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31화 (31/173)

#31화 레이디는 어여뻤다

2017.06.15.

“그러니까 내가 드레스를 입어줬으면 해서가 아니라, 드레스를 팔아치워서 이것들을 사줬다는 거지? 사과하는 의미로?”

그녀의 되물음에 넋을 잃고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고 있던 제드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러곤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의 얼굴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긍정이라는 것을 깨달은 루시펠라는 더욱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드는 뚱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그녀의 웃음이 멎어들기를 기다렸다.

“생각해 보니 그쪽, 오해만 하고 있는 거 알아? 내가 화가 났던 건, 그냥 내가 못나서야. 그쪽 잘못이 아니야.”

그 말에 제드가 뭐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가 못났다고 말한 사람을 보고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렇게나 웃고 있지 않은가.

“기사들의 수준은 나도 동의하는 바라서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쪽이 생각하는 것만큼 애정을 가지진 않았어.”

그에 제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드레스는 왜 처분한 거지? 레이디가 드레스를 스스로 팔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인데.”

그런가? 루시펠라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로서도 자신이 아는 레이디 중 하나가 드레스를 다 팔아치웠다면 무슨 일인지 생각부터 했을 것이다. 드레스와 레이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으니까.

“그냥 팔고 싶어서 그랬다, 정도로 해두지. 이젠 별로 드레스를 좋아하지 않거든.”

“……?”

루시펠라는 더 설명하지 않은 채 웃었다.

제드가 재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행동이 싫지는 않았다. 그녀가 화가 났다고 생각해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하고 그녀에게 신경을 써줬다는 게 아닌가.

저 재수 없는 남자가 사과를 하려고 쩔쩔맸다고 생각하니 우스웠다. 게다가 ‘또’ 오해라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찌푸린 것은 더 우스웠다.

그렇게 엿먹이고 싶었는데, 알아서 엿을 드셔주는 게 어떻게 재미가 없겠는가.

“그래도 결혼하자마자 이혼할 약혼녀에게 이렇게 신경을 써주다니, 그쪽도 나쁜 사람은 아니네.”

“그건…….”

제드는 무어라고 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드레스를 보는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비록 이것이 오해였다고 해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면 또 그녀가 화를 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미소도 사라지겠지. 제드는 그러한 상황을 바라지 않았다.

“내일 수도로 떠나기 전에는 풀어둬야 할 것 같아서.”

“쓸데없는 노력 했네. 이거 참 미안하게 됐네.”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문 바깥의 기척을 느끼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방문 쪽으로 다가서더니 문을 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복도엔 사람의 인기척이 없었다. 하녀라도 잠깐 지나간 것일까? 제드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왜?”

“아니.”

루시펠라의 물음에 제드가 고개를 흔들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는 루시펠라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제드는 그녀에게 손을 뻗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모처럼 호의를 보이는 그녀가 또 어떤 종잡을 수 없는 이유로, 화를 낼지 알 수 없기에.

어딘가 까다로우면서, 또 어딘가 단순한 약혼녀. 그리고 그녀에게 가진 종잡을 수 없는 감정.

그로서도 처음 느낀 감정이었지만 그가 확신할 수 있는 게 딱 한 가지 있었다.

그는 그녀가 싫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루시펠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웃음기 어린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제드는 그 모습에 뿌듯함을 느꼈다.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으로 인해 그녀가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지독히도 어여뻤다.

제드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

루시펠라는 다시 성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굳어 있었는데, 그녀는 되도록 한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칼리드의 목소리에 루시펠라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칼리드는 마차 앞에 서 있었다. 백작이 마련해 준 모양이었다.

루시펠라는 의식적으로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바로 옆에 서 있던 제드를 바라보았다.

제드의 의도는 명백했다. 칼리드가 자신에게 저질렀던 일의 증거를 인멸할까 봐 그를 따라가려는 것이다.

제드의 뒤에는 말과 튼튼한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루시펠라와 제드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다 루시펠라는 이내 바로 그에게 시선을 뗐다. 왜냐하면 칼리드가 그녀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는 루시펠라가 미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깨닫기도 전에 허리를 숙여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의 감촉이 스쳐 지나가자 루시펠라는 화들짝 놀라 자신의 손을 잡아 뺐다.

“크나큰 신세를 졌습니다, 영애.”

루시펠라는 멍하게 손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칼리드에게 이런 식의 인사는 받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시, 실례를 저지르면 안 된다.”

백작의 부드러운 말에 루시펠라는 정신을 차리고 그를 보았다.

“괜찮습니다. 갑자기 영애를 놀라게 한 사람은 저니까요.”

칼리드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누가 봐도 레이디에게는 상냥한 기사의 모습이었다.

그것을 보던 루시펠라가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저야말로.”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 걸까? 그냥 단순히 저 하인트 공작을 도발하기 위해서일까? 그런 거라면 소용이 없을 텐데. 하인트 공작과 자신의 사이는 그렇게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녀가 흘낏 제드 쪽을 바라보자, 제드는 예상대로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러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가 움찔하자 제드가 그녀에게 성큼 다가왔다. 그에 칼리드가 옆으로 비켜 섰다.

제드는 칼리드 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루시펠라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의 얼굴, 정확히는 두 눈. 그리고 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더니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

손을 내밀어달라는 건가?

루시펠라가 손을 내밀자, 그 역시 손을 내밀어 잡아왔다. 그의 손은 루시펠라의 손보다 훨씬 커다랬다. 손가락 끝에 기사 특유의 거친 굳은살의 감촉이 느껴졌다.

“조만간.”

“조만간?”

루시펠라가 따라 말하자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다시 볼 때는 결혼식인가?”

“결혼식?”

왜 갑자기 이 시점에 결혼을 언급한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루시펠라는 이 남자와 자신이 결혼식을 올릴 거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결혼을 늦출 줄 알았는데, 그대로 진행할 생각인가?

그녀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굳자, 그 모습을 제드가 그대로 지켜보았다.

그는 입을 맞추려는 듯 손을 들어 올리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아래로 내렸다. 그러더니 작게 속삭였다.

“손에 입을 맞추는 건 생략하지.”

그것을 본 루시펠라는 너무도 잘 알 수 있었다. 저 녀석은 어지간히도 칼리드가 싫은 모양이라고. 뭐, 손 키스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로서도 반길 일이었지만 말이다.

제드는 등을 돌려 마차에 올랐다. 마차의 문이 닫히기까지 그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보며 못마땅한 마음에 얼굴을 찌푸렸다.

저놈은 기껏 지가 선물해 준 옷을 입었는데도 왜 별말이 없단 말인가.

물론 그녀 역시 드레스들은 아직도 보기엔 다 비슷비슷해서 구분이 불가능했지만, 그녀는 제드의 둔감함에 굳이 관대해지지 않기로 했다.

“다음에 보죠, 영애.”

그때, 칼리드가 루시펠라에게 말을 건넸다.

다음이라……. 다음이 있다면 이번에는 어떤 상황에서 만나게 될까.

루시펠라는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려 미소 지었다.

“그래요, 다음에.”

칼리드는 미소를 지어 보이곤 마차에 올랐다.

두 대의 마차와 더불어 하인트 가의 기사들이 떠났다.

순식간에 성 앞 공터는 텅 비었다. 손님들이 떠날 때 특유의 부산스러움이 사라지고 낯선 고요함이 찾아왔다.

루시펠라는 한참 동안 마차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루시.”

부드러운 목소리에 루시펠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백작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의 걱정과 불안이 담긴 시선. 루시펠라는 백작의 모습을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드디어 갔네요.”

“그래, 가셨구나.”

백작이 무엇인가 말을 꺼내려 할 때 루시펠라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자신이 하려는 게 나름의 평온한 이 두 번째 생을 다시 파란으로 몰아갈 것을 알고 있었다.

“저 이제 괜찮아졌어요.”

루시펠라가 그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저도 수도로 갈 수 있나요?”

아직 그녀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아니, 무엇도 할 수 없기에 방법을 모른다는 게 맞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칼리드를 보고 적어도 인내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그를 살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젠 마음을 어느 정도 억누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복수를 원한다면 이곳에서 기다릴 수 없었다. 다시 그가 마물에게 당활 확률 따윈 없을 테니 말이다. 그에게 다가가야 했다. 그는 말 그대로 황실의, 특히나 황태자 테미르의 개였고, 권력을 원했으니 그녀 역시 그것에 다가갈 수밖에.

백작이 루시펠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따스하게 미소 지었다.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복수를 한다면 그저 단순하게 그를 검으로 찌르는 복수를 해서는 안 되었다. 명예로운 죽음도, 급작스러운 사고도 칼리드에게 선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 그에게 복수를 한다면 그가 원하는 것을 모두 잃어버리게 해야 했다. 에스텔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아이딘 백작은 딸아이가 어떤 마음을 품는지도 모른 채, 천사 같은 딸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

“아이딘 영애를 많이 좋아하시는 모양이군요.”

제드는 칼리드를 노려보았다. 그 서늘한 시선에도 칼리드는 빙긋 웃었다.

“마차를 같이 타자더니, 내 약혼녀에 관한 시답잖은 이야기나 하려고 그런 건가? 우리가 그런 친밀한 사이는 아닐 텐데 말이지.”

“공의 솔직함은 언제나 배울 만하다 생각합니다. 제겐 솔직해질 용기가 없거든요.”

나라와 상관을 배신한 저 녀석에게 경멸을 표하는 것은 제드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칼리드는 언제나 그런 이들에게 미소를 보이며 부드럽게 대했다. 비굴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그러나 칼리드는 단 한 명, 제드에게만은 묘하게 다른 태도를 취했다. 꼭 이렇게 웃는 낯으로 속을 득득 긁어댔던 것이다.

칼리드는 제드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비굴한 가면 아래 본심이 살짝 드러날 정도로.

제드는 그래서 저놈이 더욱 싫었다. 무엇을 잘했다고 그를 싫어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저 녀석이 자신을 좋아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기분이 더러웠을 것이다.

“저는 영애에게 관심이 갑니다.”

“뭐?”

대놓고 약혼자 앞에서 하는 도발에 제드가 으르렁거리듯 되물었다. 결투라도 하자는 건가. 그는 기꺼이 응할 생각이었다.

“꼭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거든요.”

칼리드의 말에 제드가 잠시 동안 움찔했다가 이내 더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 ‘누군가’의 정체를 제드 역시도 짐작했기 때문이다.

지독한 불쾌감이 엄습했다.

관심. 이오지프 녀석도 그렇고 이놈도 그렇고 왜 죄다 남의 약혼녀에게 그렇게 관심을 갖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공이 누군가에게 관심이 간다는 걸 왜 이야기하는 거지? 기분이 더러우라는 건가.”

제드가 얼굴을 찌푸리자 칼리드가 웃었다.

“관심이 향한다는 걸 미리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게 예의인 것 같아서.”

“침묵을 지키는 것이 예의겠지. 황태자 전하가 그쪽에게 무엇을 시켰던 걸까. 수도에 가서 제대로 파헤칠 텐데, 벌써부터 그렇게 혀를 함부로 놀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가.”

“수도에서 무엇을요? 저는 영애를 보고 싶어서 영애를 따라갔던 것뿐입니다만?”

제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칼리드는 수도에서도 이렇게 말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루시펠라를 둘러싼 소문은 그리 좋지 않았다.

황태자와의 염문설. 최근에는 정신이 나가 버렸다는 소문. 거기다가 칼리드 루이르크까지 그 소문에 끼어든다면 얼마나 형편없는 수식어가 붙을 것인지 생각만 해도 아득했다.

남자와 여자가 엮이는 소문이 나면 항상 피해는 여자가 입게 마련이다.

“그 관심이란 게 이런 의미였나?”

빠져나갈 생각으로 밑밥을 깐 거냐는 제드의 물음에 칼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까도 말했잖습니까. 떠오르게 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입니다.”

칼리드는 그렇게 말하며 회상하듯 미소 지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좋습니다. 꼭 아무 희망도 없는 밑바닥에서 살아남으려고 아등바등하는 그런 모습 말입니다. 같이 리닉스에게 쫓겼을 때 아이딘 백작 영애가 그런 모습을 보이더군요.”

“…….”

“그 모습이 에스텔, 꼭 그녀 같아서…….”

그에 제드의 살기가 터져 나왔다. 이글이글한 적갈색 눈이 그를 삼킬 것처럼 칼리드를 노려보았다. 그 위압감에도 칼리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저는 에스텔을 참 좋아했습니다, 하인트 공.”

마치 애완동물을 대하듯 하는 말투에 제드는 반사적으로 나가려는 손을 내리는 데 상당한 인내력을 소비해야만 했다.

침착하자. 이 녀석은 제드가 그에게 폭력을 쓰는 것을 기대한 것일 수도 있다.

만약 황제가 직접 대질 심문을 하는데 제드가 ‘환자’에게 폭력을 썼다는 것을 알면, 일을 그르칠 수가 있었다.

“에스텔 슈페르트의 이름이 공의 입에서 뻔뻔스레 나올 줄은 미처 몰랐군.”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목을 잘라 바치는 것이 좋아했다는 것이라면 진짜 미친 건 아이딘 백작 영애가 아니라 칼리드 루이르크였다.

“그래서 참, 아이딘 백작 영애가 궁금하더군요.”

칼리드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대체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공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같은 마차에 탄 건가?”

제드는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칼리드가 에스텔을 떠올렸던 것처럼, 제드 역시 그녀의 눈을 보고 에스텔을 떠올렸던 적이 있었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역시나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입니다.”

칼리드는 짐짓 즐거운 듯 미소를 지었다. 제드는 이놈을 당장 패대기쳐야 하는지 고민했다.

이번 백작 영애 습격 사건에 대해 떠볼 수 있을까 해서 마차에 올랐지만, 괜한 짓이었다. 그는 에스텔과 루시펠라를 동시에 들먹여 가며 제드의 심기를 상하게 했다.

“그런데 하인트 공은 참 이상하게도 꽤 에스텔을 생각하는 것 같군요. 이미 죽어버린 망국의 기사가 아닙니까?”

제드는 그에 대답하지 않고 칼리드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저 하늘의 별이 된 에스텔이, 공이 자신을 떠올린다는 것을 알면 역겨워하며 구역질을 해댈 겁니다. 저는 그녀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거든요.”

그 말에 제드가 이내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

“그 기사의 부관으로 있다가 얀스가르에 목숨을 팔아버린 이에게 듣자니 참 믿음직한 말이군, 기억은 해두지.”

그 말에 칼리드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웃는 낯짝으로 사람을 살살 긁어내리는 건 이오지프만으로 충분했다.

제드가 직접적으로 지적할 걸 예상하지 못했는지 칼리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들 사이에 싸늘한 정적이 감쌌다.

제드는 마차를 세웠다. 그들 사이에 대화란 이미 끝이 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수도는 멀고, 우린 얼굴을 계속 마주할 정도의 친밀한 사이는 아니니 공도 이해하리라 믿어.”

“뭐, 그런 것 같군요.”

칼리드는 시원스럽게 긍정했다. 그가 마차에서 내려 문 앞에 서자, 제드가 입을 열어 말했다.

“아아, 좀 궁금해서 묻겠는데 대체 왜 에스텔 슈페르트가 ‘구역질을 하며 역겨워한다’는 말을 내게 한 거지?”

“…….”

“공이 아무 의미 없는 말을 할 리는 없고, 그게 내 기분을 상하게 할 거라고 생각해서 말한 게 아닌가?”

“…….”

“그렇다면 공은, 그 기사가 공을 싫어하는 게 상당히 마음에 걸린 모양이지?”

제드의 그 말에 칼리드의 눈이 번뜩였다.

제드는 그에 정곡을 찔렀다는 쾌감보다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불쾌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설마 진짜로 그랬다는 건가? 그랬다면 대체 왜 그녀를 죽인 건가. 제드는 칼리드의 사고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보겠습니다.”

칼리드는 따로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마차로 향했다.

칼리드가 내리고 다시 마차가 출발하자 제드는 얼굴을 찌푸리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다행히 그의 도발에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헤집어진 머릿속은 다시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역겨워하며 구역질을 해댄다라.

뭐, 그럴 수도 있고,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마음을 품고 생각하는 것은 자유였다.

그러고 보면 칼리드는 그를 도발하는 것 이외에도 영애에 대해 무언가 정보를 얻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과연 어떤 정보를 얻고 싶어 했던 것일까.

그 기사 에스텔과 레이디 루시펠라가 닮았기에 루시펠라에게 관심이 갔다라…….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비웃을 수 없었다.

제드도 루시펠라의 반짝이는 두 눈에서 에스텔을 한 번 떠올린 적이 있었다. 한데 그 짧은 순간에 느꼈던 느낌을 칼리드가 느꼈다니 상당히 불쾌했다.

“…….”

수도의 일이 정리되면 역시 공작령에 내려가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리고 아이딘 백작과 언제 혼인할지 정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다가 제드는 마지막으로 본 루시펠라의 모습을 떠올렸다. 몸이 건강해 보였으니 결혼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제드는 그 손등에 입을 맞춘 칼리드를 떠올리자 다시 불쾌해졌다. 자신이 먼저 입을 맞췄어야 했다. 그러다가 그에 반응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제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펴졌다.

마지막으로 본 그녀는 분명히 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분명 주문할 당시, 입으면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했던 드레스였다. 그게 왜 지금 생각이 난 걸까.

‘그래도 배웅을 한다고 입고 나왔던 모양이군.’

제드는 그 모습을 생각하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여러 가지 일로 복잡한 머릿속에 오롯이 루시펠라의 모습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dark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