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35화 (35/173)

#35화 레이디들의 티파티 (4)

2017.06.29.

루시펠라는 자신에게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자리는 클로렌스 영애의 바로 옆자리, 커다란 원형 테이블이라는 것을 감안하고서라도 이 자리 선정은 찝찝했다.

게다가 클로렌스가 일꾼들을 시켜 들고 온 의자는 확실히 다른 영애들 것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클로렌스가 앉은 의자와 똑같은 세공의 의자였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속셈인 거지?’

루시펠라는 의자와 클로렌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클로렌스는 웃으며 영애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속내를 알 수 없으니 조바심이 났다.

루시펠라는 애써 빙긋 웃으며 심호흡을 했다. 지레 겁먹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어차피 그녀가 여기서 무언가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강제성은 없었다.

마음을 편하게 먹으니 클로렌스의 외양이 눈에 들어왔다.

‘예쁘네.’

찝찝한 건 찝찝한 거고 예쁜 건 예쁜 거였다.

가까이서 보니 클로렌스는 말 그대로 아름다웠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클로렌스 영애가 루시펠라에게 미소를 보냈다.

클로렌스의 벌꿀 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저렇게 예쁘게 웃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여자의 질투란 참으로 무섭다고 루시펠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서 차를 내오도록 하렴.”

클로렌스의 명령에 차 시중을 들기 위해 서 있던 하녀들이 찻주전자를 들고 영애들의 찻잔에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과연 후작가에서 주최한 티파티여서인지 한 사람에 하녀 한 명이 전담하여 찻잔이 비지 않도록 계속 차를 따라주었다.

루시펠라에게도 차가 따라졌다.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고급스러운 찻잔에 물 흐르는 소리 하나 없이 찻물이 조용히 채워졌다.

루시펠라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클로렌스를 제외한 영애들 모두가 그녀를 쳐다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루시펠라는 분명 그 위화감을 느꼈다.

“차 맛이 아주 좋네요.”

레인 영애가 차를 마시며 말했다. 그에 다른 영애들 역시 차를 마시며 똑같이 말했다. 루시펠라가 마시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건 꼭 술자리 같은데. 안 마시면 나만 이상한 그런 상황인가.’

루시펠라는 기사였을 때의 경험에 빗대어 이 상황을 분석했다.

이런 자리에서 자신만 ‘제가 술은 못 마셔서……’라고 말하면 분위기가 상했다. 물론 에스텔은 말술이었기에 그런 사람이 되어본 적은 없지만, 어쨌든 그랬다.

이런 자리에서 차 안에 독이 들어 있을 리는 없을 테고. 안 마시는 방법은 애초에 없었다. 루시펠라는 에레네 부인의 훈육대로 천천히 몇 모금 차를 마셨다.

차 맛은 독특했지만 루시펠라의 마음에 쏙 들었다. 꼭 에스텔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꿀꺽 넘기자 목이 시원해졌다.

뭐, 별거 없는 모양이네. 그녀는 미소를 머금은 채 찻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두었다.

영애들의 얼굴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들었다. 심지어는 기함한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을 본 루시펠라 역시 의아하긴 매한가지였다. 차에 딱히 독약 같은 건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단 말인가?

루시펠라가 클로렌스를 보니 클로렌스는 태연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뭐지? 뭐가 이상한 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루시펠라가 살짝 눈에 힘을 주고 영애들을 바라보자 그녀들이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때 차를 다 마신 클로렌스의 시선이 루시펠라와 당황해하는 영애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루시펠라의 바로 뒤에 있는 하녀에게 손짓했다.

“제니, 차 좀 내게 따라주겠니?”

“네.”

왜 그녀의 차 시중을 드는 하녀가 아니라 굳이 루시펠라의 차 시중을 들던 하녀를 부르는 것인가. 이건 또 무슨 신종 괴롭힘인 걸까. 차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하거나, 뭐 그런…….

루시펠라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가해질 수 있는 여러 공격을 생각하고 있었다.

클로렌스 영애가 차를 한 모금 들이켰을 때였다.

그녀가 풋, 하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하녀가 황급히 손수건을 내밀자 클로렌스가 손수건에 찻물을 뱉어냈다.

뭐지? 거기에 무슨 독이라도 있었나?

괜찮냐고 달려드는 하녀를 향해 클로렌스가 손을 세워 그들을 막았다.

클로렌스의 시선이 영애들을 향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차분했지만, 이번에는 루시펠라도 알아차렸다. 클로렌스는 그들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실례했어요, 제가 상당히 독특한 차를 준비한 모양이군요.”

클로렌스가 제니라는 하녀를 쳐다보자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요, 괜찮았는걸요. 영애가 생각해서 준비한 차잖아요. 나쁘진 않았어요.”

루시펠라의 말에 클로렌스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을 했다.

그녀는 꼭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이쯤 되니 루시펠라 역시 대강 상황을 짐작했다.

이 차의 독특한 맛은 레이디들이 평범한 상태로 섭취하지 못할 정도로 정상적이지 않았다. 즉, 이 독특한 차는 그녀를 곤란에 처하게 만든 준비물이었던 것이다.

또한 티파티를 주최한 클로렌스는 이것을 모르고 있었다. 알았다면 굳이 확인하기 위해 마시는 짓은 하지 않았겠지. 그녀는 자신의 분석력에 나름 감탄했다.

그러나 이게 그렇게 못 마실 맛인가. 이건 에스텔이 어렸을 적 입이 심심할 때마다 씹었던 풀이었다.

좀 맵긴 했지만 시원한 느낌과 함께 목이 뚫리는 느낌이 들어 그녀는 이것을 즐겨 먹고는 했다.

몇몇 애들이 그녀를 따라 하다가 토하기는 했지만, 원래 입맛이란 게 다 다른 게 아니겠는가?

그래도 오랜만에 이 그리운 맛을 접해서 기분이 좋았는데, 이게 그녀를 곤란을 일으키는 수단이 되어 있었다니.

나쁘지 않은 맛인데…… 그녀는 괜히 억울했다. 목감기에도 좋은 것인데. 심심한 홍차의 맛보다도 더 좋고.

그녀에게 내밀어진 찻잔이 회수되었다. 그녀는 아쉬운 듯 그것을 보았지만 붙잡지는 않았다.

이것을 ‘좋아해서’ 마신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정신이 이상한 영애에 이어 미각이 이상한 영애가 될 게 뻔했다.

이후 티파티의 대화는 예상대로였다.

“요사이 드레스는 케인트미스 쪽 디자이너가 있는 곳이 좋더라고요.”

“어머, 머리핀은 어떤 모양으로 하셨나요?”

“귀걸이가 참 예쁘시네요. 어머 이건 어디서 산 건가요?”

시작은 에레네 부인이 말한 대로 드레스에 대한 가벼운 화제였다.

서로를 치켜세워 주기에 바빠 보이는 이들을 보며 루시펠라는 자신도 뭐가 예쁜지 정도는 말하자고 열심히 예쁨을 표현하는 단어를 생각했지만, 그녀에게 말을 걸어주는 이는 없었다.

이 또한 에레네 부인의 예상대로였다. 친분이 없는데 티파티를 초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초대 자체의 의도가 불순한데 거기에 하하호호, 노는 자리에 쉽게 그녀를 끼워줄 리 없었다.

사람을 앞에 세워두고 저들끼리 호들갑스럽게 친목을 과시하며 기를 죽이는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그래서 루시펠라가 곤란하거나 소외감을 느꼈냐 하면, 별로 그러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말을 걸어주지 않는 것이 편했다.

예쁨을 표현하는 단어를 생각했지만 기껏해야 한두 개였고, 그마저도 이미 다른 영애들이 먼저 말해 버렸다.

모든 여자의 아름다움을 각각 다른 방법으로 칭송하는 것은 루시펠라가 가진 능력에 없었다. 한데 대단한 것은 이 모든 것을 클로렌스 영애는 너끈히 해내고 있었다.

‘참 대단한 사람이네.’

레이디의 교본이 있다면 바로 클로렌스 로에르가 아닐까?

“참, 황태자 전하 소식 들으셨나요?”

그에 루시펠라의 귀가 번쩍 띄었다.

“폐하께서는 여전히 황태자 전하의 업무를 중단시키고 있다고 하네요.”

황제가 황태자의 업무를 중단시켰다고? 무슨 일 때문에?

“디저트는 입맛에 맞으시나요, 영애?”

그때 클로렌스 영애가 루시펠라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황가의 화제에 집중해 있던 영애들이 겨우 다시 루시펠라의 존재를 깨달았다.

“폐하의 분노가 빠르게 풀리셔야 할 텐데요. 그렇지요?”

클로렌스가 루시펠라에게 말하자 그들이 입을 다물고 눈치를 힐끔 살폈다.

분명 무언가 중요한 화제가 오고 갔다. 그럼에도 루시펠라는, 이 화제에 대해 정확한 분석이 힘들었다.

또한 클로렌스는 황태자의 옛 연인이자 인척 관계인 루시펠라의 존재를 상기시킴으로써 영애들의 수다가 여기서 더 나아가는 것을 막았다. 동시에 황태자를 걱정하는 듯한 말로 혹시나 뒷말이 나올 여지까지 제거했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루시펠라는 클로렌스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서도 생각에 잠겼다.

이래서 사교계가 중요하다. 집에만 있는 여자가 어떤 소식을 얼마나 접할 수 있겠는가. 정보는 곧 기회이자 무기였다. 그런데 사교계와 동떨어진 루시펠라는 이런 정보에서 떨어져 있었다.

왜 이들이 사교활동을 하는지 루시펠라는 그 본질을 이해했다. 이들은 이렇게 모임으로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딘 영애, 그러지 말고 아이딘 백작의 영지는 어땠는지 이야기해 주세요. 네?”

황태자의 이야기를 먼저 꺼낸 영애가 루시펠라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황태자의 이야기를 함부로 꺼낸 자신의 말실수를 염두에 두며 루시펠라에게 아부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질문을 받자 루시펠라는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제니스 영애, 영애는 아파서 요양을 간 거잖아요.”

가만있던 클로렌스가 말했다. 아파서 요양이라, 미쳐서 내려 보내졌다는 소문이 돈 걸로 알고 있는데.

일부러 그러는 건가? 하지만 중요한 것은 클로렌스의 말에 루시펠라는 대화에 끼어들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미워하나? 이 티파티를 보면 꼭 그러지는 않은 것 같은데.

“아, 맞아, 그랬었죠. 그게…….”

‘요양’이라는 말에 그녀가 실성했다던 소문이 다시 떠올랐는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정말로 미쳤는지 미치지 않았는지 관찰하는 그 시선에 무어라 입을 열려던 찰나 클로렌스가 말했다.

“수도는 참 실없는 소문이 많이 퍼지는 곳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그 말에 루시펠라는 더 의아해졌다. 그 미쳐서 내려보내졌다는 소문이 실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녀는 그 소문이 거짓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병 주고 약 주고도 아니고, 뭐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말이 많아지게 마련이니까요.”

루시펠라가 침착하게 대답하자 영애들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클로렌스 영애가 또 다른 화제를 던지자 사람들은 그 화제에 대해 재잘거리며 이야기를 했다.

루시펠라 혼자서만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티파티는 이상했다. 처음에야 그녀의 예상대로 착착 맞아떨어져 갔지만, 에레네 백작 부인이 말했던 경우는 초반에만 일어났다.

특히나 가장 약한 수준이라던 무시하기 역시 클로렌스 영애에 의해 깨졌다.

그러니까, 루시펠라만을 노리는 아주 불편한 자리는 아니었단 말이다. 무언가 엄청 대단한 함정도 없었고, 그녀를 대놓고 공격하는 사람도 없었다.

저 여자는 어떤 목적으로 자신을 초대한 것일까. 루시펠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가씨.”

유리 온실 바깥에서 하녀 한 명이 클로렌스에게 걸어가 그녀에게 쪽지를 보여주었다.

쪽지를 확인한 클로렌스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바로 옆에 있었기에 그 미세한 움직임이 루시펠라에겐 잘 보였다.

하지만 클로렌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불쾌한 기색을 얼굴에서 지우며 말했다.

“여러분, 양해를 구해도 될까요?”

“무슨 양해요?”

“제 둘째 오라버니가 퇴궁하셨는데, 손님이 찾아오신 모양이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분과 같이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하시는데, 괜찮으신가요?”

오라버니, 라는 말에 영애들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레이디들의 관심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좋은 혼처도 포함되어 있었다. 로에르 후작가의 영식이 누군가를 데려와 이곳에 인사를 온다. 그것만으로도 설레는 모양이었다.

“그 손님은 누구인가요?”

클로렌스의 입에서 의외의 이름이 나왔다.

“루이르크 공작 각하요.”

루시펠라의 눈이 커졌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그녀는 애써 평온을 되찾았다. 수도에 오면 재회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았나. 이런 상황도 예상해야만 했다.

“어머!”

“정말이요?!”

“세상에, 공작 각하가 이곳에 오시다니!”

영애들이 기쁨에 찬 표정으로 소리쳤다.

영애들의 반응을 본 클로렌스가 피식 미소를 지으며 하녀에게 속삭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시죠, 영애?”

“네, 괜찮습니다.”

루시펠라의 말에 클로렌스가 미소 지었다.

루시펠라는 그 와중에도 클로렌스의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클로렌스의 지시로 자리가 더 만들어졌다. 영애들은 흥분 어린 표정으로 자신의 옷과 머리 매무새를 점검했다.

“루이르크 공작 각하가 로에르 후작가와도 연이 있나 봐요?”

“아무래도 1기사단 일을 하면서 2기사단장인 공작 각하와도 친분이 생기셨나 봐요.”

그들은 루이르크에 대해서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타국, 그것도 적국이라 생각했던 이곳의 영애들 역시도 얼샤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여자들은 모두 칼리드의 아름다운 얼굴과 부드러운 매너에 매료되었다.

그나저나 칼리드가 티파티에 참여하다니, 이런 우연도 다 있네. 루시펠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아름다운 꽃과 같은 분들이 계시니, 이 온실에 봄이 미리 찾아온 것 같군요.”

여자들의 작고 높은 목소리만 가득했던 온실에 남자의 굵직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루시펠라를 비롯한 영애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백금발의 남자가 거들먹거리는 걸음걸이로 온실을 들어왔다.

“오라버니.”

클로렌스의 말에 검은색 제복을 입은 남자가 미소 지었다.

클로렌스의 미모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럭저럭 봐줄 만한 얼굴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연유 모를 불쾌한 감각에 얼굴이 찡그려졌다.

이젠 경험해 봐서 안다. 이런 연유 모를 감정은 진짜 루시펠라가 과거에 품었던 감정이었다.

루시펠라는 그 감정을 무시하고 바로 뒤에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자주색 제복을 입은 탄탄한 몸이 보인다. 그녀가 시선을 들어 올리자 물빛의 머리카락과 새하얀 얼굴이 보였다. 그 역시도 루시펠라를 바라보고 있던 모양이다. 시선이 마주한 그가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영애.”

따스한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펠라는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이군요, 각하.”

***

“어라, 이게 무슨 일이야, 제드!”

이오지프는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드가 몸소 2황자의 방에 찾아온 것이다.

그의 두 눈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그러나 이 친구, 제드는 다짜고짜 말하는 것이 이런 말이었다.

“나한테 빚졌지?”

“빚? 친구 사이에 무슨 빚! 우린 그런 거 없어, 제드.”

제드의 눈빛이 살벌해지자 이오지프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진짜 그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해줄까?”

나직한 경고에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커다란 빚을 졌지. 우리 형님께서 드디어 정무에서 손을 떼게 되었으니까 말이야.”

이오지프의 입가에는 미소가 서렸다.

“하지만 딱히 날 위해서 한 건 아니잖아? 날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딘 백작 영애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그 놀리는 듯한 말에 제드가 말했다.

“그래서 네가 이득을 본 게 없다고?”

“아니, 그건 아니지.”

황태자의 정무를 중단시켰다. 황제가 황태자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다.

그것이 분노에 의한 한시적인 것이든,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어서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황태자가 맡은 정무는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나라 전체의 세금이 아닌 궁 내부의 자금의 관리, 정복전쟁으로 사라져 버린 ‘외국’의 대사를 대접하는 일. 좀 중요한 일이라면 그를 잘 따르는 황태자파의 가문들을 손에 넣고 움직여 황제의 입맛대로 따르게 하는 것 정도였다.

그것을 맡지 않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황태자가 누리던 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황제가 살아 있고, 황태자가 실책을 반복하는 이상 황태자가 폐위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인지되었다는 것이다.

황태자에게 온건적인 황제라도 어떤 일에서는 엄하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그것이 이오지프에게 이득이 전혀 없을 리가.

“그래서 빚을 어떻게 갚아줄까? 무엇을 원해?”

이오지프의 안경이 위험하게 빛났다. 그의 입가에는 제드가 항상 재수 없다고 생각하던 음험하고도 책략가스러운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네가 잘하는 거.”

“뭐?”

“네가 말하는 그 꽃은 꼭 기사 단련장에서만 피나? 유리 온실에서는 안 피나?”

“그게 무슨 개소리야?”

이야기를 다 들은 이오지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헛것을 들은 게 아닌가 생각했다. 제드는 정상이 아닌 모양이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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