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아이딘 백작가의 비극
2017.05.11.
루시펠라가 며칠 동안 자신이 기거한 성을 보며 내린 총평은 이러했다.
“이건 뭐,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정말이었다. 성은 낡고 구식이었다.
욕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던 저택과는 달리, 일일이 나무 욕조를 끌고 와 목욕해야 하는 하녀들이 번거로운 방식도 그러했고, 횃불이 저녁마다 성의 돌벽에 피워지는 것만 해도 그러했다.
이곳은 주거지보다는 방어를 위한 요새로서의 역할이 더 컸다.
“진짜 그야말로 옛날 성이네.”
만약 이 성 주변에 개울과 도개교가 있다면 기록상에 나오는 완벽한 고성이지 않을까?
그런 거라면 더 멋있었을 텐데. 그러면 분명 더 멋졌을 것이다.
성문 앞에서 성을 보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문지기들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던 맷시가 말했다.
“몇백 년 전에는 이곳이 얀스가르 왕국과 카라얀의 국경이었으니까요. 아주 중요한 방어지대였습니다.”
“그래, 뭐, 그렇겠지, 그런 것 같아 보여.”
“…….”
“마차를 타고 올 때 보니까 도시를 성벽으로 감싸놓은 구조던데, 성벽 하나를 지어 올리는 데 한 도시의 1년 세금이 드는 걸 감안한다면, 도시 전체를 아우르는 성벽에 드는 비용은 어마어마했을 테니까, 이 정도라면 정말 중요한 거점 도시였겠지…….”
“이런 부분에 대해 잘 아시고 계십니까?”
맷시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루시펠라는 아차, 싶었다. 그녀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루시펠라는 당연하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맷시의 표정을 보며 루시펠라는 흠, 하고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마차에 있을 때 책에서 봤어. 마차 여행이 얼마나 따분한데. 그런 재미없는 책도 보게 되더라고.”
루시펠라의 말에 맷시는 납득한 듯했다. 루시펠라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성을 둘러보았다.
삐뚤빼뚤한 회색의 돌, 낡아 보였기에 칙칙했지만 오랜 세월을 견딘 만큼 굳건해 보였다. 루시펠라는 이런 것이 싫지 않았다.
“그래도 싫지는 않은데?”
“네?”
“마음에 든다는 말이야. 그냥 멋있잖아.”
그에 맷시가 어리둥절해하다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예전 수도에서 백작님이 내려가자고 하셨을 때 이 성이 낡다고 싫어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한 번도 오지 않으셨고 말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항상 같겠어.”
루시펠라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성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맷시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무리 봐도 이곳은 부유해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야. 대체 수도의 저택은 왜 이렇게 화려한 거지?”
루시펠라의 말에 맷시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야 주군께서 아가씨를 위해 마련한 곳이니까요.”
“그래?”
화려한 저택을 보며 루시펠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차라리 그럼 그 돈으로 이 성을 꾸미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지만 금전이라는 게 귀족가라고 해서 흘러넘치는 것은 아니니 성을 꾸밀 정도의 재력은 없을 수도 있다.
그녀가 보기에도 아이딘 백작은 딸에게 돈을 모두 다 씀으로써 뿌듯함을 느끼는 종류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성안에서 아버지는 보통 어디 계셔?”
너무 늦게 물어보는 질문이었나.
“보통 대부분 바깥에서 보내시지만 오실 때면 서재나 남쪽 방에 계십니다.”
“남쪽 방? 거기가 어딘데? 한 번도 안 가본 것 같은데? 맞지?”
이곳을 나름 탐방하며 서재 쪽은 갔던 기억은 있었지만 남쪽 방이라는 곳은 딱히 간 기억은 없었다.
“네, 그러니까…… 마님의 초상화가 놓여 있는 방입니다…….”
맷시의 말에 점점 힘이 빠졌다.
“어머니의 초상화가 있는 게 뭐 이상한 건가? 점점 말에 힘이 빠지네.”
루시펠라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머니가 뭐 다른 일이라도 있는가?
“그러고 보니, 자작은 내게 어머니의 초상화에 대해 한마디도 안 했네.”
그녀의 지적에 맷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가씨에게도 상처 되는 사실이 아닙니까.”
“……상처?”
루시펠라가 고개를 갸웃하자 맷시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님을 잃으신 일이니까요.”
루시펠라는 그것에 불편함을 느꼈다.
진짜 루시펠라라면 어땠을까? 그녀는 루시펠라가 아니었기에 그녀의 어머니를 잃어버렸다는 데에 대해 어떠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을 했다.
“내가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건 분명히 아버지한테 들었을 테고, 어머니에 대해 기억하려 해봤자 사실 제대로 기억나는 건 없어.”
그러고 보면 루시펠라의 기억 속에는 어머니의 기억만이 없었다. 루시펠라가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음에도 기억 한 조각 정도는 남아 있어야 했는데 말이다.
“과거가 어쨌든 간에, 그걸 가지고 쉽게 무너지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걱정 마.”
루시펠라의 침착한 말에 맷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는 걱정 어린 표정이었다. 하긴, 애초에 영지에 내려왔던 것도 정신적 문제니 걱정이 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불편한 느낌은 있었지만, 그것에 불쾌하지 않았던 이유는 맷시가 진정 자신을 걱정하고 염려하기 때문이었다.
‘참 사랑받는 아가씨였네, 루시펠라는.’
다만 루시펠라가 그 사랑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뿐이다.
남쪽 방의 문이 열리자 루시펠라는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걸어 들어갔다. 방 안은 사람이 살지 않는 특유의 한기가 있었다.
“아가씨, 이거라도…….”
맷시가 그녀의 어깨에 망토를 걸쳐 주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벽을 바라보자 푸른색 가림막이 무언가를 덮고 있었다.
맷시가 다가가 끈을 잡아당기자 가림막이 올라가며,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초상화가 보였다.
루시펠라는 확신했다. 영지 내에서 가장 화려한 것을 꼽는다면 자신의 드레스들이 아닌, 바로 이것이리라.
액자의 틀은 백금으로 섬세하게 세공되었고, 크고 작은 사파이어가 박혀 이 어두운 방 안에서도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루시펠라의 시선은 어느새 액자 틀이 아닌 초상화 속의 여자에게 가 있었다.
마치 달과 같이 고운 여자였다. 결 좋은 고운 흑발은 등허리까지 내려와 있었으며 발그레한 두 뺨은 복숭아와 같이 예쁜 빛깔이었다. 두 눈은 액자 틀에 박혀 있는 사파이어와 같은 짙은 푸른색이었다.
그녀는 눈 색과 같은 드레스를 입은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예쁘네.”
루시펠라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루시펠라가 느끼는 감정일까? 연유 모를 이상한 감정에 그녀는 손을 뻗어 초상화를 쓸었다. 그러자 오돌토돌한 붓 자국이 느껴졌다.
“어머니는 왜 돌아가셨지?”
초상화를 쓸던 루시펠라가 물어보자 맷시가 말했다.
“정말, 전혀 기억이 안 나십니까?”
“응.”
에스텔의 어머니라면 몰라도 루시펠라의 어머니에 관한 기억은 없었다. 특별한 기억이라면 응당 떠올라야 하지 않나? 루시펠라는 그것이 안타까웠다.
“홍열병에 걸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래?”
홍열병이라면 얼굴이 붉어진 채로 열이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고통스럽게 피를 토하며 죽는 병이었다. 어렸을 적 뒷골목에서 살았을 때 그 병에 걸려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전염의 여부는 불확실했지만 사람들은 그 사람의 주변에 가는 것을 기피했다. 그러나 에스텔만이 간간이 물을 떠주었다. 그리고 그 환자는 피를 한 바가지 토해내고 죽어버렸지. 병은 귀족이건 평민이건 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어머니가 돌아가셨구나.”
루시펠라의 말에 맷시의 표정이 달라졌다.
“기억나십니까?”
“모르겠어, 그냥 말이 막 나왔어.”
루시펠라는 얼굴을 찌푸리며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런데 그 홍열병 말이야, 분명히 약을 쓰면 된다고 알고 있는데, 왜 아버지는 약을 구하지 않은 거지?”
그 말에 맷시의 표정이 굳었다. 이런 것까지 질문할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태도였다. 병에 대한 지식도 레이디들이 알면 안 되는 것이었나. 그럼 대체 레이디들이 알아야 하는 건 무엇이지? 그녀는 답답함을 느꼈다.
“약은 아주 귀한 약초가 들어가기에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비쌉니다.”
“구하면 되는 거잖아. 그걸 우리 영지의 재산으로 못 구할 정도였나?”
“당시는요.”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루시펠라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던 루아나의 옷과 초상화 속 루아나의 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초상화를 그림에도 백작부인이 걸친 장신구나 드레스는 소박했다. 그냥 검소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 정도로 돈이 없었던 모양이다.
홍열병의 치료약은 어마어마한 돈이 든다는 것은 그녀 역시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백작이 루시펠라에게 쓰는 돈을 보면 절대 구하지 못할 형편은 아니었을 텐데, 지금과 어렸을 적 아이딘 가의 형편이 크게 달랐던 모양이다.
‘돈이 없으면 귀족들도 똑같이 죽음이 찾아오는구나.’
루시펠라가 헛웃음을 지으며 초상화를 쓸었다. 그러곤 아름다운 미소를 지닌 백작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문득 떠오르는 그녀의 괴로운 얼굴에 그녀는 갑자기 모든 행동을 멈췄다.
“아가씨?”
“잠깐만.”
초상화만 있던 이 남쪽 방은, 그녀가 떠올린 기억 속에 침대도 있었고 화분이 있었다.
“루아나, 제발, 모든 걸 바쳐서라도 약을 구해올게, 약을 구해올 테니까……!”
“아아, 괴로워! 아파! 루이, 제발, 제발! 날 좀 죽여줘, 죽여달라고!”
얼굴이 붉어진 채 열병을 앓던 백작부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절망하고 있던 백작의 뒷모습도.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걱정되는 듯 되물어 오는 맷시의 얼굴에 루시펠라가 가쁜 호흡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루시, 제발, 루시, 네 아버지에게 시켜서 날 좀 죽여달라고 말해주렴. 제발 부탁이야. 엄마는 이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아.”
“아니, 기억이 좀 떠올랐거든.”
루시펠라는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맷시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던지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어머니가, 많이, 괴로워하셨나 보네.”
“……그렇습니다.”
루시펠라는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 후에 영지에 보석 탄광이 발견되었던 거지?”
“그렇습니다.”
백작부인의 병사와 더불어 뒤이은 백작의 자살 시도.
역설적이게도, 그 이후 형편이 나아졌다. 이 조그맣고 볼품없던 영지가 가지고 있던 쌍둥이 산 중 하나에서 보석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커다란 광산은 아니었습니다만, 영지를 부유하게 할 정도는 되었습니다.”
맷시의 설명에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그 감정에 가슴이 아릿할 정도였다. 어린 루시펠라가 겪은 충격이 아직도 전해져 왔다.
그녀는 이 진짜 루시펠라를 동정했다. 영지에 내려오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너무나 확고하게 있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의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비참한 과거가 있는 곳은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이들 집안의 사정을 알아버린 루시펠라는 이 찝찝함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미소를 짓는 백작부인,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백작은 이곳 남쪽 방에서, 죽은 자신의 아내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루시펠라는 그 감정이 감히 짐작되지 않았다. 루시펠라의 몸속에 있어도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이었기에.
***
따분함에 몸서리치던 제드가 소식을 받은 것은 루시펠라가 떠난 뒤 약 20일 정도 되던 때였다.
북서쪽에 마물이 대규모로 마을을 습격했다는 소식이 수도로 전달되었다.
“가시려고요?”
“그래. 수도는 따분해서 견딜 수 없군. 폐하께 말씀드려야겠어.”
버나드의 말에 제드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것을 본 버나드는 또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제드는 성년이 되고 나서 1년 이상 수도에 머물렀던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작위를 물려받은 이후 좀 바뀔 거라 생각했던 게 오산이었다.
제드는 수도의 번잡스러움을 싫어했고,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권력 투쟁의 음험함 역시 싫어했다. 이 점은 선대 하인트 공작과는 상당히 반대되는 것이었다.
선대 하인트 공작은 원하는 게 있으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황제에게 주장하는 쪽이었다. 그리하여 파벌 역시 존재했고, 그는 언제나 수도에 있었다.
반면 제드는 원하는 게 있으면 쟁취하기 위해 노력 정도는 했으나, 그렇다고 귀찮음을 감수하며 열정적으로 매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싫은 게 있으면 그것을 치워 버리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저 똥이니 피해 버리자고 생각했다.
직접적으로 누군가가 그를 건드리지 않는 이상 그는 모든 일에 끼어들기 싫어했다.
버나드는 제드가 1∼2년 이내에 수도 내 저택을 처분하고 기사단장 직을 반납한 뒤 영지로 돌아갈 것을 알았다.
마침 제드는 오늘날까지 꽤 성실하게 1기사단의 집무실에서 집무를 보고 있었기에 중앙궁의 집무실까지 걸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황궁의 구조상 1기사단과 2기사단의 건물은 붙어 있었고, 제드는 그곳을 지나가야만 했다.
“아아악!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
여자의 작은 비명 소리에 제드의 발걸음이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그가 조용히 버나드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지?”
“요즘 황태자 전하께서 하녀들을 괴롭히기 시작하셨다고 하더군요. 혹시 폐하께서 아실까 봐 2기사단 건물까지 끌고 와서 괴롭히는 모양입니다.”
버나드가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요즘은 자중하는 줄 알았는데 변함이 없나 보군.”
제드가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버나드 역시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꼭 검은 머리 여자들만 골라서 괴롭히신다더군요.”
“뭐?”
제드가 발걸음을 멈췄다.
“황궁에서 일하는 검은 머리를 가진 여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염색하려고 혈안이라고 합니다.”
제드가 확인하듯 뒤를 돌아보았다. 기사단 건물 앞의 공터에는 2기사 단원들이 도열해 있었으며 이중 한 명은 한 하녀를 채찍으로 때리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황태자의 얼굴이 보였다. 미소를 띤 황태자의 얼굴은 멀리서 봐도 역겨웠다.
“……저 새끼들이 기사단 얼굴에 먹칠하는군. 하긴 단장이 그런 새끼니……. 그러고 보니 루이르크 공작은 어디 갔지?”
“휴가를 신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자세한 건 알지 못합니다. 개인 사정이라고…….”
“어디로?”
“그것 역시도…….”
제드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는 웃지만 눈빛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버나드는 식은땀을 흘렸다. 아마 황궁이 아니었으면 대번에 한 소리는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할 말이 있다.
칼리드는 정보 길드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수도를 빠져나갔다. 당시 수도의 성문을 지키던 기사들이 2기사단이기에 더욱 수월하게 빠져나갈 수 있었던 모양이다.
“황궁의 개가 대체 또 무슨 짓거리를 꾸미려고 수도를 몰래 빠져나갔을까.”
제드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제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하녀는 채찍질을 당하고 괴로움에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검은 머리의 여자만 골라서 이렇게 괴롭히는 것을 보니 황태자가 검은 머리의 여자에게 가진 집요한 악의마저 느껴졌다.
무엇 때문에 이딴 짓을 벌인 건지는 뻔했다. 바로 루시펠라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떻게 하고 싶어도 그녀가 영지로 내려가 버린 이상, 황태자가 손을 쓰기는 힘들었다.
황태자가 손을 쓰기 힘들었다라…….
어쩐지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서실 겁니까?”
“저기 황태자가 있는데 내가 어떻게?”
제드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간만에 고자질이나 해야겠군. 저번에 진 빚도 있어서 말이야.”
황궁으로 가는 제드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저 가여운 하녀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이 상황에서는 제드의 판단이 일을 해결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이었다.
제드가 황궁으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로한 황제로부터 황태자의 금족령이 내려졌다.
***
루시펠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연무장의 기사들을 보았다. 안다. 에스텔이었기에 아주 잘 안다. 당연히 지방에서 선별하는 기사들이라 수준에는 한계가 있겠지.
게다가 백작령은 옛날에나 국경 지역이었지, 영토 경계선이 확장된 얀스가르에선 거의 내륙이기에 딱히 방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루시펠라는 이들의 훈련을 보고 뭐라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참았다.
그래, 여긴 얀스가르다. 이들은 얼샤의 국민이 아니다. 내 알 바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꼴을 보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장비들이 낡은 건 그렇다 치자. 아니, 이걸 어떻게 그렇다고 여기는가! 대체 검이 왜 이가 나가 있단 말인가!
그녀는 당장에라도 대장장이에게 부탁해 검을 모조리 수리하고 싶었다.
게다가 소리. 루시펠라는 그 소리를 듣고 탄식을 내뱉었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는 분명 안 좋은 철로 만든 검이 부딪쳤을 때 나는 소리였다. 이러면 진짜 좋은 검과 부딪쳤을 때 검이 부러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국왕이 직접 선별한 ‘왕실 기사’와는 다르게 귀족들이 자체적으로 선별한 ‘기사’는 정식 기사라기보다는 귀족의 사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기사다. 기사는 준 귀족과도 같은 평민들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다! 어중이떠중이들을 모아서는 검을 들게 하면 안 되는 거란 말이다.
어쩐지 백작가에 있는 기사들이 모두 고용된 기사라 이상하다 했더니, 기사의 질이 떨어져서 그랬던 모양이다.
하인트 공작이 이걸 보면 얼마나 비웃을까. 저절로 이가 깨물어졌다.
화려한 옷과 건축물이 가문을 상징하듯이, 탄탄한 군사력은 가문의 힘을 상징했다. 당연히 가문별로 기사들의 수준은 상이했다.
예를 들어 얀스가르에서 수준 높은 귀족의 기사단 중에 단연 으뜸으로 꼽는 것은 하인트 가의 기사들이었다. 얀스가르와 얼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하인트 가문 기사들의 수준은 얼샤까지도 들려올 정도였다.
전쟁이 생각보다 지지부진하게 늘어지자 얀스가르의 국왕은 하인트 공작가에 원군을 청했다.
하인트 가에서 직접 훈련시킨 기사들과 정예병들이 출전했을 때, 얼샤의 패전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가속화되었다.
루시펠라는 재수 없는 하인트 공작, 제드가 떠올랐다. 검은 갑주를 입은 채 거대한 검을 자유자재로 휘둘렀던 기사의 모습은 흑사자라는 별명 그대로였다.
“……재수 없어.”
루시펠라가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네?”
옆에 있던 맷시와 로이자가 동시에 물었다. 상냥까지는 아니더라도 언제나 무덤덤한 태도를 보이던 아가씨가 처음으로 내보인 지나치게 부정적인 말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더 말을 하려 할 때였다.
“어이, 거기, 이리 와봐.”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