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24화 (24/173)

#24. 추적

2017.05.22.

어쩐지 느낌이 안 좋더라니, 루시펠라는 이를 악물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익숙하고도 오싹한 느낌에 뒤를 돌아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상단 녀석들이 서로 눈짓을 하며 허리춤에 매달린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그때부터 루시펠라는 일이 잘못되어 감을 느꼈다.

저 상단이 오랜 거래처이며 얀스가르의 유명한 상단이라는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숨을 몇 번이고 되살렸던 것은, 그러한 종류의 지식이 아니라 그녀의 직감이었으니.

“아가씨!”

맷시가 뒤에서 그녀를 부르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기사들이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각자 살아남는 것은 그들의 몫이 아니던가. 자신의 생존이 달린 판에 못 미더운 기사들에게 목숨을 내맡길 수는 없었다.

루시펠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들이 칼을 들고 소리치며 그녀를 쫓아오고 있었다.

기사들과 그녀를 따르던 하녀는 이미 목숨을 잃은 지 오래였다.

이 새끼들, 보석만을 노린 강도가 아니었어. 노리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역시 다수의 기사를 대동했어야 했다. 거래의 신뢰도 문제 때문에 적은 기사들을 데려와서는 안 되었다.

보석 역시도 그렇다. 원석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어떻게 된 건지는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원석을 가지고 마을에서 도시로 돌아가는 것은 그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오로지 그녀만이 이들에게 경계를 풀지 않았던 것이다.

‘마차에 타지 않길 잘했어.’

마차에 찝찝해서 마차에 안 올랐던 게 그나마 다행이다. 그녀가 마차에 탔으면 그녀는 무력하게 마차에서 살해당하거나 어딘가로 납치되었을 게 뻔했다.

“아가씨! 말은 제가 몰겠습니다!”

맷시가 소리쳤지만 루시펠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맷시가 그녀보다 더 말을 잘 몰 리가 없다.

두 사람을 태운 말의 속도는 루시펠라가 아무리 가벼워도 자연히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추격자들이 모는 말의 발굽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러다가 루시펠라는 마물이 있다는 왼쪽 산을 보았다.

어떻게 할까.

망설임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루시펠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차피 죽긴 매한가지였다. 나올지도 모르는 마물보다는 저기 칼을 들고 루시펠라를 노리는 저놈들이 그녀에겐 훨씬 위협적이었다.

루시펠라가 고삐를 내려치며 말을 더욱 세게 몰았다. 말이 위급함을 짐작하듯 속도를 다시 올려 산속으로 향해 갔다.

“아가씨, 거기는!”

맷시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맷시에게 답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느냐였다.

그녀는 절묘하게 말을 몰아 좁은 길로 들어섰다. 루시펠라는 등 뒤에 추격자가 있는지 확인했다. 마물이 있다는 산 위를 망설임 없이 올라갔기 때문인지 추격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루시펠라는 능숙한 솜씨로 말고삐를 틀어쥐며 말을 세워 말에서 내렸다. 나무가 빽빽하게 있는 곳에 들어왔기에 말에서 내리는 데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말의 엉덩이를 차 말을 산 아래로 내려보내며 말했다.

“산 아래는 저 녀석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경도 알고 있겠지?”

“…….”

맷시는 침묵하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말을 모느라 몸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쓰러지면 죽는다.

그것을 알기에 그녀는 초인적인 힘으로 서 있을 수 있었다. 며칠 전부터 계속 단련해 오지 않았으면 금방 쓰러져 죽었을지도 모른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루시펠라는 얼굴의 생채기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대로 숨어 있을 곳을 찾아볼까요?”

“일단 그렇게 해야 하는 게 최선의 방법인데, 그냥 숨어 있으면 발각될 가능성이 커. 사람들이 들어온 흔적이 없어서 우리가 걸어온 흔적이 다 남았을 거야.”

“…….”

“마물 때문에 저놈들이 머뭇대는 것도 잠깐이야. 저놈들은 보석이 아니라 날 노리고 있을 테니까.”

“아, 알고 계셨습니까?”

“보석 강도라면 그냥 보석만 들고 가면 되었을 테니까. 그럼에도 날 쫓아오는 걸 보면 노리고 있는 건 나일 거야. 그리고 대형 상단으로 위장했다는 건 그만큼 준비가 철저했다는 뜻이고. 철저한 만큼 더욱 집요할 테지. 한낱 보석 도적이 저지를 일은 아니야.”

루시펠라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사실 루시펠라의 태도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겁 많은 레이디가 분석하기에는 지나치게 냉철한 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맷시는 이 상황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심지어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 아가씨에게 판단을 미루고 있었다. 나중에서야 안다면 혀 깨물 일이었으나, 그 역시 이러한 상황은 처음이었고 당황한 상태였다.

“저 산을 넘어가 봤자 저긴 강이 흐르고 있으니 개고생만 하고 퇴로는 없는 상황이니까…….”

“……버텨본다면 되지 않을까요? 분명 우리가 돌아오지 않으면 기사들이 올 겁니다.”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기사들이 빨리 움직일까?”

그에 맷시의 얼굴이 굳었다.

기사들은 전부 평화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런 그들이 위험을 감지하고 오는 것이 가능할까?

일분일초가 급한 이때 기사들이 빠르게 올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힘들었다.

“그때그때 도망갈 수밖에 없어. 마물에게도, 사람에게도. 살아 있으려면 말이야.”

그때, 위협적인 사내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루시펠라는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추격자들이 근처로 오고 있었다.

어두운 산속, 지리를 모르는 것은 루시펠라도 저 침입자들도 마찬가지다. 단지 저들은 지나치게 자만하고 있었고, 이들이 간과한 것은 루시펠라의 안에 에스텔이 있다는 것이었다.

“자, 다시 숨바꼭질을 시작하자.”

루시펠라는 미소를 지었다.

***

“좀 늦으시는군.”

기사 중 한 명이 말했다. 거래를 위해서 마을을 떠났는데 귀환 예정 시각이 늦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겠냐마는 어딘가 찝찝했다.

“역시 따라가는 게 좋았을까?”

금발 기사의 말에 검을 다듬던 기사가 답했다.

“맷시 경께서는 호위를 최소한으로 줄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오랜 거래 상대에 아가씨가 있다고 기사를 너무 늘리는 것은 상대에게 불쾌감을 준다. 중요한 상단과의 거래이니만큼 이러한 점 하나에도 주의해야 하기에 따른 기사는 다섯 명뿐이었다.

하지만 아가씨의 안전을 위해서 조금 더 욕심을 부려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작 아가씨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단장인 그웨인도 나서지는 않았기에 가만있었으나 역시나 나서는 게 나았다고 생각했다.

“에이, 뭐, 큰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냥 아가씨만 끼어든 것뿐인데요.”

“그러겠지.”

맷시의 예상대로 이들은 위급 상황에 대해 어떠한 경각심도 없었다. 만약 걱정되어 마을로 갔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거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거래를 망칠 수도 있다. 또는 나중에 질책을 당할 우려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다, 단장님!”

“무슨 일이지?”

기사들의 휴게실에 뛰어온 것은 집사 야민이었다. 그 경악의 얼굴에 그웨인은 역시나 무슨 일이 벌어졌나, 뛰어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주인 백작과 맷시가 없으면 자연스럽게 성의 관리는 그웨인과 야민이 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야민이 대경할 정도라면 무언가 큰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다.

“바, 방문자가, 방문자가 오셨습니다.”

“방문자? 하하! 설마 황제 폐하라도 오신 건가? 꼭 표정이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정말로 놀랄 일이긴 한데. 그웨인의 실없는 농담에도 야민은 웃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폐하가 아닙니다.”

“폐하가 아니면 누군가. 대체 누가 방문한 거지?”

야민은 숨을 크게 고르더니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하인트 공작 각하 말입니다. 하인트 공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뭐?!”

기사들의 표정이 모두 변했다.

하인트 공작! 제더카이어 하인트! 전장의 흑사자, 불세출의 기사가 아니던가!

제드를 직접 볼 수 있는 수도의 사람들과는 달리 이곳 지방의 기사들은 제더카이어 하인트를 언제나 이야기로만 접했기에, 이 순박한 지방 기사들에게 제드는 거의 군신(軍神)과도 같았다.

그들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옷차림을 점검했다. 기사 중의 기사인 그에게 허술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사들이 전부 하인트 공작이 있는 곳으로 뛰쳐나갔다. 그를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들이 건물 바깥으로 나가자, 마침 하인트 공작이 다수의 기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성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그들이 기대한 것 이상이었다.

털에 윤기가 흐르는 거대한 흑마. 그 흑마 위에 올라탄 탄탄한 몸을 가진 남자는 상당한 미남이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청동색 머리는 분명 오묘한 빛깔이었고, 그 적갈색 눈동자는 눈빛으로도 사람을 벨 것처럼 날카로운 예기가 서려 있었다.

기사들이 보이자 하인트 공작은 말을 멈춰 세웠다.

그웨인은 거의 감격에 차 제드에게 다가갔다. 분명 제더카이어 하인트는 겨우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였지만 어딘지 사람들을 꼼짝 못 하게 하는 특유의 위압감이 존재했다.

하인트 공작은 말에서 내린 뒤 주위를 둘러보며 한마디 했다.

“영애는?”

“네?”

그웨인은 자신이 가장 멍청한 대답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라는 대답은 아무리 기강이 해이하더라도 기사가 하면 안 되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품위가 떨어져 보이기 때문이다.

주군이 무언가 명령을 하달했을 때, ‘네?’라고 되묻는 기사가 있다면 얼마나 한심하겠는가!

그러자 하인트 공작이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이딘 백작 영애를 말하는 거다.”

“아, 네!”

생각해 보니 하인트 공작은 아가씨의 약혼자였다. 약혼녀를 만나러 이곳으로 찾아온 모양이었다.

“상단과 거래를 위해 마을에 갔습니다.”

“언제?”

“가신 지 꽤 되었습니다.”

“언제 돌아오지?”

“보통은 한 시쯤입니다만.”

“지금은 몇 시지?”

“두 시 반입니다.”

하인트 공작은 허, 한숨을 쉬며 그웨인을 보았다.

“기사는 몇이 따라갔나.”

“다섯입니다…….”

“영애가 직접 감에도 호위가 다섯 명뿐이라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어보자, 그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간신히 대답했다.

“네, 그렇지만 그건 거래를 위해서…….”

“돌아올 시간이 지났음에도 경들은 무엇을 하는 거지? 주군을 위험에서 지키기 위해서 경들이 있는 게 아닌가?”

“…….”

그러자 그들 또한 할 말이 없었다. 제드의 말이 구구절절 다 옳았기 때문이다.

“형편없군.”

제드가 씹어 내뱉는 말에 기사들이 충격을 받은 듯 얼어 있었다. 그러곤 자신들의 아가씨가 떠올랐다.

아가씨가 처음 연무장을 방문했을 때 제드와 똑같은 표정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나 한심한 것일까? 기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제드가 앞에 있는 그웨인 경을 보고 말했다.

“어서 안내해.”

공작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그웨인은 무언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다.

***

루시펠라와 맷시는 발소리를 죽이며 산속을 이동했다.

굽 높은 구두는 별로라 편한 구두를 고집하길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이 돌산을 맨발로 다녀야 할 뻔했다.

“마물은 없는 건가? 왜 보이지 않지?”

“그게…….”

맷시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아마 마물은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적어도 마물에 관해서는 안심해도 된다는 소리입니다. 더 이상은 묻지 말아주십시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루시펠라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마물이 없다니? 맷시는 꽤나 확신 있는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마물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거짓이라는 걸까. 루시펠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이 부분은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았다. 일단 살아남으면.

루시펠라는 쓸데없이 풍성한 치마를 잡으며 몸을 낮추고 걸었다. 산을 익숙하게 타는 감각은 남아 있었지만 쉽게 떨어지는 체력이 문제였다. 그녀는 벌써 피로함을 느끼고 있었다.

“맷시 경도 여기 이 산세에는 별로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지?”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이곳은 마물의 출몰이라는 이유로 봉쇄된 지 꽤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마물이 있다는 소문은 일부러 퍼뜨린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맷시의 기세를 봐서 더 물어봐도 대답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소리를 낮춰야 했기에 이 둘은 그 후론 말없이 숨을 곳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도 초행이고 저들도 초행이기에 사고의 흐름을 역전할 만한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쪽이 생각하는 것은 저쪽도 생각한다. 그 기본적인 생각을 간과하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이다.

“여긴, 나밖에 못 지나가겠는데?”

나무 사이가 지나치게 좁아서 남자인 맷시가 들어가기엔 비좁았다.

“돌아서 다른 곳을 찾아보자.”

“아가씨.”

루시펠라의 말에 맷시가 나무라는 듯 그녀를 보았다. 맷시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알았으나, 루시펠라는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명령이야, 따라와.”

“제가 나중에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니…….”

그런 작은 실랑이가 이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루시펠라와 맷시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가 손쓸 틈도 없이 소리쳤다.

“여기다!”

그와 동시에 나무 위에 앉았던 새가 푸드덕하고 날아올랐다.

맷시는 재빨리 루시펠라를 등 뒤로 하고 좁은 나무 사이로 루시펠라를 밀어 넣었다.

“아가씨, 얼른 도망가십시오!”

“뭐?”

“얼른!”

“…….”

루시펠라는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이런 미친 경우가 다 있지? 에스텔일 때도 지겹게 경험해 왔던 것을, 지금 그녀가 왜 경험해야 하는 건가!

이건, 이건…… 이건 싫었다. 그녀가 고개를 필사적으로 젓자 맷시가 엄하게 소리쳤다.

“어서요! 아가씨가 없으면 백작님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다 안심했던 제 잘못입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루시펠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 그녀는 힘이 없기에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게 분했다.

루시펠라는 이것이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경을 기억할게.”

루시펠라가 결국 해줄 수 있는 것은 잊지 않겠다는 말밖에 없었다.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루시펠라는 나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더 넓은 공간이 눈에 띄었다. 나뭇가지와 나뭇가지가 겹쳐 마치 동굴 같았다.

그 틈으로 새어 나오는 햇빛을 바라보며, 그녀는 나무로 만들어진 굴 바깥으로 벗어나려 발걸음을 떼었다.

남자들의 고함 소리와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루시펠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검만 있었어도! 적어도 그녀에게 무력이 있었다면 이렇게 무력하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대체 왜!”

소리쳐 봐야 소용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억울함이 다시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그 어둑한 나무 덩굴 사이를 걷다가 겨우 출구로 보이는 곳에 루시펠라가 빠져나올 때였다.

별안간 손이 쑥, 하고 나무 사이로 비집고 나오더니 루시펠라의 긴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루시펠라는 속절없이 끌려 나가야 했다.

“드디어 잡혔네.”

추격자 중 한 명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팔을 결박해 루시펠라를 남자 무리 사이로 끌고 갔다.

루시펠라는 이를 갈았다. 자신은 걸음이 느려졌고, 동굴 같은 곳을 보았으니 출구를 찾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남자들을 보았다. 남자들은 전부 검을 소지하고 있었다. 소매 속에 감춰둔 단검은 활용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쪽들, 참 집요하네.”

루시펠라가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들어 올리며 말하자 상단의 관리인인 척하던 남자가 가운데에 서서 말했다.

“아가씨야말로 참 포기를 모르더군.”

루시펠라는 후, 한숨을 쉬었다. 맷시에 대해 물어볼까 했지만, 가망이 없다는 점은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죽일 생각은 없어. 걱정 마.”

“…….”

남자가 부드럽게 말했지만 루시펠라에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아 올리며 뱀과 같은 시선으로 루시펠라의 몸을 훑어보았다. 루시펠라는 그 눈깔을 칼로 도려내 버리고 싶었다.

“그쪽에서도 건드리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분풀이는 하게 해줘야지. 덕분에 계획이 엉망이 되었잖아.”

루시펠라는 소매 안에 둔 단도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이젠 이런 방법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으아아앙!

아이의 울음소리와 함께 땅이 우르르 진동했다. 인적이 없는 이 조용한 산속에서 나는 아이의 해괴한 울음소리는 사람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했다.

루시펠라도, 남자들도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루시펠라는 이 소리를 알고 있었다. 산속에서 들리는 갓난아이의 소리. 마물, 그것도 상급 마물인 리닉스(Lynx)였다.

‘젠장, 마물 없다며!’

루시펠라가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단검을 들어 자신을 결박한 남자의 팔을 찌르는 것이었다.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그녀에게 반격을 가하려고 했으나, 곧장 어둠 속에 나타나는 커다란 그림자에 압도되어 꼼짝없이 굳어 있었다.

루시펠라는 얼른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진초록색의 기다란 풀더미를 찾아다녔다.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그 방법뿐이다. 몇 걸음 되지 않아 그녀는 어렵지 않게 거대한 수풀 더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으아아아아악!”

“마물이다!”

콰드득, 뼈와 살이 부서지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앙! 아아앙! 아아아아앙!

“사, 살려줘!”

“아아아아악!”

그녀 쪽으로 도망쳐 오는 남자들이 있었으나 루시펠라의 머리만 한 발이 날아왔다. 날카로운 발톱이 남자의 등을 찔렀다. 가슴을 관통당한 남자가 허물어졌다. 그것에 소리를 내지 않으려 그녀는 애써 입을 틀어막았다.

캐옹! 캐옹! 캐오오오오오옹!

리닉스가 사람을 공격할 때 내는 특유의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그 아비규환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이어 다른 소리도 들렸다.

콰득, 콰드드드득, 아드드드득.

루시펠라는 마물이 뼈째 사람을 삼키는 그 소리에 눈을 질끈 감고 귀를 막아 단말마의 비명 소리로부터 자신을 차단했다.

“으아아아악!”

누군가 생존자가 있었는지 달아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리닉스가 몸을 돌리고 그 인간을 쫓았다. 뾰족한 갈고리가 달린 리닉스의 꼬리가 서서히 시야에서 멀어질 때, 루시펠라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오랜만에 본 허망한 죽음의 현장에 심장이 아직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녀는 애써 자신을 진정시켰다.

수풀 사이로 보이는 바깥은 흥건한 피와 살점들로 가득했다. 어떻게 하지? 지금이라도 나가야 하나? 루시펠라가 나가려 할 때 누군가가 루시펠라의 손을 잡았다.

그에 루시펠라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단검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난리통에 단검을 떨어뜨렸는지 잡히지 않았다.

“영애, 접니다.”

“……?”

별안간 익숙한 목소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루시펠라가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려 하자 곧바로 손바닥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쉿, 조용히.”

루시펠라가 뒤를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보라색 눈동자가 진지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칼리드였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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