그는 대놓고 분노하고 있었다.
“상관의 목을 벤 그대라면, 얀스가르가 똑같은 상황이 되면 그땐 병사들의 목숨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누구의 목을 벨 거지?”
제드의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명실상부한 공작이었고, 얼샤 정복전쟁에 참여해 승리로 이끈 기사였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그보다 더 당당하게 발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제드가 한 말은 아까 루시펠라가 한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반박 역시 똑같이 돌아왔다.
“얀스가르의 태양은 지지 않는 법입니다.”
“태양은 언제나 떠오르고 지는 법이지. 저 하늘에 있는 태양이 그렇지 않나?”
그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제드가 황제가 스스로 부여한 태양이라는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언제나 그렇게 말하며 다른 사람의 입을 막고 비난에서 도망쳐 왔나 본데, 내겐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지. 폐하께 고해바쳐도 좋아.”
제드의 당당한 말에 칼리드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공이야말로 검을 잡지 말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제드의 마지막 말에 칼리드는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루시펠라는 칼리드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정적 후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소리였다.
칼리드가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가 소름 끼칠 정도로 경쾌했다.
“하인트 공, 제가 무엇을 해도 믿지 않으실 테니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분명 웃음기 서린 얼굴이었지만 루시펠라는 칼리드의 얼굴에서 오싹함을 느꼈다.
칼리드에게서 저런 분위기도 났었나? 오늘 보여주는 칼리드의 모습은 너무 낯설었다.
“제가 배신을 할 기미가 보이면 제 목을 베시면 됩니다. 하인트 공께선 그럴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너무나 간단한 일인 것을요.”
그 목소리가 너무나 나긋해서 사람들은 그 말의 의미를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칼리드의 시선을 마주한 제드가 웃으며 말했다.
“꼭 그렇게 하지.”
농담조로 나누는 대화. 그러나 루시펠라는 이들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가 나라를 배신했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듯, 그녀의 목을 바쳐 얼샤 정복이 빨리 이뤄졌다는 점 또한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말을 덧붙이더니 다시 테이블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제가 분위기를 망친 것 같군요.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지나치게 오래 눌러앉았나 봅니다.”
그는 클로렌스와 해럴드가 앉아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함께 있어서 참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파티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로에르 영애.”
“아닙니다.”
클로렌스가 가까스로 이성을 차린 듯 대답했다.
뒤이어 칼리드는 루시펠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루시펠라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칼리드는 해럴드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온실 바깥으로 나갔다.
여전히 온실 안은 정적에 감싸였고, 그 누구도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 정적을 깬 건 제드였다.
“흥을 깨서 미안하게 됐군.”
모두 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 첨예한 대립과 본디 말이 없는 과묵한 느낌이었던 제드가 이런 적나라한 조롱의 말을 쓰는 성격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제드가 웃으며 말했다.
“해럴드 경은 다시 한 번 침묵의 의무에 대해 나와 한번 길게 대화를 나눠야 할 필요가 있겠어.”
제드의 말에 해럴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 아니…… 단장님!”
제드는 그의 부름을 무시하고 루시펠라를 보며 미소 지었다.
“영애가 있다기에 보러 왔어. 내가 영애의 사교 모임에 함부로 끼어들었던 게 아니었으면 좋겠군.”
그의 어조는 다정했고 루시펠라를 향한 따스함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도무지 제드라는 사람에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
루시펠라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자 제드가 그것만으로 충분한 듯 클로렌스를 보며 말했다.
“후작 영애가 내 약혼녀를 챙겨주고 있었다니, 몰랐군. 아무래도 내 약혼녀의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실례지만 이만 데려가도 될까? 물론 루시가 원한다면 말이야.”
그 말에 클로렌스의 표정이 굳었다.
아주 짧은 순간 그녀의 벌꿀 색 눈동자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불쾌함이 서렸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의 순간이었고, 그녀는 다시 생긋 미소 지었다.
“물론이지요, 각하. 정말 아이딘 영애가 부럽네요.”
그녀는 흠잡을 데 없는 살가운 태도였다.
“영애, 어떻게 할 거지? 계속 이곳에 있을 텐가?”
루시펠라는 어떻게 할지 생각했다. 그녀에게도 혼란을 추스를 시간은 필요했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저들보다 그나마 제드가 편한 게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제드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망설이는 시간은 아주 짧았고, 그녀는 제드가 내민 손 위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손등 위로 그의 손가락이 자리했다.
“가지.”
부드럽게 이끄는 그 손에 루시펠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갔다.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그녀의 머릿속에 무겁게 짓누르던 칼리드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오로지 제드만이 보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왜?’라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아주 정중하게, 아주 귀한 것을 대하듯 제드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이끌었다. 심지어 그는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평소였으면 안 어울리게 무슨 짓이냐고 몸을 떼며 소리쳤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가 에스텔을 비호했다. 아니, 비호한 것은 착각일까? 하지만 적어도 그는 그녀를, 그녀가 했던 행위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제드를 올려다보았다. 제드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대기해 있던 마치에 루시펠라를 태우고 자신도 올라탔다.
“지금 이렇게 움직여도 되는 거야? 2황자 전하를 호위한다고…….”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라 루시펠라는 겨우 떠올려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상식적인 말을 했다. 그럼에도 말이 더듬더듬 나왔다.
“별로 상관하지 않을걸.”
그는 편하게 마차에 기대며 적갈색 눈으로 루시펠라의 창백한 얼굴을 훑었다.
그가 뭐라 입을 열려고 할 때, 루시펠라가 먼저 물었다.
“왜?”
“그거야 전하를 데려온 게 나니까.”
제드가 덤덤하게 말했다.
“왜 황자 전하를 데려왔는데?”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가 음, 하며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파티에서 영애를 빼내 오기 위해서.”
제드의 말에 루시펠라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왜 날 거기서 빼내 온 건데?”
“그야 그 티파티에 참석한 영애들은 당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으니까.”
그것은 마치 제드가 루시펠라를 염려해서 움직였다는 소리로 들렸다.
***
“영애를 데려와야 해.”
“뭐?”
“로에르 후작 영애가 주최하는 티파티에 가버렸거든.”
“뭐, 갈 수도 있지. 레이디들이 하는 게 그런 거 아닌가? 차를 마시고, 유행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정보 교환도 하고.”
이오지프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자 제드가 인상을 썼다.
“영애가 살인범에게 당할 뻔했다는 소문이 로에르 후작가의 차남인 해럴드 로에르에게서 나왔어.”
“저런, 안됐네.”
이오지프가 턱을 괴며 무감하게 말했다.
“저번 가을 연회 때 그 일로 조롱을 당했다더군. 그런데 그곳에 발을 들인다고? 영애는 그걸 모르고 있어.”
제드는 루시펠라가 이미 에레네 부인에게 주의를 받았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곤란할 것을 알면서도 그곳에 발을 디뎠다는 것도.
“게다가 루이르크 공이 그곳에 갔다더군.”
“뭐, 갈 수도 있지. 그도 얀스가르의 귀족이니까.”
이오지프의 산뜻한 말에 제드가 이오지프를 노려보았다. 경고 어린 매서운 눈빛이었다. 그러나 급한 쪽은 제드인데 어쩌겠는가. 이오지프만이 도와줄 수 있었다.
제드는 로에르 후작가와 교류가 없었고, 따라서 예고 없이 방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약혼녀인 루시펠라를 만나러 한 번도 방문한 적 없던 후작가를 방문한다?
약혼녀 때문에 초대받지 않은 자신의 저택을 제집 안방 드나들 듯하는 이가 있다면. 격식에 딱히 신경 안 쓰는 제드라도 모욕을 당했다며 기필코 갚아주었을 것이다. 그런 무례한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생각난 것이 이오지프였다.
“네가 말하는 그 꽃은 꼭 기사 단련장에서만 피나? 유리 온실에서는 안 피나?”
“그게 무슨 개소리야?”
“로에르 가의 온실을 말하는 거야.”
“유리 온실에서는 당연히 꽃이 피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기사 훈련장에서 핀 제비꽃’이라는 제목에 대한 모독이야.”
“기사 훈련장에서 제비꽃이 피는 게 더 이상하다는 자각은 없나 보지?”
제드가 소리쳤다. 이오지프는 못마땅한 듯 제드를 보다 이내 픽 웃었다.
“그래서 후작저에 방문하고 싶다, 이 말이로군. 그렇지?”
“그래.”
“영애가 어지간히 걱정되나 보지? 세상에, 그 제드를 움직이다니. 정말 영애도 대단한 사람이로군.”
“걱정되는 게 아니라…….”
그는 부정하고 싶었지만, 사실 걱정하는 게 맞았다.
칼리드 루이르크와 루시펠라를 엮는 것도 그렇고, 그곳에 루시펠라가 혼자 갔다는 것도 그랬다.
어련히 알아서 잘할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사람이 걱정이라는 게 되지 않겠는가.
‘으으, 결국 걱정하는 게 맞군.’
마음속으로 내린 결론에 제드는 얼굴을 찌푸리며 자신을 놀리는 이오지프를 끌어냈다.
“이걸로 빚은 없는 걸로 하지.”
이오지프의 말에 제드가 피식 웃었다. 이오지프가 일어나며 안경을 고쳐 썼다.
“그럼 후작저에 가보지. 이 구경거리를 놓칠 수는 없거든.”
그렇게 그들은 로에르 후작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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