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특별한 마음
2017.06.01.
제더카이어 하인트는 언제나처럼 그 재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루시펠라는 홀린 듯이 그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두 눈 역시도 루시펠라를 향해 있었다.
“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살았다는 환희보다는 그저 궁금했다.
어떻게 이 남자가, 수도에 있어야 할 이 남자가 여기 있는가. 왜 여기서 자신을 구해준 것인가.
“하인트 공, 오랜만이군요.”
그때 자신의 귓가에 칼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그의 존재를 눈치챈 제드의 눈이 좁아졌다.
“루이르크 공작을 부축하도록.”
제드가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에 루시펠라의 목을 감싸고 있던 그의 팔이 떨어져 나갔다. 루시펠라는 칼리드의 모습을 보았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멍했다.
그때 루시펠라의 바로 옆에 제드가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과 몸을 샅샅이 훑었다. 루시펠라는 그 시선에 멍하게 서 있었다.
“뺨에 상처가 있군.”
꺼슬한 손가락의 감촉이 볼을 쓸었다.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 이 하인트 공작은 마치 그녀를 걱정했던 것 같았다.
그 옛날, 칼리드가 에스텔을 걱정했던 것처럼.
제드가 검집에 검을 집어넣은 뒤 손을 내밀었다. 루시펠라가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제드가 말했다.
“산속에서 고생이 심했을 것 같군. 내가 부축하지.”
“……그래.”
루시펠라는 손을 내밀었다. 단단한 손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 온기에 그녀는 물끄러미 제드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침착하게 현장을 정돈하고 있었다.
그러다 루시펠라는 다시 칼리드 쪽을 바라보았다. 공작가의 기사들은 정중하게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가지.”
그때 제드가 그녀를 잡아 이끄는 바람에 그녀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제드와 손을 마주 잡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금 자신이 뭘 느꼈던가. 안도감? 이 손을 잡고 안도감이 느껴졌다고?
그녀는 자신의 뺨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그에게서 손을 빼려고 하자 제드가 손에 힘을 주었다.
뭐라고 더 말하려 했지만, 그가 앞서 걸어갔기에 루시펠라도 자연히 따라가야 했다.
체력을 단련한 보람이 있는지 이번에는 꼴사납게 쓰러지는 추태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다리가 아팠다.
속치마를 대부분 찢어냈기에 그녀의 체온이 낮아져 몸이 절로 떨렸다.
루시펠라가 어깨를 미약하게 떨자, 제드가 자신의 망토를 벗어 씌워주었다.
그에 하인트 공작가의 기사들과 아이딘 백작가의 기사들은 서로 눈을 굴리며 시선을 교환했다.
갑작스럽게 영지에 방문했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하인트 공작은 저 아름다운 백작 영애에게 빠져 있는 모양이었다.
비록 상황이 상황이었지만, 외모가 준수한 두 사람이 붙어 있으니 저절로 그림이 완성되었다.
“어, 흠.”
그웨인 경이 헛기침을 하더니 루시펠라 앞에 섰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아가씨.”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맷시 경의 시신은 찾았어?”
“다행히도 자작님은 목숨을 건지셨습니다.”
“그래?”
루시펠라의 창백한 얼굴에 환한 미소가 서렸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다친 거야? 분명히 공격받았을 텐데?”
“다치시긴 했지만 치료만 잘 받으면 완쾌된다고 합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루시펠라가 활짝 웃는 모습은 지나치게 아름다웠고, 그웨인은 순간 그 모습에 시선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몰랐다.
“이야기는 이만하고, 내려가서 말하지. 제대로 걷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나?”
제드의 목소리에 루시펠라가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의 대화에 끼어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하네.”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루시펠라가 말했다.
“꼭 날 걱정하는 것처럼 말하잖아. 날 걱정하기라도 해?”
그 시비조에 그웨인은 당황했다.
‘걱정해 주는 거 맞습니다!’
걱정이 아니라면 누가, 수도에서 이곳까지 내려와 그녀를 찾기 위해 산속을 수색하겠는가!
“뭐, 그렇다고 치지.”
그러나 의외로 제드의 대답은 깔끔했다.
그렇다고 치지? 이 두 사람은 대화라는 걸 제대로 하는 건가. 걱정하는 게 맞다면 맞다고 하면 되는 게 아닌가.
제드는 루시펠라의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망토를 다시 단단히 어깨에 고정해 주었다.
“정 못 걷겠으면 말해.”
“왜, 안아주게?”
“그래.”
그웨인은 그 모습을 보고 눈치껏 자신이 빠져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빠져나갔다.
아가씨의 안위에 이상이 생겼다면 하인트 공작이 따로 행동을 할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였다.
한편, 루시펠라로서는 네 발로 기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못 걷겠다고 말을 하지 않기로 단단히 결심했다. 그러나 한 발을 내딛음과 동시에 그녀는 돌멩이에 몸이 걸려 휘청했다.
겨우 고정시켰던 망토가 떨어졌다.
그것을 본 제드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허리를 숙여 망토를 주워 들었다.
그러다가 그는 발에 걸린 돌멩이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돌멩이였다. 제드는 재빨리 주워 든 돌멩이를 망토로 가리고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슬쩍 루시펠라를 보니, 그녀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제드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딘 백작은 세간에서 평하는 ‘이드리스 공작가와 황태자에 붙어 멍청하게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 아래로 내려왔을 때 날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평지를 디디자 살았다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때 그웨인이 루시펠라에게 다가왔다.
“마차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마차를?”
루시펠라는 그웨인을 다시 봤다. 이 상황에서 마차를 준비하는 섬세함이 있었다니, 의외였다.
거기서 갑자기 제드가 헛기침을 했다. 루시펠라는 그가 기침을 하든 말든 무시하고 말했다.
“마차는 칼…… 아니, 루이르크 공작 각하를 태우는 게 좋을 것 같아.”
등에 상처가 있는데 말을 타면 상처가 더 심해질지도 모른다.
루시펠라는 그를 걱정하는 마음을 그저 찝찝해지고 싶지 않을 뿐이다, 라며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하지만 그건 아가씨가 타야…….”
그웨인이 제드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등에 상처를 입었으니 말을 몰 수 없을 거야.”
그에 제드가 못마땅한 듯 드디어 입을 열었다.
“기사라면 그 정도는 마땅히 견뎌야 해. 루이르크 공작은 말을 타고 갈 거다.”
제드가 그웨인에게 말하자, 그웨인이 그녀를 데려가려 그녀의 옆에 섰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한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루이르크 각하를 마차에 태워. 그 사람이 내 목숨을 구했다는 말을 하는 걸 깜빡했네.”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하다 다시 냉정을 되찾고 말했다.
“영애가 그 몸으로 어떻게 혼자 말을 몰고 갈 거지? 루이르크 공과 같이 마차라도 탈 건가?”
제드의 말에 루시펠라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그쪽이 날 같이 태워주는 거 아니었어?”
“뭐?”
“그럼 날 혼자 태울 생각이었던 거야?”
그 말에 제드의 눈이 커졌다. 그러다가 그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또다시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웨인은 왜 자신이 하필 또 이때 왔는지, 그는 지금 당장 저 산 입구에 있는 거대한 나무에 머리를 쾅! 쾅! 쾅! 세게 박고 싶었다.
루시펠라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칼리드 루이르크를 마차에 태우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그녀는 이미 제드와 말을 같이 탈 생각이었다.
그가 자신을 혼자 말에 태우지 않을 게 뻔했고, 또 자신 역시 약혼자를 두고 다른 남자와 말을 탈 수는 없었으니.
발에 대해 그렇게 ‘걱정’이라는 것을 했다는 사람이 정작 말은 혼자서 타라고 할 생각이었나? 루시펠라는 제드가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그거야 그렇군.”
정말로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루시펠라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드가 말 앞에서 손을 내밀자 루시펠라는 물끄러미 그 손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그 손을 지탱해 말에 올랐다.
그 순간 루시펠라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칼리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흐트러진 자신의 치마를 정리하는 척하고 그 시선을 피했다.
제드가 뒤이어 바로 말에 올라탔다.
무게가 더 늘어나자 말이 불만스러운 듯 히힝거렸지만, 제드가 고삐를 조여 잡으며 그 불만을 억눌렀다.
“갈기라도 쥐고 있어.”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가 어두움에도 한눈에 보일 정도로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역시 마차를 타는 게 좋지 않겠나?”
루이르크 공작과 단둘이 타는 것은 못마땅했지만, 아무래도 마차를 타는 편이 그녀에게는 더 좋을 것이다.
제드는 이번에 자신이 너무 자신의 위주로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시펠라도, 루이르크 공작도 환자였던 것이다.
칼리드야 알 바 아니었지만, 그 둘이 함께 있어서 못마땅한 마음은 오로지 그의 개인적인 감정일 뿐이이었다.
“아니, 그냥 이대로 출발해.”
“힘들면 도중에라도 마차에 태울 거야.”
루시펠라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드는 한시라도 빨리 도착하기 위해 힘껏 말을 몰까 생각했지만, 그녀가 힘들 것을 생각해 말을 부드럽게 몰았다.
“마을로 가서 쉬는 게 좋겠군…….”
“아니, 도시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루시펠라가 말했다.
“마을이라고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제드는 그 말에 수긍했다. 본성이 있는 주도와는 달리 마을은 사람이 적었다.
혹시 누군가가 뒷정리랍시고 군사를 끌고 오기라도 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도 있었다.
그에 이들은 조금 힘들지만 가까운 마을이 아닌 도시로 향했다.
제드는 자신의 코앞에 위치한 루시펠라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검고 검었기에, 어두워진 밤하늘에 녹아 사라질 것 같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의 머리카락은 어두운 저녁에도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루시펠라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행적을 추적한 결과, 내렸던 결론은 그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그녀를 지키던 기사들의 목이 잘렸고, 그녀는 그 와중에 몸을 피해 산을 올라가 추격전을 벌였다. 게다가 마물에게서까지 목숨을 구했다.
‘이쯤 되면 저번에 살인범에게 살아남았던 것도 우연이 아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자신에게 향하는 루시펠라의 시선을 느끼고 하마터면 말고삐를 놓칠 뻔했다.
그녀가 턱을 들어 올려 고개를 뒤로 젖히곤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행색은 비록 엉망이었지만, 얼굴, 그것도 두 눈만은 깨끗하게 반짝였다.
고개를 젖히며 몸을 뒤로 기울여서인지 그녀의 뒤통수와 앞으로 기울어진 제드의 상체가 닿았다. 그것에 제드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제야 이 자세가, 양팔 사이에 그녀를 가둬 껴안은 미묘한 자세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동그란 머리가 자신의 가슴팍에 기대 있었다.
이상하게 간지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촉감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 깊은 곳을 무언가가 간질이고 있었다.
여태껏 다른 여자들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면 없었다.
남녀 관계란 사실 간단하지 않은가. 필요와 욕구에 의해서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사이.
이성을 만나면 드는 감정이란 이렇다 할 정도로 특별하거나 진중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에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만나면 좋고 아니면 말고. 붙잡고 싶을 정도로 불타오르는 감정도 없었고, 흔한 설렘이라는 감정도 없었다.
그저 조금 짜릿했던 것은, 만나던 이성들과 느꼈던 성적 긴장감 뿐이었다.
그래서 제드는 이런 감정이 낯설었다. 그러나 그는 문득 든 생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자는 전혀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지 않고 있을 것이다. 어쩐지 그런 생각에 심통이 났다.
“왜?”
제드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퉁명스럽게 나갔다. 그것에 기분이 상할 법한데도 루시펠라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나 쫓았던 놈들은 잡았어?”
“쫓았던 놈들은 모두 전멸했어. 그리고 보석을 탈취해 갔던 놈들은 추적 중이다.”
“그렇구나.”
루시펠라는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녀의 눈에는 피로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제드가 딱 잘라 말했다. 그 ‘걱정’이라는 말에 그녀의 눈썹이 살풋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것을 본 제드는 루시펠라의 눈동자가 아름답다 못해 매력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원래부터 얼굴이 예뻤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 그 눈이 매력적임을 깨닫는 게 뭐가 문제겠는가.
그는 원래부터 합리화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방금 그 간질이던 감정도, 저 눈이 예뻐서 그런 것이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감동을 느끼듯 그런 것이다.
“걱정이라니. 내가 걱정을 한다고 생각해?”
루시펠라의 붉은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무슨 말이지?”
“당연하잖아. 그쪽이 있는데 대체 왜? 그러면 그쪽은 무슨 일이 있으면 두 손 놓고 구경할 생각이었어?”
그에 제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두 눈에 서린 것은 굳은 신뢰였다.
제드는 루시펠라가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렇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루시펠라 감정과는 별개로 그를 믿고 있었다.
열 마디의 칭송보다 한마디의 단순한, 신뢰 어린 말.
원래부터 자부심이 넘쳐흐르던 제드였지만, 이 알 수 없는 약혼녀가 자신을 믿을 정도의 삶을 살아왔다는 뿌듯함에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겠지.”
제드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애써 내리고 태연을 가장해 대답했다.
대체 이 사람은 뭐지? 왜 자기가 원하던 행동이나 마음에 쏙 드는 말만 하는 걸까.
제드의 머릿속에 그녀와 티격태격했던 기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심지어 이제 루시펠라의 무례한 말투 역시도 적응된 지 오래였다.
루시펠라는 그의 가슴팍에 기댔던 고개를 다시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아쉬운 일이었다. 다시 그의 시야에는 루시펠라의 자그마한 뒤통수가 보였다. 그에 웃음을 참을 필요가 없어진 제드는 피식 웃었다.
***
루시펠라가 자리에서 제대로 일어나 거동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3일 후였다.
그녀는 돌아가자마자 거의 쓰러지다시피 잠이 들었다.
산에 오른 것도 모자라 마물과 사람들을 피해 추격전을 벌였으니 약하디약한 루시펠라의 몸으로 무리도 아니었다.
뒤처리를 해야 했지만, 우선 그것도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했다.
몇 번 제드가 왔다 간 것 같았지만, 딱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은 남지 않았다.
“나가 봐야겠어.”
침대에 일어난 루시펠라가 멍한 표정으로 말하자 로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자는 이번 일 이후로 아가씨가 하자는 건 다 해주기로 결심한 듯했다.
“아침 식사를 하시겠어요?”
“그래. 방문객들에게도 말을 전해둬.”
그 말에 성내의 시녀 한 명이 재빨리 뛰어갔다. 그것을 다른 이들이 질투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좋은 드레스를 입으세요.”
“싫어. 평소 입었던 거 가져와.”
하녀들의 들뜬 말에 루시펠라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드가 있다고 해서 어여쁜 모습을 아양 떨듯 보여주는 것은 죽어도 싫었다. 게다가 또 한 명의 방문자에게도…….
루시펠라가 고른 것은 자신의 어머니가 입었던 짙은 초록색 드레스였다. 머리 역시 화려한 머리핀으로 치장하기보다는 땋아 내려, 같은 색깔 리본으로 예쁘게 매듭지었다.
거울을 보니 살이 빠져 더욱 갸름해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또 밥을 많이 먹어야겠군.’
대체 어떻게 하면 여기서 살이 더 붙을까. 어찌 되었든 아주 살짝 단련된 체력도 이번에 몸져누움으로써 다시 원위치가 되었다.
루시펠라는 이 손목이 굵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다가 손을 내렸다.
이제 거울을 보며 이질적이게 느껴지던 루시펠라의 얼굴은 적응이 된 지 오래였다. 이렇게 점점 익숙해지는 것일까.
“루이르크 공작 각하는 어떻게 되었어?”
“네?”
루시펠라의 물음에 하녀가 눈을 크게 떴다.
아가씨가 약혼자의 안위부터 물어보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녀는 하인트 공작 각하가 얼마나 멋있게 일을 처리했는지에 대해 말할 준비를 하다가 다소 김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성 한 켠에 방을 마련해 드렸어요.”
“그래?”
하녀가 무언가 더 말을 하려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지만 루시펠라는 눈치채지 못했다.
“여기서 죽으면 내 잘못이 되겠지?”
“무, 무슨 말씀을 하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루시펠라는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생각하며 아래로 내려가자고 말했다. 오랜만에 성안의 레이디가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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