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검과 드레스
2017.05.15.
“아가씨, 또 그런 말투!”
로이자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지적했다. 기사들을 불러오는 손짓이 어쩐지 꼭 남자들이 하는 방법 같았다. 기사들이 이내 이쪽을 보더니 루시펠라에게 다가왔다.
“늦게 인사드려 죄송합니다. 기사단장 그웨인 러더포드입니다.”
기사단장인 그웨인이 루시펠라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삼십대 청년인 것 같은 이 남자는, 기사단장이라는 말이 허울은 아닌지 저들 중 유일하게 단련된 듯한 몸짓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웨인을 관찰하듯 그웨인 역시 루시펠라를 관찰했다.
그의 시선이 루시펠라의 아름다운 얼굴에 머물렀다. 눈앞에 있는 이 멍청한 이가 자신을 관찰하든 말든, 루시펠라는 짜증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쓸며 말했다.
“대체 이 꼴이 뭐지?”
“무슨 말씀입니까?”
그웨인은 루시펠라의 입에서 기대했던 기사들에 대한 찬사나 수고가 아닌 힐난에 당황했다.
“기사의 무기가 어떻게 관리가 저렇게 허술하지? 그리고 저기 저렇게 쉬고 있는 이들은 뭔가. 왜 이렇게 설렁설렁 대련하지? 기사들의 훈련치고는 강도가 너무 약한 거 아닌가?”
연무장으로 마련된 이 넓은 공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루시펠라는 이곳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지적해야 할지 몰랐다.
루시펠라의 지적에 그웨인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했다. 검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아가씨가 훈련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맷시 역시 의아했다. 성과 방의 초라함이나 드레스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던 아가씨가 겨우 기사들의 훈련 방식이 마음에 안 들어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던 탓이다.
“기사들의 방식입니다. 아가씨께서 아마 잘못 보신 듯합니다.”
그웨인의 말에 루시펠라의 눈썹이 치켜올라 갔다. 그웨인의 말은 공손했지만, 말투는 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훈련에 대한 건 경의 재량이니 내가 크게 간섭할 권리는 없지. 그래도 무기의 상태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영지에서 나는 세금으로 무기를 해줬으면 자연한 관리도 필요하지 않나? 지금 저게 뭐지? 저래서는 종이도 잘리지 않을 것 같은데.”
루시펠라의 지적에 그웨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루시펠라는 다른 기사들의 얼굴 역시 똑같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마치 억울해서 견딜 수 없어 하는 표정이었다.
명백한 불손함에 루시펠라 역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만약 다른 남자, 하인트 공작 같은 사람이 지적했다면 수용했을 텐데, 왜 자신이 하는 말에는 이렇게 대하는 것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그웨인 러더포드 경.”
루시펠라의 비꼬는 듯한 말에 그웨인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무기의 상태가 저런 것은 아가씨의 드레스에 더 많은 돈을 쓰기 때문이 아닙니까?”
“…….”
그 말에 루시펠라의 눈이 커졌다.
그웨인의 눈에 서린 원망의 기색이 보였다. 루시펠라는 다른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기사단장의 말에 놀란 듯했지만 그 표정을 보니 동의하는 것 같았다.
“맷시 경, 그게 사실인가?”
루시펠라가 옆에 있는 맷시에게 말하자, 맷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그게 사실인가 보네.”
맷시는 석연찮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웨인의 눈빛이 의기양양해질 때였다.
“그래, 그 하찮은 이유 때문에 기사단 수준이 이따위에 대한 변명이 진짜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 그건.”
“맷시 경, 대답해. 내 드레스 때문에 군용금이 부족했던 건가?”
“그, 그건 아닙니다! 그건, 그러니까…….”
맷시의 얼굴이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주인님께서 이 영지는 충분히 평화로우니, 기사들에 대한 지원을 줄여도 상관없을 거라 하셔서 줄였습니다…….”
“그랬다고 하네.”
루시펠라가 그웨인에게 살짝 눈짓했다. 그러나 그웨인의 억울함은 가시지 않았다.
“아버님이 그런 생각이셨다고 하는데. 그게 내 드레스 때문인 건가?”
“그건 누가 봐도 명백하지 않습니까! 이번에 아가씨가 온다고 들인 드레스만 해도 어머어마한 비용이 들었습니다. 그것을 기사단에 투자만 하셨어도!”
“그렇다면 경들이 가난한 이유는 아버지의 결정 때문인데 그게 대체 왜 내 드레스 때문이지?”
루시펠라의 지적에 그웨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역시 할 말을 찾지 못했던 탓이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만드셨다는데 그 딸이 지적하니 뭐 못마땅하고 억울한 점은 있겠지. 그렇지만 군비가 부족하다고 요청은 따로 해봤던 건가?”
루시펠라의 물음에 그웨인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할 말이 없어 보이는 듯했다.
“맷시 경, 그랬었나?”
“아니요, 딱히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루시펠라는 하, 하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드레스 탓이 아니라, 아버님의 실책과 그것을 알면서도 그냥 넘겼던 기사단장 때문에 그런 거겠네. 보고 역시 경의 의무야, 그렇지 않나?”
“아가씨.”
맷시가 그만하라는 듯 주의를 주었지만 루시펠라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군비를 증강해 달라고 부탁하면 될 문제였다.
그때, 그웨인이 소리쳤다.
“요청해도 들어주지 않았을 겁니다! 백작님께서는 군에 예산을 주는 게 아깝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에 루시펠라는 어쩐지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요청해도 전하는 들어주지 않을 거야. 그분은 그런 분이 아니니까.”
칼리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칼리드가 그런 말을 예전에 한 적이 있었다. 역병으로 죽어가는 도시를 지나며, 마을을 버린 영주에 대한 처벌을 원했을 때. 에스텔은 그것을 얼샤의 국왕에게 고하고자 했지만 칼리드는 그것을 조용히 만류했다. 그때 에스텔은 어쨌더라?
루시펠라는 생각하려다 고개를 젓고 말했다.
“그래 봤자 핑계라는 건 경도 잘 알 텐데? 그건 생각이지 어찌 되었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거잖아. 제일 만만하고 쓸데없어 보였던 게 내 드레스였겠지.”
루시펠라는 자신이 입고 있는 드레스의 치마를 살짝 쥐며 흔들었다.
“아버님이 타고 다니는 마차나 옷차림이 화려해도 그걸 문제 삼았던 적이 있었나?”
그웨인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도 억울함만은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지적하고 싶었다. ‘백작이 드레스 때문에 군비를 삭감시킨 것’과 ‘백작이 무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군비를 삭감시켰고, 딸을 사랑하기에 드레스를 사준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한데 별개의 이야기를 같은 취급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따져 보면 백작이 사교활동을 하기 위해 구입하는 모든 것들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경도 잘 알고 있을 거야. 내가 지적하고 있는 문제들은 군비 문제가 아니라 기강 문제라는 것을. 내가 영지의 규모에 비해 기사들의 숫자가 부족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나? 아니면 검의 재질이 좋지 않다는 것을 말했었어?”
그녀의 말에 그웨인은 그제야 그녀가 적당히 트집을 잡아서 지적한 것이 아니라,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지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의 이가 나가는 것은 이곳의 대장장이에게 보여준다면 따로 돈이 들지 않고도 수리가 가능할 부분일 텐데, 이게 내 드레스와 그렇게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문제였던가?”
그웨인의 얼굴이 숙여졌다. 그로서는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그저 백작이 아가씨를 아껴서 드레스와 장신구를 산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차라리 그 돈을 군용금으로 배분해 주었으면 바랐기 때문이다.
군비가 부족해서 겪었던 일들 때문에 지적을 당하자 지나치게 화가 났다. 그래서 불만이었던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얼마나 비겁한 행위란 말인가. 아가씨의 말대로였다.
검에 이가 나간 것은 그들의 관리가 소홀했기 때문이다. 훈련의 강도 역시도 그러했다. 다른 영지의 기사들 훈련 강도는 이것보다 더 세다는 것을 그웨인도 알고 있었다.
“죄송…… 합니다.”
결국 그웨인은 입을 열어 겨우 대답했다. 알아서 해주는 것이 아닌, 최소한 직접 요청이라도 해야 했다.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르기에 침묵한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보고 역시도 그의 의무였다.
그것을 잠자코 본 루시펠라가 입을 열었다.
“맷시 경.”
“네, 아가씨.”
루시펠라가 맷시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 옷장에 있는 드레스, 판매할 가치가 있는 건가?”
“……네?”
눈을 크게 뜨며 물어보는 맷시에게 루시펠라가 차갑게 대답했다.
“몇 벌만 남기고 다 팔아버려. 가치가 떨어졌다면 붙어 있는 보석이나 천 자투리 정도는 팔 수 있으리라 생각해.”
“어떻게 그걸! 아가씨, 백작님께 말해서 군비를 더 늘이는 방향으로 생각해 봅시다.”
“내 드레스 핑계를 대는데, 내 드레스를 팔아야지 어떻게 하겠어?”
루시펠라의 말에 그웨인의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아, 아가씨, 그건!”
그웨인의 만류에도 루시펠라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대신 내가 판 드레스 대금을 쓸 테니, 어느 정도 내 말은 따라야 되겠지?”
“…….”
루시펠라가 생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웨인은 당황스러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기사가 지금 몇 명이나 되지?”
"100명 남짓입니다."
“이래서야 내가 영지에서 나가기라도 하면 날 호위해 줄 수 있겠나?”
“아가씨!”
맷시가 결국 보다 못해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루시펠라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기사들과 주둔군은 더 선발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 부분은 아버지께 내가 말하도록 할게. 대체 영지 내의 광산에서 보석을 캐면서도 이렇게 기사와 군사의 수가 적다니, 내 상식으론 이해가 안 가네. 도적이라도 나타나거나 적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할 거야?”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아가씨.”
“그럼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거겠네.”
루시펠라가 조롱하듯 말했다.
“아 참, 그리고 아침부터 연무장에 운동 삼아 산책할 생각인데, 나보다 늦게 일어나는 사람은 없길 바라. 모처럼 드레스를 전부 팔았는데, 나보다 게으름 피우는 이들이라면 정말 화가 날 것 같으니까.”
“아가씨, 제발 좀…….”
“드레스 핑계를 이젠 댈 수 없을 테니 얼마나 잘할 수 있는지 보자고.”
맷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루시펠라가 그웨인에게 얄밉게 말하며 돌아갔다.
그웨인과 기사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루시펠라가 성안으로 돌아가자 로이자와 맷시가 바로 뒤를 따랐다. 로이자가 걱정스럽게 손을 모으며 물었다.
“왜 그러셨어요, 그 기사님 화가 많이 나실 것 같은데요.”
“화가 나라고 한 거야. 기사들이 그렇지, 뭐.”
루시펠라는 무심하게 말했다.
“왜 화를 내게 한 건데요?”
“저기서 내가 저들을 달랬어 봐. 자존심이 센 기사들이, ‘아가씨의 지적, 감사합니다. 이렇게 대단한 지적을 해주셨으니 앞으로 훈련을 열심히 해야지’라고 생각할까.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가 무슨 말을 하네, 웃기지도 않아’라고 콧방귀를 뀌며 무시할까.”
로이자는 그 말을 듣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가씨가 지적하신 건데 당연히 기사님들도 들으셔야죠!”
그 순진한 말에 루시펠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기사들이 검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레이디의 말을 들을 리가 없잖아.”
로이자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그래도 아가씨의 말이니 들어야 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표정을 본 루시펠라는 다시 웃었다. 로이자가 보여주는 맹목적인 태도는 가끔씩 루시펠라의 마음을 따스하게 만들었다.
“검을 쓰는 사람들의 머리는 단순하니까, 저렇게 자존심을 건드리는 게 제일 효과적이지. 나한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노력하겠지. 저들을 다루는 방법이야 간단해.”
“…….”
루시펠라의 중얼거림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맷시가 말했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배워? 이 정도면 상식 아닌가?”
루시펠라가 한심하다는 투로 이야기했다. 너무나 당연한 듯 이야기하는 말에 맷시는 ‘아무래도 이곳의 상식과 수도의 상식은 참 다르구나’라고 억지로 납득했다. 그러다 루시펠라는 아, 하며 멈춰 섰다.
“이래서야 바깥에 나가기는 글렀네.”
“바깥에 나가다니요?”
“기사가 스물 정도는 되어야 하잖아. 그런데 저 수준으로 내가 어떻게 바깥을 나가지?”
“왜 그렇게나 많이 필요합니까? 정식으로 돌아다니는 건 아니잖습니까.”
백작의 영지는 그렇게 넓은 편이 아니었다. 영지 끝자락에 위치한 쌍둥이산과 그 아래 위치한 채광 마을을 비롯한 마을 몇 개. 이곳 주도(主都)인 코노트가 영지의 전부였다.
대체 왜 기사가 스무 명이나 필요하단 말인가. 맷시는 루시펠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위험하잖아?”
“무엇이요? 마물을 말하는 겁니까? 마물은 마을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가씨.”
“아니, 영지민이 귀족을 공격하면 어떻게 해?”
“왜 공격을 합니까?”
“뭐?”
루시펠라는 의아함을 느꼈다.
“영주님과 아가씨를 왜 공격합니까?”
“그야 원래 영지민은 귀족을 싫어하잖아?”
“왜 영지민이 귀족을 싫어한다는 겁니까?”
맷시의 말에 루시펠라는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에스텔이 얼샤에서 본 영지민은 모두 영주에게 기본적으로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영주가 성이나 저택 바깥을 나서면 어떻게 해서든 이들은 불만을 표현했다. 돌을 던지기도 했고, 마차를 막아서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모여서 욕설을 외치기도 했다.
그중에 특히나 레이디들은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호위기사 열 명을 데리고 나갔던 어떤 영주의 딸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 에스텔은 잘 알고 있었다.
찢어지는 가난과 궁핍에 사람들은 모두 공격적이었다. 마치 마물처럼.
“그야 배고픔 때문에?”
“아까부터 이런 일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신데, 아가씨, 이곳으로 오시는 동안 너무 소설을 많이 보신 게 아닙니까?”
맷시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맷시의 얼굴에 서렸던 찝찝함은 방금 루시펠라의 말로 사라져 버렸다. 맷시는 루시펠라를 책만 보았던 책벌레로 이해했다.
어쩐지 성과 기사에 대해 잘 안다 했더니, 요새 인기 있는 전쟁 소설이라도 읽은 모양이었다. 그 안에선 언제나 영지민은 폭동을 일으키고 영주의 목을 잘라 처형했으니, 루시펠라가 겁을 먹을 만도 했다.
그래서 아가씨가 성 밖으로 안 나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맷시는 이 아가씨가 결혼하기 전까지 머물 자신의 땅을 좋아하길 바랐다. 모처럼 이곳에 왔는데 실체 없는 겁에 질려 틀어박혀 있기엔 너무 아깝지 않은가.
그는 이상한 착각과 더불어 의무감에 휩싸였다.
“뭐하면 지금 당장에라도 나가 볼까요?”
“뭐?”
“참고로 영주님께서는 호위기사 한 명만 대동하시고 나갑니다.”
“그 호위기사가 그렇게 대단해?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만큼?”
“아니요.”
그에 맷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왜 영지를 돌아보시지 않나 했더니 이런 이유가 있으셨군요. 모시겠습니다.”
루시펠라는 맷시가 어쩐지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우선 그의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고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루시펠라는 마차의 커튼을 걷어보았다.
오밀조밀한 영지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수도의 화려한 지붕이 달린 빽빽한 풍경과는 다르게 집끼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창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모습에 루시펠라는 넋을 잃고 같이 마차를 탄 맷시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영지 관리를 잘하셔?”
영지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말끔한 옷을 입었다. 호화롭거나 화려한 옷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거적때기 같은 천을 뒤집어쓴 것이 아닌 제대로 형태를 갖춘 옷이었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루시펠라가 탄 마차를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개중에는 서서 그녀를 쳐다본 사람들도 많았다.
루시펠라는 그것에 절로 긴장했으나 자세히 보니 이들 눈에 서린 것은 불만이 아닌 순순한 호기심이었다. 루시펠라는 왜 맷시가 호위를 둘만 데려가도 된다고 했는지 비로소 이해했다.
“아니요, 백작님께서 딱히 특출 나게 잘하시는 건 아닙니다.”
“그래도 헐벗은 사람들이 한 명도 없잖아. 좋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어떤 소설을 보았는지는 몰라도, 언제나 궁핍한 영지민의 실상을 적은 책만 봐온 모양이었다. 대체 어떤 소설을 봤기에 저러실까. 맷시는 혀를 찼다.
“아가씨, 아가씨의 상상과 실제는 다릅니다.”
맷시의 말에 루시펠라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맷시의 표정이 여전히 자신을 바보 취급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녀는 유리 너머 풍경에 시선을 고정했다.
루시펠라는 그제야 얼샤와 얀스가르의 차이를 느꼈다.
수도의 규모도 모자라, 이곳 지방에서도 이렇게 차이가 극심하게 나는 것이다.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이 아닌, 그저 세상을 살아가는 평민만이 가득 찬 이곳. 루시펠라가 있던 얼샤의 땅과는 분명 비교되었다.
“……이래서 아버지께서 군 쪽에 예산을 안 넣었구나.”
“그렇습니다.”
맷시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기사들이 풀어졌던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였다. 영지 자체에 평화로움과 여유가 흘렀다.
“보석 때문에 영지 자체가 부유하게 된 거야?”
“아니요, 물론 조금 부유해지긴 했지만, 영지 자체의 생활수준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생각만큼 보석이 많이 채광되는 건 아니라서요.”
아가씨가 영지에 대해 아는 것은 나쁘지 않은 법이다.
맷시는 루시펠라가 영지에 관심을 보이자 신나서 대답했다. 이러한 것은 알아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러면 정복전쟁 때문에 전체적으로 나라가 부유해진 건가?”
루시펠라는 다시 맷시에게 물었다. 얀스가르는 정복전쟁을 벌이며 다른 나라의 부를 착취해 왔기 때문에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평화로움이 가능하겠는가?
루시펠라는 이곳의 평화로움과 풍요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이고, 아가씨. 영지의 생활수준은 정복전쟁 이전에도 이후에도 크게 변함이 없었어요. 여기 코노트는 원래 이런 곳이란 말입니다. 이런 기억도 다 잊으셨나 보군요.”
보석 광산 때문도 아니고, 정복전쟁 때문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
“영지민은 가난한 사람들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가씨께서 읽으셨다던 책에선 나오지 않았나 봅니다. 그렇게 관리를 못 하면 황제 폐하께서 압박을 가하십니다.”
“……압박을 가해?”
“수도에서는 매년 감찰대를 파견합니다. 그러니 영주들은 영지 관리에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폐하는 무서운 분이 아닙니까. 안 그렇습니까?”
루시펠라는 맷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황제의 정책 때문이었구나. 황제는 그만한 힘이 있었기에 영지민들은 이렇게 평안한 것이다.
백작이 특출 나게 인망이 두터운 영주라서가 아니었다. 얀스가르가 다른 나라를 착취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황제가 그럴 의지가 있었기에 이들은 얼샤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녀에게 기사 작위를 주었던 얼샤의 국왕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라의 차이란 이런 거구나.”
“네?”
“아니, 아니야.”
루시펠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쩐지 속이 뒤틀렸다. 그것은 누군가가 속을 긁어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럼, 지금 내가 이 마차에서 내려 걸어도 아무 일도 없는 거야?”
“아가씨께서 마차에서 내리시면 사람들이 모두 구경하지 않을까요? 제발 그런 일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맷시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듯 루시펠라는 마차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평화로운 정경이 천천히 흘러갔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그렇지만 군비를 줄인 백작의 판단이 옳았나? 이대로 평화에 매몰되어도 괜찮은 걸까, 하는.
오랫동안 마차 너머 영지를 구경하던 루시펠라는 결심이 선 듯 맷시를 보았다.
그녀가 보기에 맷시는 오랫동안 영지를 관리해 왔기에 관록을 가진 것 같았다. 게다가 그는 루시펠라에게 따스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맷시 경, 나는 아직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
“알고 있습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가씨.”
“누군가가 당연히 알아야 할 상식 역시 이렇게 모르고 있어. 나는 지식이 필요해, 도와줄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맷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루시펠라 역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루시펠라는 지식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녀는 지나치게 ‘얼샤’의 지식만 알고 있었다. 우물 안 개구리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녀가 살아가는 이곳도, 칼리드가 3년간 살아온 이곳도 얀스가르였다. 그녀는 얀스가르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루시펠라의 예상대로 맷시는 아주 좋은 스승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얀스가르에 대해 배워 나갔다. 이 나라의 권력 구도와 자신의 가문의 입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칼리드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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