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새로운 곳에서
2017.05.08.
“저희를 부르셔서 옷을 갈아입으셨어야죠!”
하녀의 말에 루시펠라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왜, 여긴 수도가 아니잖아.”
“수도가 아니라도 그렇죠! 이곳의 아가씨는 공주님이나 마찬가지라고요! 제대로 격식을 갖추지 않으면 안 돼요!”
로이자가 다가와 루시펠라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그거 잘못 말하면 모반죄로 처벌될 수도 있는데.’
루시펠라는 나중에 로이자에게 주의를 주기로 했다.
겨우 일어나 방을 나왔는데, 그녀는 바로 다시 끌려 들어가 우선 얼굴부터 씻어야만 했다.
눈곱이 끼더라도 별로 신경을 안 써왔던 에스텔과 달리, 지금의 루시펠라에게 이곳 사람들은 눈곱은커녕 기다란 속눈썹에 먼지가 한 톨 내려앉는 꼴조차 못 견뎌 했다.
“어서 옷을 갈아입으시라고요! 그런데 드레스룸이 어디에…….”
“제가 안내할게요, 아가씨!”
성의 하녀 중 한 명이 재빨리 달려와 드레스룸으로 끌고 갔다.
루시펠라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성의 하녀들이 그녀를 부축한다고 자신의 팔에 팔짱을 꼈기 때문이다.
‘수도의 하녀들이야 그렇다 치고, 성의 하녀들도 진짜 루시펠라에 대해 안 들었던 건 아닐 텐데, 굉장히 용감한 모양이군.’
물론 이곳에서 일하는 하녀들 역시 루시펠라의 소문에 대해 들었다.
그러나 수도와 지방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고, 그녀의 무서움에 대해 직접 경험하지 못했으며, 이들에게 있어서 루시펠라는 어렸을 적 울면 물어간다는 늑대 인간 전설이나 쌍둥이 산 한구석에 살고 있다는 마귀할멈 이야기 같은 막연한 두려움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두려움은 남아 있었으나, 우선 루시펠라의 첫인상부터가 그 두려움을 와장창, 깨버렸다. 반죽음 상태로 와서 잠부터 내리자는 사람이 대체 뭐가 두렵겠는가. 더군다나 깨어 있을 당시에도 그녀는 꽤 온순해 보였다.
게다가 아름답지 않은가! 이 도시 내에서 예쁘다고 소문난 이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아가씨는 아름다웠다. 성의 하녀들이 루시펠라를 두려워 도망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졸지에 이곳 하녀들에게 잡혀 루시펠라는 드레스룸으로 발걸음을 했다.
“어머! 드레스는 아가씨가 방에 계실 때 보여 드려야 한다고! 아가씨를 그 좁은 드레스룸에 모셔갈 생각이었나 봐?”
“저택과는 달리 성의 드레스룸은 무척 넓거든? 몰랐나 보네.”
“그럼 옷을 가지고 또 아가씨가 방으로 돌아가셔야 하잖아. 아가씨는 몸이 약하시단 말이야.”
그 말에 성의 하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이왕 움직였으니, 안내해.”
루시펠라가 성의 하녀들을 보며 말했다. 수도 하녀들이 루시펠라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으나 루시펠라는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는 걸로 무심하게 그들을 달랬다.
그에 수도의 하녀들의 얼굴이 뿌듯함으로 물들었다.
루시펠라로서는 다짜고짜 검부터 들이대서 살벌하게 살기를 뿌려대는 기사 놈들보다는 이 하녀들을 다루기가 훨씬 수월했다. 정말 귀여운 사람들이 아니던가. 잠을 충분히 잤기에 루시펠라는 충분히 관대해질 수 있었다.
드레스룸에 도착한 루시펠라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했던 대로 옷방에는 드레스가 가득했다.
루시펠라는 한숨을 쉬었다. 대체 백작은 어디서 이 예산을 끌어온단 말인가. 그렇게 돈이 많나? 저택의 화려함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음.”
루시펠라는 팔짱을 끼었다.
“어느 것도 안 입고 싶은데.”
루시펠라의 입에서 나온 솔직한 말에 수도의 하녀들이 것 보라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하긴 이곳 드레스는 진작 유행이 지났지요. 차라리 새로 맞춰야겠어요.”
그에 성의 하녀들이 부끄럽다는 듯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아니, 나는 그러니까, 이곳에서까지 차려입고 싶진 않다는 거야. 내 말 이상하게 전달하지 마.”
수도 하녀를 쳐다보자 그녀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루시펠라는 그렇게 옷방을 돌며 드레스를 하나하나 보았다. 하나같이 황궁 연회에나 입고 갈 법한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드레스들뿐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이것을 준비한 이들의 성의를 봐서라도 하나는 골라 입어야 할 듯했다.
그러다 루시펠라는 방 한구석에 모여 있는 드레스에 눈이 갔다. 한눈에 봐도 다른 드레스들과는 달랐다. 이 드레스들의 색깔은 대부분 단색이었고, 화려한 장식이 없었다.
“이것들.”
“네?”
“이것들은?”
“아아, 아가씨! 저건 새것이 아니에요. 돌아가신 마님 거예요.”
“마님?”
마님이라면 루시펠라의 어머니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했다. 화려한 루시펠라의 드레스와는 달리 눈앞에 있는 드레스는 초라해 보일 정도로 소박했기 때문이다.
“드레스가 다르네?”
“네?”
“소박해 보인다는 말이었어.”
그녀가 손을 들어 드레스를 매만졌다. 오래된 드레스임에도 관리는 잘 되어 있는지, 천의 구김이 가지 않아 매끄러웠다. 백작부인의 취향이라기엔 지나치게 검소했다.
“이걸로 할게.”
“네? 하지만 아가씨…….”
이번에는 수도의 하녀들과 성의 하녀들이 동시에 아쉽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나 루시펠라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딱히 절약과 검소를 추구한다기보다는 그저 눈이 현란하지 않고 허리를 조이지 않는 편한 옷이 입고 싶었다.
“이걸로.”
더 무슨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녀들을 향해 눈에 힘을 한 번 준 루시펠라는 어머니의 드레스 중 짙은 초록색 드레스를 선택했다.
몸단장을 한 뒤, 루시펠라는 겨우 방 바깥으로 나설 수 있었다. 하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소박한 드레스를 입으니 아름다움이 더욱 드러나 보인다며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기 바빴다.
다음으로 아침을 먹기 위해 복도를 지나가 계단을 내려가자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귀에 가득 찬 여자들의 가느다란 목소리와 대비되는 남자의 굵직한 음성은 확실히 주목도가 있었다.
루시펠라와 하녀들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콧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자와 빼빼 마른, 머리를 정갈히 넘긴 노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가씨, 저 맷시입니다.”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남자, 맷시를 보며 그녀는 의아했으나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루시펠라가 아는 사람이리라.
“내가 그쪽을 뭐라고 부르면 되지?”
“편하게 부르십시오.”
“좋아, 맷시 경.”
호칭이 틀리지 않았는지 맷시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어차피 기억도 안 나는 이 아저씨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망설이던 그녀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기억이 딱히 나지는 않지만 반가워.”
모를 때는 당당하게 나서야 하는 법이다. 맷시 역시 그녀가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님을 대신해서 제가 영지의 전반적인 경영을 맡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보좌관 개념으로 이해하면 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여기 이쪽은 성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집사 야민입니다.”
어차피 이름을 알려줘도 기억을 못 할 텐데. 그래도 일단 알아두는 척은 해야 할 것 같아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옆에 있던 집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 아가씨, 제가 기억나십니까?”
“아니.”
당연히 모른다. 루시펠라의 기억은 단편적이었고, 그녀에게 있어 의미가 있는 기억들만 간간이 떠오를 뿐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다 그냥 어렴풋한 감이었다.
“너무 어렸을 적에 만나 봬서 절 기억하지 못하나 보는군요.”
감격 어린 눈동자를 보며 루시펠라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침묵이 자리했다.
“…….”
“…….”
무언가를 기다리는 건가? 참다못한 루시펠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 할 말이라도 있어?”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더 철저히 준비를 했어야 하는데!”
야민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루시펠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서로 인사를 나누는 시간인 줄 알았는데, 대체 왜 죄를 참회하는 시간이 되어버린 것인가.
“옷도, 방도 아가씨의 심미안에 맞추려고 노력은 해봤습니다. 여의치 않더군요. 수도의 세련됨과 거리는 멀지만 용서해 주십시오.”
“…….”
무슨 말을 하고 있나 가만히 지켜보자, 그 침묵을 분노로 착각했는지 집사가 더 절박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가 이곳에 오는 걸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미흡한 모습이라 죄송합니다.”
루시펠라가 싫어했었나? 기억해 보면 루시펠라는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단 한 번도 이곳으로 내려온 적이 없었다.
루시펠라의 마음은 모두 짐작할 수는 없겠지만, 대충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마저 이곳에서 자살 시도를 했으니, 그럴 수도 있을 법했다.
“난 심미안이 없어서 세련됨에 대해 구분 못 하니 집사가 알아서 하도록 해. 이 드레스만 보면 알잖아?”
루시펠라가 자신이 입고 있는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들며 말했다. 고개를 숙이던 야민과 맷시의 눈이 커졌다.
“아, 아가씨! 아까부터 낯이 익다고 생각했었는데, 입고 계신 드레스는!”
“어머니가 입으셨던 거라면서? 빌렸어.”
“그렇습니까?”
루시펠라의 심드렁한 말에 맷시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두 쌍의 눈에 서린 명백한 그리움에 루시펠라는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다음에 나올 말이……
“참, 마님과 닮으셨군요.”
으윽, 이 말이 나올 줄 알았다. 루시펠라는 괜스레 죄책감에 시달렸다. 자신은 에스텔인데, 자신을 보고 이 루시펠라의 엄마를 떠올리다니 이들을 속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루시펠라는 멋쩍게 턱을 긁적였다.
“자, 내가 여기서 뭐 해야 할 일이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아가씨. 그냥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그래.”
그럼 우선 아침부터 먹어야겠다. 루시펠라는 배를 두드리며 생각했다. 새로운 장소에서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
“꽤나, 심심해 보이는구나, 제드.”
이오지프의 목소리에 제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얌전히 처박혀 책이나 읽으셔야 할 샌님이 여긴 대체 왜 온 거지? 이젠 대놓고 꿍꿍이가 있다고 말하고 다닐 생각인가?”
이오지프가 제드의 책상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제드가 보니 그것은 책이었다.
보라색으로 염색된 그 책에는 ‘기사훈련장에서 핀 제비꽃’이라고 쓰여 있었다. 보나 마나 연애소설임이 뻔했다.
이걸 가지고 기사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어서 왔노라고 했다면 기사단 놈들도 고개를 흔들며 이오지프를 보내줬겠지.
제드는 이오지프의 천연덕스러운 ‘책벌레’ 연기를 보면 치가 떨렸다. 저놈 속이 얼마나 시커먼지 안다면 모두 다 저놈을 피해 다닐 것이다.
“요즘 이게 그린힐에서 가장 잘 팔리는 소설이야.”
“무슨 제비꽃이 기사훈련장에서 피지? 다 밟아 시들겠군.”
“어허. 이 냉정한 사람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책을 보고 그런 말이 나와? 여기서 제비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기사의 진실한 사랑을 상징하는 거야! 읽어봐!”
이오지프가 열성적으로 말했다. 뭔 개가 풀 씹어 먹는 소리를 하고 있나. 제드가 내민 책을 던져 버리자 이오지프가 비명을 지르며 그 책을 주워 들어 먼지를 호호 불어 닦았다.
“그딴 거지 같은 연기를 내 앞에서 하려고 이곳에 왔나 보지?”
“아니, 네가 심심할 것 같아서.”
“내가 심심해도 너랑 놀면서 따분함을 풀고 싶지는 않군.”
제드의 차가운 말에 이오지프가 제드의 책상 위에 있던 차를 훌쩍 마시며 말했다.
“왜, 그러면 아이딘 백작 영애랑 있으면 재미있을까?”
그에 제드의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대체 왜 자꾸 아이딘 영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지 모르겠군.”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네, 제드.”
“입 닥쳐.”
제드가 다시 폭언을 내뱉자 이오지프가 웃었다. 이오지프는 안경을 고쳐 쓰며 그 초록색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나는 아이딘 영애가 참 궁금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왜 그렇게 달라진 걸까?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정말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데. 네 형처럼 말이야.”
제드가 으르렁거리듯 말하자 이오지프가 웃었다.
“제드, 너 아이딘 영애와 손잡아본 적 있어?”
“손?”
“이번 가을 연회 때 말고, 맨손 말이야.”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군, 지금 이 질문이 지나치다는 걸 모르는 건가?”
제드의 목소리에 싸늘한 기운이 어렸다. 이오지프는 그걸 보고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아니, 아무리 봐도 이상해서 말이야. 나야 검을 다뤘다는걸 꽤나 잘 숨겨오고 있었거든. 시종 녀석들이야 철저한 내 사람이니 그쪽에서 새어 나갔을 리는 없고. 그런데 그걸 아이딘 영애가 어떻게 알아차렸을까?”
“……네가 어설퍼서, 라는 건 그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나 보지?”
“아니, 어설픔을 간파당하기엔 영애를 만나서 제대로 이야기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니까. 알잖아. 선대 공작께 검술을 배운 건 너랑 내 수행원들만 알고 있어.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딱 한 번 대화를 나눠서 눈치챘을까.”
“네가 어설퍼서 그랬다니까.”
제드의 말에 이오지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야, 대충 생각해 보니 답이 나오더라고.”
제드의 눈빛에 흥미가 서리는 것을 본 이오지프는 피식 웃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 있는 장갑을 뺐다. 하얗고 고운 손등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들과 손을 잡을 때는 언제나 연회가 벌어졌을 때뿐이야. 심지어 장갑을 낀 채 손을 잡지. 애초에 난 여자를 좋아하기에 남자들이랑은 손을 잡을 일이 없고 말이야.”
이오지프가 웃으며 손을 뒤집었다. 그러자 굳은살이 박인 상처투성이의 손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딱 한 번, 영애의 손 위에 내 맨손을 얹은 적이 있거든. 그때였던 거야.”
“……손?”
“그것 이외에는 답이 없어. 책을 좀 가볍게 들었던 것 같긴 했지만 ‘검’이라고 지칭하기에는 근거가 너무 빈약했고…….”
“…….”
“이 손 말이야. 이 손의 굳은살의 감촉으로 알아냈던 거야.”
“그렇군.”
제드는 그 말을 듣고 납득한 듯 대답했다. 이오지프는 그제야 제드가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 주는구나 생각했다.
“그래, 그래서 손을 잡을 만한 어떤 사건이 있었다는 거지? 너는 그걸 내게 잘도 숨겼군.”
하지만 대답은 이오지프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제드의 그 냉랭한 말투와 못마땅한 기색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얼굴에 이오지프는 의아한 표정을 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 제드! 제드! 너는 정말 재밌어!”
“…….”
“그냥 떨어진 책을 동시에 주우려다 우연히 닿은 거라고! 내가 잡은 게 아니란 말이야!”
“그래, 그렇다고 해두지.”
제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드는 이오지프가 루시펠라에게 가지는 관심이 불쾌했다. 겨우 한 번 만난 것을 가지고 왜 저렇게 남의 약혼녀를 입에 담는단 말인가.
그녀가 떠나기 전, 일부러 찾아가서 그녀를 본 것도 그러했다.
제드의 머릿속에 루시펠라와 이오지프의 손이 맞닿은 장면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왜 손을 잡긴 잡는단 말인가. 보나마나 이오지프 놈이 같잖은 수다쟁이 연기를 한답시고 접근했던 게 분명했다.
그러다가 문득 제드는 그날 황궁에서 벌어졌던 일을 떠올렸다.
이오지프와 황궁 도서관에서 만나, 이동하는 도중 루시펠라가 황궁에서 투신했다고 했다. 이오지프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고.
대체 무엇일까? 제드가 예상했던 대로, 정말 황태자를 잊지 못해 뛰어내렸던 것일까.
제드는 이오지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저 영악한 이오지프는 정보를 알려달라고 하면 대가를 지불하라고 할 터였다. 이미 결론이 난 사실을 굳이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는 또다시 다른 쪽으로 생각이 미쳤다.
대체 루시펠라가 왜 검으로 단련된 기사의 손바닥 감촉을 알고 있는 거지?
물론 제드의 손 역시도 굳은살투성이였다. 그리고 이들이 손을 잡았느냐 말한다면 잡아본 적은 있다. 춤을 출 때. 그러나 그때 제드는 장갑을 낀 상태였다.
설마 황태자와 맞잡은 손 때문에 알아차린 건가?
하지만 황태자는 교육의 일환으로 검술을 배우긴 했지만, 손이 거칠어질 정도로 검술 훈련을 철저하게 한 편은 아니었다.
설마 그녀가 다른 기사들과 관련이 있던 것은 아니겠지?
‘대체 뭘까? 대체 뭐지?’
제드는 얼굴을 찡그렸다. 루시펠라를 떠올리면 점점 미궁에 빠지는 것 같았다.
그냥 황태자에게 빠졌다가 배신당한 사람, 황태자를 잊지 못하고 절망에 빠졌던 좀 상태가 안 좋은 여자. 이렇게 알기 쉬운 인간이어야 하지 않은가?
루시펠라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녀는 어딘가 그가 만나왔던 레이디들과는 달랐다.
또다시 반짝거리는 루시펠라의 두 눈동자가 떠올랐다. 대체 그 눈이 왜 생각나는지 알 수 없어 미칠 노릇이었다. 가끔 업무를 보다가도, 검을 휘두르다가도 그 환한 웃음이, 그 반짝거리던 눈이 생각났다.
벌써 그녀가 떠난 지 2주가 넘어서고 있었다.
이미 도착한 지 오래겠지. 아니, 그런데 도착했으면 잘 도착했다고 편지라도 보내는 게 약혼자로서의 예의 아닌가. 집에 가서 버나드에게 편지가 오지 않았는지 따로 닦달을 해봐야겠다.
설마 편지가 잘못 전달되었을 수도 있으니 그것도 추적해 봐야겠고.
그리하여 이오지프가 가져왔던 루시펠라에 대한 미심쩍은 의문점은 제드의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dark