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습격
2017.05.18.
얀스가르의 아이딘 백작령 소속의 기사단장 그웨인 러더포드는 요사이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매 아침마다 그는 활력이 차오름을 느꼈다. 그가 딱히 영약을 먹고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갑자기 내려온 영지의 아가씨 때문이었다.
그웨인에 대해 우선 말하자면 그는 3대째 기사단장을 배출한 러더포드가의 장남이었다. 아버지가 기사단장 직에서 은퇴하시고 그가 기사단의 단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웨인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동경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음유시인이나 동화책 속에 나오는 ‘기사’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검을 들고 악과 맞서 싸우며, 영광스러운 죽음으로 여신 아스트라의 품에 남아 영원한 별이 되는 그런 기사들.
기사 서임을 받을 때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러나 결과적으로 기사들이 하는 일은 적당히 저녁에 영지의 주도(主都)인 코노트를 시찰하거나, 보석을 채굴하는 이들이 원석을 빼돌리지 않는지 감시를 하는 것뿐이었다.
무력이 가장 필요할 때는 이 영지가 어지러울 때다. 하지만 영지는 평화로웠고, 싸울 일이 거의 없었으며 기사들의 검도 무뎌지다 못해 이가 나가기 시작했다.
그웨인은 그 기강을 바로세우고자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백작은 이런 쪽에 관심이 없었고, 지원은 턱없이 부족했으며, 사람들은 영주에 대해 커다란 존중이 없었다.
심지어 백작은 그웨인의 존재에 대해서 모르는 듯 행동했으며, 만나보았자 그웨인보다는 은퇴한 자신의 아버지와 만남을 더 가지고는 했다.
그가 백작에 대해서 아는 것은 그가 딸 사랑이 지극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가끔 맷시에게 들어서 그는 백작이 아가씨인 루시펠라에 대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으며 서운해했다.
그랬기에, 그녀가 영지에 내려왔을 때 그 화려한 마차를 보자 심사가 뒤틀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웨인은 아가씨에게 인사를 하러 찾아가지 않았고, 아가씨는 예상대로 자신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웨인은 연무장에 찾아온 아가씨가 반가우면서도 그 아가씨가 지적한 사항에 대해서 발끈 화가 나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언제나 그웨인의 다혈질인 성격을 지적하고는 했다. 나이를 먹어도 그 성격은 제대로 고쳐지지 않았다.
여하튼, 결과로 말하면 아가씨는 그웨인이 원하던 것을 들어주었다.
드레스를 문제 삼자 그녀는 시원하게 자신이 입고 있는 드레스를 최소한만 남기고 모두 처분해 버렸던 것이다.
그웨인은 그 당시에는 약이 올랐다. 기사들 역시도 ‘건방진’ 아가씨에게 자신들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주자고 씩씩거렸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그웨인의 생각이 달라졌다. 기사들의 눈빛은 더없이 의지로 차올랐으며, 이전에는 귀찮아서 대충 했던 훈련 역시 열의를 다하기 시작했다.
처음 3일 동안 이렇게 하자 기강이 점차 잡히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더더욱 열심히 훈련에 임했던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아가씨가 매일 아침마다 훈련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도 벅찰 텐데, 아가씨는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나와서 연무장 주변을 걸어 다니고는 했다.
그녀는 그것을 ‘체력단련’이라고 웃기지도 않은 변명을 해댔다. 처음 며칠간은 그것이 감시로 느껴져서 불쾌했지만 그웨인의 생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아가씨의 계획이 아니었을까?
지금 이 상황은 그웨인이 그토록 바랐던, 더없이 이상적인 상황이었다.
번쩍번쩍한 갑옷과 영양가 있는 식사, 질 좋은 철로 된 검이 만들어져 기사들에게 배급되었다.
심지어 이들은 혈통 좋은 군마 역시 개인당 한 마리씩이 배당될 예정이었다. 아주 옛날에나 이루어졌던 마상시합까지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기사들은 은근슬쩍 아가씨의 눈치를 보았다. 매일 아침에 나오는 아가씨의 시선이 그들에게 향할 때면 기사들은 더욱더 군기가 바짝 들어 열심히 훈련하곤 했다.
언제나 레이디들을 지켜주며 선망 어린 시선을 받던 기사들이 그야말로 레이디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웨인이 활력이 돋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사실 아가씨는 말은 독하게 했지, 모두 우리를 생각해서 그런 거야.”
기사들 역시 그웨인처럼 아가씨의 의도를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생각하기에도 아가씨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가씨가 좋은 사람이라 다행이야.”
무심한 백작과는 달리 아가씨는 인정이 넘친다는 평까지 듣고 있었다.
“요새는 성 밖으로 자주 나가신다지?”
루시펠라는 심심하면 놀러 가듯 성 바깥으로 나다녔다.
아가씨는 체력은 약했지만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좋아했다.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도 아가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성 밖으로 나섰다.
처음 기사들은 밖으로 나다니는 아가씨가 특이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도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아름다운 아가씨가 성 밖으로 나와, 심지어는 마차에서 내려 도시를 산책하자 처음에는 환호했지만 이내 그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거 알아? 아가씨가 내려온 이유가 실성해서 그렇다던데? 수도에는 그렇게 소문이 퍼져 있대.”
“딱 봐도 헛소문이네. 조금 특이하실 뿐이지 저렇게 멀쩡하신 분이 어디 있다고. 수도 사람들도 멍청하다니까.”
기사들은 수도의 소문에 대해 분개했다.
기사들은 천천히 변화해 가고 있었다. 아마 앞으로 일어날 일이 아니었으면 이들은 정말 ‘천천히’ 바뀌었을 것이다.
기사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루시펠라는 으으으, 소리를 내며 발을 굴렀다. 저것도 훈련이라고. 한겨울에 옷 벗고 냉수마찰 정도는 해주어야 훈련의 정석이 아니던가!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니 극한의 극한까지 단련해야 했다.
더욱 엿 같은 건 지금 자신의 체력 상황이었다. 어떻게 저 연무장을 한 바퀴만 돌아도 온몸이 녹초가 될 수 있는가.
이래서야 저 기사 놈들에게 얕보일 뿐이라고 생각한 루시펠라는 오기로 매일매일 아침 훈련에 나갔다. 기사들은 그것이 관심이라 생각하며 감동을 받는 것도 알지 못한 채.
“테로 상단에서 거래가 있을 예정입니다.”
“그래.”
루시펠라는 어떻게 하면 저 기사들을 쓸 만한 인간들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맷시가 말하는 보석 거래는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백작이 진행하는 거지 루시펠라의 권한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맷시의 말에도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다음에 오는 말에 루시펠라는 당황했다.
“그쪽에서 아가씨를 뵙고 싶다고 하는데요?”
“나를 왜?”
“모처럼 영지에 내려오셨으니 얼굴도 뵙고, 자주 거래하는 곳이니 성의라도 표시하고 싶다고…….”
루시펠라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유가 별로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거래의 대행인은 맷시였고, 루시펠라의 얼굴을 보거나 따로 성의를 표한다고 해서 거래에 어떠한 이득이 되는 점은 없었다.
“내가 그곳에 가면 어떤 걸 결정할 권한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
“네, 아무래도 적당한 거래가는 저희가 알아서 책정하게 될 겁니다. 아가씨의 의견은 죄송하지만 들어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나를 보자고 하는 거지? 나에게 잘해준다고 해서 이 거래가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도 아니잖아. 다음 거래를 원활하게 트고 싶어서 그런 건가?”
루시펠라의 의문에 맷시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소문 때문이지 싶습니다.”
“내가 돌았다는 소문?”
“아가씨!”
뒤에서 머리를 빗겨주던 로이자가 또 뭐라고 했다. 또 말투가 레이디들이 쓰는 말투가 아니라고 하는 거겠지. 그에 일일이 답해줄 생각이 없던 루시펠라는 고민에 잠겼다.
실질적으로 그녀가 어떠한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 가봐도 딱히 상관없을 것 같을 텐데. 상단에서 흔하지 않은 일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나가지 않는다면 실성했다는 소문이 더 크게 퍼질 테니까.
“알았어.”
결정은 언제처럼 시원하게 내려졌다.
***
“이 못된 계집애야!”
“너야말로! 이 거만한 계집애가?!”
루시펠라는 무표정으로 벌어지는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거래 상단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 어쩔 수 없이 모처럼 괜찮은 드레스를 입은 루시펠라였다.
수도에서 온 하녀들은 수도의 세련된 방식으로 루시펠라를 꾸며주었다. 이에 아가씨를 독점했다는 것 때문인지 이곳 영지 하녀들의 불만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외출을 준비하고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 사이에서 누구를 대동하고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다툼이 벌어졌다.
“아가씨 곁엔 내가 가야지! 너희가 아가씨 버릇은 알기나 해?!”
“너흰 고용된 거잖아! 우린 옛날부터 아가씨를 위해서 기다려 왔다고!”
“기다리긴 뭘 기다려! 그 촌스러운 드레스를 준비하면서 기다린 거니?”
“이게 진짜!”
수도 하녀 중 한 명이 가장 목소리가 큰 영지 하녀의 머리채를 잡았다.
루시펠라는 팔짱을 낀 채 서서 자신도 모르게 싸움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여자들이 싸울 때 머리채를 잡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선 여자들은 보통 남자들보다 머리가 길었고, 이들은 정식으로 무예를 단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한 힘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방식은 머리를 잡는 것밖에 없었다.
하긴, 검으로 팔을 잘라내는 것보다 머리털이 몇 개 빠지는 게 낫긴 하겠다.
그녀는 영지 쪽 하녀가 몸집은 작지만 손아귀의 힘이 억세서 이 싸움에 우세하다는 것까지 파악을 끝냈다.
그들은 서로의 머리채를 잡고 미친 듯이 흔들어댔다. 루시펠라가 자신들의 싸움을 구경하는 것도 모른 채.
구경하는 하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싸움에 집착한 나머지 루시펠라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중에는 로이자 역시 끼어 있었다.
싸움이 과열되자 이들이 모두 일제히 패싸움을 할 것처럼 달려들었다.
루시펠라가 얼굴을 찌푸리며 집사 야민을 바라보자 그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결국 입을 열었다.
“당장 그만두지 못하겠어?”
그 음성에 하녀들이 일동 얼음이 되었다.
루시펠라는 한숨을 쉬더니 싸움에 관여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던 영지의 하녀 중 한 명을 지목했다.
“저 애 이외에는 아무도 데려가지 않을 거야.”
그에 하녀들의 얼굴이 섭섭함과 억울함으로 뒤덮였다. 로이자 역시 눈에 눈물이 맺힌 것을 본 루시펠라는 마음이 약해졌지만 냉정해지기로 했다. 로이자 역시도 저들이 싸울 때 가담했던 하녀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쌍둥이산까지 가는 거리는 생각보다 짧았다. 루시펠라는 내심 보석을 채굴하는 광산을 떠올리며 기대하고 있었다.
동굴 같은 그런 곳이겠지?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원래 그녀는 새로운 곳을 탐험하는 것을 좋아했다.
광부들의 얼굴에는 석탄 가루가 가득 묻어 있고, 동굴 안에서 촛불을 밝히면 반짝반짝거리는 보석들이 빛나고 있을 것이다.
상단이 아직 마을에 도착하려면 아직 몇 시간은 남았기에 그녀는 맷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광산에 올라가기로 했다.
“저 옆에 있는 곳은 그 말로만 듣던 쌍둥이산이야?”
“네.”
“아, 그러면 저기도 보석이 나오지 않아?”
그 말에 맷시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보석이 발견된 곳은 이곳이고, 저 왼쪽 산은 마물들이 득시글대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
루시펠라는 그 옆에 있는 산을 보았다.
우선 코노트와 마을 사이에 어느 정도 거리가 있으니 안전해 보이기는 하는데, 보통 기사들을 늘려서 산에 있는 마물을 처치하지 않나? 군사력이 형편없기 때문에 그대로 둔 것일까? 아니, 그러면 애초에 왜 군비를 지원하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루시펠라는 그것을 애써 머리를 흔들어 지워 버렸다. 얼샤와 얀스가르의 차이일지도 모르고 나름의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니.
“그래서, 우리 어디로 가야 해? 어디에서 보석이 채광되지?”
산에서 밭이라도 매는 것인지 쭈그려 앉아 돌을 골라내는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며 루시펠라가 물었다.
정상까지 걸어 올라가야 하나? 체력이 따른다면 올라갈 수 있을 텐데.
맷시가 그냥 데려온 것을 보면 그렇게 많이 안 올라가도 될지 모른다. 빨리 가보고 싶다. 박쥐도 있을까?
“아가씨, 지금 여기서 작업하고 있지 않습니까.”
“……?”
루시펠라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아래에서 허리를 숙이고 작업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지금 이게 작업이라고? 그녀가 생각하는 그 탄광, 그 깊은 갱도는 어디 갔단 말인가?
꼭 심심풀이로 약초를 캐는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같은 차림을 하고 마을 사람들은 원석을 캐고 있었다.
“밭 매는 거 아니었어?”
루시펠라가 황당한 표정으로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누가 봐도 조약돌을 줍는 모습이 자갈밭을 개간하는 모습이었다.
“저게 원석이라고?”
“네. 보석이라는 게 원래 그렇죠. 저기서 옥석을 가려낸답니다.”
루시펠라는 황당한 모습으로 입을 벌렸다.
“아, 여기, 이 조약돌을 깨면 보석 원석이 나옵니다. 이 돌들을 모아두었다가, 무게별로 분류하면 예쁜 루비 원석이 나옵니다. 이거 보세요.”
맷시가 주위에 굴러다니는 하얀 돌멩이를 주웠다.
“뭐야, 이 돌멩이는?”
“여기 이거 자세히 보세요.”
루시펠라가 얼굴을 찡그리며 집중하자, 하얀 돌에 붙어 있는 불그스름한 무언가가 보였다.
“이게 원석이라고? 이 콩알, 닭 눈만 한 게?”
루시펠라가 의아하게 묻자 맷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펠라의 반응이 퍽, 만족스러운 듯했다.
“껄껄, 처음에 오시는 분들은 꼭 뭔가 거창한 걸 기대하고 오신다니까요. 저쪽은 사파이어가 나오는 곳인데, 저기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
루시펠라는 이때 처음으로 제대로 문화충격을 받았다. 모든 게 루시펠라가 생각하던 곳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
모험 비스무리한 걸 시작도 못 하고 끝내 버린 루시펠라는 좋지 않은 기분으로 채광인들로 형성된 마을로 들어가, 상단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나 평화로운 정경에 그녀는 절로 하품이 나왔으나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그동안 마을 사람들은 돌조각들을 수레에 실어 옮겼으며, 쇠붙이 망치로 돌을 깨서 돌과 보석 원석을 분리했다.
어느 정도는 클 거라 생각했던 원석들은 아까 본 것처럼 콩만 한 것도 있었고 모래 조각처럼 작은 것도 있었다.
루시펠라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루비 원석을 만지작거렸다. 새끼손톱보다 조그마한 요 조각들이 그렇게 가치 있다니, 참 신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인들이 왔다.
얀스가르에서 규모가 크기로 유명한 테로 상단 사람들이라는 걸 증명하듯 그들은 자신들의 상징인 장미 마크를 보여주었다.
테로 상단의 남자들은 전부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으며, 이들은 다수의 건장한 남자를 호위기사로 이끌고 왔다.
그에 루시펠라는 버릇처럼 자신의 호위기사 머릿수를 셌다.
호위기사가 지나치게 많으면 거래처에 불편함을 줄 수도 있다기에 줄인 기사의 수가 이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거래 상대는 거의 스물이나 되는 데 비해 자신 쪽은 다섯이라니, 오히려 저쪽이 너무 결례를 저지른 것이 아닌가.
그래도 이쪽은 보석을 운반해야 하니 일꾼이 많을 수밖에 없겠지. 루시펠라는 혼자서 화를 내다 혼자서 납득했다.
“반갑습니다, 아가씨.”
루시펠라는 자신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리는 테로 상단의 거래 담당자를 보았다.
루시펠라의 옆에 서 있던 맷시가 나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줄곧 거래하던 분은 오지 않은 겁니까?”
“쉐인 씨를 말하는 거라면, 담당이 다른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남자가 호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도장이 찍힌 종이를 내밀었다. 맷시는 그것을 신중하게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제 된 겁니까?”
“네,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거래에는 신중한 편이 좋으니까요.”
“이해합니다.”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입가에는 미소를 지었지만 루시펠라는 그 남자에게 호감을 가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루시펠라를 보자마자 묘한 미소를 지으며 위아래로 그녀의 몸을 훑어보았기 때문이다.
루시펠라는 예의를 차려 인사했고, 그녀가 실성했다는 소문이 거짓임을 은연중에 드러내 보였다.
담당자는 루시펠라의 아름다움에 대한 소문을 진즉 들어 알고 있었다며 그녀에게 유리가 아름답게 세공되어 있는 향수를 바쳤다. 맡아보니 냄새가 나쁘지 않았기에 루시펠라는 그것을 하녀에게 건넸다.
“자, 그럼 어서 거래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우리 다시 도시로 돌아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담당자는 보석을 훑어보더니 물었다. 맷시의 의아한 표정에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의 품질이라면 볼 것도 없이 전량 거래를 하겠습니다. 다만 우리 쪽 세공사와 감정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도시에 도착하면 그때 같이 진행함이 어떨지요.”
“보통 여기서 거래가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았어?”
루시펠라의 물음에 맷시가 대답했다.
“물량 거래가 많으면 때론 도시에서 진행하기도 합니다. 거래량이 많으니 나쁠 건 없습니다.”
그렇구나. 이러한 유의 거래에 대해서는 별로 알지 못하던 루시펠라는 맷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보석광산에 한 번 와볼 생각이었고, 견학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하고 루시펠라는 도시로 떠날 준비를 했다.
“아이쿠!”
“왜 그런가?”
맷시의 말에 말을 마차에 묶어두었던 마부가 마차의 바퀴를 가리켰다. 바퀴에 금이 가 있었다.
“이대로 굴리다가는 큰일 날 것 같은데요. 아이고, 아가씨. 죄송합니다.”
마부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을 잠자코 지켜보던 담당자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말했다.
“아가씨, 저와 같이 마차를 타시는 게 어떻습니까.”
루시펠라는 어떨까 생각하다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신세를 질 수는 없지요. 맷시 경과 함께 말에 탈게요.”
“그러지 말고, 타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뭘까, 어딘지 모르게 찝찝한 느낌에 루시펠라는 맷시에게 길을 재촉했다.
“아가씨, 마차를 타고 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루시펠라는 맷시의 둔함이 짜증스러웠으나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어차피 두 시간밖에 안 걸리는 거리잖아요. 말 정도는 탈 수 있어요.”
‘더 반대하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루시펠라의 눈빛을 읽은 맷시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그러라고 말했다.
루시펠라는 가볍게 말에 올랐다. 격식을 차린 드레스였지만 치맛단이 풍성했기에 말을 타도 다리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하지만 아가씨를 말에 태우는 것이 찝찝했던 터라 맷시가 뒤에서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이 안 좋은데 어떻게 하겠는가. 저 남자랑은 같은 공간에 있기가 싫었다.
“출발하지.”
루시펠라의 명령에 기사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하녀 역시 아가씨 대신 차마 마차는 타지 못하고 기사의 앞에 앉은 채로 말을 타고 있었다.
그 뒤에 마을의 일꾼들이 말을 타고 거래하기로 한 보석의 원석을 싣고 있었다. 상단원들은 걸어가는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이들이 말을 타고 도시로 가는 길을 서두를 때였다.
“이런, 미친! 흩어져!”
루시펠라는 문득 깨달은 듯 소리치며 발로 말의 배를 걷어찼다. 그에 말이 앞발을 들어 올리며 허리를 세운 채 울음소리를 내더니,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가씨!”
루시펠라의 돌발 행동에 기사들과 맷시가 당황했다.
기사들은 얼른 아가씨를 쫓아 말 머리를 돌렸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모든 상단원의 손에는 어째서인지 은빛 날붙이가 들려 있었다. 그들이 검을 휘두르자 보석 원석을 운반하던 일꾼들의 목이 날아갔다.
이들은 모두 도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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