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34화 (34/173)

#34화 레이디들의 티파티 (3)

2017.06.26.

“이 어리석은 놈!”

황제의 목소리가 알현실에 울려 퍼졌다. 테미르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마에 핏발이 선 황제는 머리가 아찔했는지 이마를 짚었다. 아이딘 백작은 불안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고 있었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아버지! 그저 겁만 주려고 했을 뿐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런 짓까지 벌일 줄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황태자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황제와 똑같은 그의 녹안은 두려움을 담고 있었다.

“겁만 주려고 했다고? 네가 얼마나 대죄를 지은 건지는 모르는 것이냐!”

황제의 얼굴은 더없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두 눈은 핏발이 서 있었다.

“잘못했습니다, 아바마마!”

황태자는 비굴한 표정으로 빌었다.

결국, 제더카이어 하인트는 실마리를 잡는 데 성공했다. 칼리드 루이르크가 수도로 올라가는 동안 뒤처리를 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감시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건이 끝나자마자 제드는 신속하게 움직였고, 집요한 수사 끝에 배후가 밝혀졌다.

테미르로서는 뼈아픈 실책이었다.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게 있다면 마물을 잡겠다고 말하며 의심을 사지 않고 아이딘 백작의 영지로 내려가 버린 제더카이어 하인트의 존재였다.

하인트 공작은 자신의 약혼녀에게 위해를 끼친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테로 상단은 제드의 집요한 수사에 결국 꼬리 자르기 식으로 연관자들을 내밀었으며, 그 사람들은 모두 ‘황실의 사람’이 의뢰했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두말할 것도 없이 황태자를 추궁했다.

“그래서 루이르크 공을 보냈지 않았습니까.”

“닥쳐라, 이놈!”

그 말에 테미르는 더 볼썽사납게 몸을 움츠렸다.

“애초에 그런 짓을 하지 않았으면 될 일이었다. 그래서 루이르크 공을 보냈다니, 그게 무슨 어리석은 소리냐, 테미르!”

“아버님은 모르십니다, 루시, 아니, 아이딘 영애가 제게 발길질을 했습니다!”

테미르가 억울한 듯 소리쳤다. 아이딘 백작이 그에 움찔했다. 황제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입니다. 그때, 가을 연회 때 휴게실에 잠깐 만났습니다. 저에게 욕설을 내뱉고 절 발로 찼습니다! 감히 황족의 몸에 손을 대다니! 문제 삼지 않은 것도 많이 참은 겁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영애에게 물어보십시오!”

황제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황제가 테미르에게 향하는 경멸 어린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테미르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황족의 지엄함은 보여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제 개인으로 일을 진행했던 거고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네가 저지른 죄에 대한 변명은 될 수 없다!”

여전히 황제는 화를 내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아주 살짝 누그러졌다. 기민한 사람들은 그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을 터였다. 황태자 역시도 그중 하나였다. 언제나 가까이서 황제를 겪어왔던 테미르였다.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아이딘 백작에게 사과하겠습니다.”

그는 다가가 아이딘 백작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에 아이딘 백작의 얼굴이 난감하게 물들었다.

“저, 전하!”

“제가 부족해서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기사들과 상인들을 죽인 것은 저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그놈들이 그런 저급한 놈들일 줄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숙, 정말 이건 제가 의도치 않은 일입니다.”

아이딘 백작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순서대로 황제와 황태자를 향했다. 황제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받아들여야 할 사과라는 뜻이었다. 일국의 황태자가 무릎을 꿇었으니 말이다.

황제에게 보이지 않는 아이딘 백작의 한쪽 주먹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살짝 눈을 감았다 뜨더니 허리를 굽혀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이, 이러지 마십시오.”

그러나 태자는 움직이지 않았고, 아이딘 백작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표정은 모자라 보이는 어리숙함만이 자리 잡았다.

“괜찮습니다. 루시도 무사하지 않습니까. 폐하, 제발 멈추게 해주십시오.”

백작의 애원 어린 표정에 황제는 한참 동안 그를 보다 입을 열었다.

“추태는 그만 부리고 일어나라, 테미르.”

테미르가 그에 다리를 지탱하고 일어났다. 그는 아주 공손한 태도로 아이딘 백작을 바라보았다. 황제는 자신의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늘 일어난 일은 크게 키우지 않을 거라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합당한 판단이라 생각합니다.”

아이딘 백작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부족한 아들이 그대의 여식에게 정말 커다란 죄를 저질렀네. 하지만 이 일이 커지게 된다면 영애가 크게 다치게 되겠지. 하인트 공작과 겨우 혼약하지 않았는가.”

하인트 공작, 이라는 말에 그가 움찔했다.

“오늘의 일은 서로 잊음세. 영애에게도 말을 잘 전해주길 바라네.”

황제의 말에 아이딘 백작은 말없이 허리를 숙였다. 명백한 굴복의 태도였다.

아이딘 백작은 단 한 번도 황제에게 반발한 적이 없었다. 그는 대놓고 충성을 표현하기보다는 묵묵히 숨어서 이득을 지키는 전형적인 안전을 가장 중시하는 귀족 중 하나였다.

일이 일단락되자, 아이딘 백작은 이 자리에 있기도 황송하다는 듯 황제에게 퇴궁을 허락받은 뒤 몸을 돌려 알현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황제는 아이딘 백작의 뒤를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왜소한 모습, 어딘지 모르게 자신감이 없어 보이며 그릇 역시 작아 보이는 남자. 가끔 그는 왜 아이딘 백작부인, 루아나가 그를 선택했는지 의문을 가지곤 했다.

이윽고 백작이 나가고 알현실의 문이 닫혔다. 황제가 테미르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의 기색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테미르는 그제야 안심하고 아버지에게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아버지라고, 그의 면을 세워준 것이다. 황제는 자신의, 특히나 황가의 권위를 떨어뜨린 이들에게 가차 없었다. 이것으로 넘어가다니 다행이었다.

황제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팔걸이에 올린 팔에 얼굴을 기대며 말했다.

“테미르.”

“네, 아바마마.”

“네 죄를 알겠느냐?”

“황족이 신하인 귀족을 먼저 건드린 게 큰 잘못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귀족들은 모두 황가를 불신하게 되고, 이는 곧 내분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저의 큰 죄입니다.”

황제는 서늘한 눈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공손한 듯하지만 그 굴욕적인 사과에 대한 분노는 가시지 않은 듯했다.

“네 죄는 그게 아니다.”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테미르는 황제의 서늘한 음성에 더욱 큰 두려움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알려질 정도로 허술하게 일을 벌였던 게 가장 커다란 죄이니라.”

그의 말에 테미르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이딘 백작이 너를 따르는 신하인 것을 짐이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너는 그 신하를 적으로 돌릴 뻔했다.”

“아이딘 백작이 말입니까? 어마마마의 혈연이자 제 먼 혈연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혈연이 적이 될 수 있답니까. 더군다나 아이딘 백작이 적이 되어봤자 무엇이 무섭다고요.”

테미르는 다른 건 몰라도 아이딘 백작에 대해 말하는 황제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황제는 테미르를 보더니 나직하게 한숨을 쉬다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지 못해 테미르는 더욱 불안했다. 황제가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더니 말했다.

“오늘부로 짐이 맡긴 업무를 중단하도록 하라.”

테미르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에 얼굴이 다시 하얗게 질렸다.

황제가 맡긴 업무는 그가 황태자로서 인정받는다는 증거였다. 한데 황태자로서의 업무를 중단하라니, 그가 황제에게서 나눠 받던 정무를 중단한다는 것은 황제가 그의 황태자로서 자질을 의심한다는 말이 될 수도 있었다.

“아버지!”

“폐위하지 않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라. 사과한다고 책임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지. 테미르, 내 저번에 말했던 것을 유념하지 않는 모양이더구나.”

가을 연회가 벌어지기 바로 직전, 황제는 그에게 넌지시 과거의 일은 묻어두라고 말했다. 그러나 테미르는 제드에게 모욕을 주는 데 집중한 나머지 그것을 어기고야 말았다.

황제는 이 점 또한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혹 이날 이후 아이딘 백작 영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짐이 친히 네게 죄를 물을 것이다.”

황제의 경고 어린 음성에 테미르는 꿀꺽하고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녹안이 테미르를 훑었다.

“걱정 말거라. 짐은 아직 너를 폐위하지 않았다.”

그 말인즉, 상황에 따라 그를 폐위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아이딘 백작 앞에서 화를 내고, 누그러뜨렸던 것은 어느 정도 계산된 행동이었던 것일까.

테미르는 자신의 아비라는 작자에게 타인을 대할 때보다 더욱더 싸늘함을 느끼고는 했다.

***

루시펠라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바라보았다. 말린 장미꽃잎 같은 오묘한 붉은빛의 옷은 루시펠라의 창백한 얼굴을 생기 있어 보이게 했다.

“이제 다 된 거야?”

“네, 아가씨.”

로이자가 머리에 매여 있는 리본을 다시 한 번 단단히 묶어주며 말했다.

그녀의 머리는 연회 때처럼 기다란 머리를 틀어 올리기보다는 하나로 땋아 내려 다소 편해 보이는 느낌을 주었다.

“매번 참 대단하네.”

“뭐가요?”

“이렇게 꾸며주는 거 말이야.”

“아이 참, 그게 우리 일인데요 뭐.”

루시펠라는 진짜로 이들에게 존경심이 일었다. 어떻게 매번 이렇게 다르게 예쁘게 꾸밀 수 있을까.

하지만 여기서 더 칭찬하면 머리 스타일뿐만이 아니라 옷 주름 잡는 법도 다르게 했다는 그녀로서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 대해 한 소리를 들을 것 같아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 안의 루시펠라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아가씨, 마차가 준비되었어요.”

하녀 한 명이 들어와 말을 건넸다.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 나갔다.

티파티, 그저 티파티에 가는 것뿐이다. 심지어 티파티에 가는 그 목적도 적군에 잠입해서 무언가를 가져오는 게 아닌 ‘친구를 사귄다.’ 겨우 그 하나였다.

적군, 아니, 적을 친구로 사귄다는 발상 자체는 한심할 정도로 긍정적인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리엄 같은 경우도 싸우다가 친구가 되지 않았나?’

그녀는 리엄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기사단이 창설되던 날, 단장인 에스텔에게 하도 반항적이기에 손날로 목을 좀 쳤더니 조용해졌다. 그러나 앙심을 품었는지 대련 때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발로 그의 무릎 뒤를 차 리엄의 무릎을 꿇게 했다.

아, 그건 싸움이 아닌가?

발데르 녀석도 그랬는데. 그놈은 재수 없게 이것저것 토를 달아서 그때 들고 있던 빵을 입에 욱여넣어 주었다.

그래도 꼴에 기사라고 꽥꽥거리며 검을 휘두르자 그녀는 옳다구나 검집째로 발데르를 신나게 두들겨 팼다.

그 녀석들은 마지막까지 단장에게 맞은 데가 가끔 시리다고 말하고는 했지만 뭐, 그렇게 사소한 걸 생각해서야 기사겠는가. 그러다 친해졌으면 된 거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 그녀는 언제나 싸움으로써 서로를 친구로 인식했었다. 몸으로 말하는 파는 아닌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칼리드도…….

아.

루시펠라는 생각을 멈췄다.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그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다, 한심하게도.

그녀는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칼리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싸움으로 그렇게 친해졌던 것이다.

그 당시, 우연히 가브라인 공작 부자와 마주하게 된 에스텔은 거의 납치되다시피 공작가로 끌려갔다. 가브라인 공작은 검에 미쳐 있었고, 특출난 재능을 가진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그 삭막한 공작가에 또래라고는 칼리드밖에 없었는데, 칼리드는 에스텔에게 말 한마디도 걸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무시를 당하자 그녀도 슬슬 약이 올라 하루는 정원을 걸어가는 그를 가로막고 싸움을 걸었다.

“어이, 귀족 도련님이라고 날 무시하는 거냐?”

“…….”

“오늘 네 그 곱상한 얼굴을 짜부라뜨리고 말 거야!”

그때를 떠올리던 루시펠라의 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딜 봐도 시정잡배가 할 법한 대사이지 않은가. 게다가 무시당하면 주먹부터 휘두르는 시정잡배의 정석처럼 칼리드가 그녀를 또 무시하자 그의 얼굴에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그녀는 어렸던 자신의 행동에 수치심을 느꼈다.

“아가씨?”

“아니야, 아무것도.”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루시펠라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쫓아냈다. 하지만 마차에 오르고, 출발하고 나서도 그 기억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도착한 로에르 후작가는 오히려 루시펠라의 백작가보다 더 소박해 보이는 곳이었다.

그 말인즉, 아이딘 백작가가 수도의 저택을 꾸미는 데 있어서 후작가보다 더 사치스러웠다는 것이다.

다른 게 있다면 규모가 백작가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드러난 목을 간지럽혔다. 비록 드레스의 재질이 두꺼운 벨벳이긴 하지만, 레이디들도 사실 상당히 강한 게 아닐까? 이런 추위에 어떻게 밖에서 차를 마신다는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가 후작저 하녀의 안내를 따라 조용히 정원 안으로 걸어가자 정원 안에는 꼭 컵을 뒤집어 놓은 것 같은 자그마한 건물이 보였다.

투명한 유리가 햇빛을 반사해 빛났다. 화려하게 세공된 유리 온실의 문이 열리자 바깥 기운과는 놀랍도록 다른 훈훈한 공기가 느껴졌다.

말라 버린 풀과 헐벗은 나무들이 가득해서 삭막한 바깥과는 달리, 이곳의 식물들은 정말 말 그대로 봄을 잊어버리지 않은 것처럼 본연의 선명한 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한겨울에도 식물 특유의 청량한 내음을 맡는 것은 생경한 일이었다.

마련되어 있는 길을 사용인의 안내를 따라 걸어가자 새하얀 원형 테이블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레이디들의 모습도. 마치 꿈결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루시펠라는 맨 안쪽의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를 기억해 냈다.

황궁 연회에서 그녀를 공격했던 여자였다. 다른 소녀들도 당시 루시펠라의 근처에서 그녀를 비웃었던 이들이었다.

루시펠라가 등장하자 영애들의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어머, 아이딘 백작 영애 아닌가요?”

“그러게요?”

그들은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것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인 것처럼 말이었다.

“여기는 무슨 일이시죠? 로에르 영애를 찾으신 거라면 영애는 이곳, 티파티에 참여할 예정이에요.”

붉은 머리 여자가 웃으며 물었다. 그에 다른 영애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영애가 여기에 초대받았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에이, 설마요. 로에르 영애에게 용건이 있는 거겠죠.”

이들은 모두 과장된 어조로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루시펠라가 영애들의 얼굴을 살펴보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애들이 예상하는 대로 로에르 영애의 초대를 받았답니다.”

그에 그녀들이 동시에 허무맹랑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루시펠라는 이들의 연기가 형편없지만 저 단합력 하나만은 인정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런 건 자신의 기사단원들도 못 따라간다.

“로에르 후작 영애와 영애가 친분이 없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인데 초대받았다는 걸 누가 믿죠?”

“보세요, 여기 의자도 없는걸요.”

“영애, 여긴 초대받을 수 있는 사람만 올 수 있는 곳이에요.”

세 명의 여자아이들의 말을 듣고 루시펠라는 하아, 하고 한숨을 쉬더니, 옷의 소매에서 편지를 꺼내 들었다.

“이 문양과 필체가 거짓으로 보이면 후작 영애에게 직접 물어보던가요.”

그녀가 검지와 중지 사이에 초대장을 끼우며 흔들어대자 영애들의 표정이 볼만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굳이 초대장을 가져올 거라 예상했겠는가. 게다가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는 것을 가지고 함부로 가짜네 진짜네 언급하는 것도 그 가문에 커다란 모욕이 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그녀가 정말로 초대를 받았다는 것을 알지 않나.

루시펠라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에레네 부인의 말을 떠올렸다. 에레네 부인은 영애들의 티파티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부터 기를 죽이려고 할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식으로요?”

“단합해서 초대를 한 적이 없다고 몰아갈 수도 있고, 또 의자를 마련해 놓지 않았을 수도 있죠.”

“그럼 뭐 해결책은 간단하겠군요.”

어떻게 공격할지 아는데 해결책을 준비하지 않는 것은 미련한 자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초대받지 못했다고 일부러 불안감을 조성해서 그녀의 기를 꺾을 심산인 듯한데, 어림없었다.

“초대받은 사람은 있는데 의자가 마련되지 않았다니. 로에르 후작 영애가 일부러 그랬을 리는 없을 테고, 실수를 저질렀나 보네요. 이상하네요, 이런 실수를 쉽게 하지 않을 분이신데…….”

“어머, 제가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군요.”

그때, 등 뒤에서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펠라가 뒤를 돌아보자 백금발의 영애가 화사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황갈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마치 봄의 햇살을 사람의 모양으로 빗어놓은 것 같은 아름다운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마련한 의자에 흠을 발견해 새로 가져오라고 했던 참입니다. 영애께서 첫 방문을 해주셨으니 그만큼 좋은 기억을 남겨 드려야죠.”

그녀가 부드럽게 말하며 몸을 돌리자, 의자를 들고 오는 하인의 모습이 보였다.

루시펠라는 이에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당황했다. 마치 그녀가 의자에 대해 문제 삼을 것을 이미 염두에 둔 것 같지 않나.

“무례를 용서하세요, 영애.”

로에르가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더니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루시펠라는 한순간 그녀의 기운에 압도되었다.

“클로렌스 로에르예요.”

#dar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