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레이디들의 티파티 (2)
2017.06.22.
“아이를 남기고 죽음을 택했다는 것인가?”
“그게, 당시 백작부인께서 홍열병을 앓고 계셨는데 형편이 좋지 않아 약을 구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제드도 홍열병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병에 걸린 사람이 얼마나 괴로워하며 죽는지도.
“본인의 무능을 도망으로 해결해서는 안 되었어.”
제드가 으르렁거리며 독설을 내뱉었다. 그는 아이딘 백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내를 무력하게 잃어버린 백작의 절망과 비통함보다는 그날의 어린 루시펠라에게 이미 마음이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잃어버리고, 아버지마저 또 다른 비극을 만들어내서 그것을 오롯이 견뎌야만 했던 어린아이.
안다. 그도 알고 있다. 이런 비극 따위는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가에서도, 그 반짝거리던 기사에게도 똑같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그는 이럴 때면 분노가 사라지지 않았다.
상황은 충분히 좋아질 수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나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왜 그 마음, 그 마음 하나 때문에 비극이 일어나 버린 건가.
그러다가 제드는 루시펠라가 드레스를 전부 팔아치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레이디가 드레스를 팔아버렸다는 건 비정상적인 일이었는데, 제드는 그것을 넘겼다.
자꾸 자살을 시도하는 불안정해 보이는 정신 상태. 웃음을 잘 보이지 않았던 루시펠라.
생각해 보니 가까이서 본 그녀와 백작의 사이엔 그 다정하던 부녀치고는 분명 어색함이 존재했다.
그녀 역시 이제 와서 백작의 진심을 알아버렸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딸을 지극히 사랑한다’는 백작의 행동에는 위화감이 많았다.
우선 가을 연회 때 루시펠라가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할지 알면서도 백작은 연회장에 그녀를 혼자 두고 자리를 떠났다.
그뿐인가?
미쳤다는 소문이 도는 루시펠라를 홀로 영지에 내려 보냈다. 백작이 같이 있었으면 굳이 위험에 처하지 않을 문제였다.
또한 그는 적극적으로 그녀를 습격한 사람들을 추적하지 않았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 백작이 루시펠라에게 선물한 화려한 드레스와 보여지는 애정으로 그 누구도 아이딘 백작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
제드는 주먹을 꽈악 쥐었다. 귀족들의 생리는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흔히 알려진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처럼, 자식에게 무한한 애정을 주는 부모가 있고, 적당히 애정을 주는 부모가 있고, 자식을 도구로 이용하기 위한 부모가 있다.
그리고 제드의 부모를 따지자면, 제드의 부모는 혼합형이었다. 원활한 도구의 활용을 위해 적당한 애정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가 느낀 배신감과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다.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 하인트 공작 부부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관계라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관계로 맺어지는 게 더욱 이상했으니 제드는 그놈의 사랑이라는 데 낭만 따윈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서 자식인 자신마저 귀족들의 의무인 후계자 생산, 가문의 부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귀족들 사회에 혐오감을 느끼며, 귀족들이 추구하는 것에 짙은 환멸을 느껴왔다.
때문에 사교계에 나가지 않고, 정계에 진출하지 않았으며, 이오지프의 은근한 요청을 계속해서 거절해 왔다. 그에게는 명예네 의무네 하는 그 무엇들이 하찮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도피를 해왔던 것이 맞았다.
그가 행하던 도피가 사교계에서, 부모에게서 도피하던 것이라면, 루시펠라가 하는 도피란 세상에 대한 도피가 아니었을까.
살인범이나 도적을 빙자한 남자들, 또는 마물에게서 살아남았을 때 그녀가 발휘했던 생존력은 놀라운 것이지만 사람이라는 게 남이 자신의 목숨을 거두려고 하면 억울해서 못 죽는 법이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목숨이 아깝지 않아 막 행동했던 게 살길이 되었는지도…….”
“네?”
“그래, 그랬던 거야.”
그녀가 해왔던 기행을 죽어도 상관없으니 막 나갔던 거라고 생각하면 다 이해가 갔다. 이제야 모든 게 명확히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제드는 루시펠라를 자신의 과거에 끼워 맞추는 우를 범하고야 말았다.
그로서도 어린 시절 가슴 깊이 남아 있던 상처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이 그쪽으로 초점이 맞춰져 버렸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거의 발휘되지 않던 그의 이해심과 공감 능력이 갑자기 성인(聖人) 수준으로 변했다.
얼마나 커다란 상처를 입었던 것일까. 그러면서도 혼자서 잘 이겨내려는 태도가 본받을 만했다. 제드는 그녀에게 존경심이 들었다.
“백작 영애가 수도로 올라온다고 했지?”
“네.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아마 일주일 후에 올라올 겁니다.”
“빠르군.”
“보아하니 우리가 떠나고 바로 준비한 모양입니다.”
“한데 이 떠들썩한 곳에는 대체 왜.”
그는 루시펠라를 이해할 수 없었다. 황태자에게 미련이 남는 것은 아닐 테고, 친구가 딱히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제드는 루시펠라를 떠올렸다.
자신이라도 잘 대해주어야 한다. 될 수 있으면 보살펴 주는 것이 옳았다. 약혼녀이지 않은가. 게다가 곧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다. 타인이라면 동정하고 말 것이지만, 그래도 어찌 되었든 그는 루시펠라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또다시 시작된 제드의 오해는, 이번에는 조금 심각한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
루시펠라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마련되어 있는 따스한 물에 노곤한 몸을 담갔다. 그러자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겨울의 마차 여행은 기껏 쌓아 올린 체력을 방전시켰다.
비로소 몸을 쉴 수 있게 된 루시는 떠나기 전의 지난 며칠을 회상했다.
루시펠라는 조사하라고 명령한 사람들을 백작이 모두 다 거둬들였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딘 백작은 자신을 습격한 이들의 배후가 황태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묻기로 한 듯했다.
그에 루시펠라는 강한 반발심을 느꼈다가 이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이딘 백작이 딸인 루시펠라를 아끼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맞지만, 그 선은 아이딘 백작의 입지가 위험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이딘 백작 역시 딸에게 모든 것을 다 내보일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 그도 숨기는 게 있었다.
그때 맷시는 쌍둥이 왼쪽 산에 ‘마물이 나온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결과적으로 마물이 정말 나왔기에 그건 거짓 소문은 아니었지만, 백작은 생각보다 투명하게 보이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루시펠라는 그에 대해 너무 안심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백작은 루시펠라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 정도였다.
루시펠라는 흰 욕조의 끝에 허리를 기댔다. 목욕물과 얼굴이 가까워지자 입욕제의 향기가 너무 강해 머리가 아찔해졌다.
루시펠라는 다시 그 습격 사건에 대해 떠올렸다. 그거야 뭐 ‘그’가 알아서 처리해 주지 않겠는가.
그래도 약혼녀가 위험에 처했다고 한달음에 달려와 준 사람이었다. 허투로 처리하지는 않겠지.
사실 그녀도 알고 있지 않은가. 안 그런 척, 성격이 더럽고, 무례한 말을 내뱉더라도 제드의 본질은 분명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에스텔’ 역시 그 부분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 오히려 그녀는 제드의 그 특유의 무례한 어투를 생각해 내고, 이를 득득 갈며 욕을 하고는 했다. 바로 칼리드에게.
“칼리드.”
그녀는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렇게나 낯설고도 입에 익은 이름은 없을 것이다. 그를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 어떤 힘으로 그녀의 복수를 할 수 있을까.
잠시 후 하녀들이 그녀의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부드러운 수건이 그녀의 몸을 닦아 가운을 입혀주었다.
그녀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 새 옷을 갈아입히기 위해 다시 가운이 벗겨졌다.
루시펠라는 방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나신을 바라보았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루시펠라의 나신은 그녀가 보기에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물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 인형 같은 생김새의 얼굴, 백조같이 우아한 곡선을 지닌 목, 툭 튀어나와 물이 고일 것 같은 쇄
골, 가느다란 팔,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 그리고 쭉 뻗은 늘씬한 다리까지.
화장기 하나 없어도 루시펠라의 외모는 그 자체로도 완벽했으며, 사람들을 매혹하기에도 합당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가진 최고의 장점이 아름다움이라.
그럼 무엇 하는가. 칼리드를 유혹이라도 하라는 건가?
루시펠라는 거울을 보며 실소를 지었다.
그렇게 가까운 친구, 에스텔의 목을 잘랐던 사람이 아니던가. 바로 곁에 있었음에도 에스텔은 칼리드에 대해 알 수 없었다.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그를 유혹해서 파멸시키겠는가. 외모가 아름다워도, 루시펠라는 남자를 어떻게 유혹하는지 그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칼리드는 위험인물이다. 오히려 이쪽이 간파당하고 이용당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칼리드는 루시펠라에 못지않은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주위에 이성이 많았고, 한동안 불장난 같은 짧은 사랑을 즐기다 어느 순간 이후로는 여자를 전혀 가까이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가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고 아양을 떨기 싫었다.
루시펠라는 깔끔히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다.
그러다 그녀는 제드를 생각했다. 칼리드를 만난 직후 혼란스러웠을 때, 그녀는 제드를 유혹해서 칼리드의 복수를 하려고 했다.
아파서 미친 거지. 루시펠라의 양 볼이 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그 사건에 대해 한두 번 생각한 것이 아니건만, 아직도 그 부끄러운 감정은 집요하게 루시펠라를 괴롭혔다.
그녀는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그 감촉이 똑똑히 기억났다.
‘다신 이런 짓 안 할 거야!’
결국 외모를 이용하여 누군가를 유혹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싫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역시 자신의 힘을 이용해야 했다.
우선은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을 만들어야겠지. 아이딘 백작에게 맷시 자작이 있는 것처럼 그녀에게도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녀들에게 얻는 정보는 한계가 있어.’
이들은 사소한 것을 많이 알고 있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정보는 모르고 있다는 게 맞았다.
에레네 부인을 떠올렸지만, 에레네 부인 역시도 귀족 사회에 떨어져 나온 사람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단 하나가 아니겠는가.
‘친구.’
그래, 루시펠라에게는 친구가 필요했다. 하인트 공작에게 기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백작에게 기댈 수도 없다.
그녀에게 대강 수도의 정세에 대해 알려준 맷시는 아버지의 사람이었고 영지에 있으니 가르침을 기대할 수 없다.
결론은 자신의 또래의 친구, 친구뿐이었다. 그렇다면 친구를 어떻게 사귀어야 할까.
루시펠라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
“친구를 사귀는 건 포기하셔야 합니다.”
에레네 부인의 단언에 루시펠라의 표정이 실망으로 변했다.
에레네 부인으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루시펠라는 갑자기 영지로 내려갔고, 그 뒤에는 이상한 소문들이 따랐다.
에레네 부인은 그에 루시펠라가 살짝 걱정되었다. 그녀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다시 수도에 올라오고, 바로 다음 날에 그녀를 불렀기에 그녀는 부리나케 아이딘 백작가를 찾았다. 그런데 루시펠라는 겨우 ‘어떻게 하면 친구를 사귈 수 있나요?’라고 묻다니.
“역시, 그렇죠?”
“그렇습니다.”
다행히도 루시펠라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객관적 평가를 할 정신은 있는 모양이었다. 에레네 부인은 실망하는 그녀가 가여웠다.
“보통 수도의 귀족들은 친분이 있는 가문과 어울리며, 그 친분 역시 세습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게 친구를 사귀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루시펠라는 친분이 있는 가문을 생각해 보았다.
아이딘 백작가는 수도에 진출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이렇다 할 친분을 가진 가문은 이드리스 공작가를 비롯한 황태자에게 충성하는 몇 개의 가문밖에 없었다.
그러나 루시펠라가 그 가문의 사람들과 친했나 하면, 딱히 생각나는 사람은 없었다. 죽은 1황후의 오라비이자 그녀의 친척이라는 이드리스 공작가 역시 교류가 거의 없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아니면 정말 이렇다 할 추억이 없는 걸까.
어쩌면 루시펠라가 기억하기 싫은지도 모르지.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꽤나 나중에서야 떠오르지 않았던가.
여하튼 친분이 있었으면 가을 연회 때 그녀에게 다가왔을 터다. 아니, 그녀가 아팠다고 할 때 병문안부터 왔겠지. 루시펠라, 대체 어떤 인간관계를 쌓아왔던 거니.
“두 번째 방법은, 같은 해에 사교계에 데뷔한 영애들끼리 친해지는 겁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지났지요.”
당연하다.
루시펠라는 진짜 루시펠라가 사교계에 데뷔한 날의 기억이 있는지를 떠올렸다.
당연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루시펠라는 한숨을 쉬었다.
“세 번째 방법은, 연회장에서 서로 친분을 쌓는 겁니다.”
연회장에서 친분을 쌓기보단 싸웠지. 게다가 루시펠라는 어려서부터 괴롭힘을 당해왔다.
진짜 친구 없구나, 너.
루시펠라는 깨달은 사실에 괴로워했다. 앞으로가 막막했다.
“혹시 모르지요, 누군가가 티파티라도 초대해 준다면 그때 친구가 생길 수도.”
“절 초대할 사람이 없는 거 아시잖아요.”
진짜 루시펠라가 쌓아왔던, 아름다운 인간관계는 그녀가 아프고, 수도에 내려가도 아무에게도 편지 한 통 오지 않는 깔끔한 편리함을 가져다주었다.
“역시 친구 사귀기는 포기해야 하나…….”
그냥 망했다고 생각할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에레네 부인과 루시펠라는 동시에 문을 바라보았다. 로이자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아가씨, 부인.”
“무슨 일이지?”
“저, 그게…… 초대장이 도착했어요. 로에르 후작가에서.”
그것을 주면서도 로이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아버지에게 온 게 아니라 내게 온 거라고?”
루시펠라는 확인하듯 물었다.
“네, 지금 바로 답변을 달라고 하셨어요. 수업하시는 데 죄송해요, 아가씨.”
루시펠라는 로이자가 내민 봉투를 받았다.
옅은 상앗빛 봉투에는 짙은 주홍색의 봉랍이 찍혀 있었다. 봉랍 안에는 마름모 문장이 세 개인 가문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에레네 부인이 입을 열었다.
“로에르 후작가는 제국 동북의 대영주 가문입니다. 비옥한 토지를 가진 유서 깊고 위세가 드높은 가문이기도 하죠.”
“그러니까, 지금 그 가문에서 나를 초대했다고요? 뭐 때문에?”
루시펠라가 에레네 부인에게 물어보자, 에레네 부인은 그녀가 받아 든 초대장에 눈짓했다.
루시펠라는 조심스럽게 편지 봉투를 열었다. 편지에는 사람의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꽃향기가 가득 발라져 있었다.
―몸은 건강해지셨나요? 수도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답니다.
영애와는 줄곧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기회가 없었지요.
로에르 후작저의 유리 온실은 한겨울에도 따뜻해서 봄의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영애를 우리의 티파티에 초대하고 싶어요.
날을 급하게 잡아 대답을 빨리 요구하는 무례함에 대해 양해 부탁드릴게요.
우리의 즐거운 만남,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클로렌스 로에르.
이 영애의 글씨는 또박또박했고 획의 길이가 일정하며 정갈했다.
루시펠라는 그 글씨가 왠지 싫지 않았다.
“클로렌스 로에르라는 영애가 날 티파티에 초대한다는군요. 이 영애가 누구죠?”
그에 에레네 부인이 걱정된다는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
“다른 분은 몰라도 로에르 후작 영애는 꼭 아셔야 합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요?”
“가문의 위세도 위세지만, 외양 때문이라도 잊지 못할 분이지요. 꼭 아가씨처럼요.”
그런 기막힌 미인이라면 기억할 텐데, 루시펠라는 가을 연회를 곰곰이 떠올렸다.
그런 아름다운 사람이 있었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클로렌스 영애의 백금발은 아가씨의 검은 머리카락처럼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백금발이요?”
그제야 기억났다. 백금발, 백금발의 여자! 장수! 연회에 누구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병졸을 앞세워 그녀를 망신 주려고 시도했던 여자가 아니던가.
그 여자가 대체 왜 자신을 초대한 거지? 초대의 이유야 뻔하지 않은가. 그녀의 눈이 좁아졌다.
“알 만하네. 아직 제가 미쳤다고 아는 거죠?”
“네, 아가씨를 둘러싼 소문을 확인하려고 초대하는 겁니다.”
“그래요?”
“로에르 후작 영애는 아마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왜요?”
루시펠라의 물음에 에레네 부인이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아가씨에게 직접 ‘샛별’이라고 불러줬으니까요.”
“그게 큰 문제인가요?”
루시펠라의 물음에 에레네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께서는 아가씨에게만 샛별 같다고 칭찬하시고는, 로에르 영애에게는 관심을 가지시지 않았습니다. 그때가, 로에르 후작 영애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궁하셨을 때라더군요.”
“그래서요,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당연합니다. ‘처음’은 누구에게나 중요한데, 고위 가문의 영애라 받았던 주목을 아가씨에게 다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게 화가 날 일이 아니면 뭐죠?”
“아…….”
“그리고 그 ‘샛별’이라는 호칭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폐하는 그 이후로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별칭을 내리신 적이 없습니다. 아가씨만이 유일해요.”
그 샛별이라는 호칭, 엄청 유치한데. 루시펠라는 그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고 대신 자신이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했다.
“그러니까, 위세 높은 후작가의 레이디가, 한미한 백작가인 저만 폐하의 주목을 받아 질투를 하고 있다는 말씀이시죠?”
“그럴 겁니다.”
결국 질투라니. 괜히 기대했네. 여자들이란 질투랑 떨어져 있을 수 없는가 보다.
루시펠라는 이 한심한 이유에 한숨을 내쉬었다.
“가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아가씨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초대하는 게 뻔하니까요.”
명백한 의도를 띤 초대장을 보며 루시펠라는 그러겠다고 대답하려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이 도발적인 초대장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로이자, 초대에 감사드린다고,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려.”
“네? 네!”
로이자는 의문 어린 표정이었지만 곧장 루시펠라의 말을 따랐다.
에레네 부인의 당황한 표정에 대고 루시펠라가 물었다.
“절 도와주시겠어요, 부인?”
레이디들의 티파티라. 어쩌면 그곳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지 않은가. 어쩌면 친구도 사귈 수 있고.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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