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36화 (36/173)

#36화 그 여자, 에스텔

2017.07.03.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행동했더니 그 도둑놈이 벌러덩 나자빠지지 뭡니까!”

루시펠라는 당장 저 얼간이 같은 놈의 입을 닥치게 하고 자리를 뜨고 싶었다.

로에르 후작가의 차남 해럴드는 참으로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인사만 드린다던 그들이 모처럼 열린 티파티에 참여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기사로서 자신의 무용담을 과시했다. 그 때문에 그녀가 칼리드와 이야기를 나누고 말고 할 그럴 기회도 없었다.

영애들은 눈을 반짝이며 그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저 여자들은 바보인가. 루시펠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생각했다.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요! 경께서는 어떻게 하셨나요?”

레인 남작 영애가 활기차게 물었다.

“그래서 손을 잘랐죠. 제국법에 따라 도둑질로 세 번 걸리면 손목이 잘리니까요.”

“어머, 끔찍해라.”

“세상에!”

겨우 손목 하나 가지고 영애들이 무섭다며 호들갑을 떨 동안 루시펠라는 옆자리에 자리한 클로렌스를 보았다. 클로렌스는 해럴드를 보며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그것을 보며 기묘함을 느꼈다. ‘레이디들의 티파티’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졌던 클로렌스는 자신의 오라버니 등장에 그녀들과 같은 청중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때 루시펠라와 클로렌스의 눈이 마주했다. 클로렌스는 어째서인지 드러날 정도로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 목걸이가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루시펠라의 물음에 해럴드가 화색이 돌았다. 마치 루시펠라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루시펠라를 힐끔 쳐다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 루시펠라의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럼요, 이나셀 자작가의 가보인 그 목걸이는 역사가 깊은 물건입니다. 얀스가르의 33대 황제께서…….”

사실 그가 말을 더 길게 했지만 루시펠라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기에 그의 목소리는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말을 건 사람은 자신이었지만, 루시펠라는 하품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러다 칼리드와 눈이 마주쳤다.

‘어?’

칼리드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뭐지? 루시펠라는 얼굴을 찌푸리며 그와 눈을 마주했다. 그 관찰하는 것 같은 시선은 무엇일까?

“아, 그러고 보니 얼샤에서도 보물이 있다고 하셨죠? 주신 아스트라가 내리신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클로렌스 영애의 말에 대번에 모든 이의 얼굴이 칼리드를 향했다. 그에 칼리드의 시선이 루시펠라로부터 떨어졌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있었습니다.”

“어머, 있었다니요? 지금은 없다는 건가요?”

그것에 루시펠라마저 의아했다. 얼샤의 목걸이라면 ‘이난나’라는 얼샤의 초대 왕이 여신에게 직접 받았다는 목걸이로, 여신의 힘을 받아 소원을 이루어주는 힘이 있다고 했다.

“나라가 멸망한 뒤로 깨져 버렸거든요.”

“어머, 그랬군요!”

칼리드의 산뜻한 말,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들.

한 나라가 멸망했다. 그럼에도 잃어버린 나라가 모국인 칼리드도, 적국의 귀족들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신묘한 물건이네요. 나라가 멸망했으니 깨져 버렸다는 건가요?”

클로렌스가 호기심이 인 듯 물어보았다.

“정확히는, 나라가 멸망한 날 폐하께서 얼샤의 왕궁의 보고(寶庫)로 가셨을 때 이미 깨져 있었다고 하더군요.”

“역시 전설은 전설이네요. 소원을 이뤄주었다면 나라가 멸망하진 않았겠지요.”

루시펠라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주먹을 꼭 쥐었다.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참자, 참아야 한다.

하지만 왜 참아야 하는 거지? 이곳에서 자신의 없어진 나라를 위해 분노하는 것도 안 되는 것일까?

그때 해럴드가 칼리드에게 화제가 돌아가자 못마땅한 듯 말했다.

“그것보다 다시 목걸이 이야기로 돌아가도록 하죠! 그래서 도둑이 훔쳐 가려던 목걸이를 가져왔는데, 글쎄, 그게 가짜이지 뭡니까?”

“가짜라고요?”

이들에게 있어서 얼샤의 멸망은 너무나 소소한 화젯거리였다.

해럴드가 다시 화제를 자신에게로 돌리자 사람들의 관심은 다시 그쪽으로 쏠렸다.

루시펠라는 그에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녀는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오늘 그녀는 칼리드에게 어떻게 복수할 수 있을지 방법을 찾으러 왔다.

이곳에서 이성을 잃고 화를 냈다가 받을 취급이 무엇이 있을까. 기껏해야 또 정신 나간 여자라는 소리밖에 안 듣겠지.

“그래서 이 녀석이 미리 가짜를 준비하고, 오는 동안에 어디다가 숨긴 모양이구나! 바로 눈치챘죠!”

“어머나!”

“그래서 녀석이 시치미를 떼기에 그 자리에서 동료의 목을 잘랐습니다. 그러더니 그제야 술술 불더군요.”

여자들은 끔찍한 듯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루시펠라의 얼굴 역시 굳었다.

손목을 자르는 것까지는 이해한다. 도둑의 손목을 자르는 것은 얼샤에서도 있어왔던 일이고, 모두가 그 법률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목숨을 잃게 해? 차라리 동료의 목숨을 가지고 압박을 했다면 번거롭더라도 죽이지 않았어도 될 것이다.

“때로는 손속에 자비를 두면 안 됩니다. 그리고 어차피 그놈들은 모두 처형당했을 테니까요.”

루시펠라, 아니, 에스텔이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기사로 일하면서 그녀 역시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럼, 내 약혼자가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내린 건가요?”

루시펠라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제드에 대해 언급한 것이었다.

칼리드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인트 공은 원래 냉정한 분이십니다. 얼샤와의 전쟁 때도 무서운 분이셨으니 무리도 아니겠지요.”

“저도 들었어요. 전장의 흑사자라고 불리셨다죠? 하인트 각하는 정말 유명하셨죠.”

해럴드 경이 머뭇거리더니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단장님께서 이런 하찮은 일까지 처리하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단장님은 도시 내의 업무 처리보다는 바깥의 전쟁터에서 이름을 날리시는 분이니까요.”

그렇다면 이런 처사가 제드의 명령 아래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루시펠라는 안도했다.

잠깐, 안도? 왜 자신은 제드에게 안도하는 거지?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도 너무나 고생이 많으세요. 수도가 안전한 것도 기사들이 이곳을 지켜주시기 때문이겠지요.”

영애 중 한 명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해럴드가 가슴을 내밀며 자랑스럽듯 이야기했다.

“부끄럽습니다. 기사의 명예인걸요.”

‘기사의 명예’라.

루시펠라는 그 단어를 듣고 생각에 잠겼다.

한때는 그녀 역시 기사의 명예를 말하고 다닌 적이 있었다.

검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것은 어린 에스텔에게 너무나 매력적인 일이었다.

나라를 지키다 죽은 전사들의 영혼은 모두 별의 여신 아스트라에게 안긴다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에스텔은 꼭 그 별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래서 결국 목걸이를 찾은 모양이네요.”

“네, 그렇습니다.”

해럴드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하나의 화제가 마무리되자, 아주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뒤이어 이야기를 꺼내려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영애 중 한 명이 이야기를 꺼냈다.

“아, 공작 각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제리아 영애.”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저 영애는 칼리드가 온다고 할 때부터 칼리드와 눈을 마주치지 못해 안달하던 영애였다.

“얼샤의 보물 말이에요, 하나 더 있지 않았나요?”

그 말에 루시펠라도 움찔했다.

보물. 그래, 하나 더 있긴 했었다.

보물 이야기에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검이요, 분명 검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녀는 생각난 듯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그에 칼리드가 애정을 담아 웃으며 말했다.

“그건 이난나와 같은 급인 귀중한 보물은 아닙니다. 얀스가르에도 여러 자루 있을 겁니다.”

“뭐가 다른 건가요?”

“그 검은 야나스산 강철로 만든 보검이거든요. 나라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루시펠라는 마음의 동요를 삼키려 애썼다.

야나스산 강철은 값이 금보다 높고, 가볍고 단단했다. 그렇기에 부강한 얀스가르와 달리 국력이 약했던 얼샤에서는 단 한 자루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얼샤에서는 그것을 딱히 이름 짓지 않고 ‘보검’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보검은 단 한 명의 기사에게 하사되었다.

바로 시토라 기사단의 단장, 에스텔에게.

시토라 기사단이 창설되고 그녀가 기사단장이 되던 날, 마지막 국왕의 아버지 파비아누스는 에스텔에게 검을 하사했다. 파비아누스는 생전, 그녀를 아꼈던 얼마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 보검은 몸이 가볍고 남자들보다 힘이 약한 자신의 손에 딱 맞는 검이었다.

자신의 죽음 뒤에 몰아치는 많은 일 때문에 잊고 있었다.

자신의 검은 어디에 있을까? 그 정도 되는 검이 자신과 함께 파묻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검은 황제 폐하께서 가져간 건가요?”

“아니요, 폐하께서는 제게 그 검을 내리셨습니다. 원하신다면 나중에 구경시켜 드리죠.”

뭐? 왜 그 검이 칼리드에게 가 있는가?

루시펠라는 울컥해서 그를 노려보았다.

“어머, 정말이요? 정말 저택에 초대해 주신다는 건가요?”

“영애들같이 아름다운 분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죠.”

칼리드의 말에 클로렌스를 제외한 여자들이 신이 나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런 자리에 잘 오시지 않는 분이라서 저택에 초대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제리아 영애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제 출신이 이런지라 사실 이런 곳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왔거든요.”

칼리드가 쑥스럽게 웃었다. 루시펠라는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았다.

“아니요, 무슨! 얼샤는 멸망했는걸요!”

“맞아요, 이미 망해 버린 나라 출신이라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공작 각하는 이제 얀스가르 사람이에요, 그렇죠. 해럴드 경?”

레인 남작 영애의 말에 해럴드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드는 순박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참, 감동이군요. 저도 어려워하지 말걸 그랬나 봅니다.”

“맞아요, 루이르크 공작 각하는 우리 사람이라니까요. 황제 폐하께 성을 하사받은 게 그 증거고요.”

그래, 얼샤의 귀족이자 기사였던 칼리드 가브라인은 사라지고 얀스가르의 칼리드 루이르크만 남았다.

루시펠라는 눈에 띄지 않게 입술 안쪽 여린 살을 깨물었다.

만약 지금 그녀가 에스텔이었다면 진즉 단검을 들고 칼리드의 목에 던져 그를 죽여 버렸을 것이다. 루시펠라는 꾸역꾸역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삼켰다.

“그 여자처럼 어리석게 굴지 않았으면 된 거죠.”

레인 영애의 말에 그녀는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 여자라니요?”

다른 영애가 묻자 레인 영애가 웃으며 말했다.

“왜요, 그 보검의 ‘주인’ 있잖아요.”

“네?”

“그 ‘여자’ 말이에요.”

그에 그녀의 몸이 움찔했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에스텔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적응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루시펠라는 지금 자리를 떠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영애, 괜찮으세요?”

클로렌스가 조용히 물었으나 루시펠라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차라도 들어 밀려오는 분기를 삼키고 싶었으나, 그 찻잔마저 칼리드에게 던져 버리게 될 것 같아 그녀는 참았다.

“아, 그 얼샤의 샛별인지 뭔지요?”

“참, 웃기다니까요. 거긴 모든 사람에게 샛별을 붙이나 보죠?”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전해졌다. 루시펠라는 티 나지 않게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런 조롱은 익숙했다.

얼샤의 샛별이라니, 그녀도 그 자신의 별명을 듣고 비웃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결국 폐하께 굴복하지 않고 검을 들고 날뛰다가 공작 각하에게 목이 잘렸다나 봐요.”

“어머, 추해라.”

그녀들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사정없이 찔렀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자신에 대한 평가를 듣게 된 루시펠라의 머릿속에 격랑이 일었다.

“이래서 여자들이 남자의 영역을 넘보면 안 된다니까요. 여자가 검이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죠. 그렇지 않나요, 각하?”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칼리드가 말하려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칼리드의 시선이 루시펠라를 향했다. 루시펠라 또한 자신도 모르게 간절함을 담은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아니라고 말해줄 거지? 검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너는 잘 알고 있잖아. 아니라고 말해줘,

“영애의 말이 맞습니다.”

내 곁에서 다 봤잖아.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아니라고 말해줘, 칼리드. 제발.

“그녀는 검을 잡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다.

칼리드의 그 말에 온몸에 흐르는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확인하던 것을 마주한 충격이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여자는 여자들의 영역에서, 그렇게 살아가면 됩니다. 검을 배우는 건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지요.”

“맞아요. 서로의 영역이 있는걸요. 여자는 남자들이 지켜주는 세상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해럴드가 칼리드의 말에 동의하며 말을 이었다.

“결국 그 여자가 나라를 지켰나요? 기사라니, 당치도 않는 소리를.”

칼리드가 긍정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해왔던 고뇌, 기사로서 살아가기 위한 모든 노력이 칼리드의 긍정 하나만으로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칼리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에스텔은 참 멍청한 여자였습니다. 그 아래에 있기엔 너무 힘들더군요. 얼샤는 명백하게 잘못을 저질렀고, 에스텔은 끝까지 어리석게 그것을 부정했습니다.”

“어머, 뻔뻔해라!”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런 어마어마한 짓을 저질러 놓고서!”

“맞아요!”

영애들은 저마다 분노를 터뜨렸다. 루시펠라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클로렌스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영애, 몸이 안 좋나요?”

그 말에 칼리드에게 향했던 시선이 일제히 루시펠라를 향했다.

사람들은 루시펠라에 대해 잊고 있었던 눈치였다. 루시펠라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티테이블 아래, 그녀의 손은 치맛자락을 꾹 쥐고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숨을 고른 뒤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다만, 참을 수가 없어서…….”

“무엇이 말인가요?”

클로렌스의 물음에 한 번 미소를 짓던 루시펠라가 칼리드를 보며 말했다.

“각하는 수치심도 없나 보죠?”

그녀의 말에 방금까지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도저히 참아주질 못하겠군요. 각하는 기사의 맹세를 저버리고 나라를 배신한 사람이에요. 나라의 의미가 그렇게 가벼웠던 건가요?”

루시펠라의 도전적인 물음에 칼리드가 미소를 지었다. 저번과 똑같은 비웃음이었다.

“영애가 왜 화를 내는 것인지 그 이유를 모르겠군요.”

“이 대화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제가 아는 기사의 미덕과 어긋나네요.”

루시펠라는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만약 얀스가르가 타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상황일 때 각하는 다시 얀스가르를 배신할 건가요?”

그 말에 사람들이 숨을 멈췄다. 루시펠라의 입에서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 나왔던 것이다.

“태양은 지지 않는 법입니다.”

칼리드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함께 칼리드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맙소사! 아이딘 영애, 어떻게 얀스가르의 미래에 대해 함부로 말하죠!”

“왜 각하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의가 없는 줄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칼리드가 얀스가르인들과 섞이지 못한 고충에 마음이 약해져 있던 영애들은 그를 공격하는 루시펠라에 대해 더욱 날 서게 말했다.

해럴드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 여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클로렌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기사의 성별이 ‘여자’라는 게 대체 왜 나오는 거죠? 여자는 검을 잡아서는 안 되는 건가요? 굉장히 불쾌한 말이로군요.”

루시펠라의 날 선 말에 칼리드가 웃으며 대답했다.

“검을 든 여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검을 든 여자가 나왔어도 결국 어리석은 행동을 했으니 여자가 검을 잡은 것이 어리석은 거죠.”

루시펠라가 더 말을 하려고 할 때 칼리드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항전하며 버티려던 그녀의 판단하에 목숨을 잃은 병사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그녀가 좀 더 빨리 항복했다면, 얼샤의 병사들도 항복했을 겁니다. 그럼 그만큼 희생도 줄었을 겁니다.”

“…….”

루시펠라는 그 말에 어떠한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녀의 판단으로 병사들이 죽었다. 그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다가 목숨을 잃겠다고 병사들은 그녀에게 맹세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인가. 포기했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무력하게 나라를 빼앗겼어야 한단 말인가.

칼리드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에스텔의 옆에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지독히도 잔인한 상황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다고 생각했던 이가 자신을 이렇게 혐오했다는 진실을 이렇게 이런 모습으로 듣게 되다니.

“루이르크 각하, 레이디들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해럴드가 싸해진 분위기를 바꿔보려 말했다. 하지만 이미 레이디들의 티파티는 어떤 의미에서든 변질되어 버린 뒤였다.

“제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영애.”

칼리드는 부드럽게 말했다.

“제 상관인 에스텔 슈페르트를 죽인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루시펠라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에스텔은 검을 잡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 말에 루시펠라의 이성이 날아가려던 때였다.

“공은 수치심도 없나 보지?”

저 멀리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루시펠라의 생각이 멈췄다.

언제나처럼 그녀가 냉정을 잃기 전, 꼭 그는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다.

퇴궁했기 때문일까. 그는 해럴드가 입고 있던 검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경멸을 담고 있었으며, 그 경멸이 오롯이 향한 곳은 칼리드였다.

칼리드의 자안이 그를 마주했다.

그리고 그 남자, 자신의 약혼자인 제드는 당연하다는 듯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 뒤에 섰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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