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오해와 납득
2017.06.05.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미리 착석한 제드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어차피 서로 인사는 안 하던 사이였으므로 루시펠라는 식탁의 끝부분, 호스티스의 자리에 앉았다.
루시펠라가 들어오자 제드가 일어났으나, 막상 그녀는 눈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그릇을 나르던 집사에게 물었다.
“루이르크 공작 각하는?”
그에 제드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 그분은 방에서 요양하고 있습니다.”
“식사는 따로 챙겨주고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방에서 나오지는 않았고?”
집사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그가 도움을 청하듯 제드를 보았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제드가 말했다.
“루이르크 공은 방에 연금해 놨어.”
그 말에 루시펠라가 눈을 크게 떴다.
“뭐?”
“수상하니까. 루이르크 공은 뚜렷한 명분 없이 이곳에 왔고, 영애는 사고를 당했지.”
“…….”
대놓고 수상하다는 말투에 루시펠라는 할 말을 잃었다. 제드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심지어 연금 역시 정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무언가 못마땅했다. 루시펠라는 혹시라도 자신이 흥분할까 봐 심호흡을 했다.
칼리드를 떠올릴 때마다 루시펠라는 자신의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자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연금이라면, 아무래도 그쪽의 기사들이 대단히 수고했을 것 같은데.”
“맞아.”
“그러면 잘 알겠네. 공작 각하가 등을 많이 다쳤는데 등의 상처는 어떻지? 의원에게서 들었을 것 같은데.”
“의원을 안 넣어준 것도 아닌데, 죽진 않겠지.”
제드의 말에는 노골적인 불쾌함이 담겨 있었다.
루시펠라가 집사를 보자 집사 역시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녀가 누워서 앓고 있는 동안 아무도 칼리드를 제대로 본 사람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루이르크 공작 각하를 제대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소리군. 어디지?”
“3층…….”
“왜 찾아가려 하지?”
집사의 말을 딱 끊으며 제드가 날이 선 말투로 물었다.
대화가 끊긴 루시펠라 역시 얼굴을 찌푸렸다. 이들 사이에 싸늘함이 번져 나갔다. 루시펠라와 제드의 기분이 나빠졌다는 것을 눈치챈 집사는 진땀을 흘렸다.
“우리 집에 묵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면 안 되는 건가?”
그 말에 제드가 대답했다.
“내가 연금해 놓은 이유가 영애의 안전 때문이라고 말한 걸 이해하지 못한 건가?”
“난 연금해 놓으라 말한 적은 없던 것 같은데?”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에 하녀들과 집사가 서로 눈치를 보았다. 집사가 눈짓하자 하녀들이 재빨리 식당에서 나갔다. 집사는 일이 있으면 부르라고 말하며 마지막으로 나갔다.
“그쪽의 판단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나라도 수상하게 여겼겠지. 그렇지만 루이르크 각하가 날 구하려다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그게 아니었다면 연금이 아니라 지하 감옥에 가뒀겠지.”
제드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에 루시펠라의 기분도 덩달아 나빠졌다.
그녀는 자주 울컥하는 성격이었고, 칼리드에 대해 그 누구도 모르자 자신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
“내가 그쪽한테 언제 권한을 줬다고 마음대로 이러는 거야? 그쪽의 기사들은 대체 왜 멋대로 이곳, 우리 가문의 성에서, 내 허락 없이 누군가를 연금하고 있는데?”
“권한?”
그가 재미있는 것을 들었다는 태도로 말했다. 제드 역시 화가 난 모양이었다.
“영애가 쓰러져서 아무 일도 하지 못했던 건 기억이 나지 않는가 보지? 내가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쉬고 있으라고. 내가 말했던 건 들리지 않았던 건가?”
“아파서 그런 걸 내가 어떻게 들어!”
“아이딘 백께는 이제야 소식이 전해졌을 테고, 영애는 쓰러졌고, 관리인은 중태에, 영애는 쓰러졌고, 아무도 관리할 사람이 없기에 나중에 번거로워질 게 뻔해서 굳이 안 해도 되는 뒷수습까지 했더니, 권한을 준 적이 없다고?”
루시펠라는 왠지 그의 말투가 서운함이 가득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드의 얼굴은 그 ‘서운함’과는 거리가 먼, 단정한 얼굴에 눈썹만 살짝 찌푸린 모습이었지만 그러했다.
그녀는 살짝 당황했다. 이 사람이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봤던 것이다.
에스텔일 때 제드는 재수 없는 놈이었고, 루시펠라였을 때도 그는 재수 없는 놈이었다.
그런데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을 줄이야. 그녀는 자신이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말했던 것을 깨달았다.
어찌 되었든 제드는 수도에서 이곳까지 와서 자신을 구했던 사람이다.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다.
“그게…… 고맙지 않다는 게 아니야, 그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감사해.”
루시펠라의 말투는 다시 누그러졌다. 그러나 제드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루시펠라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생각했다. 그래, 고맙다는 걸 더 말해보자. 그렇게 입술을 열려고 할 때 제드가 말했다.
“그렇게 황태자 전하의 비위를 맞춰주고 싶나 보지?”
“어?”
루시펠라는 갑자기 나온 의외의 인물에 머리가 멍해졌다. 거기서 황태자가 왜 나온단 말인가.
“저 황궁의 개자식이 누구의 개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옹호하는 것을 보면 뻔한 일이 아닌가?”
“그게 아니라, 나는…….”
“감정을 속이려면 끝까지 철저하게 했어야지. 지금 이건 나를 두 번 기만하는 행위야.”
“아니, 나는…….”
루시펠라는 더 말하려고 했지만 제드는 이미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그러자 슬슬 루시펠라의 기분이 다시 상하기 시작했다.
뭐야, 이 쫌생이는? 사람이 하는 말은 다 들어야지.
“황태자 전하가 꾸민 일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닐 테지? 루이르크 공작이 여기 온 것을 모르겠나? 황태자가 꾸민 일이야.”
제드의 눈동자가 루시펠라의 얼굴을 향했다. 별로 놀라지 않은 그녀의 표정을 본 제드가 삐뚜름하게 미소를 지었다.
“얼굴을 보니 역시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 따로 문제 삼을 생각도 없어 보이고 말이야.”
만약 아무 일도 없었다면 영지에 기사들을 끌고 온 그의 입장은 미묘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제드는 그것을 감수하고, 백작령으로 향했다.
산속에서 그 고생을 하며 찾아서 구해줬더니, 고맙다는 인사는 안 하고 그 재수 없는 루이르크를 마차에 태우자고 한다. 게다가 그 마차만 해도 제드가 루시펠라를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그 엄청난 사건이 끝나고 난 뒤에도 그렇다. 영지를 관할할 수 있는 사람이 모두 쓰러져 버리는 바람에 뒤처리를 자신이 했는데, 겨우 그것 때문에 화를 내다니. 지금 이게 옳은 일이냐 이 말이다.
제드로서는 루이르크를 지하 감옥에 가두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특혜를 베푼 것이었다. 한데 지금 누구 앞에서 누굴 옹호한단 말인가.
이 멍청한 인간이 황태자를 잊지 못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황궁에서의 태도, 그리고 그 후에 어떤 행동을 했는지, 그리고 그렇게 싫어하던 제드에게 접근해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도 재회했을 때 아무렇지도 않았던 이유는, 위험했던 그녀가 이렇게 무사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또다시 위험에서 벗어났고, 살아 있었다. 그 안도에 제드는 이미 과거 따윈 잊어버렸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여자는 저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전엔 황태자에게 빠져 있는 모습이 짜증 났으나, 이제는 저 여자의 어리석음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그 안타까움 끝에는 연유 모를 분노가 자리했다.
자신의 지적이 합당한 모양인지 루시펠라는 눈을 굴리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 그건…….”
물론 루시펠라로서는 입장이 달랐다.
우선 자신은 문제를 삼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아직 그녀는 기사들에게 추적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도 없었던 것이다. 이제 일어났는데 무엇을 문제를 삼고 말고 한단 말인가.
“나는 황태자의 대용품이 아니라는 말을 전하지, 영애.”
제드가 한술 더 떠서 말했다. 제드로서는 참다못해 날린 일침이었지만 루시펠라에겐 어디서 기인한지도 모른 근본 없는 착각이었다.
이 사람이, 보자 보자 하니까!
루시펠라가 따지려고 할 때 제드가 일어나 몸을 돌려 식당의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걸음걸이를 보아 누가 봐도 화가 난 이의 모습이었다.
루시펠라는 황당해서 허, 허, 하며 숨을 들이켜며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황태자의 대용?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어?
기껏 제드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도 사라져 버렸다. 완전히 분노한 루시펠라가 빽, 소리쳤다.
“이 인간이 미쳤나, 누굴 실연당해 돌아버린 사람으로 몰아!”
그 소리는 식당 밖까지 들려올 정도로 꽤 우렁찼다.
루시펠라의 말에 문을 열려던 제드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제드는 그 말에 더 화가 났다. 제드로서는 그녀가 또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람을 바로 앞에 두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다니.
그러나 루시펠라의 표정을 본 제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루시펠라가 그야말로 자신을 한심하다는 듯 보았기 때문이다. 진짜 착각인가? 제드는 다시 한 번 혼란에 휩싸였다.
“그러면 저번에는 왜 황궁 복도에서 뛰어내리려 한 거지? 황태자 때문이 아닌가?”
“어?”
갑작스러운 물음에 루시펠라는 대답할 수 없었다. 칼리드, 그를 봐서 이성을 잃었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그럼 그렇지.’
그것을 본 제드의 눈동자가 가늘게 좁아졌다. 루시펠라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한참 고민하다가 겨우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내가 황궁에서 또 투신 시도를 했다는 게 왜 황태자 때문이 되는 건데?”
“어?”
“그게 그렇잖아. 내가 죽고 싶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미쳐서 그럴 수도 있고. 황궁에서 뛰어내릴 만한 이유야 얼마든지 많은데 왜 하필 그 이유가 황태자야?”
그 물음에 오히려 제드가 말문이 막혔다.
황태자를 그리워할 정도로 힘들었기 때문에 투신을 시도했었으니까. 전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황태자에게 앙심을 품고 중요 부위에 타격을 날리기도 했는데. 그러면 뭐지? 제드는 혼란에 빠졌다.
“그럼 대체 왜 그런 거지?”
“개인적인 일이야.”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드는 황당했다. 이유도 말하지 않고 뻔뻔한 표정으로 자신을 설득하려는 게 아무리 봐도 진짜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루시펠라는 오히려 화를 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인간이랑 날 어떻게 엮으려 할 수 있어? 나에 대한 실례 아닌가?”
“그, 그건…….”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제드는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루시펠라가 황태자를 잊지 못하고 그를 이용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제드의 모든 생각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 루시펠라는 반쯤 미쳐서 그에게 입을 맞췄고, 영지에 내려와서 황태자에게 그런 일을 당할 뻔했음에도 황태자의 기사인 칼리드를 보살폈다.
그런데 그게 거짓말이라면? 황태자는 안중에도 없고 루시펠라에게 루시펠라 나름의 말 못 할 힘든 일이 있다면?
“……황태자가 아니었나?”
“전적이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알겠는데, 나를 얼마나 한심하게 봤으면 지금 그러고 있겠어? 그쪽 지금 나를 머리 빈 사람처럼 무시하는 거야.”
루시펠라가 자존심이 상한다는 표정으로 제드에게 말하자 제드는 머쓱해졌다. 그는 멋대로 오해하고 멋대로 화를 내버렸던 것이다.
“내가 죽고 싶어 했던 거면 꼭 사랑 때문에 그래야 하는 거야? 그쪽 머릿속엔 사랑밖에 없나? 난 그쪽에게 솔직하게 말했음에도 믿지 못했던 건 그쪽이야.”
“아니, 그건 내 부하가 전에도…….”
망할. 그는 연인의 마음을 돌리겠다고 죽겠다고 난리를 치던 그 한심한 기사를 떠올리며 이를 뿌득 갈았다. 이게 다 그놈 때문이다.
제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애꿎은 그 부하 놈을 욕했다.
“그렇다면 루이르크 공은 대체 왜 그렇게 챙기는 거지?”
“몇 번을 말해? 그 인간이 나를 구하려다 상처를 입었다니까? 그쪽이라면 그걸 그냥 보고 넘겨?”
루시펠라의 목소리가 억울한 듯 커졌다.
제드는 자신도 모르게 ‘어’라고 대답하려고 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건 칼리드 루이르크에게만 한정된 경우였다.
“그쪽은 그런 사람이었나 보네.”
“아니…….”
제드의 목소리가 은근슬쩍 줄어들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재수 없는 칼리드가 어떠한 명령을 받았든 그는 루시펠라를 구하다 상처를 입었다. 그것을 루시펠라가 보아 넘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지나치게 의미 부여를 한 나머지 이성을 잃었다. 그는 지금 당장에라도 방문을 나가서 벽에 머리를 쾅, 받고 싶었다. 지금 얼마나 멍청한 짓을 한 것인가.
그러나 그는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그렇군.”
“그래.”
설득과 납득. 이 둘 사이에 명쾌한 결론이 내려졌다.
“그런데 정말로 황태자 전하에 대해서는 미련이 없는 건가? 일말의 미련도?”
“없어, 없다고! 그리고 그게 그쪽에게 대체 왜 중요한 건데?”
할 말이 없어진 제드는 아무거나 바로 생각나는 말을 내뱉었다.
“난 영애의 약혼자니까. 마땅히 신경 써야 할 부분이야.”
그 말이 의외로 설득력이 있었던지 루시펠라가 불만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약혼자라는 말에 수긍했다. 그에 제드는 기분이 좋아졌다.
본인이 저렇게 아니라는데 정말로 아니겠지. 어쩐지 찝찝했던 기분이 사라지고 후련해졌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왜 루이르크 공작 각하를 찾아가는지 알 거라고 생각해. 다녀올 테니 아침이나 먹고 있어.”
“내가 따라가지.”
제드가 그녀를 향해 걸어오려고 했지만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무슨 일이 있으면 앞에서 지키고 있는 그쪽 기사들이 알아서 하겠지. 더 큰일이 있으면 그쪽도 있고. 기껏 집사가 따뜻한 음식을 준비했는데 식으면 아깝잖아? 식사 해.”
‘그래도 그쪽을 믿고 있어’라는 건가? 분명 그런 의미다. 제드는 루시펠라의 말에 식탁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 그는 다시 한 번 표정을 와그작 구겼다. 자신이 했던 짓에 대해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 건가. 마치 연인의 옛 애인이 누구인지 집요하게 의심하는 ‘찌질한’ 인간이 된 것 같았다.
제드는 자신이 사람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잘 유지하며, 지극히 이성적이라 자만하는 사람이었고, 이 찌질한 감정의 흐름을 납득할 수 없었다.
왜 기분이 좋아진 거지? 자신이 미친 건가? 그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
루시펠라가 칼리드를 만나러 갔을 때, 그는 책을 읽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방 안에 비쳐 들어와 칼리드의 푸른 머리카락이 반짝이고 있었다.
책을 잡은 그의 손가락이 검은 표지와 대비되어 새하얗게 보였다.
그 장면에 루시펠라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칼리드는 예전과 똑같았다. 그는 검을 수련하는 것도 좋아했지만, 책을 읽는 것도 좋아했다. 책을 읽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던 에스텔과는 달랐다.
검술 수련을 마치고 온 에스텔이 칼리드의 방으로 찾아갈 때면 칼리드는 저렇게 책을 읽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 칼리드는 기사라기보다는 우아한 왕족 같았다.
책에 집중하던 그가 자신의 기척을 눈치채고 시선을 마주하기까지의 시간.
그는 책을 읽고 있고, 그녀는 그를 보고 있고. 각기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이윽고 두 사람의 시간이 합쳐지기 전까지의 그 짧은 시간. 에스텔은 그 시간을 사랑했다.
칼리드가 이윽고 책을 덮더니 루시펠라를 보았다.
‘에스텔?’
루시펠라는 그가 당장에라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것 같았다.
“오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칼리드의 존대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지금 그녀는 에스텔이 아니라 루시펠라였다.
에스텔은 지금 바로 앞에 있는 남자가 죽였다. 그것을 속으로 되뇌며 그녀는 감정을 꾹, 짓눌렀다.
“상처가 괜찮나 해서 와봤어요.”
“보시다시피. 좀 아프긴 하지만 몸을 일으킬 정도는 되는군요. 죽을 상처는 아니었으니까요.”
칼리드는 읽고 있던 책을 내려두었다. 그러곤 침대에 접한 벽에 기대 루시펠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좀 빨리 오시지 그랬습니까. 이렇게 갇혀 있어서 정말 따분했습니다.”
“……그거야 이제 정신을 차렸으니까요.”
“그렇군요. 이렇게 오신 걸 보면 몸은 괜찮은 모양이겠죠?”
칼리드는 별말 없이 시선을 거두며 창밖을 보았다.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루시펠라는 그의 뒷모습이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칼리드는 언제나 에스텔과 얼굴을 바라보며 눈을 마주쳤던 것이다. 그 너른 어깨 너머, 그의 짧은 푸른 머리카락이 눈에 보였다.
그의 외모는 변하지 않았는데, 너무나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그가 다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무언가요?”
“혹시 기사들에게 따로 무언가를 배우신 적은 없습니까?”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