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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26화 (26/173)

#26화 죽이지 않은 이유

2017.05.29.

“그 녀석, 도망간 게 분명해!”

기사 중 한 명이 욕설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마물이 내뿜는 끈끈한 촉수가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도망간 거 아니라니까요!”

에스텔이 검을 휘둘러 그 촉수들을 잘라내었다. 그와 동시에 그것이 뿜어내는 붉은 피가 에스텔의 잿빛 머리카락을 흠뻑 적셨다.

형용할 수 없는 악취가 코끝을 가득 채웠다.

에스텔이 견습 기사였을 때 일어났던 일이다. 마물들이 대규모로 습격해 왔고, 국왕은 왕실에서 기사들을 파견했다.

나라를 지키는 일에 검으로 유명한 가브라인 가의 공자와 비록 정식 기사는 아니었지만 가브라인 공작이 손수 키워낸 에스텔이 파견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사들이 간과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그들의 수보다 마물의 수가 수십 배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도시도, 마을도 궤멸당했다.

왕실까지 지원을 요청하기에 시간은 너무 촉박했으며, 산 하나를 넘으면 위치한 도시의 시장은 이미 지원을 거부한 지 오래였다.

어떤 원조도 얻을 수 없는, 마물들에게 포위되어 버린 기사들.

이들에게 정해진 결말은 하나였다, 검을 들어 최후까지 싸우다 나라를 지키는 별이 되어 여신에게 안기는 것.

에스텔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일행 중에 칼리드는 없었다. 그들이 묵었던 마을이 마물들에게 점령당하던 그때, 칼리드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모두가 칼리드를 비난했다. 그러나 에스텔은 그가 그만의 사정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언제나 사정을 납득시키는 것은 나중이었고, 칼리드는 꼭 사람을 시험해 보는 듯 그런 행동을 벌이곤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녀가 아끼던 검을 수리를 맡기고는 버렸다고 하거나, 그녀가 당했던 따돌림을 방관하는 듯하더니 뒤에서는 그들에게 잔혹한 응징을 하거나 하는 그런 방식.

“지금 이 상황에도 그런 말이 나와? 정신 차려, 에스텔!”

“……아니야!”

“칼리드는 도망쳤어!”

그때 미처 촉수를 보지 못한 어떤 기사의 배가 꿰뚫렸다.

기사는 입에서 붉은 피를 토하며 절명했다. 서른의 기사와 백 명의 병사가 파견되었으나, 그들 중 이제 남은 인간들은 겨우 열 명 남짓이었다.

상황은 누가 봐도 절체절명이었다. 그럼에도 칼리드를 믿는다니,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짓이었다.

그녀 역시 뒷골목을 전전해 봐서 안다. 얼마나 사람들의 배신이 일상적인 일인지, 특히 ‘돈’이나 ‘목숨’이 연관되어 있을 때 사람은 얼마든지 비열해질 수 있는지를.

정말 칼리드를 믿을 수 있겠는가? 마음속의 불안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젠장, 에스텔, 이쪽으로 와라! 어서!”

기사 중 한 명이 에스텔을 뒤로 세웠다. 여자이고 어린 그녀를 살리기 위한 마지막 배려였다.

“특별 취급은 사양이라니까!”

에스텔은 소리치며 호기롭게 검을 고쳐 잡았다. 그러나 마물들의 수는 여전히 많았다.

“칼리드, 이 개자식!”

의심을 하게 만든 네가 나쁜 거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때, 그는 어디 있는가! 에스텔은 울분을 쏟아내며 검을 휘둘렀다.

그에 물컹거리는 마물이 양단되었다. 설마 배신했을 리가 없다. 배신했을 리가 없다. 그 녀석이 배신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자신이 죽어가는데 칼리드는 없다. 그것이 배신이 아니던가.

그때 삐익, 하는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 익숙한 소리에 에스텔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들의 바로 위에 자리한 절벽 위에 칼리드가 말을 탄 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양을 등지고 선 그는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영웅과도 같았다.

에스텔은 그 모습에 잠시 넋이 나갔다. 서로 목소리가 닿지 않을 거리, 칼리드가 미소 지으며 검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숙여.’

그의 수신호였다.

“몸을 숙여요!”

에스텔은 소리치며 허리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화살들이 쏟아져 내렸다.

마치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날카로운 화살들은 좀 전까지만 해도 승기를 잡고 이빨을 드러내던 마물들을 꿰뚫기 시작했다.

화살 비는 한참이나 쏟아졌다. 마물들이 전멸할 때까지.

살육전이 끝나고 고개를 들자, 이쪽으로 말을 몰고 달려오는 칼리드의 모습이 보였다.

칼리드의 시선은 에스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에스텔의 몸 상태를 확인하곤 안도의 한숨을 쉬며 활짝 웃었다.

에스텔은 눈을 크게 뜬 채 칼리드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최후의 순간까지 완벽하게 그를 신뢰하지 못했다. 그는 혼자서 이렇게나 노력했는데, 그녀는 결국 그를 비난했다.

칼리드가 에스텔의 뺨의 상처를 쓸며 말했다.

“얼굴이 조금 다쳤군. 미안, 그땐 정신이 없어서 내 계획을 말하지 못했어. 강 건너에 폐허가 된 다리가 있다는 걸 얼핏 들었거든. 거길 건너서 마지막으로 원군…… 에스텔!”

에스텔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에스텔.”

당황한 듯한 칼리드의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미안, 미안해. 칼리드.”

“……어?”

“잠깐 동안 널 믿지 못해서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

칼리드는 한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얼굴에는 아까와 같은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세상에, 나를 또 못 믿었던 거야? 어떻게 하면 네가 날 믿어줄 수 있지?”

“칼리드.”

“음, 역시 신관에게 맹세라도 해야 하나? 신관의 인장을 다섯 개나 찍어 보여주면 너도 날 믿을 수 있겠지? 아아, 에스텔. 하나뿐인 내 친구에게 이렇게 불신을 당하다니, 난 정말 불쌍한 사람이로군.”

“야, 그건 너도 책임이 있거든?”

칼리드의 능글거리는 말에 에스텔이 빽, 화를 냈다. 그러다 에스텔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졌다.

에스텔 못지않게 엉망이 되어버린 그의 얼굴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 녀석도 필사적이었을 터다.

에스텔은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칼리드의 뺨을 쓸었다.

“괜찮아, 에스텔. 번번이 그 죄책감 어린 얼굴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거든. 뭐, 결국엔 다 잘된 거잖아?”

“야, 너는 내 얼굴이 재밌냐!”

에스텔이 으르렁거리듯 소리치자 칼리드가 안겨 있는 에스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닌가? 에스텔, 나는 너의 그런 얼굴이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

“바보 취급 하지 말라고 했지!”

그에 칼리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그는 여전히 에스텔의 신뢰를 계속해서 흔들었다. 그녀가 시토라 기사단의 단장이 되고 나서도 똑같은 일을 해서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릴 때까지.

그리고 칼리드는 그녀의 신뢰를 배반했다. 그녀를 죽이는 가장 최악의 방법으로.

***

루시펠라는 자신의 앞에 쓰러져 있는 남자의 옆에 꿇어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그의 등에 손을 얹었다. 새하얀 손바닥이 빨간 피로 물들었다.

“이, 미친 새끼…….”

그게 아니잖아. 너 이러지 않았잖아. 몸 바쳐서 모르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면서 이게 무슨…….

아니, 이건 사고다. 딱히 그녀를 구하려고 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칼리드, 칼리드, 정신 차려!”

그는 의식을 잃어버렸는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저 미동하는 몸만이 그가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리닉스의 꼬리에 할퀴어진 상처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거다. 하지만 이대로 피를 흘리다 그는 죽게 되겠지.

“야, 야, 이 자식아!”

루시펠라는 자신도 모르게 황망한 표정으로 그의 몸을 흔들었다. 자신의 이런 행동에 의문을 표할 여유 따윈 없었다.

그러다 루시펠라는 문득 깨달은 사실에 충격을 받고 모든 행동을 멈췄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지금이 칼리드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왜 자신은 지금 그의 이름을 부르고, 정신을 차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고통스럽게 눈을 감은 칼리드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한순간에 품어왔던 모든 감정이 잊혀졌다.

“내가 왜…….”

루시펠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 뒤 입술을 깨물었다.

그를 죽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이대로 일어서서 산을 빠져나가면 된다. 그래, 그렇게 산에서 내려가자.

루시펠라는 몸을 일으켜 등을 돌리며 천천히 그로부터 걸음을 떼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그녀가 다시 숲으로 가려고 할 때, 그녀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누워 있는 칼리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등에 피가 흐르고 있는 상태다. 이대로 가면 죽을 것이다.

루시펠라는 눈을 크게 뜨다 이내 질끈 감고 이내 고개를 저으며 발걸음을 떼려고 했다.

“아, 젠장!”

그녀가 소리쳤다.

아니, 이건 아니다! 이건 제대로 된 복수가 아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칼리드는 심지어 에스텔의 존재도 모른다. 저건 칼리드에게 있어서 ‘사고사’지 ‘복수’로 인한 죽음이 아니다.

게다가 어찌 되었든 칼리드는 루시펠라의 목숨을 구했다. 죽음으로써 온갖 불명예를 뒤집어쓴 기사 에스텔과 달리, ‘가련한 레이디를 위해 희생하는 아름다운 죽음’을 그에게 허용할 것 같은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칼리드는 괴로워해야 한다. 이대로 가면 평생 후회할 게 뻔했다.

이것은 애매한 복수다. 만약, 해야 한다면 가장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할 것이다.

“되살려 놔서, 다시 제대로 죽여 버릴 테니까…….”

루시펠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그에게 뛰어갔다. 다시 그에 앞에 앉은 루시펠라는 날카로운 돌을 찾아서 자신의 속치마를 길게 찢었다.

하얀 면으로 된 재질이라 지혈에 도움이 될 터였다.

효용성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치마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속치마였기에 당연히 깨끗했고, 재질 역시 지혈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길게 찢으면 붕대로도 쓸 수 있을 터였다.

그녀는 칼리드의 너덜너덜한 상의와 피에 흠뻑 젖은 셔츠를 벗겨냈다.

익숙한 그의 상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언제나 여행길에 들고 다녔던 허리춤에 달린 물병도.

‘여전히 준비성이 철저한 녀석이구나.’

그녀는 물병을 열어 천을 적시고 그의 상처를 깨끗이 닦아냈다. 그러곤 다른 천으로 그의 상처를 꾹 눌러 피를 멎게 했다.

천을 몸에 감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루시펠라로서는 그의 몸통을 들어 올릴 힘은 없었으니 이 방법밖에 없었다.

그의 상처를 꾹 누르면서도 루시펠라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누르자, 그의 등에서 나오는 피가 멎었다.

루시펠라는 하늘을 보았다.

이대로 가면 날이 저물기 전에 산에 내려가지 못한다.

그때 칼리드의 몸이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루시펠라는 얼른 천을 떼어내고 칼리드를 내려다보았다.

몸을 움직이자 다시 상처가 벌어져 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가 눈을 떴다. 그는 엎드린 상태에서 환부를 누르고 있던 루시펠라를 보며 물었다.

“내가 얼마나 의식을 잃었던 겁니까?”

“얼마 안 됐어요.”

“그렇군요.”

“붕대를 감아야 할 것 같은데, 몸을 일으켜 주시겠어요?”

칼리드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붕대’의 정체가 루시펠라의 속치마라는 것을 깨닫고 미묘한 표정을 했다.

어깨에 천을 한 번 걸쳐 감고, 두 번째는 그의 등을 있는 힘껏 꽉 감았다.

그의 가슴팍에 붕대를 감으려 손을 가져다 댔을 때, 칼리드와 루시펠라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의식을 잃은 듯 그의 몽롱한 표정은 꼭 그때와 같았다. 루시펠라는 그것에 그의 두 눈을 피해 치료에만 집중했다.

이윽고 그 어색하고 불편한 시간이 끝났다.

“걸을 수 있어요?”

“물론입니다.”

칼리드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찢어진 겉옷을 몸에 매며 말했다.

“곧 해가 집니다. 어서 내려가는 게 좋겠군요.”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리드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칼리드가 그것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부축하시려는 겁니까?”

“그렇게 해야겠죠.”

그녀가 낑낑거리며 말하자 칼리드가 피식 웃었다. 그에 루시펠라의 눈이 커졌다.

가식적인 웃음도, 비웃음도 아닌 그 익숙한 미소. 한순간 다시 예전에 알던 칼리드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묘한 기분에 그녀는 입술 안쪽 살을 꽉 깨물며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입을 열면 울컥해서 무언가 말을 쏟아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 발짝, 한 발짝 발을 디디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부상을 입었음에도 칼리드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잘 따라와 주었다.

“왜 날 죽게 두지 않은 겁니까?”

“네?”

“당신은 절 죽게 놔두는 게 맞을 텐데요.”

루시펠라의 몸이 움찔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꼭 에스텔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던 것이다.

칼리드가 계속 말을 이었다.

“비록 뒤처리를 맡았어도 어찌 되었든 저는 영애에게 위해를 가하는 쪽이 아닙니까?”

“…….”

루시펠라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녀석이 다쳤기에 들었던 여러 생각 때문에, 정작 이 녀석이 어떤 이유로 이곳에 왔는지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벗어났다.

“그건…… 목숨을 빚졌으니까요.”

가장 그럴듯한 대답을 하면서 루시펠라는 이를 깨물었다.

너무나 어리석은 이유였다. 목숨을 빼앗겼기 때문에 복수를 한다면서, 목숨을 얻었기에 이렇게 은혜를 갚는다고 말한다.

“저라면 아마 죽게 두었을 겁니다.”

칼리드는 꼭 그녀를 도발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루시펠라는 정말로 울컥해서 나도 그러고 싶었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자신은 에스텔이라고, 너의 친구였던, 네게 죽임을 당했던 에스텔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입을 다물며 그의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 것으로 대답했다.

“게다가 영애를 구한 건 제가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황태자 전하입니다.”

“네?”

“영애께서는 참 머리가 좋으시더군요. 아까 제게 말한 게 모두 진실이라 감탄했습니다. 저는 그분의 명령을 받은 것뿐입니다.”

갑자기 왜 그가 솔직하게 말한단 말인가. 루시펠라는 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녀석들이 영애의 몸에 손을 대거나 목숨에 위해가 가해질 시 등장하는 역할로요.”

웃으며 말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태연해 루시펠라는 혐오감이 들었다.

황태자 새끼도 참으로 이상한 놈이었다. 그러면서도 왜 이런 말을 대놓고 하는지 궁금했다.

“……지나치게 솔직하다고 생각하진 않으십니까.”

그 적대감 어린 시선에 칼리드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어째서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전하께 대체 얼마나 밉보이신 겁니까? 납치를 해서 수도로 은밀하게 끌고 오라고 할 정도면 상당히 밉보인 모양인데.”

납치? 미친놈 아니야?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칼리드의 입에서 확인받자 어이가 없었다.

루시펠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그녀를 납치하려고 지금 이 짓거리를 벌인 거라고? 겨우 거시기 한 번 차인 거 가지고?

직접적으로 문제 삼긴 쪽팔리니까 이런 음침한 복수를 하는 건가?

공식적인 명분을 얻지 못하고 황태자가 다른 이에게 사주하여 귀족 여식을 해하려 했다는 것을 알면 커다란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여기나 저기나 비상식적인 사람이 넘치는 모양이었다. 얀스가르라고 얼샤와 그리 다른 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영애?”

“아, 실례. 생각 외의 쪼잔함에 놀라서 할 말을 잃었군요.”

“…….”

루시펠라의 말에 칼리드가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더니 그는 미미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왜요, 그쪽의 주인을 욕해서 기분이 상한 건가요?”

“글쎄요…….”

칼리드는 말끝을 흐렸다. 루시펠라가 쳐다보았으나 그는 침묵을 지켰다.

그 후 산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며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시펠라는 지쳐 갔다. 칼리드 역시도 지친 모양인지 몸에 힘이 점점 빠지며 그녀에게 더욱 몸을 기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리드가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 둘 다 죽을 운명이었던 것 같군요.”

루시펠라는 그에 동의하듯 한숨을 쉬었다. 여기저기서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소리가 작은 것으로 봐서 이것은 그때 죽인 리닉스의 새끼들인 것 같았다.

“새끼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요.”

“마물은 혼자서 번식이 가능하니까요. 여기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가 낮은 신음 소리를 흘리며 힘겹게 자신의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나무 사이사이로 노란 눈들이 들이찼다.

아까 잡았던 리닉스보다 크기는 크지 않지만 이들은 모두 성견만 한 크기였다. 무장 해제가 된 것이나 다름없는 자신들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뒤로 물러나십시오.”

칼리드가 루시펠라를 등 뒤로 하고 앞에 섰다.

루시펠라는 이 순간마저도 극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하다하다 이젠 칼리드의 등 뒤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이 찾아왔는데 복수는커녕 그의 등 뒤에서 보호만 받고 있다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기분을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없습니까?”

마침 칼리드가 루시펠라에게 물었다.

그녀는 어떻게 할지 망설였다.

망설임의 시간은 짧았다. 그러나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새끼 리닉스 한마리가 칼리드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붉은 불꽃과 함께 번들거리는 강철이 눈에 보였다. 횃불이었다.

그와 동시에 남자들의 고함 소리와 더불어 치열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째지는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들리며 피비린내가 훅 끼쳤다.

루시펠라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사람들이다, 도와줄 사람들이 나타났다! 루시펠라는 희열에 찼다.

으아아아아앙!

그러나 리닉스의 울음소리가 그것을 비웃듯 바로 등 뒤에서 들렸다.

루시펠라와 칼리드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덩치 큰 리닉스 한 마리가 몸을 낮춰 그들을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칼리드가 루시펠라를 뒤로 끌었다. 그러나 지금 이 거리는 리닉스의 공격 범위 안에 들어 있었다.

한 번 도약만 하면 싸우고 있는 남자들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갈기갈기 물어뜯길 것이다.

루시펠라가 발을 내디뎌 칼리드의 앞에 섰다.

기사가 타인을 지키는 것은 습관과도 같아서 위험에 처해 있는 상황에 그녀는 남을 보호하는 그 자세에 익숙했다.

리닉스가 도약할 때 루시펠라는 그것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때, 은빛 섬광이 번뜩였다.

별안간 한 남자가 뛰어 들어와 엄청난 힘으로 리닉스의 몸을 양단했다.

“영애.”

남자가 든 검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루시펠라와는 달리 억울할 정도로 깔끔한 옷을 입은 남자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환한 횃불의 불빛이 그의 얼굴을 밝혔다.

그 갑작스러움에 그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불꽃을 품어 붉게 타오르는 듯한 적갈색 눈동자가 눈에 보였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그렇게 또렷한 존재감을 가지고 서 있었다.

제드, 제더카이어 하인트. 그녀의 약혼자가 이곳에 온 것이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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