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원치 않은 동맹
2017.05.25.
루시펠라는 바로 자신의 뒷머리에 닿은 그의 가슴팍을 느끼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잊어버렸던 분노가 왈칵 밀려왔다. 거의 끌어안기다시피 그에게 붙잡혀 있는 것이었다.
“지금 나가서 움직이면 리닉스가 눈치챌 수도 있습니다.”
“…….”
왜 단검이 자신의 손에 없는가. 루시펠라는 그것이 너무나 아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칼리드를 죽일 기회가 있다는 것이 아님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가만있어야 한다는 게 견딜 수가 없었다. 이미 마물의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절 기억하고 있으셨길 바랍니다. 칼리드 루이르크입니다.”
“…….”
차라리 소리를 질러 둘 다 죽어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루시펠라는 입을 벌리려 했지만 입을 막은 칼리드의 힘이 더 세졌다.
“지금 소리 지르면 둘 다 죽습니다.”
“…….”
발버둥 쳐도 되지 않는다. 루시펠라는 초인적인 힘으로 이성을 되찾으려고 했다.
개죽음. 그래, 맷시와 다른 이들의 희생이 개죽음이 된다. 이렇게 따지면 칼리드에게도 진정한 복수는 이뤄지지 않는다. 이런 어리석은 방법으로 죽게 둘 수는 없다.
그런 생각에 루시펠라의 빨라졌던 호흡과 몸에 들어갔던 힘이 쭉 빠지자 칼리드 역시 손에 힘을 풀었다.
“소리 지르지 않는 겁니다.”
확인하는 칼리드의 어조에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손이 떼어지고 루시펠라는 숨을 쉴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닉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것의 입에는 이미 희생자로 보이는 남자가 입에 물려 있었다. 그는 남자의 머리를 물더니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 잔인한 모습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쩝쩝거리며 모든 것을 섭취한 리닉스는 코를 킁킁거리며 주변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숨어 있는 사람이 있는 건가 찾는 것이다. 루시펠라는 아차 싶었다. 아까 도망가면서 단도로 제압한 인간의 팔을 그어버렸던 탓에 피 냄새가 묻어 있었다.
킁킁거리며 마물의 전신이 보였다. 뾰족한 귀, 입 아래로 돌출된 날카로운 송곳니는 피와 타액이 섞여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녀석의 커다란 노란 눈동자가 이리저리 돌아가고 있었다. 리닉스의 갈고리가 달린 꼬리가 쉴 새 없이 땅을 탁, 탁, 쳤다.
루시펠라는 욕설을 내뱉었다. 일부러 마물에 대한 소문을 퍼뜨렸다더니 정말로 마물이 살고 있었을 줄이야.
하긴, 오랜 세월 동안 인간들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 마물이 없으라는 법은 없었다.
우아아아앙!
째지는 듯한 비명 소리로 리닉스가 꼬리를 흔들며 루시펠라와 칼리드가 숨어 있는 수풀 쪽으로 다가왔다.
루시펠라와 칼리드는 숨을 죽였다. 리닉스가 다가와 킁킁 수풀의 냄새를 맡았다. 리닉스의 코가 루시펠라의 바로 위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녀는 이대로 리닉스가 입을 열어서 그녀의 허리를 두 동강 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물이 에취! 하고 재채기를 했다. 그는 불쾌한 듯 고개를 들어 수풀을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공격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루시펠라가 의도한 대로, 이들이 숨어 있는 수풀은 리닉스가 가장 싫어하는 특유의 향기가 있었다. 숲의 여행자나 마물을 상대로 하는 기사들에게나 알음알음으로 전해졌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는 사실이었다.
리닉스가 불만스럽게 그 수풀을 보고 등을 돌려 사라졌다.
“하아.”
루시펠라와 칼리드는 아주 조심스럽게 굳어 있던 몸을 풀었다.
“우릴 눈치챘습니다.”
“알고 있어.”
루시펠라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칼리드에게 존대를 써야 한다는 의식조차 없었다.
이 산에 저 마물이 지배하는 곳이라면, 루시펠라와 칼리드는 산에 무사히 내려갈 수 없다. 그 특유의 후각으로 리닉스는 그들을 추격해 올 것이다.
“저 똑똑한 마물이 이 수풀을 어떻게 할 생각부터 하겠군요.”
그녀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돌을 공처럼 굴리는 것을 좋아하는 리닉스의 특성상, 동그란 바위를 꼬리로 옮겨 이쪽으로 던지거나 아니면 거대한 나무를 던져 수풀 속에 숨어 있던 자신들을 죽일지도 모른다.
기다린다는 방법이 있긴 했으나, 리닉스는 인내심이 없어 그런 시간 싸움을 싫어했다.
“이젠 괜찮을 것 같군요. 나갑시다.”
리닉스의 기척이 사라지는 것을 눈치챈 칼리드가 루시펠라 쪽을 바라보았다. 루시펠라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수풀을 벗어나 리닉스가 사라진 곳의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제드가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보고 내뱉은 말이었다.
운반하는 일꾼들의 목이 잘려 있었고, 보석의 원석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들은 보석 강도에게 습격당한 것인가?
아니, 그렇게 번거롭게 할 이유가 있을까. 무력이 차이가 난다면 그냥 원석만을 가져가면 될 일이었다. 아직 세공되지 않은 원석은 팔기가 더 쉬우니 더욱 그러했다.
“이, 이게 무슨!”
그웨인과 기사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호위를 나갔던 기사들의 모조리 몰살당한 뒤였다. 심지어 이들은 제대로 저항한 흔적도 없어 보였다.
“형편없는 기사들이니 이 모양이지.”
제드가 가차 없이 말했다. 그러곤 굳은 얼굴로 시체를 바라보다가 말 발자국이 찍힌 경로를 바라보았다.
말 발자국이 깊고 진하게 찍힌 것으로 보아 말을 몰았던 사람이 꽤나 급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드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내가 이렇게 있는데도, 황태자 새끼가 이런 짓을 꾸몄다는 거지.’
그의 이가 으득 갈렸다.
마물을 토벌하러 떠나기 전 그는 이오지프의 호출을 받았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기사훈련장에 핀 제비꽃’이라는 극악한 제목의 책이 들려 있었다.
“이상하지 않아? 루이르크 공작은 어디로 사라졌고, 폐하가 금족령을 내리시기 전까지도 황태자 전하는 검은 머리 여자를 괴롭히기에 여념이 없으셨지.”
“안 이상해.”
“형님이 집요하다는 걸 생각하면 조금 더 생각해 봐, 제드. 형님과 아이딘 영애와의 사이에 무슨 일은 없었던 거야? 너도 알잖아. 검은 머리 여자만 잡아서 괴롭혔던 건 아이딘 영애를 겨냥한 거라고.”
“…….”
제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그 역시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렇게 어리석기야. 어떻게 백작 영애에게 황태자가 손을 대지?”
“형님은 사실 겉으로만 똑똑해 보이지, 지나치게 어리석어. 형님이 진짜 똑똑했다면 말이야…….”
“…….”
“나를 먼저 죽였겠지.”
이오지프의 입에 삐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그 말만큼 설득력이 있는 말은 없었다.
“루이르크 공작의 행적을 발견했어. 아이딘 백작령으로 가는 마을 중 하나에서 묵었나 보더군. 이제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겠어, 제드?”
제드는 바로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아니겠지, 설마 아니겠지.
아니, 사실 아이딘 백작 영애가 위험에 처하더라도 무슨 상관인가. 설마, 황태자가 정말로 영애를 죽이기야 하겠는가?
그러나 그는 황태자가 때때로 얼마나 분별없이 행동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현 황후에게도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그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초조한지 몰랐다. 말을 달리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루시펠라가 어째서인지 맴돌았다.
이 여자에게 사랑이라도 느끼는 걸까? 그건 아니다.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건 뒷수습을 해준다고 했으니 응당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계속 그렇게 되뇌었고 길을 서둘렀다.
수치스러워서라도, 심지어 자신을 쉽게 보지 않아서라도, 이딴 짓까지 벌일 줄은 몰랐다. 질 낮은 도발은 일일이 상대하지 않을 생각이었고, 앞으로의 일을 위해 참고 넘기려고 했다. 그런데 황태자라는 새끼가 감히 자신의 약혼녀를 건드려?
그는 칼리드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기사의 명예도 없는 새끼, 레이디에게 해를 가하라는 황태자의 명령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야말로 황궁의 개다운 행동이었다.
혐오감과 분노를 씹어 갈기며 그는 영지로 향했다. 주도 코노트의 그 평화로운 정경에 제드는 잠시 동안 진정했다. 분명 루시펠라가 특유의 표정으로 왜 왔냐고 물어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이런 것이었다.
그가 흩뿌리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하인트 공작가의 기사들과 아이딘 백작가의 기사들이 절로 부들부들 떨었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태세였다.
한참 동안 말발굽을 추적하던 제드는 그것들이 전부 산의 입구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딘 백작령에 있는 두 개의 쌍둥이산 중 마물이 나온다던 왼쪽이었다.
“여긴 마물이 나오는 곳입니다.”
마물이라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제드는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딘 백작가의 기사들은 그것에 서로 불안하게 눈빛을 교환했다.
그는 산의 입구에 풀어져 있는 말들을 바라보았다. 추적자들 역시 여기서 말을 풀어놓고 루시펠라를 쫓아간 듯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말에서 내려 산을 올랐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서늘한 검이 번뜩이고 있었다.
뒤를 따르라는 명령조차 없었지만 하인트 공작가의 기사들이 당연하다는 듯 그를 따랐다.
그에 눈치를 보던 그웨인과 기사들 역시도 따라 들어가기 시작했다.
해가 곧 질 모양인지 붉은 석양이 산에 드리워졌고, 기사들은 산의 음울한 분위기를 느끼며 불안한 듯 눈을 굴렸다.
군홧발 소리가 사람들이 없던 산을 침범하여 발자국을 남겼다. 어느 정도 산에 올라가던 그는 한 인영을 발견했다.
“맷시님!”
그는 나무에 기대 있었다. 반쯤 감긴 눈에 흰자위가 보이는 게 한눈에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제드가 물었다.
“누구지?”
“영지의 관리인입니다.”
제드가 걸어가 모습을 확인했다. 맷시는 미약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배에 보이는 창상으로 보아 복부를 검에 찔린 듯했다.
제드가 눈짓하자 버나드가 그에게 약을 먹였다. 신관의 가호가 들어 있는 약을 먹이자 그의 몸에 따스한 기운이 돌아왔다.
그러곤 이내 정신을 차린 듯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아, 아가씨. 아가씨가……!”
“영애가 어디 있지?”
제드의 물음에 맷시가 굳은 혀를 움직이며 말했다.
“저기…… 저 위로, 저 위로 가셨습니다. 아가씨…… 좀, 아가씨 좀 제발!”
제드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를 보니 곧 질 것 같았다. 그러기 전에 꼭 찾아야 한다. 바람이 훅 불어왔다. 기분 탓일까, 피 냄새가 느껴졌다.
***
“아무래도 쫓기는 것 같군요.”
칼리드가 말했다. 루시펠라 역시 그 점에 동의했다. 아기 울음소리가 저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고 있었다.
“알고 있어요.”
루시펠라가 대답했다.
“이젠, 저에 대한 예의를 지켜주시는군요.”
“예의?”
“아까부터 말을 굉장히 짧게 하시고 있지 않으십니까.”
그 말에 루시펠라는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칼리드에게 편한 말투를 당연하게 쓰고 있었다. 칼리드는 그 말투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루시펠라는 기이한 서운함과 더불어 불쾌함을 느꼈다.
“목숨을 겨우 건진 사람에게 그렇게 격식이 필요했나 보죠? 생각보다 격식을 따지신 분인가 봅니다. 격식을 차리지 않아서 이곳의 기사가 된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루시펠라가 툭 내뱉는 경멸의 말에 칼리드의 얼굴에 가식적으로 서려 있던 호의가 사라졌다. 그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누가 그쪽의 목숨을 구하고 있는지 알고 계신다면, 입은 다무시는 게 현명할 텐데요.”
“감사는 제가 황태자 전하께 해야 하겠죠. 이 빌어먹을 상황에 처하게 한 게 황태자 전하 아닌가요?”
그 말에 칼리드의 싸늘한 시선이 루시펠라에게 향했다. 루시펠라는 그가 전혀 무섭지 않았다.
“내가 그쪽이 왜 이곳에 있냐고 안 물어보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나요? 아, 또 바보 취급하셨으려나. 아무리 봐도 황태자 전하의 작품인데, 황태자의 개라는 그쪽까지 있으니 더 의심할 여지도 없군요.”
루시펠라는 이죽거리며 말했다. 맷시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녀는 칼리드 가브라인이 어떻게 칼리드 루이르크가 된 것인지, 세세하지는 않지만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얀스가르 황궁의 개라고 불렸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황태자의 개였다. 황태자에게 들러붙어, 훗날 황제가 된 황태자로부터 약속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떠맡은 남자가 바로 자신의 친우였던 이자였다.
“그쪽은 아까 인간들 뒤처리를 위해서 온 거죠? 마물이 대신 처리했으니 참 편하시기도 하겠네요. 아니, 마물에게 할 일을 빼앗겼으니 아까운 건가?”
그녀가 차갑게 빈정거렸다.
“말을 가려 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 나직한 경고의 음성에도 루시펠라는 입을 열었다.
“부정할 생각은 아니라는 거겠지? 여자 하나 납치하느라 참 고생이시군요. 얼샤 기사의 명예란 고작 다 그렇게 형편 없…… 윽!”
루시펠라는 목을 틀어쥐는 느낌에 얼굴을 찌푸렸다. 칼리드가 그녀의 멱살을 쥔 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한낱 레이디의 입에서 기사의 명예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녀가 이제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서늘한 음성이 머리를 두드리는 것 같았다. 칼리드의 눈빛이 더없이 위협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두 눈에 짙게 서린 살의를 발견하자, 루시펠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대가 함부로 말할 게 아니란 말이지.”
칼리드는 여차하면 그녀를 죽일 것이다. 어둡게 가라앉은 두 눈을 보며 그녀는 몸을 움찔했다.
루시펠라의 머릿속에 위험 신호가 퍼졌다. 그녀는 지나치게 방심하고 있었다. 칼리드가 루시펠라인 자신을 죽일 거라는 생각 따윈 하지 않았던 것이다.
멱살을 틀어쥐는 손을 보고 그녀는 무력함과 더불어 모멸감마저 느꼈다. 이딴 일을 당하는데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또다시 저 새끼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니, 어떻게 이렇게 불합리할 수가 있는가.
게다가 왜 루시펠라는 칼리드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고 또 믿고 있었는가. 그녀는 이를 뿌득 갈며 말했다.
“자기보다 약한 놈 명줄 틀어잡고, 재밌지? 얼른 죽이지 않고 뭐 해? 황태자 전하께서 내 육신은 그대로 남겨두라고 하셨어?”
멱살을 틀어쥐는 손이 더욱더 강하게 그녀의 목을 옥죄었다. 저 녀석에게 잠시나마 두려움을 품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칼리드를 노려보는 그녀의 두 눈이 새파랗게 타올랐다.
그녀를 싸늘하게 바라보던 칼리드가 그녀의 눈동자를 보더니 흠칫했다. 갑자기 목을 조르는 힘의 강도가 약해졌다. 그러다 그의 손이 루시펠라의 목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숨을 쉴 수 있게 되자 루시펠라는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시야가 흐릿하고 눈에는 반사작용으로 눈물이 흘렀다.
“쓰레기 같은 새끼.”
기침을 다 하고 호흡을 겨우 고른 루시펠라가 씹어뱉듯 말하자, 칼리드의 눈동자가 대번에 다시 서늘해졌다.
에스텔은 칼리드의 눈동자가 항상 따스한 보랏빛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가 이렇게나 차가운 빛을 띨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리닉스에게 던져 주기 전에 입 닥쳐.”
“입으로 나불댈 시간이 그렇게 많나 봐? 리닉스에게 던져지는 건 그쪽인 것 같은데?”
루시펠라가 목을 매만지며 말했다.
기묘한 배신감과 더불어 분노가 계속해서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저 녀석이 저런 쓰레기였다니. 항상 에스텔에게 웃어주었던 모습은 역시 허상이었던 건가.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루시펠라는 칼리드를 뒤로하고 걸어갔다. 칼리드가 따라오든 말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칼리드 혼자서 리닉스를 죽이는 건 무리였다.
에스텔인 그녀와 같이 협공을 한다면 모를까. 마물에게 붙들리면 둘 다 죽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죽는 거 저 자식에게 끌려 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때였다.
우에에에에에엥!
소름 끼치는 리닉스의 울음소리가 다시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루시펠라와 칼리드는 동시에 위를 바라보았다. 돌로 깎은 절벽 위, 리닉스가 그들을 보며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언제 여기까지! 쫓아올 줄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따라잡힐 줄은 몰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절벽은 뛰어내리기 높은 곳이다.
저 녀석이 내려오기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루시펠라와 칼리드는 어떤 신호도 주고받지 않고 동시에 냅다 뛰었다.
나무가 없는 평지가 눈에 띄었다.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그 평지를 감싸는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평지에는 꽃이 피어 있었다. 루시펠라와 칼리드는 그것을 보고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꽃의 향기는 일시적으로 리닉스의 후각을 마비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꽃밭은 평지라 검을 휘둘러 공격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산지에 사는 리닉스의 변칙적인 움직임도 평지에 가면 단순화되기에 동선을 파악하기도 쉬웠다.
그들이 긴장하는 순간, 얼마 지나지 않아 리닉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애오오오옹!
앙칼진 울음소리와 함께 리닉스가 매서운 속도로 뛰어왔다.
루시펠라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아직도 피가 묻어 있었다. 아까처럼 들킬 확률이 높았다. 이젠 끝이다.
루시펠라는 눈을 감았다 천천히 뜨고 칼리드 쪽을 바라보았다. 칼리드 역시 등 뒤로 다가오는 리닉스의 기척에 정신을 집중하다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둘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루시펠라는 자신도 모르게 리닉스 쪽으로 눈짓하며 자신을 가리킨 뒤 리닉스를 가리켰다.
어찌 되었든 이곳은 평지다. 검을 휘두르기에 이보다 최적의 장소는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미끼가 되는 편이 나았다. 그녀가 미끼가 되어 리닉스의 목을 치면 된다.
사실 이것은 검사 둘이 이루어야 하는 협공이었지만 어찌할 수 없다. 그녀는 무력이 안 되니까. 사실 이렇게 서 있는 것도 기적적인 일인 것이다.
루시펠라는 엄지손가락으로 리닉스를 가리키고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내가 유인할 테니, 너는 저놈의 뒷목을 내려쳐.’
요약하자면 조금 전 그녀가 보냈던 것은 그런 수신호였다.
확인하듯 칼리드를 바라보자 칼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그는 무엇을 깨달은 듯 놀란 표정으로 루시펠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땐 이미 루시펠라가 뛰쳐나간 뒤였다.
꽃밭의 평지로 뛰어가던 루시펠라는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리닉스를 보았다.
분명 저 나무 너머에 있었는데 어찌나 속도가 빠른지 금세 지척에 다가왔다.
번뜩이는 송곳니가 눈에 들어왔다. 발톱이 그녀에게 바로 내려쳐졌다.
천운일까, 그녀는 가까스로 그놈의 발톱을 피했다. 대신 그녀는 굴러야만 했다.
그러다 그녀는 칼리드를 보았다.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는…….
칼리드가 서 있는 자리에 칼리드는 없었다. 설마, 자신이 지금 미끼로 남겨진 건가?
루시펠라는 순간 아연했다. 그 짧은 순간 대체 무엇을 믿고 칼리드에게 공격을 지시했던 것인가! 그 배신자 놈에게! 그녀가 후회하던 순간이었다.
캬옹!
리닉스의 목을 꿰뚫고 검이 나왔다. 루시펠라는 눈을 크게 떴다. 칼리드가 내던진 검이었다.
이 새끼가 지금 멍청하게! 어떻게 무기를! 자신의 상처에 발버둥 치는 리닉스를 피하려고 할 때였다. 별안간 꼬리가 그녀에게 휘둘려졌다.
윽! 이 속도는 최소 내장 파열이다!
이렇게 죽는구나. 눈을 질끈 감을 때, 누군가가 그녀를 끌어안고 몸을 땅으로 던졌다.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살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워낙 밀었던 힘이 커서인지 그녀와 그 사람은 데굴데굴 굴러야만 했다. 루시펠라는 자신을 구해준 이를 보았다.
칼리드가, 칼리드가 자신을 구했다. 쓰러져 있는 그의 등에는 날카로운 꼬리의 갈고리가 스쳐 지나간 붉은 상흔이 남아 있었다.
“칼리드!”
루시펠라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