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기사는 자신의 명예를 비웃는다
2017.06.08.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루시펠라는 머리털이 쭈뼛 섰다. 칼리드가 설마 무언가를 눈치챈 것인가?
루시펠라가 그를 탐색하듯 바라보았다.
칼리드가 여기서 그녀가 ‘에스텔’이라는 것을 알아채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까 말까 고민했던 루시펠라였지만, 막상 이 상황을 접하니 칼리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눈물을 흘리며 참회할까?
겁에 질릴까?
아니면 다시 자신을 살해할까?
흠칫, 루시펠라의 몸이 떨렸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을 부정할 만한 믿음이 그녀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눈앞의 이 남자는 자신을 두 번 죽일 수도 있었다.
루시펠라의 얼굴에 떠오른 경계를 본 칼리드가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조금 궁금해서요. 결국 그 와중에 영애 혼자서 살아남지 않았습니까. 보통이라면 불가능할 겁니다.”
휴, 루시펠라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운이 좋았으니까요. 기사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영광이군요.”
루시펠라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칼리드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훑었다.
“그런데 각하께서는 그게 왜 궁금하시나요?”
“황태자 전하께 무어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루시펠라의 얼굴이 굳었다.
칼리드는 황태자의 명령으로 이곳에 왔다. 그녀를 납치하는 납치범들의 뒤처리를 하기 위해서.
“그렇게 황태자 전하가 좋나요? 왜 충성을 바치는 거죠?”
루시펠라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말이 새어 나왔다. 이해할 수 없었다. 적어도 칼리드가 이런 행동을 했다면 납득이라도 할 수 있는 행동이길 바랐다.
이미 그녀를 죽였지만, 그녀는 그래도 칼리드에게 마지막 자존심이 있다는 것을 믿고 싶었다.
“당신에겐 기사의 명예가 없나요?”
그 말을 듣고 있던 칼리드가 푸훗,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루시펠라는 그가 저 산에서 단둘이 있었을 때처럼 다시 이성을 잃어주기를 바랐다. 다시 한 번 자신에게 기사의 명예가 있노라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칼리드는 잔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저번부터 웃긴 소리를 하는군요. 기사의 명예라, 저에게 기사의 명예를 물으셨습니까?”
“…….”
“기사의 명예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당연한 게 아닙니까? 지위만 높지, 하는 짓은 일반 병사와도 같습니다. 누군가의 검으로 살다가 개죽음당하는 게 기사입니다. 저는 그게 싫었고요.”
칼리드의 얼굴을 본 루시펠라의 얼굴이 창백해져 갔다.
아직도 아니라고,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이 칼리드의 본성이다. 그녀도 알고 있다. 루시펠라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다시 물씬 드는 배신감과 그에 대한 혐오에 그녀는 갑자기 격한 충동에 휩싸였다.
그의 면상에 대고 소리치고 싶었다. 네가 자랑스러워하던 명예는 어디로 간 것이냐고, 기사의 명예를 버리고, 자신을 베고 목숨을 연명하고 지위를 연명해서 만족하느냐고.
몸을 던져 자신을 구했다고 해서, 과거의 모습 때문에 지나치게 마음이 약해져 있었다. 이 녀석은 자신을 죽인 놈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죄책감 역시 없다.
알면 알수록 자신이 알던 칼리드에 대한 가면이 벗겨지는 것 같았다.
루시펠라는 살짝 떨리는 입술을 깨무는 것으로 감추며 말했다.
“연금은 풀어드리겠습니다만 얼굴은 되도록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목숨값으로 영지에서 바로 쫓아내지는 않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로 사라지시죠.”
루시펠라는 쏘아붙이듯 차갑게 말하며 등을 돌려 방을 걸어 나갔다.
그 뒷모습을 칼리드가 두 눈을 가늘게 좁히며 바라보았다. 칼리드의 입에 걸렸던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연금이 풀린 칼리드와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찝찝함에 제드는 아침, 기사들을 데리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저번에도 말한 것 같지만, 엉망이군.”
제드가 아이딘 백작가의 기사들을 보고 내뱉은 말이었다.
그에 버나드와 하인트 가의 기사들이 동의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와 갑옷은 새것이었고, 심지어 이 넓은 연무장이 자신들의 것이었으나 이들은 하인트 가 기사들의 위세에 짓눌려 한쪽 구석에서 소극적으로 훈련하고 있었다.
적어도 영지에서 가문을 지키는 자들이라면 당당해야 하지 않겠는가.
“저러니 레이디를 지키지 못했겠죠.”
“맞아.”
기사들 몇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제드 역시 그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
아이딘 가 기사들의 군기가 잡히지 않았기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하인트 가의 기사들에게는 며칠 전에 일어났던, 레이디 납치는 이해가 가지 않는 영역이었다.
“그런데 대체 저 장면은 뭐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버나드가 대답했다. 아침 훈련을 하는 아이딘 가 기사들을 헤치며 루시펠라가 걸어 다니고 있었다.
“아침 산책을 저렇게 할 수도 있는 건가?”
제드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버나드 역시 어깨를 으쓱했다.
기사들의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앙큼한 아가씨인지도 모르지.
그러나 제드는 그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듯 루시펠라를 보고 있었다.
“겨울 아침이라 쌀쌀할 텐데, 이해할 수 없군.”
하얀 입김이 나오는데도 루시펠라는 빠른 걸음으로 연무장 주변을 걷고 있었다.
몸에 걸친 드레스가 약간 헐렁하니 찬바람이 들기에 딱 좋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서늘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슨 심각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쯧, 제드는 혀를 차며 루시펠라에게 다가갔다.
“대체 무엇을 하는 거지? 아침 산책?”
그 말에 멍한 표정이던 루시펠라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체력 단련이야. 이게 산책으로 보여?”
그 말에 제드는 웃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그냥 연무장 주변을 걸어가는 것이 어떻게 체력 단련이 된단 말인가. 뛰어다녀도 모자랄 판에.
아니, 뛰면 저 작은 몸이 버텨내질 못하니 빠른 걸음이 최선이었을까?
나름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좀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체력 단련을 하는 레이디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도 자기를 단련하는 것은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래, 고생하는군. 바람직한 행동이야.”
제드의 칭찬에도 어째서인지 루시펠라는 더욱 얼굴을 구기며 대답하지 않고 그를 스쳐 지나갔다. 마치 아침부터 똥 밟았다는 태도였다.
제드는 자신이 무언가 잘못 말했나 생각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대화가 끝날 판이다.
“대체 왜 체력을 단련하는 거지? 그쪽 기사들이 미덥지 못한 건가?”
“…….”
그제야 루시펠라가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영애를 지키지 못한 기사들이니 그 수준에 대한 의심은 나도 납득이 가.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
그에 루시펠라가 노골적으로 화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대화를 이어가는 데 정신이 팔린 제드는 루시펠라의 얼굴을 살피지 못했고, 따라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야 말았다.
“체력이 어느 정도 된다면 나중에 검이라도 가르쳐 주지. 저런 무능한 녀석들은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여기서 제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여인이 잡는 게 거의 금기시되던 검을 잡게 해줄 만큼 자신은 열려 있는 사람이며, 굳이 시간을 할애해서 검으로 얀스가르의 정점에 오른 자신이 직접 가르쳐 줄 만큼 자신은 친절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검을 가르쳐 주는 시간만큼 함께할 수 있으니 그를 좋아하는 여자들이라면, 아니, 적어도 관심이 있다면 그의 말은 누구나 다 반겨야 할 말이었다. 그를 별로 안 좋아하던 루시펠라도 이 정도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그러나 제드는 예상하지 못한 얼굴을 마주해야만 했다.
“…….”
그녀는 자세히 보니, 아니, 굳이 자세히 보지 않아도 모욕을 당한 듯 화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꾹 다물린 입술은 다시는 벌려지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혀 있었고, 제드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두 눈은 분노로 번뜩이고 있었다.
그 싸늘한 얼굴을 보며 제드의 머릿속은 유례없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무슨 잘못을 했나? 방금 말을 했던 것에 무언가 화가 나는 거라도?
루시펠라의 표정을 본 버나드를 비롯한 하인트 가의 기사들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이건 아무래도 보면 안 되는 장면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사들이 도망치듯 사라지자 루시펠라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 잘났네, 잘났어. 검도 들고, 가르쳐 준다고 하고, 다 가졌어.”
“그게 대체…….”
“나한테 말 시키지 마!”
그녀가 이를 으득 갈며 말했다. 그녀가 몸을 돌리자 제드가 황급히 물었다.
“어디 가지?”
“그쪽 면상 안 보이는 데로.”
루시펠라가 씹어뱉듯 말하고 연무장을 떠나갔다.
떠나간 루시펠라의 뒷모습을 보며 제드는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한눈에도 화가 나 보였다.
다소 민망한 상황에 제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대체 무엇을 잘못한 거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온 버나드가 대답했다.
왜 기껏 걱정해 주니 갑자기 화를 내는 건가. 제드의 기분도 덩달아 나빠지기 시작했다.
종잡을 수 없는 사람 같으니, 정말 피곤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제드는 자신이 한 말 중에 기분 나빠할 만한 말이 있었나 점검해 보았다.
“검을 가르쳐 준다는 말이 기분 나빴나?”
“설마요, 영애께서는 검사도 아니잖습니까.”
검사가 동등한 다른 검사에게 ‘검을 가르쳐 준다’라고 말하는 것은 커다란 모욕이 된다. 네 가르침은 아직 멀었다며 깔보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결투에서 상대를 도발할 때 단골로 쓰이는 말이었다.
“설마, 영애가 검사는 아니겠지?”
“에이, 설마요.”
버나드가 말했다. 그 몸만 봐도 안다. 저 가는 팔로 검을 뽑아 들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분명 떨어뜨릴 것이다.
저런 가녀린 몸에 검이라니, 말도 안 되지.
제드 역시도 그냥 해본 말인 듯 멀어져 가는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저 멀리서 이쪽을 보고 있는 아이딘 가의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왠지 그의 직감이 ‘기사’에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자신들이 존경하는 그 하인트 공작이 부르자 앞 다투어 다가왔다.
기사들이 입고 있는 갑옷이 아침 햇살에 유달리 반짝였다.
“무구들은 관리를 잘하는 모양이군.”
제드의 말에 기사들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관리를 잘한다기보다는 무구들은 전부 새것이었다.
“백작가에서 이런 지원을 아끼지 않나 보지?”
제드의 말에 그웨인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나이 어린 청년 기사 한 명이 말했다.
“아가씨 덕분입니다, 각하!”
제드가 그를 보며 물었다.
“아가씨 덕분이라니?”
“아가씨께서 드레스를 팔아…….”
“케빈!”
“읍!”
그웨인의 부름에 케빈이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제드는 말을 들어버린 뒤였다.
“드레스를 팔았다고?”
그웨인이 어린 기사를 노려보았다. 그웨인으로서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이것은 영지의 재정 상태를 하인트 가가 오해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이게 두 가문 사이에 불화의 시발점이 된다면……!
그웨인은 지금 이 엄청난 말실수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까마득했다.
그렇다고 그웨인으로서는 자신이 ‘영애의 드레스 때문이다’라고 말해서 영애께서 ‘그러면 내 드레스를 팔겠어’라고 했다는 사실을 말할 순 없었다.
이는 기사단의 명예와 직결된 것이었다. 그러나 하인트 공작은 의외의 질문을 했다.
“영애가 기사단에 관심이 많나?”
그 말에 그웨인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좀 관심이 많습니다. 이렇게 아침에 나오시는 것도 저희를 한번 지켜보려는…….”
그 말을 끊고 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 거였군.”
제드는 그들을 한 번 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그 표정을 보고 그웨인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걱정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제드가 사라지자 그웨인은 케빈을 노려보았다.
어린 기사는 지나치게 하인트 공작을 동경한 나머지 말해서는 안 될 말까지 했던 것이다.
그웨인은 기사들에게 침묵의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정말 이들 사이에 엄격한 규율이 필요할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 제드는 턱을 쓰다듬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그랬었군. 영애는 기사단을 끔찍이 생각하던 사람이었어.”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버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딘 백작가 영지의 재정 상태가 그렇게 안 좋은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만, 저번 약혼 때도 조사했다시피 백작은 무력 쪽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드레스를 팔아서 무구를 충당했던 건 영애께서 자발적으로 한 일이었을 겁니다.”
“…….”
제드는 자신이 커다란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드레스를 팔아서까지 무구를 줄 정도로 애정을 가진 기사단의 사람들을, 아침에 체력을 단련한다는 명분으로 지켜보던 그 기사단의 사람들을 자신이 조롱하듯 말한 것이다.
“오합지졸을 오합지졸이라 말도 못 하고…….”
그렇게 중얼거리던 제드는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자신의 말이 사람에 따라서 굉장히 듣기 싫은 말이 될 수 있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제드는 말이 없는 편이었지만, 말을 꺼내면 사람의 기분을 묘하게 나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냉소적이었고, 그 생각을 말할 때는 거침이 없었다.
그에게 친구라 할 특정한 이들이 없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평가는 루시펠라의 기분을 상하게 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드 역시 할 말은 있었다.
루시펠라가 사고를 당했을 때 이들이 보였던 무능함은 그가 아이딘 백작가의 기사들의 수준을 낮게 평가하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이 유능하다고 뻐기려다가 실패한 셈이었다.
“미친.”
그러다가 그는 자신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이렇게 어리게 행동한 건가. 치가 떨리게 유치할 정도였다.
제드는 그러다가 루시펠라의 옷에 생각이 미쳤다.
드레스를 팔아서 기사단을 지원했다고? 아버지와 의견이 달라서 자의로?
그러고 보니 요새 그녀가 입고 다니는 옷들은 그 옛날 그녀가 자주 입고 다니던 옷이 아닌 수수한 옷이었다.
조금 오래되어 보이긴 했지만, 그 드레스들 또한 나름의 매력이 있었기 때문에 제드는 그 옷을 입은 루시펠라가 감각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한데 그게 그 드레스를 팔아치워서 그랬다는 건가?
“대체 왜?”
어떻게 레이디가 자신의 드레스를 미련 없이 팔아치울 수 있단 말인가. 그건 기사가 검을 파는 것과 똑같은 행위였다.
제드는 루시펠라가 얀스가르의 샛별이라고 불릴 정도로 얼마나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다녔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드레스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기사단을 위해 팔아버리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며 제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
“아가씨, 편지가 왔습니다.”
집무실에 앉아 있던 루시펠라에게 하인이 찾아와 편지를 내밀었다.
아이딘 백작가의 표식이었다. 펼쳐 보니 아이딘 백작이 소식을 듣고 급하게 이쪽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딸이 사고를 당했다는 걸 알자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편지에 있는 것은 괜찮니? 어디 다친 데는 없니? 라는 걱정들뿐이었다.
그에, 무언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아이딘 백작의 단 하나 남은 혈육이었다.
그녀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은 황태자 새끼가 꾸민 일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이 자신의 행동 때문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거시기를 찼다고 이딴 짓까지 벌일 줄 누가 알았냐고.’
그녀로서도 이 황태자의 미친 짓거리에 기가 질렸다.
그녀는 성내의 어수선한 상황을 떠올리며 절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가 누워 있는 동안 제드가 급한 일은 처리해 놨지만, 관리인인 맷시가 중상을 입어버렸기에 처리해야 할 일이 쌓여 있었다.
그녀는 우선 맷시의 보좌관들이 가져오는 서류를 읽었다. 영지가 작은 만큼 올라오는 일들은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았다.
“우선, 분쟁 건에 대해서는 여기 살고 있는 그대들이 더 잘 알 테니까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 다만 나중에 맷시에게 물어서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들을 거야. 아, 그리고 여기 이 도난 사건은 기사들에게 조사하라고 따로 지시를 내릴게.”
“…….”
“그리고 가장 급한 건, 날 이 꼴로 만든 놈들을 어떻게 잡느냐는 건데.”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건 그 인…… 아니, 각하가 잘 처리해 두셨네. 대량이든 소량이든 루비 원석을 판매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내게 보고를 올리도록 해.”
루시펠라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정보 길드는 한 번 정보가 걸러져서 들어오니까 상인 길드에 도움을 청하는 게 번거롭지만 더 잡기 쉬울 거야. 우리랑 거래했던 테로 상단에서 어떻게 잠입했는지도 알아야 하고.”
그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보좌관들은 서로 얼굴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나치게 지시가 상세했기 때문이다. 그냥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하라고 할 줄 알았더니, 예상외였다.
“또, 가브…… 아니, 루이르크 공작 각하에 대해서는, 계속 치료해 드리고, 그리고…… 하인트 공작 각하에 대해서는…….”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보좌관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이들은 아가씨가 약혼자를 극진하게 대우하라고 지시할 것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뒤에 들려온 말에 그들은 귀를 의심했다.
“그냥, 빨리 내보낼 방법은 없나?”
루시펠라는 짜증을 내고 있었다.
칼리드는 의원의 말에 따르면 상처 회복이 늦어 지금 당장 수도로의 이동은 불가능했다. 제드 역시도 눌러 있을 듯했고.
두 거슬리는 남자들이 동시에 영지에 묵자 그녀의 짜증 지수는 최고조에 달했다.
특히나 제드의 ‘검을 가르쳐 주겠다’는 말은 칼리드의 처우에 대해 치우쳤던 짜증을 제드에게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검을 가르쳐 준다니. 어떻게 그런 무례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루시펠라는 그 말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제드를 질투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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